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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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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7)~76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698
석당논총
76권0호(2020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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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우슈비츠 이후 예술가의 책무 -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가족초상화시리즈>(1965)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승호 ( Kim Seung-h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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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는 <가족초상화시리즈>(1965)와 함께 동시대미술에서 부상한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가의 책무에 동참한다. 리히터의 초상화시리즈는 자신의 가족 앨범에서 발견한 흑백사진, 특히 나치시대에 찍은 자신의 삼촌과 이모 그리고 구)동독시절의 아버지의 사진을 회화의 도구로 흐리게 재현한 작품이다. 그의 이 초상화시리즈는 나치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과 결부된 것으로 다양한 전시문맥을 통해 21세기에 들어와 국제적 논쟁을 초래한다. 그리하여 미술작가로서 리히터의 사진·회화의 노정이 한편으로는 역사적 문맥에서 해석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셉 보이스[Joseph Beuys]가 제기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관계가 현대미술에서 역점을 달리하면서 이어진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1962년 동독에서 서독으로 망명하고 요셉 보이스가 교수로 재직한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수학하고 교수로도 재직한 미술가이다. 보이스가 유리관 설치작품<아우슈비츠-데모>(1956-64)으로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가의 책무를 현대미술에 수용한 반면에, 리히터는 자신의 가족구성원을 회색으로 재현한 초상화시리즈로 응수한다. 동시대작가이자 보이스의 제자였던 외륵 임멘도르프[Jörg Immendorf]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도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가의 책무에 서사적 회화로 동참한다. 리히터의 초상화시리즈와 함께 임멘도르프의 <카페 독일>시리즈 그리고 키퍼의 <마가레테/술라미트>시리즈로 팝아트 이후 형상회화가 부각한다. 나치시대의 잔학성과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역사가 어둡고 거칠고 차가운 화면으로 표현돼 아우슈비츠 이후 새로운 유형의 시리즈가 미술사의 과제로 부상한다.
리히터는 초상화<삼촌 루디>(1965)와 <이모 마리안네>(1965)에 <개와 함께 있는 호르스트>(1965)초상화를 포함시켜 가족초상화시리즈를 완결한다. 그의 초상화들은 화면의 크기가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치군인이었던 루디, 종족우월주의로 희생당한 이모 그리고 나치군인의 아버지를 재현하여 개인의 가족사와 나치시대가 동시에 조망된다. 사진 속 인물을 묘사한 <삼촌 루디>, 현재는 체코의 리디체 미술관의 소장품인 삼촌의 초상화가 이차대전 당시 범죄국가와 피해국가 간의 화해의 상징으로 간주된 반면에, 작가의 부친 초상화<개와 함께 있는 호르스트>는 이차대전 당시 군인으로 참전한 아버지세대와 자식세대간의 갈등에 주목한다. 작가의 <이모 마리안네>는 독일인으로서 나치시대의 종족우월주의로 사망한 희생자를 상징하는 미술작품으로 간주된다. 그의 초상화시리즈들이 각기 달리 해석되어 국제사회에서 과거사를 잊지 말자는 경고가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리히터의 사적 영역이 공적으로의 전환은 아우슈비츠 이후 리히터의 책무와 그의 초상화시리즈에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가족 앨범에서 발견한 흑백사진과 비교분석하여 아우슈비츠 이후 리히터의 가족초상화에 은닉된 의미의 층을 들여다본다. 이러한 미술사적 비교분석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거부한 리히터의 고유한 회화적 부정의 변증법, 그의 가족초상화시리즈가 전통적 관조방식을 거부한 인식론적 방법론도 포함한다. 이러한 인문학적 방법론은 아우슈비츠 이후 현대미술에서 새로운 해석학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리히터의 가족초상화시리즈와 결부된 역사적 문맥을 분석하고 아우슈비츠 이후 초상화를 온전하게 고찰하는데 중점을 둔다.
동시대 회화작품으로서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가의 책무에 관한 비교예문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가족초상화시리즈>(1965)에 대한 미학적 카테고리에 대한 연구가 성숙되었다.


Gerhard Richter (1932 ~), in his family portrait series (1965), delves into the responsibilities of artists after Auschwitz. His family portrait series turns the monochrome photos of his uncle, aunt, and father that had been taken during the Nazi period and former East Germany era and were found in his family album into grisaille paintings. The portrait series sparked debates at a global level in a wide array of exhibition contexts as they are associated with the Nazi era and World War II. That has led to Gerhard Richter's journey as an artist of photo-painting being interpreted in the historical context while the boundaries between the private and public realms suggested by Joseph Beuys emerge in the contemporary portraits.
After leaving East Germany for West Germany in 1962, Gerhard Richter studied and taught at the Dusseldorf University, where Joseph Beuys was a professor. Joseph Beuys, with his glass-vitrin installation work, Auschwitz- Demonstration (1956-64), incorporates the artistic responsibilities after Auschwitz into contemporary art and Richter responds to this with his grisaille family portrait paintings. Jörg Immendorf and Anselm Kiefer, contemporary artists as well as Joseph Beuys' students, visualize the obligations of artists after Auschwitz with their narrative paintings. The family portrait series by Gerhard Richter and Deutschland series by Jörg Immendorf as well as Margarethe and Sulamith series by Anselm Kiefer declared the return of figurative painting in the cold war era. All these series visualized the brutality of the Nazis and the unrepaired past in a dark and crude tone and put the responsibilities of artists on the list of artistic themes.
Gerhard Richter's family portrait series contain Onkel Rudi(Uncle Rudi) (1965), Tante Marianne(Aunt Marianne) (1965), and Horst mit Hund(Horst with a Dog) (1965). These works, despite their different dimensions, represent his uncle Rudi who was a Nazi solider, his aunt who was a victim of ethnic chauvinism, and his father, who participated in the war as a Nazi soldier and thereby look into both his family history and the Nazi period. Onkel Rudi which is in the collection of Lidice of Czech depicts the figure in the photo and is considered a symbol of reconciliation between the countries which committed atrocities and the countries subject to brutalities while Horst mit Hund, the portrait of the artist's father focuses on the conflict between the father's generation who took part in World War II as soldiers and their children's generation. Tante Marianne is regarded as a piece that epitomizes the German victims of ethnic chauvinism in the Nazi days. Although his gray paintings have been subject to a variety of interpretations, some of which issues a warning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gainst forgetting the past, the transition from the artist's personal domain to the public one shall be found in his responsibilities and pictorial strategy.
This paper will explore the layers of meaning hidden in Richter's family portraits through a comparative analysis of the portraits and the black-and-white photos found in his family album. Such art-historic comparative analysis encompasses the dialectics of Richter, who refuses and disregards the artistic beauty and the epistemological methodology that interprets the grisaille portraits by Richter, who counters the substance and meaning of traditional portraits. Such liberal arts methodology, rather than proposing new hermeneutic methods, focuses on an in-depth analysis of Richter's family portrait series.
It is challenging to identify comparative texts for Gerhard Richter's family portraits series (1965) regarding the responsibilities of artists, and it is imperative to specify an aesthetic category to address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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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중 보타관음의 불교적 영성과 손행자(孫行者) 이미지

저자 : 박은경 ( Park Eun-kyung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7-6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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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과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관음의 진신처는 Potalaka산(補陀落迦山, 小白華樹山, 光明山) 관음궁전이다. 이 곳은 수목과 꽃이 만발한 가파른 산정에 시냇물과 연못을 배경으로 자리한 석천궁이다. 그런데 한중 수월관음도를 보면, 연꽃이 피어오른 수면을 잔잔한 蓮池로 표현한 경우와, 파랑과 포말이 일어나는 海水面을 연상케 하는 경우 등 2계열이 보인다. 나아가 해수면에만 볼 수 있었던 바다의 보화 산호를 점차 연지에도 장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음의 진신처에 연지 외에 해수면이 등장하는 것은 인도로부터 출발한 관음신앙이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확산됨에 따라 해안절벽에 입지한 觀音聖窟 탄생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게다가 여기에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비롯하여 다라니경류에 기술된 관음의 강력한 위신력인 海難救濟 신앙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한중 보타관음의 새로운 진신처인 바닷가 성굴은 불교적 영성과 더불어 현세에 구현된 또 다른 관음정토 세계라 할 수 있다. 관음을 방문하는 용왕과 바다권속을 비롯한 도상들이 눈에 띈다. 해수면 등장으로 흥미로운 것은 일본 大德寺 소장 고려 <수월관음도>를 비롯한 일부 작품에 관음을 방문하는 손오공 행자(孫行者) 도상이 확인된다. 손행자 도상은 서유기 관련 도상으로, 이미 고려 14세기에 명대 서유기본 보다 이른 텍스트에 의거한 도상이었을 것이다.


According to the Avatamska Sutra and the Great Tang Records on the Western Regions, the real residence of Avalokitesvara is the Avalokitesvara palace in the Mount Potalaka(補陀落迦山, 小白華樹山, 光明山). This place is known as a Heaven's palace(Seokcheon palace), made of stones located near a pond on the tiptop of a steep mountain with full of trees and flowers.
The appearance of sea water in the scenery of the Avalokitesvara's real residence is considered to be related to the idea of the Avalokitesvara's sacred cave located on the cliff of the coast as the Avalokitesvara belief, originated from India, spread to Korea via China. This belief of the Avalokitesvara's sacred cave is based on the salvation from the sea risks-divine power of the Avalokitesvara- described in the Chapter of the Universal Gate of Bodhisattva Avalokiteshvara of the Sutra of the Lotus and other dharanis.
The sacred cave by the sea known as the new real residence of the Potalaka-Avalokitesvara in Korea and China is not only Buddhist spirituality but also the world of Avalokitesvara's paradise embodied in the world. In addition, in the Water-moon Avalokitesvara paintings, some figures who visit Avalokitesvara are found, such as the dragon king and his subordinates. Especially, with the emergence of sea water, the icon of the pilgrim Sun Wukong is identified in some Water-moon Avalokitesvara paintings, for example the painting in the Goryeo dynasty at Daitoku temple(大德寺) in Japan. The icon of the pilgrim Sun represents that the text of Journey to the West had already existed in the Goryeo dynasty in the 14th century, earlier than the one in the M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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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의 역사·문화적 공유의식

저자 : 崔永好 ( Choy Young-h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5-83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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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유네스코(UNESCO)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해인사대장경판에 담겨진 역사·문화적인 공유의식을 진단하였다. 13세기 중엽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사업 당시 고려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당대의 공유의식을 정리한 다음,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사업에 담겨진 공유의식을 진단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조성사업 이후 해인사대장경판에 담긴 공유의식의 확장현상도 살펴보았다.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사업이 이루어지던 13세기 중엽 고려사회는 잔혹한 몽골 군사들의 침략에 따라 경제적 궁핍과 살상·포로·약탈의 대상으로 극한적인 공포와 위기 상태에 내몰려져 있었으며, 현실적 삶도 더욱 열악한 상태로 치닫고 있는 등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상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에는 고려사회의 핵심적인 전통가치와 상징으로 기능·인식된 불교문화유산과 불교기록유산들도 파괴·훼손되면서 불교계의 위기도 노출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당대 고려 사람들은 민족적 모순과 현실적 삶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대책들 가운데 핵심적인 하나의 통로를 불교와 불교유산의 조성사업에서 모색할 수 있다는 공유의식을 가지고 함께 실천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불교와 조성불사가 몽골침략과 함께 현실적 삶을 극복할 수 있다는 공유의식을 가지고 실천하였다.
13세기 중엽 조성된 해인사대장경판에는 몽골침략 등으로, 모든 고려 사람들이 겪던 민족적 위기와 현실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불교적 기원의식과 신념이 담겨져 있었다. 국가 및 국왕·왕실의 안녕, 전쟁종식·외적 격퇴 등의 기원은 13세기 중엽 당대 모든 고려 사람들이 함께 바라던 공유의식으로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사업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해인사대장경판에는 이러한 공유의식을 담고 있었으므로, 당대 고려 사람들과 불교계가 조성사업에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조성사업도 안정적이고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해인사대장경판은 조성사업 이후에도 현재까지 거의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성사업의 당시나 이후에도 해인사대장경판에 담긴 역사·문화적인 공유의식이 지속적이고 확장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능하였다. 고려사회에서뿐 아니라 특히 성리학적인 지배이념이 확산되고 불교사상이 억제되었던 조선시대에도 국가로부터 나라의 보물이라는 공유의식과 위상을 확보하면서 안정적인 보존 대책도 마련되는 등 우리 민족의 기록유산으로 인식되고 자리매김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의 남북한에서도 국가적인 보물로서의 위상과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더구나 일본사회에서도 중세 이래 근대까지도 불교나 세계적인 보물로 인식되는 공유의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공유의식으로 해인사대장경판은 2007년 6월 유네스코(UNESCO) 기록 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등 우리나라를 포함한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기록유산으로서의 위상과 가치가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This paper attempt to analyze into the historical & cultural sharing―consciousness of the Haein-Temple's Tripitaka-Woodblock that UNESCO has listed as Memory of the World in 2007.
The Haein-Temple's Tripitaka-Woodblock had been carved as a national project in the mid―13th century. at this time, the Goryeo(高麗)-Dynasty was undergoing a brutal invasion of Mongolia. In the process, the whole of Goryeo-people were feeling life threat, were suffering enormous material damage. In addition, Goryeo-society was experiencing destruction of the Buddhist heritage. Goryeo-Dynasty has been experiencing the greatest national crisis and realistic contradictions since its founding. in this realistic environment, the Goryeo-people responded by force to the Mongol invasion. on one hand, they relied on Buddhist beliefs.
Goryeo-people carried out Buddhist events and sculptures with Buddhist beliefs. and they wished the stability of the state and the royal family, earnestly prayed for an end of the war(repulsion of Mongolian Invasion) and the well-being of their families. in particular, this origin is inscribed in the Buddhist sculptures that had created in the mid―13th century. therefore, this origin was a shared consciousness of the Goryeo-people in the mid-13th century.
A creation project of the Haein-Temple's Tripitaka-Woodblock was also included in such shared consciousness. therefore, the Goryeo-people of the mid-13th century actively & voluntarily participated in the creation project of the Haein-Temple's Tripitaka-Woodblock. they participated actively and voluntarily with all their heart. the participated people of this creation project included from the king to the common people, were also included all Buddhist sects of the time.
the Haein-Temple's Tripitaka-Woodblock is almost completely preserved to date even after the construction work. this was because the shared consciousness of the time had historical and cultural vitality even after the creation project. in particular, the historical & cultural values of the Haein-Temple's Tripitaka-Woodblock was nationally & continuously shared the Joseon(朝鮮)-Dynasty that the Buddhist faith was suppressed.
The Haein-Temple's Tripitaka-Woodblock was recognized as a national treasure in both Japanese colonial rule and modern society. this documentary heritage was also recognized as a national treasure in Japanese society. this documentary heritage has listed as UNESCO Memory of the World in 2007, is now established a universal heritage of world hum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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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근대 우의(羽衣) 천녀(天女) 도상(圖像)의 변용 : '일본'에서 '아시아'적 천녀로

저자 : 김정선 ( Kim Jung-sun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5-10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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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근대기 일본을 대표하는 도상으로 다수 제작되었던 날개옷(羽衣) 천녀에 주목하여 시기에 따른 변화의 양상을 살펴보고, 새로운 천녀상 창출의 정치적 함의를 추적하는데 목적이 있다.
지상으로 내려온 천녀가 날개옷을 잃어버리고 이를 숨긴 남성과 결혼하는 우의천녀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금강산 선녀전설(선녀와 나무꾼)을 비롯해 전 세계에 분포하는 광포설화로, 일본에는 시즈오카현(靜岡縣) 미호(三保)반도의 소나무 숲(松原)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우의전설(이하 미호의 우의전설)이 대표적이다. 미호의 우의전설은 15세기 전통 가무극인 노(能) 공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해 이후, 우키요에(浮世繪)와 같은 인쇄물을 통해 일본을 대표하는 날개 옷 전설로 자리 잡게 된다.
본 논고에서는 이처럼 에도(江戶)시대까지 서민들을 중심으로 당대 예능 속에서 소비되던 미호의 우의천녀가 역사화 제작이 활발해 지는 19세기 이후가 되면, 서구의 신화를 대체할 주요 도상으로 인식되어 일본의 역사, 신화적 공간 내에 새롭게 편입되기 시작하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실제 1890년 제3회 내국권업박람회에 출품된 혼다 긴키치로(本多錦吉郞)의 <우의천녀>를 시작으로 제국극장 천정화(1911), 조선총독부 벽화(1926)를 거치며 당대 풍속을 기반으로 했던 우의천녀는 일본의 고전으로, 나아가 아시아적 천녀로 변화되어 간다. 그리고 이러한 변용의 여정이 서구와 대등한 근대국가 건설에서 '大東亞共榮圈', '八紘一字'로 아시아 지배를 확장했던 제국 일본의 자기 정체성 확립과 괘를 같이 하는 것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The shapes of beautiful women who flew around the sky have been the themes of drawing for a long time regardless of eastern or western worlds. In addition to the western angels and a goddess like Nike, in eastern world, the shapes of the sky adventist women such as flying angels, Taoist fairies and jade women floating on top of the cloud and crane with long flying clothes have been handled frequently for the main objects of drawing in Buddhism and Taoism since before Christ. This study is focused on the process of changes use of such traditional sky adventist women to 'Asiatic sky adventist women' amid the historical and mythical spaces newly organized mainly in modern era of Japan.
Especially, many drawn images of Japanese representative sky adventist women in the era were the feathered clothes stories(“Miho's feathered clothes legend”) unfolded at the background of pine forest of Miho(三保), Shizuoka(静岡). Miho's feathered clothes legend has been widely known to the public in the opportunity of Song of feathered clothes composed around 15th century. The contents of the song that a fisherman, Hakuryu who hided the feathered clothes to keep as family treasure and returned it by regretting his wrongdoing, and then, the sky woman showed the dance of sky woman rewarding for it and disappeared beyond the Fuji Mountain have been positioned for a Japanese endemic story of feathered clothes women via printed media like Ukiyo-e(浮世繪 folklore drawing) including the Japanese traditional music, Nagauta(長唄), dance and Kabuki(歌舞伎 Dance music playing).
As mentioned above, the legendary feathered clothes women that had been known publicly along the emerged people culture at modern times reached to decorate the walls of public buildings and as single tableau as well as those were recognized as main drawings which will substitute the western legends since 19th century active in producing historical pictures.
Therefore, this study will look into the courses of the traditional sky adventist women introduced into Japanese historical and mythical spaces with Miho's feathered clothes legend at its center which had never been handled specifically in arts history in spite that those are the representative drawings in modern era, and trace the political implication of creation of new sky adventist women drawings.
It is because those are the women in Tempyo(天平) era represented for Japanese classic in Buddhist women and they are in line with the imperial Japanese own identity extended to Asian dominance by the slogans of 'the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大東亞共榮圈)' and 'World under the Empero(八紘一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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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시대 봉수대의 건물지 고찰

저자 : 홍성우 ( Hong Seong-wo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9-14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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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지는 봉수군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봉수대를 이해하는데에 필수적이고 중요한 시설이다. 봉수대 건물지는 봉수군이 상주(常住)하면서 숙식과 생활을 주로 한 주거용 건물지[家屋]와 거화재료와 봉수군의 생활물품을 보관하였던 창고용 건물지[庫舍]로 구분된다. 주거용 건물지는 건축 방식에 따라 지상건물지와 수혈주거지가 있다. 양자(兩者)는 모두 아궁이와 온돌이 갖추어져 있다. 수혈 주거지는 문헌사료를 검토하여 산성과 봉수대 등 군영에서 추위를 피하기 위해 겨울철에 조성된 토실(土室)이며, 이 토실이 산성과 봉수대 내 주거 및 방어의 용도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창고용 건물지도 건축방식에 따라 지상형(地上形)과 수혈형(竪穴形)으로 구분되나 대부분 지상형이었다. 창고용 지상건물지는 구조상 다칸구조(多間構造)와 한칸구조(一間構造)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지상건물지의 구조나 규모의 차이는 보관 물품의 종류나 수량의 차이 그리고 주거용 건물지 내 고방(庫房)의 유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봉수대 출토유물 중 기와는 상당히 높은 출토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건물지의 지붕 재료로 기와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기와는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번에 걸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계속적인 보수 과정을 거치면서 그 규격이 조금씩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출토위치를 보면, 건물지 외에도 거화, 방호, 생활시설 등 다양한 곳에서 출토되었다. 이는 건물지의 지붕용을 비롯하여 연통재료용, 대지조성용, 배수로용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As building sites are directly associated with the life of signal fire soldiers, they are recognized as an essential and important facility in understanding signal fire stations. Building sites around signal fire stations can be divided into residential building sites (家屋) where signal fire soldiers resided and lived and storing building sites (庫舍) where they stored materials for erecting signal fires and daily necessities. Residential building sites are divided, depending on the method of construction, into ground type and pit dwelling type. Both of them were equipped with furnaces and ondol (Korean floor heating system). Through literature review, it was found that pit dwelling-type residential building sites were mud-walled huts (土室) built by military camps near fortresses and signal fire stations to keep out the cold in winter. These mud-walled huts were found to be used for the purpose of residence and defense within fortresses and signal fire stations.
Storing building sites are also divided, depending on the method of construction, into ground type and pit dwelling type, but most of them are ground type. Ground-type storing building sites can be divided, depending on the structure of buildings, into multi-room type (多間構造) and single-room type (一間構造). The differences in the structure and size of ground building sites seemed to be related to the differences in the type and amount of stored materials and the existence of a storeroom (庫房) within residential building sites.
Roof tiles accounted for a high share of relics excavated from signal fire stations, which can be attributed to the fact that roof tiles were used to roof the buildings. The excavated roof tiles seemed to be produced several times for a long period of time and their size slightly changed as the buildings were repeatedly repaired over time. Roof tiles were excavated from various places, not only from building sites but also from facilities for erecting signal fires and those for defense and living, which indicates that roof tiles were utilized for various purposes not only for roofing but also for erecting signal fires, developing sites, draining water,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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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세기 명(明) 암흑기(暗黑期)(1436~1463) 청화백자의 조선 유입과 수용

저자 : 김은경 ( Kim Eun-kyoung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7-17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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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5세기 正統-景泰-天順시기(1436~1463), 명나라 관요 생산의 침체기였던 暗黑期(혹은 空白期)때 명과 조선의 도자교섭에 관한 것이다. 1447년 명나라가 자기 무역 일체를 금하면서 조선도 중국과의 자기무역을 금하지만, 조선시대 유적에서 암흑기로 추정되는 경덕진 청화백자가 출토 확인되어 문헌기록과 다른 정황이 확인된다.
암흑기 때 명을 통한 공식적인 자기 유입은 문종즉위년인 1450년, 즉 경태원년(景泰元年) 단 한 차례이다. 이때 명 사신을 통해 진상된 암흑기의 자기는 상당한 수량으로 당시 황위를 둘러싼 불안정안 명 조정과 환관정치가 극에 달했던 정황, 그리고 양국의 기록에 명 황제의 하사품이라 언급되지 않은 점을 토대로 명 사신이 개인적으로 조선 국왕에게 진상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아울러 문종즉위년 이후, 명 황실을 통한 자기 유입의 기록이 전무한 것은 암흑기의 특성에 기인한다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암흑기 자기는 경태~천순시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어, 문종즉위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점은 이 시기 일본과 류큐를 통해 상당수의 명 자기가 조선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익히 알려진 용천요 청자 외에 백자 및 청화백자도 포함하고 있으며, 품종을 알 수 없는 자기도 최대 1천점이 한꺼번에 진상되는 것으로 보아 암흑기 명 청화백자는 일본과 류큐를 통한 제 2의 경로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오늘날 일본과 류큐 유적에는 암흑기 청화백자가 다수 출토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암흑기 자기와 동반 출토된 명 청화백자의 편년대가 15세기 후반~16세기에 분포되거나, 암흑기 이후인 성화년간(1465~1487)부터 본격적으로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동시기 유입이 아닌, 사무역이 증가하기 시작하는 15세기 3/4분기 이후부터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16세기 조선관요에서 15세기 편년의 명대 자기가 출토된 사실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경로와 뒤늦은 시기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암흑기 자기는 조선관요 백자 제작에도 영향을 미쳐, 전기 청화백자에 암흑기 자기의 양식적 특징이 확인된다.


This study is about the trade of Porcelain between Joseon and Ming Dynasty during the reign of ZhengTong(正統)-JingTai(景泰)-TianShun(天順)(1436~1463) in the 15th century and the Interregnum Period of official kiln in the Ming Dynasty. In 1447, the Ming Dynasty banned Porcelain trade, and Joseon prohibited Porcelain trade with the Ming Dynasty. However, the Blue and White porcelain of Jingdezhen, believed to be in the Interregnum Period, was excavated from the historical site of the Joseon Dynasty, confirming the literature records and other circumstances.
The official influx of ceramics through the Ming Dynasty during the Interregnum Period is only the first year that King Munjong(文宗, 1450~1452) took the throne in 1450. Porcelain of Interregnum Period delivered through Ming Dynasty envoys is a considerable amount. However, raised the possibility that envoys of the Ming Dynasty personally gift the Porcelain to the Joseon king based on the fact that the records of the two countries were not mentioned as imperial gifts of the Ming Dynasty along with the unstable situation of the Ming Dynasty and the situation in which the politics of the endoscope was at its peak. Due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Interregnum Period, it was also possible to understand that there was no record of any record through the imperial family of the Ming Dynasty since the year when King Munjong first took the throne.
Besides, the Porcelain of Interregnum Period excavated from the historical site of the Joseon Dynasty shows the stylistic characteristics of the JingTai(景泰)-TianShun(天順) period, indicating that it has been continuously introduced since 1450. Noteworthy is that during this period, Porcelain from the Ming Dynasty often flows into Joseon via Japan and Ryukyu. In addition to the well-known Longquan celadon (龍泉靑瓷), it also contains white porcelain and Blue and White porcelain, and since up to 1,000 Porcelain pieces of unknown variety have been presented at once, it is highly likely that they have flowed into the second route through the Ryukyu with Japan. In fact, it has been confirmed that a number of blue-and-white porcelain from the Interregnum Period have been excavated from Japan and the Ryukyu historical site.
The Blue and White porcelain production in Ming Dynasty, excavated with Porcelain of Interregnum Period, was distributed in the late 15th century to the 16th century. Excavated with Porcelain from the Interregnum Period, the Ming Dynasty Blue and White porcelain produced in the late 15th and 16th centuries. Also, considering the fact that it was excavated in earnest from the reign of the ChengHua(成化, 1465~1487) it would not have been introduced during the same period. In other words, it is likely that personal trade has flowed in since the third quarter of the 15th century when it began to increase. If so, it may also be understood that Ming Dynasty Porcelain produced in the 15th century was excavated from the Joseon official kiln of the 16th century. Porcelain from the Interregnum Period, which is likely to have been introduced in various channels and late periods, also affects the production of the joseon official kiln white porcelain, and the stylistic features of the Porcelain of Interregnum Period are identified in the electric purifying white porcel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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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제강점기 경북 예천지역의 사찰문화재

저자 : 최은령 ( Choi Eun-ryung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9-228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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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예천(禮泉)은 소백준령의 높은 줄기가 감싸고 낙동강, 내성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명당에 자리한 고장이다. 자연 그대로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자연유산, 기록유산, 유적건조물, 무형문화재, 유물 등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예천지역에는 92건 95점(2020.1.1.기준)의 문화재가 국가 및 경북 문화재로 지정되어있으며 이 중 불상과 불화, 탑, 전각 등 사찰의 불교문화재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예천을 대표하는 사찰 용문사의 보물 대장전과 윤장대가 최근 국보로 통합, 승격되면서 예천지역에서는 첫 국보가 지정되었다.
예천에는 신라 이래 조선시대까지 약 75개의 대소 사찰이 창건되었는데, 20세기 초에는 용문사를 비롯해 10여개의 사찰만 남고 모두 폐사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사찰령에 의해 1902년 16본산에서 1924년 31본산으로 늘어났고 예천지역의 사찰은 문경 김룡사의 말사로 되었다. 현재까지도 경상북도 예천에는 용문사를 비롯하여 여러 사찰에 중요 불교문화재가 소장되어 있지만 예천지역 사찰과 불교문화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경상북도 예천지역 사찰과 불교문화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였다. 과거의 시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사찰 재산대장을 기록했던 시간이고, 일제강점기의 경북지역 사찰 관련기록은 일제강점기 발행된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와 조선총독부관보 기록이다.
먼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불교문화재 조사와 관리에 관련된 주요 행정절차와 법령, 고적조사 등을 통해서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방향을 파악하였다. 일련의 일본이 실시한 불교문화재 정책은 한국을 식민지로 동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한 것이었고, 사찰의 재산 파악에 목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문건들을 비교하여 예천지역에 잔존했던 장안사, 용문사, 서악사, 한천사, 보문사, 명봉사 6개의 사찰과 재산목록을 확인하고 당시 사찰의 규모, 불교문화재의 소장 상황 및 특징을 파악하였다. 전체적으로 본사 이외 말사의 규모나 재정상태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고, 특히 일본의 전쟁물자 수급을 위한 금속품의 헌납이 전국 사찰에 강행되어 주요 불상 및 불구 등이 이 시기에 사라진 것을 재산목록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어 현재까지 예천지역에 남아있는 사찰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고 문화재를 현황을 파악하여, 유실 혹은 도난되거나 새롭게 추가된 문화재의 종합적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경북 예천지역의 사찰과 사찰문화재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3건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본말재산대장』에서 화엄사가 선암사의 말사로 되어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재산대장은 1911년 사찰령이 공포된 이후 화엄사가 1924년 31번째 본사로 등록되기 전에 작성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현대에 와서 사찰은 변화와 약동을 통해 근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었고 그 사이 사찰의 문화재는 자국인에 의해 또 다른 도난의 피해자가 되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사찰문화재가 사라졌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조차도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지금도 어려움이 많다. 이러한 문제는 과거 일제강점기의 종결된 것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또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도난된 사찰문화재는 그 중요도는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대부분 문화재로서 지정되지 않은 경우라서, 도난이후 해당 문화재의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기반도 없이 약탈의 대상이 되고 사라져버렸다. 향후 경상북도 예천의 사찰과 불교문화재의 관리와 보존에 관해서 다각적인 모색과 방안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Yecheon, Gyeongsangbuk-do, is a site located in a famous temple in Baesan-su, which is surrounded by the high stems of Sobaek Ordereong and flows along the Nakdonggang River and Naeseongcheon Stream. Along with its outstanding natural scenery, it has a number of cultural heritages, including natural heritage, documentary heritage, historical building, intangible cultural assets and relics. The Yecheon area has 92 pieces of cultural assets designated as national and North Gyeongsang Province cultural properties, of which Buddhist cultural assets such as Buddhist statues, Buddhist paintings, pagodas and pagodas take up a significant portion. The first national treasure was designated in the Yecheon area as the treasure of Yongmun Temple, a temple representing Yecheon, and Yun Jangdae were recently promoted to national treasure.
About 75 Daeso temples were built in Yecheon from the Silla Dynasty to the Joseon Dynasty. In the early 20th century, only about 10 temples, including Yongmunsa, were left, and all of them were closed. Japanese colonial era's order of inspection by the General Governor-General of Korea increased from 16 Bon-san in 1902 to 31 Bon-san in 1924, and the temple in Yecheon area became the horse of Kim Ryong-sa Temple in Mungyeong. Until now, Yecheon, Gyeongsangbuk-do has important Buddhist cultural assets in various temples, including Yongmun Temple, but no research has been conducted to give a full view of the temples and Buddhist cultural assets in Yecheon. The main building sheds light on the past and present, focusing on temples and Buddhist cultural assets in Yecheon, North Gyeongsang Province. The time of the past was when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recorded the property of the temple, and the records related to the temple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of North Gyeongsang Province were written on the documents of the Joseon Governor-General's Museum and the Chosun Governor-General's Register of Government-General.
First, the direction of the Joseon Governor-General's Buddhist culture policy was understood through major administrative procedures, statutes, and historical surveys related to the investigation and management of Buddhist cultural assets conducted by the Joseon Governor-General's Office at Japanese colonial era. A series of Japanese policies on Buddhist cultural assets were used as a way to assimilate Korea into a colony, and aimed at identifying the temple's properties. Japanese colonial era documents were compared to the remaining six temples and properties of Jangan Temple, Yongmun Temple, Seoraksa Temple, Hancheon Temple, Bomun Temple and Myeongbongsa Temple, which were located in the Yecheon area, to identify the size of the temple, the situation of the collection of Buddhist cultural assets, and the characteristics. Overall, the size and financial status of the horses outside the headquarters were in a very poor situation, and in particular, it was possible to compare property lists that Japan's dedication of metal products to supply and demand war supplies was pushed to the national inspection and the loss of major Buddhist statues and Buddhas during this time. Following Japanese colonial era, we looked at the current state of the temple remaining in the Yecheon area and looked at the current status of cultural assets, and looked at the comprehensive situation of lost, stolen.
The temple and temple cultural assets in Yecheon, North Gyeongsang Province, compare the three records issued by the General Administration of Joseon at Japanese colonial era to confirm that Hwaham Temple is the horse of Seonamsa Temple in the 'Bonmal Property Register." The property register can be estimated to have been written before Hwaham Temple was registered as its 31st headquarters in 1924, after the inspection decree was promulgated in 1911.
Coming to modern times after liberation, temples developed into different forms from modern times through change and pharmacology, and in the meantime, temples' cultural assets have become another victim of theft by their own people. There are still many difficulties now, as most people cannot even check out the basic details of who disappeared and when and how the temple's cultural assets disappeared. This problem is not the end of Japanese colonial era in the past, but it should be recognized for its seriousness in that it is ongoing and when and how it will occur. In particular, temple cultural properties that have been stolen so far can be valued highly, but are not designated as cultural assets, so after the theft, they become the subject of looting and disappear without the foundation for proper evaluation of the cultural assets. In the future, we expect to provide a variety of search and measures regarding the management and preservation of Buddhist cultural assets and temples in Yecheon, North Gyeongsang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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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사찰 소장 목판의 서지(書誌) 및 역사(歷史)·문화적(文化的) 의의(意義)

저자 : 朴鎔辰 ( Park Yong-jin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9-26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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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불교문화재연구소의 사찰 목판 일제조사 보고서를 기준으로 사찰 소장 목판의 현황을 검토하고, 그 토대 위에 사찰 소장 목판의 서지 및 불교문헌학적 의의, 나아가 역사·문화적 의의를 사례를 중심으로 시론하였다.
전국 사찰 소장 목판은 불교문화재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783종 27,171판이며, 추가 조사가 예정되어 있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사간장 고려시대판 52종 2801판, 14-15세기 6종 647판, 16세기는 21종 356판 등을 추가할 수 있다. 목판의 소장처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원소장처를 달리하는 경우가 많으며, 지역의 중심 사찰을 중심으로 목판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고, 목판의 주제별 분류에 따르면, 경·율·논장이 다수이지만, 조선시대 불교 전존 목판의 다수는 불교의례나 의식과 관련된 주제 및 내용에 해당한다. 목판을 소장하고 있는 지역별 소장 사찰수는 101개소이며, 목판 783종 가운데 간행처를 알 수 있는 것은 177개 사찰의 326건이며, 457건은 간행사항이 분명치 않다.
사찰 소장 목판의 서지학적 의의를 살펴보면, 판목의 판각정보를 통하여 무간 기본의 간행시기를 알 수 있고, 입목이나 보각 등의 내용 개변을 확인할 수 있다. 목판과 판본은 보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서의 정본화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또한, 불서의 간행 체계와 인쇄문화를 알 수 있는 정보가 판목에 있다. 고려시대 목판은 고인쇄기술과 문화를 전하는 한편 국내외 유일본 목판이 전존하고 있어 불교문헌학적 의의가 크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목판은 한국 찬술과 불교의례, 언해류, 다라니류가 다수이며, 이는 한국불교사상과 신앙의 성립과 전개를 알 수 있어 가치가 있다.
사찰 소장 목판은 동아시아 한문불교문화권의 교류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 전존한다. 목판의 판각정보인 각수명을 통하여 시기를 확정하고, 판각의 시대상황과 불교 사상경향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목판은 불교의 교학과 실천, 그리고 신앙의 전승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이다. 한편, 조선시대 목판 조성은 교학과 강학만이 아닌, 경전 판각에의 결연이 정토왕생의 행업과 작선으로 전개되면서, 소수에서 다중의 참여가 가능한 방향으로 확대되는 불교문화의 새로운 양상이 확인된다.
향후 사찰 소장 목판은 인쇄기술이나 판각 예술의 측면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고, 인쇄출판물을 보관하는 경장이나 장경각이라는 건축문화와도 연관되어 있다. 향후 목판과 관련 분야를 종합하면 한국의 불교문화 나아가 전통문화를 심화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current status of the Woodblocks of temples based on the report of the Woodblocks at th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below, RIBCH), and discusses the bibliographic and Buddhist literary and historical and cultural significance of the Woodblocks of Buddhist temples.
According to the survey of RIBCH, the Woodblocks of national temples are 27,171 of 783 titles. Haeinsa(海印寺)'s woodblocks, such as Korean Tripitaka and saganjang(寺刊藏) will be further investigated. The collections of woodblocks are often stored differently according to the times, and the woodblocks tend to be concentrated around the central temple. According to the thematic classification of the woodblocks, although it is Gyeong(經), Yul(律), and rON(論), many of the woodblocks of Buddhists in Joseon Dynasty correspond to the themes and contents related to Buddhist rituals. There are 101 temples that own woodblocks, 326 titles of 177 temples have publications, and 457 titles are unclear.
Aa for the bibliographic significance of the woodblocks of the temple, Woodcuts and editions are complementary and can be the basis for authenticity of the Buddhist Books. The woodblocks contains information on the publishing system and printing culture of Buddhist books. The woodblocks of the temple conveys the situation of the exchange of East Asian Buddhist culture. Woodblocks can be found in the times of engraving and the Buddhist trends. Woodblocks are also an indicator of Buddhism's teaching, practice, and tradition. Combining woodblocks and related fields in the future will help to deepen and creatively inherit Korean Buddhist culture and traditional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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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인재 신개의 생애와 정치활동 연구

저자 : 김준태 ( Kim Jun-tae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3-283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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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 초기의 고위관료이자 정치가이며,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재상인 인재(寅齋) 신개(申槩)의 삶과 정치활동을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그가 공정성과 객관성을 강조, 조선 건국 초기 국정을 안정시키고 각종 법제가 안착하는데 공헌한 점을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신개는 태조와 세종 때 각각 임금이 사서(史書)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앞장서서 차단함으로써, 객관적 역사서술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임금의 열람을 엄격히 금지하는 규범은 신개로부터 출발한다. 아울러 신개는 은사과의 폐지를 주장하여 관철하였으며, '관교'를 제한하고 서경(署經)을 확대하자고 진언하는 등 공직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승진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였고, 국가 차원에서 인재의 역량 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이밖에도 토지 조세제도인 공법(貢法)개혁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답험손실법과 공법의 장점이 결합한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이 시행되는데 이바지하였다. 이상 신개의 정치활동은 정치와 정책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으로, 조선 초기의 국정 안정에 공헌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and reveal Injae Shin Gae (1374-1446)'s life and thoughts, who was a politician in the early years of the Joseon Dynasty. Shin Gae, who began his life as a bureaucrat, shortly after the foundation, devoted himself to the settlement of various systems of Joseon Dynasty working as the premier for a long time, starting from the reign of King Sejong. Especially, his contributions to personnel administration and the maintenance of the land taxation system were absolute.
Shin Gae established the tradition of objective historical statements by preventing the king's intervention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while he served as a historiographer. He supported fair and transparent processes of the selection, appointment, promotion of men of talent institutionally and was interested in the equal operation of land taxation, as well. Shin Gae was a person who expanded and settled 'Seogyung,' a system similar to the confirmation hearing system of today, too. In each sector of the national administration, he made an effort to establish 'publicity.'
However, in the present academic circles, almost no studies on Shin Gae are conducted. This is because studies of the figures in the Joseon Dynasty focus only on the people who accomplished academic achievements. Also, it is partly because the records Shin Gae left, like the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are brief. However, considering the activities and roles Shin Gae showed, he is an indispensable figure in studying the early years of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Therefore, this paper would provide the beginning to understand Shin Gae and lead to the subsequent research by introducing his life and thou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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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조선인 '위안부'를 둘러싼 제국 남성의 시선 과 언어

저자 : 이진아 ( Lee Jin-a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5-30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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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전시체제기 조선인 '위안부'를 둘러싼 제국 남성의 시선과 언어에 대해 젠더론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제국의 시각적 응시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동시에 여성성을 은유하는 식민지 표상과 기표를 가시화하면서, 조선인 '위안부'를 향한 일본인 병사의 시선과 언어에 대해 역사적인 맥락에서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인 남성 병사들은 '위안부'가 되었던 식민지 여성을 향해 조선 창녀, 공중변소, 일본식 별칭, 고유 번호 등을 통해 여성 혐오의 프레임을 투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의 시선과 언어 안에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인 창녀 출신의 조선 여성이 돈을 벌기 위해 '자유의지'로 '위안부'가 되었다는 인식이 내재되어 있었다. 즉 조선 여성이 태생적으로 더럽고 비천한 존재이기 때문에, 일종의 자업자득으로서 일본인 남성에게 이러한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자기합리화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위안부'가 식민지 여성의 최하위 존재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과 함께 제국 남성에 의해 차별과 멸시, 혐오의 언어가 여성 신체에 투영된 문화적인 사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study researched the Japanese men's view and the language about Chosun 'comfort woman' during the wartime from the view of gender ideology. Specifically, the view and the language toward Chosun 'comfort woman' by Japanese man was examined from the historical context while visualizing Chosun's girls who were representative visually and revealed the cultural position of Chosun women, and Empire's sexuality management. It was found that the frame of misogyny was reflected by the fact Japanese soldiers called 'comfort women' 'Chosun prostitute', public toiler, Japanese nick name and serial number. Their view and language includes an inherent perception that prostitute Chosun women with the oldest job in the world became 'comfort women' with their free will to earn money. In other words, they are internalizing the logic of self-rationalization because Joseon women are inherently dirty and humble, they had to be treated by Japanese men as a well-earned punishment inevitably. This fact proves that 'comfort women' was the lowest position of Korean women in colonies/empires, and the cultural cases in which the language of discrimination, contempt and disgust were projected on the female body by Japanese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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