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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37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5
간행물 제목
37권0호(2020년) 수록논문
권호별 수록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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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석기시대 이른 시기 생업연구 -제주도와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저자 : 최종혁 ( Choi Jong-hyuk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8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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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신석기 연구에 있어 초창기 설정의 문제는 아직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물론 제주도 고산리 유적의 발견과 조사로 인해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초창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어 왔지만, 동북아시아의 초창기와는 절대연대의 문제와 문화양상과는 이질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초창기 연구가 대부분 그 계통과 편년에 연구가 치중되어 더욱더 그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초창기와 조기)의 삶, 즉 생업에 대해 살펴보았다.
초창기 유적이 아직 제주도에서 한정되어 확인되고 있어 한반도와 비교연구에는 자료가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생업문화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하는 동식물 유체, 즉 자연유물의 출토 예가 없어 생업문화에 대한 연구는 단편적인 연구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유적의 입지와 도구조성 등을 중심으로 이른 시기의 생업문화에 대해 살펴본 결과 초창기에는 수렵과 채집에 있어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반면, 어로활동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었다. 조기에는 양지역 모두 어로활동이 확인되며 남부지역에서는 중심적인 생업활동을 점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로 인해 남부지역의 조기의 대표적인 토기인 융기문토기가 제주도에서도 확인되며 양 지역의 교류활동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초창기 유적에서 출토하는 석기의 석재에 있어 한반도 산 석재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와 남부지역과의 교류 등을 엿볼 수 있었지만 어로활동이 확인되지 않는 점과 한반도 남부지역에 초창기 유적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자료의 증가를 기다려 해결하고자 한다.


Subtle inquiries regarding time setting of early Neolithic Period in Korea are still underpinned in the academic world. Given the results found from Gosanri sites in Jeju Island, there are certain progresses of this research area while showing disparate tendency and absolute age differences compared to early stage of North-East Asia. Most of Korean researches on this certain period seem to focus on the systems and formalities which drains this kind of difference. Therefore, this work mainly sheds light on the everyday life, rehabilitation of early Neolithic Period.
It is also certain that most of early stage sites are limited to Jeju Island, which means rather shortages of Neolithic sites in the peninsula. Natural resources of flora and fauna fluid that is crucial evidence of identifying rehabilitation of prehistoric times are hardly discovered which makes the relevant researches fragmentarily achieved. Based on the research about the location of sites and used implements, it seems that early people actively engaged with gathering and hunting while no certain evidence of fishing. Slightly later, both Jeju Island and Southern areas showed fishing activities and especially heavily engaged in the Southern areas. Earthenware bowl with raised pattern that is typical southern pottery of this period is also found in Jeju Island which proved rigorous interaction between two locals. Stone implements and resources, in the meantime, from peninsula of early stage Neolithic period are uncovered from Jeju Island which are clear proof of both areas. However, it seems there is no fishing evidence and no fishing sites in the Southern area which means inquiries are not yet answered enough. More substantial clue would be appeared in the near future.

2통일신라시대 경주지역 장판타날기와의 출현시기 검토

저자 : 차순철 ( Cha Soon-chul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5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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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경주지역에서 장판타날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라는 문제는 새로운 기와제작기술이 도입된 것보다는 기존에 국가의 직접 관리 아래에 있던 기와제작기술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공통된 제작기술을 유지하던 기와생산체제가 어떤 원인으로 인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인 모습이다.
중판타날기와라는 통일된 기준을 가지고 기와가 생산되던 신라사회에서 중앙관사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왕경 외곽 또는 지방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와제작기술인 장판타날기와가 생산되면서 건물에 사용하는 기와의 기준이 변화된 모습이 확인된다.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시기는 분명한 연대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없지만 경주 외곽지역에서 발굴조사된 여러 기와가마 출토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신라왕경에 기와를 공급했던 기와가마들은 통일신라시대 후기까지도 내성(內省)에 속한 와기전(瓦器典)의 관리감독아래에서 중판타날기와를 생산했다고 보여지며, 신라왕경 외곽에 위치한 기와가마들은 이러한 와기전의 관리감독을 벗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원인은 당시 정치혼란과 호족세력의 출현과 발전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경주 외곽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와 제작기술인 장판타날기와 생산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며, 그 출현시기는 다른 지방의 장판타날기와의 출토사례와 제작시기 그리고 경주 방내리 생활유적 내 기와가마의 연대측정결과를 고려할 때 신라 헌덕왕 14년(822) 이후로 추정된다.


The question of when the use of the roof tile with large paddle-beat pattern had begun in Gyeongju region during the Unified Silla Dynasty period is a matter of the change in the roof tile production which were managed by the government rather than the introduction of a new production technology. In other words, this indicates that the roof tile production system that maintained a common production technology at the time changed for some reason.
Silla used roof tiles with medium paddle-beat pattern. However, when the central control grew weak, new roof tiles with large paddle-beat pattern were produced mostly in the outskirts of the royal capital and rural areas, which brought changes to the standards for the roof tile. This change could not be confirmed through chronological data, however, can be confirmed through the artifacts excavated from a variety of roof tile kilns that were excavated and investigated in the outskirts of Gyeongju.
The roof tile kilns that supplied roof tiles to the royal capital of Silla until the late Unified Silla Dynasty period produced roof tiles with medium paddle-beat pattern under the management and supervision of the Roof Tile Agency under the Ministry of Interior, but it is quite likely that the roof tile kilns located in the outskirts were outside the management and supervision of the authority. This is related with the political disorder and the emergence of powerful clans. It is estimated that the production of the roof tiles with large paddle-beat pattern began in the outskirts of Gyeongju, which is estimated to be after the 14th year in the reign of King Heondeok of Silla (822) considering the excavations in rural areas and the dating of the remains of the dwellings in Bangnae-ri, Gyeongju.

3조선시대 남해군의 관방성과 목장성

저자 : 심봉근 ( Sim Bong-geun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7-8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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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내에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읍성을 비롯한 관방성, 목장성, 왜성 등 다양한 목적의 성곽이 분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논의하는 관방성과 목장성은 조선시대 남해군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자료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 가운데 관방성은 남해군의 지리적 환경이 왜구와 근접되게 대면하고, 사방이 노출된 상태를 적으로부터 방어할 목적으로 축조한 성이다. 관방성의 축조는 수군의 육지근무가 가능하게 된 성종대 부터로 특히,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남쪽 앵강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새로운 성을 축조하지 않고, 기존의 평산현 고성, 난포현고성, 성고개 고성 등 전대에 축조된 치소성이나 기타 미상의 기존시설을 이용하였다. 이후 성고개, 우고개 등과 같이 구릉이나 야산 산록부에 성곽을 직접 축조하였다. 중종조에는 삼포왜란을 계기로 남해안 지역에 보다 적극적인 방어태세를 갖추면서 곡포, 상주포, 평산포 등 남쪽 해안선 근접지역에 진보를 이설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후 왜구 출몰이 소강상태를 이루자 영조대에는 남해안 수군진보가 대부분 혁파되어, 남해군도 평산포진, 미조항진, 적량진만 조선 말기까지 남게 되었다. 노량진성과 호포진성의 경우는 관방성 역할이 예상되지만, 현재로서는 해창과 조창이 위치하는 나루터 감시를 목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남면 당항리 고진성은 문헌상에 보이는 우고개보성이며, 난포현 치소에서 시작하여 우고개보를 거처 곡포보로 이설한 것으로 파악된다. 주목되는 것은 성고개보인데 문헌상으로는 조선시대에 보를 설치하면서 '성고개'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을 감안하면, 그 이전에 이미 성이 위치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내 지표조사에서도 전대의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적갈색토기편이 다수 수습되어 미상의 기존 성곽을 조선시대에 다시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목장성은 이동면 난음리 난곡사 뒷뜰에 위치한 석비를 근거로 목장성인 남해장성(금산목장성)을 관방성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678년 작성된 경상도 남해현과 진주목 목장지도를 포함하여, 각종 문헌사료와 성의 규모와 형태, 위치 등 고고학적 제 특징이 금산목장성으로 파악된다. 또 진주에서 뒷날 남해로 편입된 창선지역도 상죽리, 진동리 등지에서 점마장과 같은 목장 흔적을 확인할 수 있지만, 성은 축조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관계문헌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창선면은 섬 전체가 목장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창선도내에 위치하는 지족해변성에 대한 성격 규명은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종합하면 조선시대 남해군 내의 관방성은 전략상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에 대비한 주민보호가 주목적이었으므로 왜구의 성쇠에 따라 위치 이동이나 혁파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목장성은 금산목장과 같이 광활한 지역의 경우 경계지역에 성을 축조하여 방목으로 발생하는 농민의 피해를 최소화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창선과 같은 작은 도서지역에는 성곽은 축조하지 않고 섬 전체를 목장으로 이용한 것을 알 수 있다.


Fortresses(seong), including Eup-seong, Gwanbang-seong, and Mokjang-seong, which were used for various purposed during the Joseon Dynasty(1392-1910), are located in Namhae-gun. Gwanbang-seong and Mokjang-seong to be discussed here are one of the materials to understand the identity of Namhae-gun during the Joseon Dynasty. Gwanbang-seong is a fortress designed for the defense against enemies such as Japanese invaders as the region is geographically adjacent to Japan and exposed in all directions.
The fortress was firstly constructed from the reign of Seongjong(r. 1469-1494), when the naval forces were able to perform shore duty. The construction was particularly centered on southern Aenggang-man(bay), where the Japanese invaders often infested. In the early of the Joseon Dynasty, instead of building new fortresses, the old fort, Chiso-seong; existing fortresses located in Pyeongsan-hyeon, Nanpo-hyeon, and Seong-gogae; and other unidentified fortifications were reused. Newly built forts during the Joseon Dynasty were positioned on the base of a mountain and a hill like Seong-gogae and U-gogae. Sampowaeran riot(1510) led to taking an aggressive defensive posture and moving and rebuilding strongholds along the southern shorelines including Gok-po, Sangju-po, and Pyeongsan-po,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r. 1506-1544). Most of the naval fortresses located along the south coast were, however, faded away by the reign of King Yeongjo(r. 1724-1776) as the Japanese invasions had decreased after the Jeongyuwaeran war(1597-1598). By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only a few military positions, including Pyeongsanpo-jin, Mijohang-jin, and Jeokryang-jin, remained in Namhae-gun. Noryangjin-seong and Hopojin-seong might have played a role as Gwanbang-seong. However, so far as is now known, they were constructed to watch over ferries where granaries (haechang and jochang) were. Nammyeon Danghang-ri Gojin-seong refers to U-gogae-boseong in literature. It was first built as a Chiso in Nanpo-hyeon, moved to U-gogae, and then to Gok-po. The Seong-gogae-bo is a noteworthy case in terms of using the place name 'Seong-gogae' to call a fort(bo), which indicates that the region already had a fortress. Moreover, blue-gray stoneware pottery sherds and reddish-brown pottery sherds unearthed within the fortress through the surface survey show that the unidentified existing fortress was reutilized during the Joseon Dynasty.
Based on a stele located in backyard of Nangoksa shrine, Naneum-ri, Idong-myeon, Namhaejang-seong (Geumsan 'Mokjang-seong') is known as Gwanbang-seong. However, considering various historical records, including maps of pastures in Jinju-mok and Namhae-hyeon in Gyeongsang-do, created in 1678; and the archaeological features of the site such as its size, form, and location, it is understood as the Geumsan Mokjang-seong. The vestiges of farms like horse pasture(jeommajang) are also found in Sangjuk-ri and Jindong-ri in Changseon, where was incorporated as part of Namhae from Jinju. Nonetheless, it is understood that a barrier (seong) was not built, as seen through related literature. It is, therefore, estimated that the entire island of Changseon-myeon was the farm. Further research will need to be carried out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Jijok-haebyeon-seong located within Changseon-do island.
In conclusion, Gwanbang-seong was fortresses, tactically constructed within Namhae-gun during the Joseon Dynasty, to protect residents from Japanese raiders infested the southern coast. The fortresses were, therefore, lost their function and moved their locations following the rise and fall of Japanese invaders. Mokjang-seong was built around boundary areas, especially of large farms like Geumsan Mokjang, to help farmers damaged from grazing stock. A fortress was not constructed in a small island like Changseon, but instead, the whole area was used as a farm.

4부산 1세대 서양화가 우신출 연구 -풍경화를 중심으로-

저자 : 이수현 ( Lee Sue-hyun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5-11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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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光우신출(禹新出, 1911~1991)은 부산지역 초기 서양화단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이다. 부산에서 서양화를 체득한 그는 부산 최초의 동인전 경남미술회를 시작으로 춘광회와 경남미술교육연구회, 후기전 등을 참가하며 화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한국전쟁기에는 종군화가로서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였고, 전쟁후에는 13번의 개인전을 통해 끝없는 창작활동을 펼치며 부산화단의 맥을 이어 나갔다. 한편, 그는 생애 전반에 걸쳐 부산·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풍경화를 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아무리 악랄한 침략자도 향토의 풍물까지 떼어가겠느냐는 생각을 기저로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을 계속해서 그린 것이다. 따라서 본 논고는 우신출의 화가로서 생애와 풍경화를 대상으로 그의 화풍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종래 구체적으로 연구된 적이 없는 부산 1세대 화가 우신출의 화업 전반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사실을 기반으로 제작된 그의 풍경화는 소재 및 화풍을 기준으로 볼 때 시대별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1930년대에는 근대적 소재가 다수 발견되며, 전반적으로 인상주의 경향을 답습하고 있지만 표현주의 특징이 정형화되지 않은 채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서자 전근대적인 향토적 소재가 새롭게 등장하며, 일본의 관전풍 아카데미즘을 따르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산의 일상적 풍경을 주제로 점묘적 특징이 가미된 새로운 풍경화로 전개된다. 즉, 40년대 보이던 향토적 소재의 연장선상에서 60년대는 일상적 풍경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부산의 발전과 변모과정 속에서 화풍의 변화를 거친 우신출은 부산화단에서 크게 두 가지 역할을 지닌다. 첫째, 1930년대 초기 부산화단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남아있는 자료는 매우 희소하여 당시 상황을 살펴보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런 가운데 부산 근·현대를 관통하는 우신출의 생애를 추적함으로써 부산근대미술의 형성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례로써 활용될 수 있다.
둘째, 경남미술교육연구회와 일요화가회를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 보다 쉽고 친숙하게 미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미술대중화에 일조하였다. 이를 통해 미술의 사회적, 대중적 성장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서양화가 우신출은 부산미술사에 있어 주목해야 할 인물로 그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Dankwang(丹光) Woo Shin Chul(禹新出, 1911~1991) is an artist of Western painting representing the original Busan painting circle. As non-being studied abroad, he was accepted for a major competition without systematic education on Western painting and stood shoulder to shoulder with the mainstream painters of Busan painting circle of the day. Not only, as a painter, he carried out flourishing activities as leading various group exhibitions centered on Busan area, but also he spent his effort to educate juniors as working in teaching profession for 40 years. Meanwhile, he produced his landscapes of the whole place in South Gyeongsang province and Busan city throughout his life.
Woo Shin Chul, who lived a life through modern and contemporary Busan as a painter, has two significances in the Busan painting circle. First, he led the original Busan Western painting circle in 1930s. Although he could not go to study abroad on account of difficult family reasons, he completely learned modern art in the process of introducing Wester paintings in Busan. Therefore, it was able to identify the aspect of the original Busan painting circle through the process of Woo Shin Chul acquiring Western paintings. Second, he led the popularization of art in Busan. He took the initiative in the popularization of art as teaching art to the general public through the Gyeongnam Art Education Research Society and the Sunday Artists'Club.

5조양규의 작품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축 -모자(母子) 이미지에 관한 시론(試論)-

저자 : 정현아 ( Jeong Hyeon-a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5-134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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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규가 13년 간 일본에서 제작했던 일련의 작품은, 1945년 8월 이후 한국이 해방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일본이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장대신에 어떻게 근대자본주의를 이용해 그들의 이익 편승을 도모해 나갔는가에 대한 근대 일본사회의 단면을, 최하층민의 관점에서 보다 세련된 은유와 직관적 모티브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일관되게 구현한 것이다. 「창고 씨리즈」, 「맨홀 씨리즈」는 물론, 일정한 모티브를 가지고 다양한 조형 형태를 보여주는, 「소 모티브」, 「모자모티브」, 「노동자 모티브」 등은 조양규의 사상적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러한 조양규 작품에 대한 사상적 시각은, 도일(渡日)이전 좌익 활동이력과 그로 인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밀항선을 타면서 시작된 화가로서 그의 삶을, 13년간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의 사상적 주제와 모티브로 연결시켜 본 연구결과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본 시론은 해방기 한국에서 좌익사상과 그와 연관된 이력만으로 조명되었던 조양규의 정치적 행보라는 시각과는 달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에서의 행적과 습작과정에서 발견되는 모자 이미지에 주목한다. 해방기 한국의 부산시절에 포착되는 모자 이미지의 시작과 모자 이미지의 근원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조양규의 남다른 가정사와 함께 사범학교 학생시절에 심취했던 케테콜비츠와 그녀의 주요 모티브인 모자 모티브는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이후 모자 이미지가 나타나는 일본에서의 작품 활동과 그와 관련된 시기에 보이는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지속적으로 모색되는 모자 이미지의 흔적을 추적한다. 조양규의 일본에서의 작품 활동 가운데 발견되는 모자 이미지는 많지 않지만, 조국(모)과 나(자)의 관계의미를 표현한 작품과 실제 모자 이미지를 조형 속에 재현한 작품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이 두 형태의 모자 이미지가 조양규의 13년간 일본 활동 가운데 지속적으로 확인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다른 작가와의 교류에서 발견되는 모자 이미지와의 관련성은 작가의 의도 속에 여전히 모자이미지의 추구가 엿보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조양규의 모자 이미지는 해방기 한국에서부터 개인적 가정사와 정치운동과 함께 시작된 운명적 이미지였고, 일본의 작품 활동에서 다른 사상적 모티브와 함께 추구되었던 일상적 이미지였으며, 많은 작품 속에서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꾸준한 작품과 교류 활동 속에서 계속해서 모색되었던 지속적 이미지였던 것이다.


Cho Yang-gyu's series of work created in Japan for 13 years is a consistent embodiment of his thoughts, via more refined metaphor and intuitive motives from the perspective of a bottom feeder, on how Japan had sought profit-making using modern capitalism instead of expanding imperial colonies this time after August 1945, while Korea was going through the liberation period and Korean war. Not only < Warehouse series > and < Manhole series > but also < Little motive > < Mother-child motive > and < Laborer motive >, showing diverse forms of molding under a certain motive, are a good example to believe that Cho Yang-gyu's thinking motives were expressed persistently in his work.
Such a philosophical perspective found in Cho Yang-gyu's work is closely related to his new life as an artist, who had had a career of leftism until this involved him in political events and forced him to board a smuggler to Japan. The existing studies connected his past in Korea to the philosophical themes and motifs of the work he created in Japan for 13 years.
So Cho Yang-gyu has been chiefly illuminated by his political movement of leftist thinking in Korean liberation period and his related activity. However, this essay takes notice of his record of performances in Korea which has been unknown so far and the mother and child image found in his course of study. His mother-child image was initiated in his life in Busan in the liberation period and is considered due to Cho Yang-gyu's unusual family history. This image is also deeply related to Kather Kollwitz by which he was fascinated when attending a teachers' college and her major motif mother and child.
This article, then, traces the mother-child image he continually sought in his activity as an artist in Japan and interaction with other authors in the relevant period of time. There are not many mother and child images found in Cho Yang-gyu's work in Japan but, looking by division into work of expressing relational meaning between his mother country (Mother) and him (Child) and reproduction of actual mother and child image in molding, these two types of mother-child image are continually confirmed in his 13 years of activity in Japan. Moreover, relation to mother-child image discovered in interaction with other authors still proves his intentional pursuit of a mother-child image.
To conclude, Cho Yang-gyu's mother and child image was a fateful image which began in Korea's liberation period with his personal family history and political movement, routine image sought in performing in Japan along with other philosophical motifs, and continual image sought constantly in performing work and social interaction, although not embodied in many works of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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