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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ciety for Korean Historico-Music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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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8)~63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975
한국음악사학보
63권0호(2019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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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월중선이 전승한 열사가의 의미

저자 : 김성혜 ( Kim Seonghye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3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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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가는 일제에 항거했던 여러 열사들의 삶을 소리로 엮은 창작판소리다. 박동실은 해방 이후 열사가 4곡을 작곡하였고, 박동실의 제자 장월중선은 13세 때부터 3~4년 간 스승에게 판소리 심청가와 춘향가를 배웠다. 그리고 박동실의 창작 판소리인 열사가 역시 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장월중선이 전승한 열사가에 대한 조명은 그동안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 장월중선이 박동실에게 열사가를 배운 배경과 장월중선이 소리한 열사가의 음원을 조명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장월중선은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민첩하게 배웠고 배운 소리를 오랫동안 기억하는 천재적인 능력자였다. 그래서 박동실이 열사가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장월중선은 소리를 저장하는 녹음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장월중선은 박동실이 <유관순 열사가>를 작곡하는 과정에서 소리를 배운 제자였다. 그러므로 장월중선의 <유관순 열사가>는 원천적인 성격을 지닌 음원으로서 그 가치와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유관순 열사가>는 완창의 소요 시간이 약 70분으로 열사가 중 가장 긴 소리다. 이처럼 긴 소리의 <유관순 열사가>를 박동실이 작곡할 수 있었던 그 배경에는 바로 장월중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박동실의 이러한 창작 과정은 장월중선에게 향후 창작의 세계로 접어들게 한 동기 부여가 된 데 의미가 있다.
둘째, 장월중선이 소리한 열사가의 음원을 조사한 결과, 장월중선이 30대시절에 가장 선호한 열사가는 <안중근 열사가>였으며,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에 이 소리를 녹음한 사례가 있었으나, 음원은 소실되었다.
셋째, 장월중선이 소리한 현존 유일의 열사가 음원은 그녀가 타계하기 두달 전에 녹음한 <유관순 열사가>이며, 『국악 명가의 후손들』 CD1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1996~1997년 기간에 제자 김수미와 이선숙에게 <유관순 열사가>를 가르칠 때 녹음한 테이프가 현존하는 것을 파악하였다. 전자의 경우 <유관순 열사가> 19개 대목의 소리가 모두 수록된 데 가치가 있으나, 아니리 부분이 다소 결락된 것이 아쉽다.
결국 장월중선이 소리한 열사가 음원은 <유관순 열사가>뿐이다. 장월중선이 창한 <유관순 열사가>를 담고 있는 『국악 명문가의 후손들』 음원은 발행된 지 17년이 지났고 비매품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쉽게구할 수 없다. 그리고 장월중선의 제자인 김수미와 이선숙이 소장하고 있는 장월중선 창 <유관순 열사가> 음원도 모두 개인소장이며, 미공개 자료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향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Yolsaga” 烈士歌 composed by Pak Tong-sil 朴東實 in 1945 right after the Liberation, is a ch'angjak p'ansori 創作판소리 about various patriots who fought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ism. Chang Woljung-son 張月中仙, a student of Pak Tong-sil, had learned “Simch'ongga” 沈淸歌 and “Ch'unhyangga” 春香歌 from him for about 4 years since when she was 13 years old. Although Pak Tong-sil's “Yolsaga” is well known up until now, the version of “Yolsaga” that Chang Woljung-son inherited has not been studied in depth. This study is intended to examine the background in which Chang Woljung-son learned “Yolsaga” and the recorded “Yolsaga” by Chang Woljung-son.
Chang Woljung-son was a prodigy from her childhood. She was quick at learning and could remember so well what she learned that she played a role of recorder while Pak Tong-sil was composing. When Chang Woljung-son was learning from him, Pak Tong-sil was composing “Yu Kwan-sun Yolsaga” 柳寬順 烈士歌. It is not difficult to guess that Chang Woljung-son participated in the process of Pak Tong-sil making the song. Therefore, Chang Woljung-son's “Yu Kwan-sun Yolsaga” has its significance as an original. “Yu Kwan-sun Yolsaga” is the longest p'ansori among the others. If its length is compared with that of others, it is as 3.5 times long as “Yi Chun Yolsaga,” 이준 烈士歌, as 5.8 times long as “An Chung-gŭn Yolsaga” 安重根 烈士歌 and as 4.3 times long as “Yun Pong-gil Yolsaga.” 尹奉吉 烈士歌 It is presumed that Pak Tong-sil was able to compose such a long p'ansori as “Yu Kwan-sun Yolsaga” thanks to the presence of Chang Woljung-son. Pak Tong-sil's composing process, on the other hand, must also have influenced and motivated Chang Woljung-son to compose her own works in her later life.
The recorded songs by Chang Woljung-son were examined. It turned out that Chang Woljung-son's favorite in her 30's was “An Chung-gŭn Yolsaga.” It is said that she recorded the p'ansori either in the late 1950s or the early 1960s, but none of the copies have survived.
The only existing recorded “Yolsaga” by Chang Woljung-son is “Yu Kwan-sun Yolsaga” which she recorded 2 months before she died. It is found on the CD 1 of Descendents of the Prestigious Family for Kugak 『국악 명문가의 후손들』. It is verified that Chang Woljung-son recorded it as she taught “Yu Kwan-sun Yolsaga” to her students, Kim Su-mi and Yi Son-suk, in the years of 1994 and that the record still exists. While it is valuable because it has the 19 parts of “Yu Kwan-sun Yolsaga,” it's a bit disappointing that the aniri 아니리 part is missing.
It has been 17 years since the Descendents of the Prestigious Family for Kugak was released. It wasn't intended for sale. Therefore, it's rarely available to the public. “Yu Kwan-sun Yolsaga” records owned by the students of Chang Woljung-son, Kim Su-mi and Yi Son-suk, are also personal collection. It is hard for the public to have an access to such materials. Given that, it is required to find a way for the public to share those mater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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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국악세계화 담론의 흐름과 전망

저자 : 라예송 ( Ra Ye-song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54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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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전통예술 분야에서 '세계화'는 중요한 담론적 지점이었다. 오늘날도 대중화, 산업화와 함께 대한민국 전통예술정책의 기본방향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국악 혹은 전통음악과 관련한 세계화 논의는 그동안 활발하게 이루어진 듯하지만 실제로는 당위만 지배한 채 그 의미와 함정에 관한 성찰과 비판적 사유는 빈약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 초반부터 오늘날까지 국악세계화 관련 논설들의 흐름을 짚어보면 조금씩 진화해온 궤적을 살필 수 있으며, 오늘날의 세계화 담론에서 공격적인 해외진출이나 국가주의적 자문화 홍보ㆍ보급 차원을 넘어 인류공통의 의제인 문화다양성을 논하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이다. 이제 앞으로의 논의의 발전은 '어떻게 세계화를 할 것인가'의 방안 모색 차원을 넘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의 질문이 전면에 제시될 필요가 있다. 세계화 논의 자체가 국가주의와 국수주의 혹은 제국주의적 욕망에 길들여진 채 현실의 성찰과 반성이 없이 진행되는 현상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의미가 탐색되고 현실이 성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천만이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Globalization has been one of the most actively discussed terms in the disciplines of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since the 1990s, and it is still dealt heavily in contemporary Korea's traditional culture policies. Although there have been lots of arguments about globalization of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introspection of the meanings or risks of the term 'globalization' has been relatively poor.
Nevertheless, there has been the track for evolution in the arguments about globalization since the 1990s, in which cultural diversity has been discussed, besides aggressive overseas expansion to the world market, nationalistic self-culture propagation.It is desirable that 'value' rather than 'duty' should be discussed.
The development of arguments about globalization of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will depend on the issues of 'for what' and 'for who' rather than 'how'. It may be dangerous that globalization arguments would be habituated to nationalism and imperialistic desire. Exploring to 'meaning' and reflecting on 'the real' are inevitable in the discourse of cultural glob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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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미군정기 전통음악 방송의 현황과 의미 재고찰

저자 : 송소라 ( Song So-ra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5-120 (6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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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해방 이후 미군정기 전통음악 방송의 현황을 정리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미군정기는 해방 이후 새로운 민족국가 수립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던 때임에도 미군정의 문화정책 아래 방송 역시 미국식 개편은 물론 내용의 통제와 규제를 받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연예오락프로그램으로서 전통음악 프로그램은 이시기에도 꾸준하게 방송의 영역을 차지해왔다. 일제강점기 새로운 음악의 장르들이 음반과 방송을 통해 유입됨에 따라 전통음악이 점차 해당 영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던 것을 생각할 때, 미군정기 전통음악이 다시 활발하게 방송되고 꾸준히 유지되는 과정은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1945년 11월부터 1948년 12월까지의 전통음악 방송 목록을 당대 간행되었던 다양한 신문 지면을 통해 확인하여 정리하였다. 이는 그간 동아 일보, 조선일보 등의 일부 신문만을 통해 정리해서 제시되었던 자료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수정 보완하였다는 점에서 일차적 의미를 갖는다. 정리한 자료를 토대로 본고는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 미군정기 전통음악 방송의 현황을 검토하였다.① 전통음악 방송이 부활하고 일제강점기의 그것에 비해 나름의 변모를 보이는 1945년, ② 전통음악 방송이 꾸준히 송출되며 교육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새로운 면모를 보이는 1946~47년, ③ 전통음악방송의 부흥과 지속이 이어지는 1948년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본고는 미군정기의 전통음악 방송이 당대 연예 오락의 주요프로그램으로 기능을 하였다는 점, 해방 전후 침체 일변도를 걸어왔던 국악이 재건할 수 있었던 수요 수단으로 기능한 점을 통해 미군정기 전통음악방송의 의미를 말하였다. 본고는 그간 전통음악 방송(국악방송)의 침체기이자 이후 그것의 쇠락 시작점으로 평가되어 온 미군정기 전통음악 방송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이루어져야 하며, 더불어 우리 전통음악 방송을 바라보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이 확립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ummarize the status of Korean traditional music broadcasting in the U.S. military era after liberation and to examine its implications.
Although the U.S. military era was more intense than ever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 rule, broadcasting was also controlled and regulated by the U.S. under the cultural policy of U.S. military justice. Nevertheless, traditional Korean music programs as entertainment programs have consistently occupied the realm of broadcasting during this period.
Considering the fact that Korean traditional music gradually decreased in the area as new music genres were introduced through records and broadcasting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process in which Korean traditional music of the U.S. military era was broadcasted and maintained steadily was noticed. There is a need. In this paper, a list of Korean traditional music broadcasts from November 1945 to December 1948 was identified and compiled through various newspapers. This is meaningful in that the existing data, which was presented only through some newspapers such as Tong-A Ilbo 『東亞日報』(Tong-A daily newspaper) and Choson Ilbo 『朝鮮日報』 (Choson daily newspaper), were reviewed in full and revised
Based on the collected data, this paper is divided into the following three periods to examine the current status of Korean traditional music broadcasting in the U.S. military era. ① In 1945, when Korean traditional music broadcasting was revived and its appearance was changed compared to that of Japanese colonial rule. ② In 1946~47, when Korean traditional music broadcasting was continuously sent out and new educational programs were established. ③ Revival and continuation of Korean traditional music broadcasting. This is followed by 1948.
Lastly, this paper shows that Korean traditional music broadcasting in the U.S. military era regularly functioned as the main program of entertainment in the contemporary period, and that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broadcasts that had played a major role in reconstructing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that had been in the recession before and after liberation said the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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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50년대 민족주의 담론과 전통음악 -제1공화국 시기를 중심으로-

저자 : 신혜주 ( Hye-ju Shin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1-15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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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은 해방과 전쟁, 국가의 재건 등이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 시기로, 이 안에서 국가는 국가의 정통성과 당위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국가 기조 속에서 전통음악예술은, 민족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반드시 취득해야할 상징성을 가졌으며, 이는 전통음악예술을 국가기관으로 소속시키고, 제도적 차원의 전승체제를 유지시키려는 모습으로 발현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국가기관으로 소속되어 개원한 국립국악원(구. 구왕국아악부)은 다양한 국가주도행사에 동원되어 활동하였으며, 전통음악과 관련한 사설 단체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인 전승체계 속에서 신국악에 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보여진 신국악은 김기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전반적인 내용에 있어 1950년대 국가 기조에 부합하는 반공주의, 민족주의적 색채가 다수 나타남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부적 움직임과는 상반되게 당시 국가의 문화예술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에 대한 우상화 작업과 전시체제의 분위기를 강화하기 위한 것에 주력되어 있어 그 사용범위가 매우 소략함을 검토할 수 있었다. 또한 국가기관으로 소속시켜 민족의 음악을 보존시키려 한다는 설립 취지와는 달리 실질적 지원은 열악한 상황이었던 것 역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당시 정부는 국가의 전통 획득을 위한 다양한 방식 중 하나로 전통음악을 차용하였을 뿐 전통음악에 대한 이해도나 그것을 활용하고 보존하려는 방안은 오히려 부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During the First Republic, a period when the liberation, war, and reconstruction of the nation took place in a short period of time, the nation strived continuously to seek its authenticity and legitimacy. On these basis of the country, the traditional music arts had symbolic significance that must be acquired in terms of the national culture. This can be seen as a way of attaching the traditional music to the state institute and maintaining transmission system at an institutional level.
In such process, the present National Gugak [Kugak] Center called Kungnip Kugagwon 國立國樂院 (formerly known as Kuwanggung aakpu 舊王宮雅樂部), which was established as a national institute, was mobilized for various national events and was making a move toward a 'New Gugak [Kugak]' 新國樂 in a relatively stable transmission system compared to other related private institutions. It is found that the 'New Gugak [Kugak]' driven by the present National Gugak [Kugak] Center was led by Kim Ki-su 金琪洙 and its overall contents were mainly about anti-communist and nationalism that matched the national tone of the 1950s. In contradistinction to the internal activities, however, the culture and arts of the country were focused on idolizing then-President Syngman Rhee [Yi Sŭng-man 李承晩] and intensifying the atmosphere of wartime showing that the scope of its use was very small. In addition, unlike the purpose of its establishment which was to preserve the traditional music as a national organization, it was found that there were no sufficient support from the government.
Eventually, it has shown that the government had just borrowed the traditional music as one of methods to acquire the tradition of the nation without having understanding of the traditional music nor plan to preserve and utilize the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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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해방공간기 구왕궁아악부의 활동 고찰

저자 : 이수정 ( Lee Su-jeong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1-18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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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음악계에서는 국가재건에 동참하고자 단체를 결성하였으며 민족음악의 수립을 음악적 지향점으로 삼고, 일본 제국주의 잔재 음악 소탕과 봉건적 문화요소와 잔재, 특권계급 문화 청산 등을 선결 과제로 삼았다. 해방공간기 치열했던 민족음악 논의 중 구왕궁아악부 관련 자료와 담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당시 구왕궁아악부는 해방공간 민족음악론의 방향성과 대척점에 서 있었다. 아악부의 음악적 기반인 궁중음악은 봉건주의 특권계급의 음악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일본 궁내성에 복무하는 음악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일제 잔재라는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구왕궁아악부는 해방공간 3년의 짧은 기간 동안 생존을 위해 상당히 치열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시조강습, 관변음악 연주, 행사연주, 연구회 조직 및 국영안 통과 등 전방위적으로 활약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해방공간기 구왕궁아악부-대한민국 국립국악원'으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였다.
결국 구왕궁아악부는 일제강점기에 해왔던 관행 그대로 음악을 유지하여, 음악구성, 무대구성, 악기배치 등을 현대국악계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었다. 구왕궁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안착하여 주류음악의 중심이 됨으로써, 이왕직아악부 전승음악에 대해 한번도 비판이나 점검하지 못한 채 현대국악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왕직아악부가 일제강점기 폭행의 시대를 견디고 전통음악을 지켜온 공로가 있음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음악적인 측면에서 비판과 검토의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Following the liberation, the country's music community formed its organization to join the nation rebuilding. With the aim of establishing the national music called minjok ŭmak 民族音樂, they chose as their prerequisites the elimination of all remnants of the Japanese imperialism, the clearing of feudalistic elements of the culture, and the liquidation of the culture of the privileged class.
This paper focuses its study on the Royal Music Institute of the Yi Household known as Kuwanggung aakpu 舊王宮雅樂部, of all the intense national music debates during the post-liberation era. The Royal Music Institute of the Yi Household stands opposite to the directionality of the national music theory. The court music of the Royal Music Institute is the music for the feudalistic privileged class. Also, the Royal Music Institute is not free from the charge that it belonged to remnants of the Japanese imperialism, as it engaged in musical activities while serving the Japanese General Government 朝鮮總督府 in Korea and the Imperial Household Office 宮內省 in Japan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The Royal Music Institute of the Yi Household engaged in intensive activities for its survival for the short 3 post-liberation years. It engaged in various operations including the sijo 時調 lessons, the court music performance, organization of the research society, and the passing of the bill for the state running of the organization. the Royal Music Institute of the Yi Household incessantly urged the nation to acknowledge its credit for keeping the ancient tradition by relying on the historical legacy, in its effort to cope with the move to purge feudalism and the remnants of the Japanese imperialism. Owing to such activities, the Royal Music Institute of the Yi Household transitioned to the Royal Music Institute of the Yi Household during the post-liberation era and then to the National Gugak Center, thus successfully serving as the bridge that connected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and the Republic of Korea.
After all, the Royal Music Institute of the Yi Household stuck to the music that it practice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thus carrying the format of its music, stage plan, and the arrangement of musical instruments etc. to the modern-day kugak community in the name of tradition. As the Royal Conservatory of the Yi Household called 李王職雅樂部 as the National Gugak [Kugak] Center called Kungnip Kugwon 國立國樂院 and thereby took the Center of the mainstream music, the music carried over from the Royal Music Institute of the Yi Household (舊王宮雅樂部) is used in the modern-day kugak community with neither criticism nor inspection performed on it. While due credit should be acknowledged for the role that the Royal Music Institute of the Yi Household kept the traditional music while brooking the violence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it seems necessary to get its music itself to undergo a crit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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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제강점기 조선음악과 민족담론

저자 : 전지영 ( Jeon Jiyoung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5-202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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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일제강점기는 전통예술에 있어 민족주의 차원 시련극복의 시대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그 시대를 이들의 활동을 정리할 때 민족문화의 수호자나 민족정체성을 위한 투사로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민족주의 의식은 일제강점기보다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 보다 강화되고 구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 일제강점기에 대한 기억은 민족주의 투쟁사의 차원으로 새롭게 '구성'되고 구축되었으며, 그 구성과 구축의 기획은 국민국가 수립 정당성과 구획된 국가공동체 의식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 조선음악 활동은 '민족문화를 위한 저항적 활동'으로 재해석되었으며, 그것은 일종의 국가에 의한 이념적 '발명'작업임과 동시에 지배질서를 위한 기억재편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 영향은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지금도 '국악을 하는 것이 곧 민족의 역사와 정통성을 수호하는 일'이라는 논리적 연결고리가 없는 이데올로기 단층이 공고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1910-1945) has been remembered as an era of overcoming ethnic national hardships, and we would like to understand that period musicians as the 'national culture defenders' or fighters for national identity. However, this kind of nationalism had been intensified after independence and government formation, rather than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The memories of Japanese occupation period had been restructured and reinterpreted as a perspective of nationalistic liberation, the aim of which was justification of government formation and ethnic community spirit uplift.
It was a kind of invention of tradition, which was the history of reorganizing memories for ideological nationalism. In consequence, there is a cultural custom that traditional music play itself should be a task for protecting national history and identity, which might be an ideological fault lacking of logical valid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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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북한 민족음악의 실제 : 『조선민요의 조식체계』와 『조선민요조식과 민족전통화성』을 중심으로

저자 : 천현식 ( Chon Hyon-sik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3-24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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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의 '민족음악'은 사회주의 음악관에 따라 민족적 형식이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시대의 요구와 사명이 요구하는 민족 현실의 반영이라는 내용성에 무게를 두면서 그 외연을 확대했다. 이는 남북 경쟁과 주위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속에서 체제유지와 함께 국가 발전을 추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의 현실에 주목하는 '대중성'을 열쇠로 해서 전래이자 과거인 '민족성'과 외래이자 현재인 '현대성'을 통합시켜내는 방식으로 민족음악을 구성해 갔다. 그런 점에서 북측의 민족음악은 '전통-서양-대중'의 구분이 아닌 장르 통합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며 외래음악과의 관계에 민감하고 유연한 자세를 취해왔던 것이다.
그러한 민족음악의 실제 모습을 구체적인 형태, 『조선민요의 조식체계』와 『조선민요조식과 민족전통화성』이라는 책으로 살펴보았다. 민족성에 대한 주목은 사회주의 국가 일반의 특성인 인민성과 연결시킴으로써 '인민음악'으로서 민요에 주목했으며, 또한 인민음악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민족음악의 유산으로서 지배계급의 음악인 궁중음악까지 새로운 민족음악의 원천으로 삼아 왔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성에 대한 주목은 대조소조 체계의 서양 근현대 조성음악과의 교섭과 통합, 나아가 독자적 발전을 지향하기 위해 평조계면조의 우리나라 조성음악체계를 이론화, 체계화하는 일에 집중했다. 이는 과거에서부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체현되어 있는 전래음악의 기호와 서양을 중심으로 획득한 근래 외래음악의 현재적 기호를 인정하고 그를 발판으로 삼고자 '대중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North Korea's minjok ŭmak 民族音樂 (ethnic music) emphasized the content and meaning of the songs, and broke the constrictions of nationalistic traits, which was a socialist view of music. The simultaneous pursuit of national development and regime maintenance, while competing with South Korea, and tensions with superpowers led to the formation of these characteristics. Minjok ŭmak comprises popularity, which focuses on the realities of the present times; nationality, which reflects traditions and the past; and modernity, which represents external inputs and the present. In that sense, minjok ŭmak was flexible and maintained sensitivity toward the influences of external input, and also integrated genres rather than categorizing them into a certain style (i.e., traditional, Western or popular).
Considering these characteristics, this paper studied the practice of North Korea's minjok ŭmak using tangible structures, which were the National Traditional Harmony and Choson Minyo Chosik (『조선민요조식과 민족전통화성』), and the Chosik System of Choson Minyo (『조선민요의 조식체계』). The emphasis on minyo was in connection to its role in being 'the people's music,' in line with the North's heavy focus on nationalism as a concept linked to 'the people,' a general feature of socialist countries. Minjok ŭmak is at its core 'people's music,' but it embraced court music, which was a musical form of the ruling class, viewing it as a legacy of minjok ŭmak. North Korea's focus on nationalism led to interaction with modern, contemporary western tonal music based on major and minor scales. It also concentrated its efforts to theorize and institutionalize Korea's tonal music system, which was based on p'yongjo 平調 and kyemyonjo 界面調, to achieve independent development. North Korea's minjok ŭmak focused on popularity as grounds to acknowledge and utilize modern music symbols from external influence as a foundation as well as using the traditional music symbols which were intrinsic to Koreans handed down histor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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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한겨레음악대사전』(2012)의 보유(補遺)(Ⅲ)

저자 : 宋芳松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83-31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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