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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6
간행물 제목
17권0호(2020년) 수록논문
권호별 수록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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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제 모악산(母岳山) 귀신사(歸信寺)의 역사와 인물

저자 : 고영섭 ( Ko Young-seop )

발행기관 : 한국불교사연구소 간행물 : 한국불교사연구 1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53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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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신라 화엄십찰이었던 김제 모악산 귀신사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논구한 글이다. 한국불교는 고대의 천신, 산신, 무속 신앙의 원류를 풍류도라는 큰 가슴으로 껴안고 한국 민족 정신의 본류가 되어 도교와 유교와 기독교의 지류에 흘려주어 왔다. 이 때문에 한국사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사상의 한우물로 이어져 왔다면, 한국불교사는 이 한우물을 불러 깨우는 마중물임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한국사상사가 삼재사상을 아우르는 풍류도의 한우물로 이어져 왔다면 한국불교사상사는 이 한우물을 불러 깨우는 마중물임이 분명하다.
신라와 고려 이래 왕실과 긴밀했던 신라 화엄십찰 김제 모악산 귀신사에 주석하다 고려시대에 국사로 추증된 원교국사 의상(義湘), 원명국사 징엄(澄儼), 현오국사 종린(宗璘) 등을 한국사상을 깊게 하고 넓게 한 철학자와 사상가로 본다면 그들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을 통해 우리의 삶은 좀더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귀신사를 찾아 교유하면서 시편을 남긴 윤진(尹珍), 설잠(雪岑), 유홍(俞泓), 이기발(李起浡) 및 산문 기록을 남긴 유세무(柳世茂), 이하곤(李夏坤) 등도 귀신사의 소중한 역사와 인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김제 모악산은 선말 한초 이래 풍수지리 도참설과 선천 후천 개벽설과 관련되어온 공주 계룡산과 함께 신흥종교의 발생지로서 주목 되어온 산이다. 완주 위봉사와 김제 금산사와 함께 이 지역의 중심사찰인 귀신사는 중수와 중창 및 개창과 보수를 하면서 오늘의 사격을 유지해 왔다. 이 때문에 귀신사를 존재하게 한 염화와 신허 및 덕기와 도헌, 조열과 태학 및 연한과 두심, 성천과 봉학 및 수일과 정우(正愚), 춘봉(春峰, 殷德惇)과 김보화(金宝化), 김만송(金萬松)과 김강로(金江露), 조종화(趙鍾和)와 정응회(鄭應悔), 김시현(金時鉉)과 송상신(宋相信), 추담(秋潭, 金容順), 유금성, 혜견(慧見, 김춘희)의 살림살이가 더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신라 화엄십찰 김제 모악산 귀신사의 사격 회복과 중흥 불사에 매진해 오고 있는 용타(龍陀)와 범현(梵玄) 및 무여(無如)의 살림살이도 귀신사의 역사와 문화 및 인물로서 수렴하고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귀신사의 역사와 문화를 토대로 활용과 보존이 좀더 깊게 고민되고 보다 넓게 확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This paper examines the history and figures of Temple Gwishin on Mount Moak in the city of Kimje, which was one of the ten Huayan temples of the Silla Dynasty. Korean Buddhism emerged as the main ideology of Korea as a result of the magnanimous embracing of beliefs in heavenly gods, mountain gods, shamanism, and Poong-Ryu-Do. Korean Buddhism influenced Taoism,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in the years to come. The history of Korea demonstrates that the idea of a trilogy of Heaven, earth, and human beings has been consistently maintained in Korean thought, and this is well reflected i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as well. Therefore, we can understand how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is itself reflective of the history of Korean thought.
Temple Gwishin was one of the ten Huayan temples in the Silla Dynasty, and was deeply associated with the King's Palace in the Goryo Dynasty. Many important figures have passed through the temple throughout history. National preceptors Wongyo Uisang, Wonmyung Jingum, and Hyunwoo Jongrin, who have resided in this temple, contributed greatly to developing profound knowledge and enlightenment in Korean thought. At the same time, there have been many thinkers in Korean history who have visited and exchanged their thoughts with figures in the temple. Among those visitors, Yoonjin, Suljam, Yoohong, and Kibal Lee left their mark through the writing of poetry while Semoo Yoo, and Hagon Lee left their mark through the writing of prose. These visitors also need to be considered as precious parts of the history of Temple Gwishin.
Mount Moak has been the focus of significant attention, along with Mount Gyeryong, as the site for a new religion with regard to the philosophy of feng shui and the ideology of a new beginning of the world. Temple Gwishin, which has been one of the main temples in this area along with Temple Wibong in Wonju and Temple Gumsan in Kimje, went through many rebuilding, remodeling and renovation stages throughout history to become the temple that it is today. Therefore, the lives of those who have contributed to maintaining and rebuilding the temple, i.e, Yumhwa, Shinhu, Dukgi, Dohun, Joyul, Taehak, Yunhan, Dooshim, Sungchun, Bonghak, Sooil, Jungwoo, Choonbong, Bohwa Kim, Mansong Kim, Kangro Kim, Jonghwa Cho, Unghoi Jung, Shihyun Kim, Sangshin Song, Choodam, Gumsung Yoo, and Hyegyun, need to be studied and highlighted.
Moreover, those who are contributing to the recovery and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Gwishin at the present time, i.e, Yongta, Bumhyun, and Mooyeo, also need to be considered as cultural figures of this particular period, and their lives need to be properly respected. I hope more support and careful consideration of the practical use and conservation of the temple based on its historical and cultural value will be possible, as Temple Gwishin is an important part of Korean cultural heritage.

2귀신사의 역사적 추이와 건축조형

저자 : 손신영 ( Sohn Shin-young )

발행기관 : 한국불교사연구소 간행물 : 한국불교사연구 1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5-9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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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사에는 구전과 실재가 혼재되어 역사적 사실로 전해지는 부분이 적지 않다. 더구나 조선 말기에서야 '귀신사' 라는 사명이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고려시대에 이미 귀신사로 기록하였던 바가 확인된다. 조선말기에는 귀신사를 구신사(狗腎寺)라 칭하기도 했는데, 이는 '귀'를 '구'라 하는 지역 사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소재를 알 수 없지만 14세기에 조성된 청동향완이 발견된 바 있고, <귀신사3층석탑> 역시 14세기에 조성된 탑으로 여겨지므로, 귀신사는 고려말기에 해당되는 14세기에 중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624년의 이전과 1633년의 중창만 알려져 있었으나 기록 및 1609년 『법화경』 간행을 통해 1601~1614년에 재건되었던 바를 추정할 수 있다.
조형적으로 보면 대적광전 및 <귀신사3층석탑> 등, 귀신사의 목조와 석조에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파가 파악된다. 특히, 대적광전 후면에서 흔적이 파악된 하앙은 완주 화암사 극락전에서 그 양상을 살필 수 있고 금산사 미륵전과 금강문에서도 흔적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완주·김제 등 백제의 옛 지역에 해당되는 곳에 하앙이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백제의 조형이 오래도록 계승되어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귀신사3층석탑>과 <청도리3층석탑>에도 백제계양식이 드러나 있다는 사실 역시 이를 시사하기에 충분하다. 이밖에 귀신사가 역대 왕실과 관련이 있음을 추론해 볼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국신사였다는 바와 고려시대에는 왕자와 종실 출신의 스님이 주지로 파견된 바를 알 수 있고, 조선시대에는 인조의 생부 원종과 관련하여 중창된 바가 추론되기 때문이다. 한편, 석수는 구례 <논곡리 3층석탑> 좌우의 사자상 등을 통해 석사자상이자, 석등 받침석으로 여겨진다.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정혜 원융탑> 앞에 자리한 사자석등을 통해, 승탑 앞에 조성되었던 사자석등의 받침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History of Gwishinsa-Temple has been transmitted with a mixture of oral tradition and real fact. Moreover, it was thought that the name “Gwishinsa-Temple” began to be used only in the late Joseon Dynasty, but it is confirmed that it was already recorded as Gwishinsa-Temple in the Goryeo Dynasty.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sometimes referred to as Gusinsa Temple, because 'Gu” seems to have originated from a local dialect called 'Gwi'. Although its current whereabouts is unknown, the bronze incense burner, which was made in the 14th century, has been found, and < Gwishinsa 3-story stone pagoda > is also considered to have been constructed in the 14th century, so it can be inferred that the temple was reconstructed in the 14th century during the late Goryeo Dynasty.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was known that there were the reconstructions only before 1624 and in 1633. However, it can be estimated that it was reconstructed between 1601 and 1614 through some records and the publication of 『The Lotus Sutra』 in 1609.
In terms of structure, it is understood that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are reflected in the wooden and the stone structures of Gwishinsa-Temple, such as Daejeokgwangjeon and < Gwishinsa 3-story stone pagoda >. In particular, Ha-ang, whose traces were identified from the back of Daejeokwangjeon, can be also seen in Geungnakjeon of Hwaamsa-Temple in Wanju and its traces are also found in Mireukjeon and Geumgangmun of Geumsansa-Temple. That Ha-ang remains concentrated in the areas of Baekje, such as Wanju and Kimje, suggests that Baekje style has been inherited for a long time, which is supported by the facts that the style is also reflected in < Gwishinsa 3-story stone pagoda > and < Cheongdori 3-story stone pagoda >. In addition, one can deduce that Gwishinsa-Temple is related to the former royal family. This is because it was founded as a national shrine(Guksinsa)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and monks from the prince and the Jongsil were sent as Juji during the Goryeo Dynasty. Also, it can be inferred that the remodeling of the temple during the Joseon Dynasty was made in connection with King Injo who was the father of King Wonjong. On the other hand, the stone animal statue can be assumed as a stone lion statue and stone pedestal through the lion statues on the left and right sides of < Nongok-ri Three-story stone pagoda > in Gurye. This is because through Sajaseokdeung in front of < Cheongnyongsa Bogak Guksa Jeong Hyewon Pagoda >, the stone statue would be a pedestal for a lion stone lantern that is usually built in front of a pagoda.

3귀신사(歸信寺)의 불교조각과 조선의 리얼리즘

저자 : 주수완 ( Joo Soo-wan )

발행기관 : 한국불교사연구소 간행물 : 한국불교사연구 1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7-13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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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귀신사의 불상조각을 통하여 그간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만 평가되어온 조선시대 불상양식을 새롭게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억불숭유의 시대였던 조선시대의 불교예술의 기량은 불교가 사회적으로 중요시되었던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 비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사실성을 배제한 요소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성의 배제, 혹은 억제가 결코 기량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귀신사의 불상조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통일신라시대 석굴암 조각상에 보이는 섬세한 근육묘사나 투명한 듯 얇게 처리된 천의 자락 아래로 보이는 감각적인 인체의 표현 등은 조선시대 조각에서 잘 찾아볼 수 없지만, 귀신사의 불교조각상들은 마치 특정인을 모델로 삼아 조각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각 인물들의 개성이 잘 드러나며, 그 표현은 생동감이 넘친다. 더불어 각 존상들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그 움직임에 따라 옷자락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모습도 잘 훈련된 작가가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운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리얼리즘은 17세기 전반이 지나면 다시금 정적이고 획일화된 성향을 띄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 직시한 새로운 세계관과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이 어우러져 17세기 전반기에 이와 같은 독특한 예술적 특징이 형성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보았다.
더불어 귀신사를 포함한 몇몇 사찰에서 이와 같은 대형의 소조불상을 조성한 배경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전후 복구의 의지를 이와 같은 대형불상 조성으로 표출한 것으로 보았지만, 본고에서는 그러한 측면 외에도 기본적으로 해당 사찰들마다 임란 이전부터 장육상 이상의 대형불상들을 모셔온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복원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보았다. 특히 비로자나 삼불상의 도상구성에 대해서는 화엄10찰에 봉안된 아미타+석가(또는 비로자나)의 불상조합에 약사여래가 결합된 것으로 풀어보았다. 나아가 이러한 대형소조불상들이 주로 전북·충청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이들 사찰 주변의 토양이 소조불 조성에 유리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보았으며, 특히 분청사기 가마터와 같은 도자공방이 존재한다는 점을 통해 양질의 흙과 이를 가공할 인력과 시설의 확보가 수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보았다.


This study intended to focus on the realistic expression techniques contained in the Buddhist statues of the Joseon Dynasty by the analysis of Buddhist statues in Gwisinsa(歸信寺) temple. In general, Buddhist art during the Joseon Dynasty is considered to be inferior to that of Unified Silla or Goryeo, when Buddhism was socially important. Of course, it can't be denied that elements that intentionally exclude realism account for a greater proportion in this period. However, it was confirmed through the statues of Gwisinsa that the exclusion or suppression of such realism was never a matter of skill.
Although delicate muscle descriptions and sensual human body expressions that appear below the edge of a transparent cloth such as the Seokguram Sculptures from the Unified Silla Period are hard to find in Joseon Dynasty sculptures, but Buddhist statues of Gwisinsa reveal their individuality to the extent that they may have been modeled after a specific person, and their expressions are full of life. In addition, the way in which each statue's movements are depicted and the organic movement of the hem of the garment according to the movement shows skills that are difficult to express without a well-trained technician. Such realism seems to have become static and uniform again after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Perhaps a new worldview and hope for the future, acquired from experiencing two wars, led to this unique artistic tendency in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look at the background of this large-scale clay Buddha statue. Until now, it was regarded as expressing the will to recover from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but in addition to this aspect, this article estimated the possibility that each temple in question might have been restored because it had a tradition of having large statues of Buddha before the war. In particular, about the statues composition of the Vairocana triad, it can be assumed that the association of Amitabha and Seokga (or Vairocana) enshrined in the 10 Avatamska temples were combined with the Medicinal buddha later.
Furthermore, attention is being paid to the fact that these large-scale Sojo Buddha statues are mainly distributed in North Jeolla and Chungcheong provinces. The reason for this possibly be that the soil around the temple in this area may have been advantageous for the creation of the clay Buddha statue, and it is assumed that the existence of ceramic workshops such as buncheong kilns made it easier to secure quality soil and manpower and facilities to process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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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편액(扁額)글씨는 필자와 시기, 장소나 건물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왕궁 사찰 서원 등의 중심 건물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가독성과 예술성 측면에서 볼 때 편액 글씨는 보통 건물과의 조화를 전제로 하여 획(劃)이 굵고 크면서도 빈틈이 거의 없는 엄정(嚴正)한 해서(楷書)의 서체로 구사된다. 이러한 경우는 유가(儒家) 사회의 주류 건축공간인 궁중이나 서원은 물론 불가(佛家)의 사찰 건축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귀신사의 <대적광전大寂光殿> <명부전冥府殿>의 서체조형 특질은 두 작품 모두 대자해서(大字楷書)로 대체적으로 필획에서 뚜렷한 마제(馬蹄) 잠두(蠶頭)와 향세(向勢) 배세(背勢), 태세(太細)대비가 강조되고 있고, 결구에서는 소소(疎疎) 밀밀(密密)한 구조가 특징이다. 다만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서체조형이나 미학에 비하면 <명부전冥府殿>은 비교적 자유롭고, 휘호한 사람의 개성인 필획과 글자구조로 인간적인 맛까지 느껴진다. 미학적으로도 사찰의 주 건축물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전형미와 부속공간인 명부전(冥府殿)의 개성미는 건축물의 용도 기능과 정체성에도 부합하고 있다.
편액의 제작 시기 또한 실제 귀신사의 <대적광전大寂光殿> <명부전冥府殿>의 중창 시기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귀신사(歸信寺)가 임진 병자 양란으로 폐사된 후 1633년(인조11)에 중창될 당시나 자수(子秀) 무경(無竟)의 <전주모악산귀신사사적사인全州母岳山歸信寺事蹟詞引>의 기록 그대로 1657년(효종 8년)에 대웅전(大雄殿)을 중수한 17세기 중반의 서풍이다. 이러한 사례는 임진 병자 양란이후 조선시대 사찰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중창불사의 양상인바 귀신사 <대적광전大寂光殿>과 같은 서체(書體) 서풍(書風) 글씨가 구례 화엄사의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쓴 <대웅전大雄殿>(1636)과 <지리산화엄사智異山華嚴寺>(1636)라는 사실에서 확증을 더하고 있다.
귀신사의 <대적광전大寂光殿> <명부전冥府殿>편액의 시대서풍도 조선시대 궁중이나 서원의 편액과 같은 맥락에서 확인 된다. 특히 조선 중후기 편액 글씨의 전형으로 자리 잡은 석봉 한호의 <대자천자문大字千字文>글씨 서풍과 같다. 이것은 14세기말 공민왕의 <영호루映湖樓>, 15세기 초반 양령대군의 <숭례문崇禮門>, 16세기 중반 <모악산금산사母岳山金山寺>(1556), 16세기 중후반 석봉 한호의 <구인당求仁堂>, 17세기 초중반 조일회의 <돈의문敦義門>, 이광의 <대웅전大雄殿>과 <지리산화엄사智異山華嚴寺>(1636), 18세기 중엽 이광사의 대흥사<대웅전大雄殿>, 19세기 중엽 김정희의 은해사<대웅전大雄殿>, 임태영의 <광화문光化門>의 글씨를 종횡으로 비교해본 결과 더 명확하게 객관적으로 밝혀졌다. 그런 만큼 귀신사 <대적광전大寂光殿> <명부전冥府殿> 글씨는 17세기 중엽, 조선 중후기 편액 글씨의 전형미(典型美) 개성미(個性美)의 척도가 된다.


Calligraphy on plaques from the Joseon Dynasty differs according to its writer, production date, associated building, and site. However, examples from plaques hung at palaces, temples, and seowon (local private academies) do sharecertain characteristics in common. Commonly, for legibility and artistic value, calligraphy on plaques iswritten or carved in rigid regular script using large, thick, dense strokes in harmony with the architecturewhere the plaques are to be hung. Not only palaces and seowon, the primary architectural spaces of Confucian Joseon society, but also Buddhist temple buildings were ornamentedwith plaques bearingsuch calligraphy.
The plaques at Daejeokgwangjeon Hall and Myeongbujeon Hall inGwisinsa Temple containcalligraphy in large regular script. Their calligraphic strokes generally demonstrate distinct horse's hoof-shaped beginnings and silkworm head-shaped ends. They also emphasize two vertical strokes facing each other and swollen either to the out- or inside. Moreover, a contrast between plump and slender strokes is highlighted. These strokes are sometimes coarsely or finely structured. Compared to the calligraphy of the “Daejeokgwangjeon Hall” plaque, however, the calligraphy of the “Myeongbujeon Hall” plaque is relatively unconstrained and presents strokes and structures which are distinctive to the point of appearingpassionate. Aesthetically, the conventionalbeauty of thecalligraphy of “Daejeokgwangjeon Hall” and the individual beauty of thecalligraphy of “Myeongbujeon Hall” correspond to the identity and function of these two major buildings at Gwisinsa Temple.
Moreover, the production dates of the plaques atDaejeokgwangjeon Hall and Myeongbujeon Hall inGwisinsa Temple align with the dates of the reconstruction of the buildings. The calligraphy on these plaques wasproduced either during the reconstruction of Gwisinsa Temple, which was ruinedfollowing both the Japanese and Manchu invasions of Joseon in 1633 (the eleventhyear of the reign of King Injo) or during the repair of Daeungjeon Hall in 1657 (the eighthyear of the reign of King Hyojong), as recorded in Remarks on the History of Gwisinsa Temple onMoaksan Mountain in Jeonju (全州母岳山歸信寺事蹟詞引) by Monk JasuMugyeong, thusreflecting the calligraphic style of the mid-seventeenth century. Their production was part of areconstruction project undertaken at Joseontemples nationwide after the Japanese and Manchu invasions. The mid-seventeenth-century calligraphic style reflected in the Gwisinsa plaques is also validated by the fact that the calligraphic style of the“Daejeokgwangjeon Hall” plaque resembles the stylesof the“Daeungjeon Hall”plaque atHwaeonsa Temple in Guryeand the plaque reading “Hwaeonsa Temple onJirisan Mountain,”both of which were written in 1636by Yi Gwang, also known as Prince Uichanggun.
The calligraphic styles in the plaques of Daejeokgwangjeon Hall and Myeongbujeon Hall at Gwisinsa Temple bear similarities to those in the plaques of Joseon palaces and seowon. In particular, they recall the style seen in the plaque of “Large One Thousand Characters” by Han Ho (sobriquet: Seokbong), which was considered a definitive exampleof plaque calligraphy in the mid- and late Joseon period.Thisresemblance to the plaques of Joseon palaces and seowon can be further demonstratedby an analysis of vertical and horizontal strokes and a comparison with other plaques. These include the plaques of“Yeonghoru Pavilion” by King Gongmin in the late fourteen century; “Sungnyemun Gate” by Prince Yangnyeong in the early fifteenth century; “Geumsansa Temple onMoaksan Mountain” in the mid-sixteenth century; “Guindang Hall” by Han Ho in the mid- and late sixteenth century; “Donuimun Gate” by Jo Il-hoe in the mid- and late seventeenth century; “Daeungjeon Hall” and “Hwaeonsa Temple onJirisan Mountain” by Yi Gwang in 1636; “Daeungjeon Hall” by Yi Gwang-sa at Daeheungsa Temple in the mid-eighteenth century; “Daeungjeon Hall” by Kim Jeong-hui at Eunhaesa Temple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and “Gwanghwamun Gate” by Yim Tae-yeong. Thus, the calligraphyon the “Daejeokgwangjeon Hall” and “Myeongbujeon Hall” plaques at Gwisinsa Temple serve as a criterion for defining conventionalor individual beauty in plaque calligraphy duringthe mid-seventeenth century.

5모악산 귀신사의 보존과 활용

저자 : 남해경 ( Nam Hae-kyeong )

발행기관 : 한국불교사연구소 간행물 : 한국불교사연구 1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5-19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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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7교구 금산사의 말사로 모악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676년에 초창되어 통일신라 후 화엄십찰 중 하나가 되어 전주일원을 관장하던 대가람이었다. 청도리 일원이 전부 귀신사의 사찰 영역이었고 금산사가 귀신사의 말사였으며 2층의 대웅전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축소되어 대적광전과 명부전, 요사채등이 있을 따름이다. 이에 본 연구의 목적은 대가람 귀신사의 보전과 활용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여 귀신사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한다.
귀신사의 보전은 먼저 귀신사의 건축적 본질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회복을 하고자 한다. 귀신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사찰의 영역과 유적을 확인하기 위하여 귀신사 영역과 청도리마을 일원에 대하여 시굴 및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가람의 영역을 확인한다. 이를 근거로 귀신사의 영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3단계로 귀신사의 영역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건축물의 경우 대웅전을 비롯한 불전을 파악하기 위하여 문헌조사와 발굴조사 등을 실시하고 주변에 분포되어 초석, 기단, 기타 석물 등의 유구를 통하여 건축의 규모를 추정한다. 그런 다음 현실적으로 가능한 현재의 사찰영역을 중심으로 화업십찰의 가람배치를 반영하여 문루와 대적광전의 위치와 규모 추정을 하였다.
귀신사의 활용은 현재 귀신사의 영역을 중심으로 귀신사의 진정성을 유지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활용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화업십찰로서 귀신사의 진정성을 반영하여 템플스테이, 불교학교, 마음 힐링 사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일반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불교를 구현하고자 다도학교, 사찰음식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 대중적인 활용방안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귀신사 주변과 김제 주변의 불교 문화재를 연계하는 관광프로그램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귀신사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현대인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보존과 활용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Guisinsa temple is one of the 17th Diocese of Geumsansa temple of the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It is constructed in 676 as one of the Hwaeom 10 temples. The area of Cheongdori Village was originally those of the temple. And Geumsansa temple was one of the branch temple of the Guisinsa temple and there was a Buddhist temple on the second floor. But now it is rather small.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store the value of this temple.
The maintenance and restoration of the temple should first conduct excavation and excavation surveys on the area of the temple to confirm the area. In addition, Garam will have to be restored under the given conditions and the gate tower will have to be re built, and plans should be made to conserve and use of the heritage.

6백암 성총의 보살사상 연구 - 백암 성총의 『사경지험기(四經持驗紀)』를 중심으로 -

저자 : 이서련 ( Lee Seo-ryeon )

발행기관 : 한국불교사연구소 간행물 : 한국불교사연구 1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7-244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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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백암성총의 『사경지험기(四經持驗紀)』에 나타난 대승보살의 수행을 살펴봄으로 조선후기 교(敎)·선(禪)·염불이 융화된 수행의 양상을 밝혀보고자 한 연구이다. 본래 네 가지 경전에 대한 지험기는 청(淸) 주극부(周克復)의 저술들이다. 이것을 백암성총이 조선후기 상황에 맞게 발췌하여 사경지험기 4권 1책으로 편찬한다.
『사경지험기』의 저술 의도(意圖)는 대승보살의 실천적 지성의 '닮음'이라고 생각한다. 그 실천적 지성으로 첫째, 상구보리(上求菩提)는 불도수증(佛道修增)의 측면에서 차별된 교·선·염불의 수행체계를 대승지관(大乘止觀)의 원돈(圓頓)·원융(圓融)적 방식으로 개현(開顯)한 것이다. 둘째, 하화중생(下化衆生)은 포교(布敎)의 측면에서 심오한 교학과 선(禪)이 오직 경전을 믿음으로써 이루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불자의 『영험기(靈驗紀)』를 통해 불계(佛界)의 종자를 일으켜(佛種心起: 信: 華嚴經持驗紀) 법계를 이해하고(解: 金剛經持驗紀) 경전을 따르려하는(行: 法華經持驗紀) '그' 중생에게 스스로 법계를 건립(建立)시키기(證: 觀音經持驗紀) 위한 방법으로 염불 수행을 장려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후기 불서간행과 삼문수업을 정착시킨 17세기 부휴계의 법맥을 이은 백암성총은 보조유풍을 이어받아 겸수·회통의 사상을 확장했다. 그런 면에서 초기 저작인 『사경지험기』는 조선후기 중시된 염불문을 통해 전체를 보는 입장에서 「영험기」를 간행한 것이다.


This writing try making clear of the aspect of the practice with the congruence of meditation and doctrine, and chanting Buddha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examining the practice of Bodhisattva in Mahāyāna in Sagyeongjiheomgi (四經持驗紀, the record of miracle relating four sutras) by Seon (Zen) Master, Baegam Seongchong.
It is thought to have been written with the intent of demonstrating the likeness of practical intelligence of Bodhisattva in Mahāyāna, which reveals itself in two aspects. Firstly, as for its seeking bodhi above (上求菩提), the method of practice with the congruence of meditation and doctrine, and chantting Buddha appears in the way of Weondon (圓頓, Perfect and immediate) and Weonyung (圓融, Perfect harmony) of Samatha-Vipassana (止觀, cessation and observation) in Mahāyāna. Secondly, as for its saving sentient beings below (下化衆生), full understanding profound doctrine and meditation is accomplished with the faith in sutras. Thereby, The one, is encouraged to practice of changting Buddha, who tries to awaken the seed of the faith (信) in Buddha dhātu with The record of a miracle, to understand (解) Dharma dhātu and to practice (行) the teaching in sutras, which is the way of building (證, atttainement) Dharma dhātu for one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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