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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Chong(The Historical Jouranl)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4446
  • : 2671-58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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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5)~100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851
사총
100권0호(2020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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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삼한(三韓) 개념에 대한 고찰

저자 : 이전 ( Lee Je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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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개념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문화변동에 따라 변화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문헌에 등장하는 삼한은 다양한 개념을 갖는다. 고문헌에 등장하는 삼한에 대한 분석은 삼한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라고 본다. 이 논문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삼한 개념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연구이다. 『조선왕조실록』은 500여 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만들어진 사료로서 삼한 개념의 다의성을 고찰하는 데 매우 적절하고 유용한 고문헌이라고 판단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三韓이 345번이나 등장한다. 그중에 삼한이 마한·진한·변한의 국호를 분명하게 가리키는 경우는 단지 1번뿐이고, 삼한이 삼국보다 앞선 실체임을 분명하게 명시하는 경우는 겨우 4번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삼한이 우리나라라는 뜻을 갖는 경우가 215번이나 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조선을 삼한이라고 칭한 경우는 30번이나 된다. 또한 삼한을 직위·공신·화폐·서적 명칭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60번이나 된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삼한이 가리키는 시대가 불분명한 기사가 33번 등장하고, 고려 태조 왕건이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을 통합하였다는 잘못된 기사도 2번 등장한다.
고문헌 자료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한반도 종족들은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다. 그런데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세 종족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문화변동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는가에 대한 논의는 한반도 고대사 이해의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이 논문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삼한이 매우 다양한 개념을 갖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삼한 개념이 이처럼 다양한 것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문화변동으로 인하여 삼한 개념이 점차 변화하였기 때문이고, 그러한 삼한 개념의 변화가 『조선왕조실록』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The Samhan concept has changed along with the cultural changes that might have taken place in the Korean Peninsula. Accordingly, diverse meanings of Samhan may appear in the historical documents of Korea. Therefore, the meanings of Samhan in the historical documents need to be analyzed carefully in order to understand the Samhan concepts correctly.
This study deals with the Samhan concepts that appear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The Annals, recorded for about five hundred consecutive years, may be one of the most highly valuable source of information for studying the diversity of Samhan concepts. In the Annals, the term Samhan appears three-hundred-and-forty-five times: just once as the name of the three countries(Mahan, Jinhan, and Byunhan); four occurrences as the three countries that come just before the three states(Goguryeo, Baekje, and Shilla). In the Annals Samhan is named as our country two-hundred-and-fifteen times, while Samhan is called as Joseon country by foreigners thirty times. Samhan is also used as an official title(name) for position, founding member, money, and book sixty times in the Annals. Furthermore, in the articles of Annals the age of Samhan is unclear for thirty-three times, and is not correct for two occurrences. It has been found in this study that the Samhan concepts are very diverse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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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순사건 이후 한국군의 변화와 '정치화'

저자 : 노영기 ( Noe Young Gi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6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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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발생 이후 한국군, 그중에서도 육군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하며 한국군의 정치화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살펴보았다. 여순사건은 이승만정권이 극우반공체제를 완성시켜나가는데 있어서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이승만정권은 이 사건을 겪으며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는 한편 반대세력을 억눌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빨치산 뿐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이승만정권의 강력한 '반공화'는 물리적 기구인 군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육군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화를 추진하는 한편으로 민간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내부적으로 모병과 주둔지 이동, 반공이념의 확산을 통해 안정을 꾀하는 한편으로 이승만정권의 물리적 도구로서 기능하였다. 그리하여 내부가 안정된 이후 이승만정권에 반대되는 세력들을 제거해 나가는 기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즉 이승만정권의 강력한 '공권력'으로서 기능하였다.
군이 강력한 체제 수호의 기구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반민족 행위처벌법이 통과되고 친일파 청산에 대한 민족적 요구가 높아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군 핵심부를 차지했던 친일파 출신 군 수뇌부는 반민법의 처벌 대상자였기 때문에 반민법과 반민특위의 활동에 대해 조직적으로 반발하였다. 비록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과 국방부 차관 최용덕이 광복군 출신이었고, 광복군 출신들이 일부 군에 입대했으나 당시 군 수뇌부는 '친일파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이들에게 제헌의회 소장파의원들의 활동은 자신들에게 비수를 겨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민법의 통과와 반민특위의 활동이 강력해질수록 군 수뇌부는 그 지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특히 헌병대와 육군본부 정보국은 친일경찰이나 친일헌병 출신들이 많았다. 때문에 이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국회 프락치사건'과 '반민특위 해산'을 기획하거나 관여하였다.
그리고 민족분단이 법제화된 이후 통일운동을 전개하던 김구 역시 이승만 정권에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여순사건 이후 반공을 이념으로 정착시키며 극우반공체제의 물리적 기구로 기능하고 있던 군과도 대립할 수밖에 없다. 국회 소장파 의원들과 김구는 군의 지향과는 정반대로 활동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활동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총반격이 1949년 '6월공세'였고, '6월공세' 기간에 군은 이승만 정권의 물리적 도구로서 기능했다. 그리고 군의 정치 개입의 중심에는 '친일파'로 비판받던 군 최고수뇌부에서부터 친일 경찰 출신의 헌병대 부사령관 전봉덕 그리고 일본군 헌병 출신의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 김창룡 등이 관련됐다. 하지만, 아직 군은 직접 정치를 주도할 만큼 확대되지 못했다. 38도선을 둘러싼 남북한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아직 충분하게 민간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할 만한 역량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군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한국전쟁은 한국군의 정치화에 분수령이 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북한의 침략에 맞서 '구국의 영웅'으로 자리매김 하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전쟁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같은 한국군의 성장은 휴전 이후 정치권력과 밀착하며 종국에는 1961년 5·16쿠데타로 귀결됐다. 한국군의 '정치화'는 어느 날 갑자기 시도된 게 아닌 한국군 창설기부터 정치정체와 정권의 이해에 따라 이미 배태되었다. 이 글에서 세밀하게 해명하지 못한 여순사건 이후 군대 내부의 변화가 정치화로 어떻게 구체화 되는가는 향후 과제로 남겨둔다.


Kim koo, who had been carrying out the unification movement since the government was established in the two Koreas and the division was legislated, was also a “thorn in the eye” to the military as well as the Rhee Syngman regime. This will inevitably lead to confrontation with the military, which has established anti-communist ideology since the Yosu-Sunchon Incident and served as a physical organization for the far-right anti-communist system. Young members of the National Assembly and Kim Koo acted in stark contrast to the military's sentiment. As a result, it can be assessed that the total counterattack of the Syngman Rhee regime on their activities was the "June offensive" in 1949, and that the military served as a physical tool for the Syngman Rhee regime during the "June offensive." Also at the center of the military's political intervention were top military leaders, who were criticized as " pro-Japanese group," Jun Bong-deok, a former pro-Japanese police officer and deputy commander of the military police force, and Kim Chang-Yong, chief of the intelligence bureau at the Army headquarters, a former Japanese military police officer. In particular, Army Chief of Staff Chae Byung-duk referred to President Syngman Rhee, the head of the armed forces, as a subject that South Korean soldiers should emulate in a book published in 1949. It is a symbolic representation of the military's activities and personality changes at that time. However, the military has yet to expand enough to lead direct politics. Conflicts between the two Koreas over the 38th parallel were continuing, and they have yet to reach the capacity to topple the civilian government and seize power enough. Meanwhile, the military celebrated the Korean War on June 25, 1950. The Korean War was a watershed event in the politicization of the Korean military. Above all, it has established itself as a "hero of the national salvation" against North Korea's aggression, and has grown quantitatively and qualitatively beyond the pre-war period. And the growth of the South Korean military has since been in close contact with political power, and has been able to play a leading role in the May 16 coup in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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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역사적 영역과 경계의 지도화 문제 -남북조(南北朝)시기 '만월(蠻越)'을 중심으로-

저자 : 정면 ( Jeong-mye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9-11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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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지도는 치열한 기억전쟁터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2015년 끝내 좌절된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편찬사업'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고대의 기억을 지도화하는 일이 때로는 더 치명적이라는 것을 이 사업의 무산 과정은 잘 보여주었다. 이 연구의 가장 큰 목적은 남북조시기 蠻越의 분포와 경계 문제를 통해 중국학계의 역사지도가 지닌 문제점을 비판하고 이를 다시 그려보는 데에 있었다. 이를 위해 우선 南朝 국가들의 남쪽 경계에 관하여 짚어 보았는데, 寧州와 交州를 통해 남조국가의 군현적 지배 범위가 어디까지 미쳤는지 살펴보았다. 먼저 서남쪽 변계에 해당하는 영주의 경우 이미 군현적 지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토착 집단에 의해 점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남쪽 변계에 해당하는 交州의 경우 참파 계통의 국가인 林邑에 의해 그 경계가 후퇴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둘째로 남조 국가들의 영역 내에 존재하였던 '만월' 종족 집단들의 분포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남조 국가의 중심 지역인 江東지역을 제외한 전역에 蠻, 獠, 俚의 공동체들이 군현과 함께 잡처함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점의 집적을 통한 영역 재연을 통해 중국 학계의 역사지도가 지닌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The main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distribution and boundary of 'Manyue(蠻越)' during the period of the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and to criticize historical maps drawn by Chinese academia of history. And redrawing this historical map was one of the research goals. For this purpose, I first looked at the southern borders of the Southern Dynasties. In particular, through Ningzhou(寧州) and Jiaozhou(交州), I looked at the extent to which the administrative control of the Southern Dynasty was extended. In the case of Ningzhou, however, it was confirmed that administrative control had not already worked properly, but was occupied by an indigenous group, Xichuan(西爨). And in Jiaozhou's case, it was confirmed that the boundary was retracted by Lâm Ấp(林邑), the country established by Champa. Second, I looked at the distribution of 'Manyue' ethnic groups that existed within the territory of the Southern Dynasties. Through this, it was confirmed that 'Man(蠻)', Liao(獠), and Li(俚) tribes resided among Chinese cities in all areas except Jiangdong(江東), the central area of the Southern Dynasties. Finally, I drew several historical maps as a way of expressing the territory of the country by dotting it, which helped me to some extent solve the problems of historical maps drawn by Chinese acad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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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61-62년 장강장정(長江章程)과 강한관(江漢關)의 설치(設置)

저자 : 김현정 ( Kim Hyun J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3-156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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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천진조약에 따라 장강의 일부가 개방되었으며, 한구·구강·진강의 세 항이 통상항으로 지정되어 처음으로 해관의 설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세 통상항에 연해의 통상항에서와 같은 해관이 설치되어 그와 동일한 기능을 갖추게 된 것은 2차례에 걸친 장강장정 개정 후인 1863년 이었다. 아울러 장강교역에 부과되는 해관세를 상해에서 대리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청조 중앙에 대해, 장강의 내항에도 해관을 설치해서 직접 징세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은 장강의 지방당국이었다.
1860년대 초 장강장정은 영국의 요구에 따른 장강의 조기 개방과 동시에, 태평천국이 여전히 진압되지 않은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구상되었다. 천진조약에 의해 장강의 개방이 결정되었다고는 해도 태평천국의 영향으로 인해 청조 정부가 장강교역에 대한 통제와 징세를 유효하게 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 장강무역장정과 장강통상장정의 작성을 각각 주도한 영국측과 청조 중앙의 견해는 일치하였으며, 각 장정의 초점은 치안 유지와 탈세 방지에 맞춰져 장강으로의 통과허가증의 발급과 함께 상해에서의 관세 대리 징수가 정해졌다.
하지만 그 후 상해의 대리 징수에 대한 지방당국의 개정 요구가 거듭되었고 그 결과 성립된 장강통공장정에 의해 마침내 한구와 구강에서 해관세를 직접 징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 때 이미 장강에서는 교역의 재편과 함께 통상 환경의 변화가 나타났고 이는 장정의 규정에도 반영되어, 정기적으로 운항하며 장강교역에 참여하는 내강윤선과, 비정기교역에 참여하는 대양선을 각기 나누어 관리 및 징세하게 되었다. 또한 장강으로의 통과허가증 발급이 계속해서 행해졌으며, 이로써 치안 유지와 탈세 방지와 같은 이전 장정의 목표는 이후 내항에서의 해관체제의 특징이 되었다.


The Treaty of Tientsin signed in 1858 opened up the country's major waterway, the Yangtze River, and the three ports of Hankow(漢口), Jiujiang(九江) and Zhenjiang(鎭江) were designated as treaty ports, installing the first Imperial Maritime Customs. However, it was not until 1863, after the two revisions of the Yangtze Regulations that these Maritime customs of three ports were functioning and active as those of treaty ports on the coastal waters. In addition, for the Peking government, which insisted that the tariffs imposed on the Yangtze River trade should be collected by proxy in Shanghai, whereas the local authorities of Yangtze River demanded that the Customs duties levied on Yangtze River should be collected directly through the Maritime Customs installed on the river ports.
In the early 1860s, the Yangtze Regulation was conceived to be in an unstable situation where the Taiping Rebellion was still unsuppressed, with the early opening of the Yangtze River upon British demand. Although the opening of the Yangtze River was decided under the Treaty of Tientsin, it was not a situation where the Qing government could effectively exercise control and taxation on the Yangtze River trade due to the influence of the Taiping Rebellion. In this regard, the mutual agreement between the British authorities and Peking government, led to the preparation of the Provisional Regulations for British Trade on the Yangtze(長江貿易章程) and Provisional Regulations of Trade on the Yangtze(長江通商章程). The aim of both Regulations was to maintain the security and prevent tax evasion, with the issuance of a transit permit to the Yangtze River as well as the collection of the Customs duties in Shanghai.
However, afterwards, the local authorities' demand for amendments have been repeatedly raised, and as a result, the Revised Regulations of Trade on the Yangtze(長江統共章程) has finally made it possible to collect the Customs duties directly from Hankow and Jiujiang. Meanwhile, the Yangtze River had already seen changes in trade environment along with the reorganization of trade in the Yangtze River. This was reflected in the Regulations which divided and managed the river steamer(內江輪船) that regularly operated in the Yangtze River trade and the sea-going vessels (大洋船) which participated in the irregular trade. In addition, the issuance of transit permits to the Yangtze River continued, and the goals of the previous Regulations such as policing security and the prevention of tax evasion became the hallmarks of the Maritime Customs system in the river 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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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중국의 외교문서 공개 및 출판 사례 연구 -대륙과 대만의 사례를 포괄하여-

저자 : 이동욱 ( Lee Dong-u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7-203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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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청말부터 현대에 이르는 중국의 외교기록물 공개 및 외교문서집 출판의 역사를 고찰하고, 현대 중국의 외교기록물 공개 제도와 관련 규정, 외교문서집 출판 사례를 전반적인 당안 관리 시스템의 변화와 연관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 근대 이래의 세계에서 외교문서의 공개와 외교문서집의 출판은 국가의 대외관계 업무 수행을 위한 참고자료와 학술적 연구자료의 제공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자국의 외교정책을 홍보하고, 그 정당성과 합리성을 주장하여 국내외의 지지를 획득하는 수단이자, 정부행정의 투명성과 민주화의 진전을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의 외교문서의 공개와 외교문서집 발간의 역사는 서세동점의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흐름의 일부로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은 기록물의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를 중시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근대 이전까지 외교문서 공개와 외교문서집 간행의 전통은 없었다. 서양 열강과의 폭력적인 조우를 계기로 그들과의 교섭문서를 모아서 편찬한 청말의 외교문서집 『籌辦夷務始末』은 서양식의 외교문서집이라기보다는 후세의 통치자들을 위한 참고자료를 남겨둔다는 전통적인 성격이 더욱 강했다. 그러나 중화민국 시기에 들어서면, 영국, 독일 등의 열강이 자국의 외교를 정당화하기 위해 외교문서를 출판하던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적인 흐름에 궤를 맞추어 1919년부터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도 간간이 파리강화회의나 워싱턴회의 등 당대의 외교문서를 출판하여 자국의 외교를 변호하고, 중일전쟁 발발 전 10년 동안에는 열강이 중국을 침탈해오던 시기의 외교문서집을 정리하여 출판하면서 중국측 사료에 기반한 외교사 연구의 발전과 함께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의 고취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전반부터 중후반까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사회주의 또는 권위주의적 당국체제가 장기간 지속된 역사는 정부행정의 투명성이나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차원의 외교문서 공개나 외교문서집 출판이 중국에서 정착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대륙에서 개혁개방이 심화되고 대만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21세기 중국의 외교문서 관리제도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대만은 당안의 기밀해제와 공개가 민주화의 척도로 인식되면서 당안의 활발한 공개와 국가 규모의 디지털화 사업을 통해 모범적인 수준의 당안 관리 시스템을 구축해가고 있으며, 당안을 역사기록물로서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정부 행정 기관과 역사연구기관이 협력하여 훌륭한 온라인 문서검색 및 열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중국공산당과 국가 수뇌부에서 생산된 외교문서가 소장된 중앙당안관은 개방되지 않고 있으며, 외교부당안관의 경우, 국가와 대중에 함께 복무한다는 명분으로 2000년대 초반 적극적으로 신중국 성립 이후의 외교당안 공개와 외교문서집 출판을 추진하였지만, 2008년 이후 더 이상적극적인 정보공개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급진적인 개방의 반작용으로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수준의 정보 공개 제도를 실시하여 세계적인 추세를 따르려는 움직임과 당과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민감한 정보의 차단과 통제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당안 행정 사이의 과도기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This study set out to summarize the history of managing diplomatic documents and publishing collections of diplomatic documents in China since late Qing and examine the current practice of opening diplomatic documents to the public and publishing collections of diplomatic documents in current mainland China and Taiwan along with the legal grounds and the characteristics of institutional management. The Chinese dynasties placed importance on the management and preservation of records based on the concept of regarding the records of the past as the mirror for the present and future and the tradition of expansive document administration that began in ancient times. This tradition has impacts on the current Chinese system of managing and preserving archives(Dang'an). China began to publish collections of its diplomatic documents or open its diplomatic archives to the public in the latter half of the 19th century when it made full-blown contacts with the West. These practices have changes in the interactions of foreign invasion and political confusion during the Late Qing and Republican Era, the establishment of party-state system by KMT and CCP, domestic political situations including the control of press and information, the vogue of publishing collections of diplomatic documents after World War I, declassified diplomatic documents and their disclosure in the latter half of the 20th century, and global trends such as digitization. In China, the movement of declassifying and publishing diplomatic records according to the global standards led to the achievements of opening the Archive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to the public and publishing diplomatic documents in the early 2000s despite the strong influence of the conservative tradition that has put importance on the block and control of sensitive information for the stabilization of the system or "national interest." This policy is, however, still under the powerful influence of domestic politics. In Taiwan, only limited use of diplomatic archives was allowed under the authoritarian rule of the KMT regime for many years. Since democratization, however, it has been active to declassify the archives, promote their digitization, and open them to the general public online in the social atmosphere of associating information disclosure with "democratization" and "Taiw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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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조기 로마 제국의 대전략

저자 : 차전환 ( Cha Jeon-hwa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5-23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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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러트왁의 분석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 치세까지(31 B.C.~ A.D. 68) 로마 제국의 전략은 제국 전역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기동 타격부대들을 이용하는 한편, 제국 변경 지역의 안전을 유지하는 피호국들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로마 제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군대로 제국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은 속주들에 대한 직접 통치와 피호국들에 대한 간접 통치를 결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 단지 25개 군단(바루스의 재난 이후는 25개 군단)과 군단을 보조한 보조군이 히스파니아에서 시리아와 이집트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의 평화를 확보했다. 로마 황제들은 제국 변경의 피호국들을 동맹으로 관리함으로써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변경의 안전을 효과적으로 확보했으며, 중대한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예비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제국을 침입하는 외적은 우선 피호국의 영토에 침입했으며, 공격받은 피호국은 가능하면 자신의 군대로 적을 물리쳤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로마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 피호국들은 로마 제국의 동맹으로서 기병대, 경무장 보병, 궁수와 궁기병 등을 제공해 보조군을 이루었다. 로마 제국은 피호국 통치자들을 통제하고 부단히 관리했다. 충성스런 피호국 통치자들은 보상으로 보통 로마 시민권을 받았고, 일부는 기사신분을 받았다. 피호 부족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도 프린키파투스 이전부터 계속 사용된 정책이었다. 로마 제국 군대는 군단과 보조군의 역할이 균형을 이룬 다목적 야전군이었지만 고도 밀집전투에서 강점을 지녔다. 병력 집중과 전투의 밀집도가 높아짐에 따라 로마 군대의 전술적 우월이 두드러졌다. 제국 군대는 도시와 같은 고정된 자산을 가진 적에 대해 싸우기 적합하도록 훈련되었고, 자산과 힘의 원천이 집중되지 않은 적에 대한 전투에서는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러트왁이 보기에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이나 파르티아, 아라비아와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족들을 정복하지 않은 것은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According to Luttwak, the grand strategy of the Roman Empire from Augustus to Nero(31 B.C.~ A.D. 68) was to rely on the client states that maintained the security of the Imperial frontiers, while using mobile strike forces strategically located throughout the empire. The Romans were able to keep the safety of the empire with a relatively small army. During this period, the Roman Empire employed a strategy of combining the direct rule over the provinces with the indirect rule over the client states. During the reign of Augustus, only 25 legio (25 after the disaster of Barus) and auxilia that assisted the legio secured the peace of the vast empire stretching from Hispania to Syria and Egypt. The Roman emperors effectively secured the security of the frontiers from outside invasions by managing the client states as allies, and had reserve forces to cope with grave threats. Foreign invaders first invaded the territory of the client states, and the attacked client states defeated the enemy with their own army if possible, and if it was impossible, they were assisted by the Roman army. As allies the client states provided cavalry, light infantry, archers and mounted archers to form auxilia. The Roman Empire controlled and administered the rulers of the client states(tribes) continuously. Loyal rulers of client states usually received Roman citizenship as compensation, with some rulers receiving equestrian order. Granting subsidy to the client tribes has been a constant policy from the time before principate. The Imperial Army was a multi-purpose field forces with a balanced role of legiones and auxilia, but it had an advantage in high-density combat. As the concentration of troops and the density of combat increased, tactical superiority of the Imperial army stood out. The Imperial troops were trained to be fit to fight against the enemy with fixed assets such as city, and it was difficult to exercise their ability in battle against the enemy whose assets and sources of power were not concentrated. In Luttwak's view, it was based on reasonable judgment that the Roman Empire did not conquer the Germanic tribes, Parthia, and nomadic peoples of Arabia and North Af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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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이후 소련의 지도자들은 경제개혁의 일환으로서 정부조직을 대대적으로 재편했다. 1957년 인민경제회의 개혁과 1965년 경제개혁, 이 두 차례에 걸친 구조개혁 과정에서 소련의 경제관리체계는 급격한 변화와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면서 고도화 및 안정화되었다. 기존의 연구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경제관리조직 재편 과정에서 소련의 경제체제 개선에 대한 다양한 전망이 존재했고 이에 대한 논쟁과 재편의 과정도 상당히 역동적이었다. 두 차례의 연이은 경제개혁 조치는 단순한 기업 재편이나 생산 조직 일부를 조정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경제관리구조 전체를 뜯어고치는 작업이었다. 1957년 인민경제회의 개혁은 부서주의의 폐단으로부터 오는 경제 부문간 조정과 협력 문제를 해결하여 생산과 유통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를 위해 경제 부문별 조정을 위해 만들어진 경제부서들을 해체하고 그 관리권한을 경제권역별 인민경제회의로 이관시켰다. 1965년 경제개혁('코시긴 개혁')은 앞선 1957년 개혁의 문제점들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고, 근본적으로는 전후 소련 경제구조 전체의 모순을 관리체계 개혁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바로 부서체계의 재건이었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부서체계로의 재편이 흐루쇼프 시대 개혁 노선으로부터의 전반적 후퇴나 퇴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The soviet authorities have reorganized their own government system as part of economic reforms since the late 1950s. The economic management system of the Soviet Union have undergone drastic change, and then have been advanced and stabilized through these two structural transformations such as the 1957 Economic Councils reform and the 1965 economic reform. Unlike previous studies, there were various visions and arguments about each reform in the soviet authorities and the transformations were very dynamic. These two successive structural reforms were not just simple corporate reorganizations or the partial improvement of production organizations, but works to renovate the entire economic management structure. The 1957 reform aimed to maximize the economic efficiency by clearing obstacles of inter-sector coordination and cooperation caused by departmentalism. The reformers dissolved most of economic ministries in the Soviet Union and transferred their managerial power to newly organized regional economic councils for these goals. The 1965 economic reform was designed because the previous 1957 reform caused many problems. But it was basically an attempt to resolve the fundamental contradictions of the entire Soviet economic structure through the reorganization of economic management system. The most basic task for promoting this reform was the reconstruction of ministries. This does not mean an overall retreat from the reformist agenda in the Khrushchev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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