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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ciety for Korean Historico-Music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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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8)~62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966
한국음악사학보
62권0호(2019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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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윤덕 명인의 음악활동에 관한 연구 -해방이후를 중심으로-

저자 : 권은경 ( Kwon Un-gyong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2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58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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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金允德, 1918~1978)은 1968년 51세의 나이에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23호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명인이다. 전라북도 정읍(井邑) 태생인 그는 어려서 농업에 종사하며 정읍지역 명인이었던 김광석(金光錫)에게 가야금풍류를, 김용근(金容根)에거 거문고를 사사했다. 전문적인 교육자이자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5년경(28세)으로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 활동시작 시기가 늦은 편이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부산으로 피란해 여성국악동호회(女性國樂同好會)의 햇님창극단 교사이자 강습자로 정남희(丁南希)·한갑득(韓甲得)에게 가야금과 거문고를 사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휴전 후 상경하여 라디오방송에도 출연하였다. 1953년 3월에는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의 예술사(藝術士)로 합격하여 1961년까지 약 8년간 심상건(沈相健) 명인과 함께 재직하였다.
1960년대 대학교에 국악과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 덕성여대·서울대·서라벌예대 등에 출강하였고,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에서도 일반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예술부장으로도 활동한 기록에서 그의 교육자적 면모를 살필 수 있었다. 동시대 같은 분야의 무형문화재였던 성금연(成錦鳶)과 비교해보았을 때, 성금연도 교육자로서 활동한 바 있으나 자신의 연주활동에서 더 비중이 있었던 반면, 김윤덕은 비교적 교육자로서 비중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연주활동에 있어서도 그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창단멤버로 참여하였고, 해외로 전통예술을 알리던 1970년 전후 연주자로서의 김윤덕은 정부에서 해외로 파견하는 한국민속예술단(韓國民俗藝術團)의 일원으로 멕시코와 유럽, 일본(2회)에 거쳐 순회했고, 이의 성공적인 성과로 정부의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 표창을 받았으며 김소희(金素姬)·성금연과 함께 미국순회공연 등을 하였다.
이렇듯 연주자이자 교육자로 활발히 활동하던 김윤덕은 가야금산조 무형문화재인 것에 비해 거문고 연주자로 활동한 기록도 많다. 그는 자신의 음악 토양인 정읍풍류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점, 설장구에도 능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연주자보다는 전통음악에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으로 평할 수 있다. 이런 그가 2년간의 간암 투병 끝에 1978년 숨을 거두면서 30여년간의 음악활동을 갑작스레 끝마치게 되는데, 동시대 명인인 성금연도 비슷한 시기 이민으로 떠나 남한에 없어 가야금산조의 전승이 다시금 어려워지게 되었다.


Kim Yun-dok(金允德 1918~1978) is one of the 23rd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kayagum sanjo 伽倻琴散調 and kayagum pyongch'ang 伽倻琴倂唱. He was born in Chongup 井邑, North Cholla province 全羅北道 and engaged in agriculture during most of his 20's. But he was also learned from Kim Kwang-sok 金光錫(kayagum) and Kim, Yong-gun 金容根(komun'go 거문고) during his 20's.
In 1945 he started activity as a professional music player, in Seoul. However, the Korean War was broken in 1950, so he escaped to Pusan 釜山. During the evacuation he may had learned from the Chong Nam-hui 丁南希(kayagum) and Han Kap-tuk 韓甲得(komun'go) within Haennim Ch'angguktan 햇님창극단 and also taught the komun'go and kayagum to students. After the Korean War, he came back to Seoul and he became a member of the National Center for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國立國樂院(present, the National Gugak Center) in March, 1953. But he resigned in 1961 for the New Public Service Regulations.
In the 1960s, the department of Korean music was created in universities like Seoul National University, Toksong 德成 Womens University and Sorabol 徐羅伐 Arts School. So, Kim taught the students in those universities and also taught in personally at his music research center. Moreover, Kim was a teacher as an art director at School of Korean Traditional Arts(國樂藝術學校). Inferred of these records, Kim was not only a good performer but also an excellent teacher.
In 1968, the Overseas Folk Arts Troupe sent to Mexico for the Olympic and in 1971 to Europe also. Kim joined these groups and received the commendation two times from the Ministry of Public Cultural Affairs 文化公報部 after the tour. Additionally, he also participated in America Tour Team in personally with Kim So-Hui 金素姬 and Song Kum-ryon 成錦鳶.
Despite of these musical activities, he was died in 1978 because of cancer, suddenly. His lost was so regrettable to modern history of kayagum sa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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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조제요(時調提要)』에 나타난 영제시조(嶺制時調)의 상하행(上下行) 선율(旋律) 유형(類型)에 대한 분석(分析)

저자 : 김경배 ( Kim Kyong-pae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2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9-10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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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현재 영남지방에서 불려지고 있는 영제시조(嶺制時調)의 선율적인 특징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유일하게 남아있는 『時調提要』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시조는 정가(正歌)에 속하는 노래이면서도 가곡(歌曲)처럼 일관되게 전승되지 못하고 있어 논란의 여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각 지방 특유의 토리에서 오는 언어적인 면을 가리킬수 있을 것이다. 영제(嶺制)는 씩씩하면서도 강하고 우렁차 옛 선비들의 인격수양의 방편으로 꼽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속칭 '영판'(嶺板)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어져 왔다.
송하(松下) 김영도(金榮燾)와 일관(一觀) 이기능(李基綾) 공편의 『時調提要』가 전해짐으로써 영제시조의 전통성에 보다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행 불려지고 있는 영제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고 근거도 확실하지 않은 자의적인 해석으로 영제시조의 근간을 흔들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악보의 분석을 통하여 영제시조에 보다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삼고자 하였다. 아울러 조선왕조 말 영제시조의 3대 명창 중 일인이였던 고영태(高永泰)와 근세 영제시조의 명인이었던 이계석(李啓鍚)의 실제 녹음자료는 영제시조의 전모를 밝혀내는데 근거가 되었다.
시조창(時調唱)은 3음음계 중심의 노래라고 한다. 그렇지만 '仲'음과 '黃'음의 4도 관계 음 진행이 주도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이면에 숨겨진 시김새 처리와 선율의 다양성을 가려내는 점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따라 본고에서는 『時調提要』 중 평시조(平時調)의 골격을 이루는 선율의 유형별 특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時調提要』의 평시조 10곡을 선별하여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4도 진행시 가장 많은 출현 빈도수를 나타내는 선율형에는 仲음에서 黃음으로 4도 도약진행하는 선율형을 들 수 있다. 이 진행의 특이점은 곧바로 하행하는 선율형이 아니라, 仲음으로 지속하다가 하행 직전에 약간 밀어 蕤(林)음을 짚고 이어 黃음으로 떨어지기 직전 㑣(㑲)음을 속히 짚으면서 黃음으로 도약 진행하는 선율형이다. 고영태 명인이 부른 '녹양천만 산들' 및 이계석 명인의 '태산이 평지토록' 역시 유사한 선율형으로 가장 많은 분포도를 나타낸다.
이와 동일한 4도 하행진행이면서도 바로 도약진행을 하지 않고 미끄러지듯 경과음을 짚어가며 하행하는 순차진행형을 들 수 있다. 출현음은 仲→姑→夾→太→黃음이며, 이 중 선율형에 따라 몇 음만을 차용한다.
지금까지의 4도 하행진행형과는 반대로 黃음에서 仲음으로 4도 상행하는 진행형을 들 수 있다. 역시 평시조의 골격을 이루는 선율형이다. 黃음에서 仲음으로 상행하기 앞서 약간 낮은 㑲(㒇)음을 빠르게 짚은 다음 4도 상행하는 유형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상행하는 선율형도 있으나 출현 빈도수에서 극히 적은 숫자를 나타낸다.
이로써 현행 불려지고 있는 영제시조의 바른 전통성을 지켜내기 위한 방법으로 시조내면에 담겨져 있는 선율구조와 선율진행에 수반되는 유형별특이점을 알아보았다. 『時調提要』 의 문헌적 가치에 대해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This paper aimed to examine the melodic characteristics of Yongje sijo 嶺制時調 (sijo of Kyongsang province) sung in Yongnam 嶺南 regions, focusing on the only remaining music score, Sijo cheyo 『時調提要』. Though it is a song belong to chongga 正歌 (lit. authentic vocal song, i.e. classical songs), there are controversies about sijo 時調 (short lyric song) because it could not be handed down consistently like kagok 歌曲(longl lyric song). One of the greatest reasons may be linguistic aspects originated from t'ori 토리 (regional musical characteristic) peculiar to each region. Yongje 嶺制 (style of Kyongsang province) is vigorous, powerful and loud. So it has been mentioned as means of cultivating the personality by old scholars, often commonly nicknamed Yongp'an 嶺板 at some regions.
Afterward, the Sijo cheyo 『時調提要』, co-edited by Songha 松下 Kim Yong-do 金榮燾 and Ilgwan 一觀 Yi Ki-nung 李基綾 allowed us to have an opportunity to approach the traditionality of Yongje sijo. However, there is a lot of controversies about the present Yongje and arbitrary interpretation with indefinite evidence disturbs the foundation of Yongje sijo. Hence, this study aimed to prepare a pathway for approaching Yongje sijo through the analysis of the score which remains only now. Furthermore, it was possible to establish a basis for revealing the whole story of Yongje sijo through a music recording of Ko Yong-t'ae 高永泰, one of three master singers at the end of the Choson Dynasty and Yi Kye-sok 李啓錫, a master of modern Yongje sijo.
Even though sijoch'ang 時調唱(sijo singing) is a trichord-centered song, perfect 4th degree between 'chung' 仲 and 'hwang' 黃 pitch play a leading role. Therefore, a priority should be put on identifying processing of hidden sigimse 시김새(refined vocal technique) and variety of melodies. Accordingly, this paper investigated the categorical characteristics of melodies that form a basis of p'yong sijo 平時調(standard sijo) in the Sijo cheyo.
As a result of selecting and analyzing 10 pieces of p'yong sijo from the Sijo cheyo, the ascending 4th degree, from chung to hwang pitch, appeared most. This motion has a unique point of continuing as pitch chung and sounding yu 㽔(im 林) by a little push immediately before downward motion, and also rapidly sounding lower im 㣩 (lower nam 㑲)' immediately before fall to pitch hwang for disjunct motion to pitch hwang rather than straight downward motion. The song “Nogyang Ch'onmansandŭl” 녹양 천만산들(Though blue willow has ten million branches), sung by Ko Yong-t'ae and “T'aesani p'yongjit'orok” 태산이 평지토록(Till a high mountain becomes a plain), sung by Yi Kye-sok also show a similar melody type that were appeared most.
Besides, there is the conjunct motion which sounds a passing tone slipperily without instant disjunct motion, nonetheless it is the same 4th degree downward motion. Pitches appeared include chung 仲→ko 姑→hyop 夾→t'ae 太→hwang 黃 and only some pitches are borrowed according to melody types.
Contrary to the 4th degree downward, there is the 4th degree upward motion from the pitch hwang to chung. It moves 4th degree upward, sounding a little lower nam 㑲(lower mu 㒇) pitch quickly before ascending from hwang to chung pitch. There is an ascending melody without such procedures above, but it appeared extremely few.
The paper examined melodic structures of sijo and unique characteristics accompanied by melodic procession to preserve the traditionality of Yongje sijo sung today. It is expected to provide a lot of suggestions for values of the Sijo cheyo as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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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전지역 독경의 음악 특징 재론

저자 : 라예송 ( Ra Ye-song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2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1-12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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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大田)의 앉은굿 무가(巫歌)는 신석봉 법사와 송선자 보살의 독경(讀經)으로 대표된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신석봉 법사의 독경은 메나리토리로, 송선자 보살의 독경은 이른바 북부경토리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실제 신석봉 법사와 송선자 보살의 독경은 이와 같은 기존 연구결과와는 다른 음악특징을 갖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독경음악은 모두 메나리토리가 강하면서 동시에 육자배기토리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대전지역 독경의 음악특징에 대한 근본적 재론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There are two shaman masters of anjun'gut 앉은굿, literally meaning the seating rites of shaman, shaman sculptures chanting called tokkyong 讀經, Sin Sok-pong 신 석봉 and Song Son-ja 송선자, who hold the title of Taejon 大田(Daejeon) Metrop olitan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The music of them has been regarded as the me nari t'ori 메나리토리(musical style of Kyongsang province), and the anjun'gut musi cal and cultural range of Taejon has been considerd as a part of menari t'ori range. Besides, Song Son-ja's music of shamanist chants has been regarded as the northern kyongt'ori 京토리(musical style of Seoul).
However, the actual characteristics of their music of chanting sculptures are differe nt from the arguments of previous research reports. They have the musical features of yukchabaegi t'ori 육자배기토리(musical style of Cholla province) as well as mena ri t'ori, though the features of menari t'ori are superior to those of yukchabaegi t'ori. Therefore, it is obviously false that the anjun'gut musical and cultural range of Taejo n has been considerd as a part of menari t'ori range, and Song Son-ja's music of sha manist chants has been regarded as the northern kyongt'ori.
The false arguments of previous research reports was based upon false transcription s of melodies and rhythms. It is inevitable that we should rethink the musical charac - teristics of shamanist sculptures chanting in anjun-kut of Taej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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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전기와 명나라 여악(女樂)의 비교 고찰

저자 : 박은옥 ( Piao Enyu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2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7-16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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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악(女樂)은 악·가·무(樂·歌·舞)에 종사하는 여성집단과 이들의 공연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며, 음악사에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이 여성들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음악·문화·풍습 등 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등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여성공연자는 천민의 무리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여악도 예(禮)에 맞지 않는다는 것과 풍기문란 등의 이유로 인해 여러 번의 폐지론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에서는 매우 오래기간 동안 여악이 존속했고, 두 나라의 음악예술에 있어 결코 빠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여악에 대하여 각각의 발전과정·기능·복식·선발과 교육·사회적 지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음악예술 영역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두 나라 여악의 비교연구는 아직까지도 전무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과 중국의 여악이 어떠한 이동점(異同点)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규명하기 위해 본 논문의 주제로 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한·중 여악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으며, 금번의 연구에서 이들을 모두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이유로 본 논문에서 조선전기와 명나라의 시대로 한정하여 두 나라의 여악을 조사·비교하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는 먼저 조선전기와 명나라의 음악기관을 조사하고, 행정관리와 악인(樂人), 여악을 담당하는 기관의 직능 및 용도 등을 살펴보면서 여악의 관리 상황을 파악하려고 한다.


Yoak 女樂(female entertainer) is a broad concept that includes female musicians who play the musical instruments, singing and dance and their performances. It hold s impor- tant significance in the music history. These women, with their special social position, affected not only the musical, cultural and customary fields, but also politi cs and diplomacy. However, up until the period of Choson 朝鮮 Dynasty, female m usicians were regarded as the people of the lowest class. In addition, as a result of the widespread notion that the yoak was against the proprieties and corrupted public morals, abolition of the yoak was advocated several times. The situation was the sam e in China.
However, the yoak continued to exist for a very long time in Korea and China, and it is a very important part of music and art history in two countries. In Korea and China, the development process, functions, costumes, selection and training and social position of the yoak have been studied in various aspects. Nevertheless, a com parative study of the yoak in two countries where it formed an important part of the musical and artistic field has not yet been conducted.
Accordingly, with an interest in verifying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of the yoak between Korea and China, the yoak in two countries was chosen as the subject to this study. However, as is well known, the yoak in Korea and China has an extremel y long history and it can not be comprehensively addressed in this study. For this reason, this study focused on the comparison of the yoak in the early Choson Dynast y and Ming 明 Dynasty. Therefore, in this study, musical institutions in the early Choson Dynasty and Ming Dynasty were examined first, followed by the functions an d uses of the institutions in charge of administration as well as management of agin 樂人(male musician), and the yoak, in order to understand the details of the yoak man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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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제주 민요 음조직에 대한 연구 검토 및 제언

저자 : 신은주 ( Shin Eun-joo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2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9-20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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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요에 대한 음악적 연구, 특히 음조직(音組織)과 관련된 연구는 1971년 나운영(羅運榮)의 “제주도민요의 작곡학적 연구: 음악구조를 중심으로”를 필두로 하여, 이후 조영배(趙泳培)를 중심으로 몇몇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간의 오랜 연구에도 불구하고, 제주민요의 음조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고, 학계에 공통의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간의 제주민요의 음조직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 종지음(終止音)을 매우 중요하게 파악하여 도(do)종지·레(re)종지·미(mi)종지·솔(sol)종지·라(la)종지의 모든 음구조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초창기 나운영의 연구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변화없이 이어졌으며, 조영배에 이르어 선율의 골격으로 주음과 핵음에 의한 핵구조가 더하여졌다. 그러나 종지음을 기준으로 모든 음구조를 제시하는 방법으로는 제주민요 특유의 음조직을 밝히기 어렵다. 이보형(李輔亨)은 중요음 구성틀에 의해 제주민요의 토리 유형을 제시하며 이전의 논의들과 구별되나, 육지 토리에 맞추어 제주민요를 바라보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이제, 그간의 논의들을 바탕으로 제주민요의 음악적 특성에 대해 보다 진일보한 결과물이 나올때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진일보한 결과물은 종지음을 기준으로 한 음구조의 나열이 아닌, 선율의 골격이나 시김 또는 제주도 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함을 가려내기 위한 시도일 것이다.
선행연구를 통해 발견된 제주민요의 독특함은 육지의 민요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도·레·미·솔·라'로 구성되는 음조직을 꼽을 수 있다. 도선법(do旋法)은 “밭밟는소리”·“마당질소리”·“흙덩이부수는소리”·“써레질소리” 등상당수의 제주민요에서 사용되는 음조직이며,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선법이다. 그렇기는 하되, 한국의 육지 지역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선법으로 제주지역의 향토민요에서만 두드러지는 특징적인 음구조이기 때문이다. 또한 종지음이 주 사용 음역의 기음(基音) 혹은 기음 4도 위의 음이 아니라, 기음부터 음을 나열하였을 때 제2음과 제4음이 주골격을 이루는 형태도 제주민요에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이다. 선율 특징으로는 비교적 넓은 음역에서 소리하며 고음으로 소리를 시작하여 점차 하행하다가, 한 음(종지음)을 중심으로 선율이 평행을 이루다가 종지하는 선율형 또한 특징적이라 하겠다.
즉 그간 제주민요의 음조직에 대해서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어업과 관련된 일노래가 많다”, “어느 한 가지 선법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서울 경기지방 민요의 토리와 유사한 점이 많다”, “순차적인 가락의 진행과 제주 특유의 사투리가 특징이다”와 같은 애매한 설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화시키면 어떨까 제안한다.
“다양한 선법이 사용되되 육지 민요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도·레·미·솔·라'의 음조직이 사용되고, 주로 최고음으로 시작하여 하행하는 선율구조를 가지며, 향토민요의 경우에도 음역이 비교적 넓어 한 곡 안에서도 다양한 선율구조를 갖는 경우가 많다.”


Musical studies of the Cheju 濟州 folk songs, in particular studies regarding the mode, have been carried out by some scholars started by Na Un-yong 羅運榮 in 1977 with his thesis and led by Cho Yong-pae 趙泳培. However, despite the studie s of many decades, the modes of the Cheju folk songs have not been clearly arranged and no common consent has been made in the academic world.
In this regard, this study inquires into the modes of the Cheju folk songs which have been discussed until now. As a result, the modes of the Cheju folk songs turne d out to have various forms. Dividing the modes according to the ending-note, a vari ety of structures can be used including Do ending-note, Re ending-note, Mi ending-n ote, Sol ending-note and La ending-note. Even in the music pieces using the same keynote, the main range presents variety. Also, the frame based on the mainly used note is diversified as well. For this reason, it is very difficult to put the modes of the Cheju folk songs in order in a brief manner. Nonetheless, native folk songs in the inland area also use a variety of modes known as t'ori 토리, and sometimes more than two modes(t'ori) are mixed and used in the modified form. Considering this, it is a natural consequence that many modes are used in the Cheju folk songs.
Admitting that many different modes are used in the Cheju folk songs, what are the modes representing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Cheju Island then· The modes comprised of 'do·re·mi·sol·la,' which are not presented in the folk songs of the inland areas of Korea, can be considered the uniqueness of the Cheju folk songs. This form of modes is utilized in many Cheju folk songs. Moreover, it is because this is the characteristics of the mode standing out only in the native Cheju folk songs, tho ugh it is the mode widely known to the world but hardly used in the inland areas of Korea.
In other words, no clear proposals have been made regarding the modes of the Ch eju folk songs and there have been some ambiguous explanations such as “there are many songs related to fishery,” “there is no noticeable representative mode,” “they ar e very similar to the modes(t'ori) of the folk songs of Seoul and Kyonggi region,” an d “they are characterized by the progress of consecutive tunes and distinct dialect of Cheju Island.” However, stepping further beyond such explanations, this study intend s to propose some concepts to materialize the features.
“While a variety of modes are used, the Cheju folk songs use the modes of 'do·r e·mi·sol·la,' which are not used in the inland folk songs. In general, the tune structure starts with the highest note and gradually descends. The native folk songs often have a structure of diverse modes even in the same music due to the relatively wide range of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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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현행 낙양춘의 형성과정 연구

저자 : 오비로 ( Oh Beero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2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7-258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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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춘”(洛陽春)은 현전하는 유이한 당악곡(唐樂曲)이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송(宋)나라의 사악(詞樂)으로 고려 때 전해져 전승과정 속에서 변하여 현재에 이른다”는 등의 구체성이 없는 서술을 사용한다. 본고에서는 그 “낙양춘”의 형성과정이 어떠한 지를 설명코자 “낙양춘”의 선율이 전하는 모든 문헌(악보)들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본격적인 형성과정 이전에 고악보들의 시기 순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악장요람』(樂章要覽)의 점(·)단락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래서 점(·)이 '대금(大笒)의 숨구'임을 앎과 동시에 『樂章要覽』의 “낙양춘”이 1음1박이 아니라, 각기 고유한 시가를 지닌 음악이며, 이것이 『속악원보』(俗樂源譜) 권4의 “낙양춘”과 동일한 음악임을 알았다. 이를 통하여 『樂章要覽』(순조)―『俗樂源譜』 권4(고종)―『俗樂源譜』 권6(일제강점기)의 순서임을 알게 되었다.
형성과정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악곡명의 변화는 『樂章要覽』·『俗樂源譜』 권4 및 권6 모두 “낙양춘”이라고 쓰고 있으나, 『아악부악보』(雅樂部樂譜)·『아악생교과철』(雅樂生敎科綴)·『이왕직아악부오선악보』(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는 “기수영창지곡”(其壽永昌之曲: 일명 “기수영창”)으로 바뀌고, 부수적으로 괄호 속에 (“낙양춘”)이라고 쓰거나 아예 쓰지 않는 형태로 변하였다. 해방 이후 1970년대에도 “낙양춘”을 표기했으나, 여전히 “기수영창지곡”을 원제(原題), “낙양춘”을 부제(副題)로 표기했고, 2007년부터 “낙양춘”을 원제, “기수영창”을 부제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악기편성은 악보를 통하여 나타난 것들만 다뤘다. 『俗樂源譜』 권4에서는 장고점(杖鼓點)이 있어 장구가 편성됐음이 명확하다. 그런데 『俗樂源譜』 권6부터 장구가 등장하지 않았고, 이는 『雅樂部樂譜』도 마찬가지였다.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는 아악기인 절고(節鼓)가 처음으로 등장했다가 해방 이후부터 민간악기인 좌고(座鼓)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1978년에 장구를 다시 편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2007년 이후 사용하지 않는다(교습본인『樂章要覽』과 『雅樂生敎科綴』 제외). 이 외에 일제강점기에 보이지 않던 방향(方響)과 박(拍)이 해방 이후부터 다시 편성되었고, 노래가 추가되었다.
선율선의 변화 없이 음고(音高)의 교체가 있었다. 먼저 주요 5음이 아닌 2음에서 나타난 『樂章要覽』과 『俗樂源譜』 권6의 '姑·無', 『俗樂源譜』 권4의 '夾·應'이 『雅樂部樂譜』에 이르러 각 악기보에 혼재되어 불협화음을 이루다가 『雅樂生敎科綴』을 거쳐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 이르러 다수결에 의해 '姑·應'으로 통일되었다. 주요음 중에서는 『樂章要覽』과 『俗樂源譜』 권4, 권6 모두 '太·仲·太·黃'이었던 악구가 『雅樂部樂譜』에서 '太·林·太·黃' '(鐘磬·大笒· 唐笛·牙箏), '太·南·太·黃'(觱篥), '太·太·黃'(奚琴)으로 나뉘어 변하였다. 『雅樂生敎科綴』에서는 '太·南·太·黃'으로 나타나 다수결에 의해 '太·林·太·黃'으로 통일 및 연주된 것이 보였고,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 주선율인 당필률·대금은 '太·林·太·黃', 종경·해금·아쟁은 '太·太·黃'으로 정리됐다.
『雅樂部樂譜』부터 삽입음이 나타났는데 이는 어떤 악보에서도 문헌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었고, 음악적으로도 의도하지 않은 불협화음을 만들거나 절주를 맞지 않게 하는 방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낙양춘”이 전승된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는 재연(再演)이라기보다 창작(創作)이고, 이러한 형태의 창작은 훼손이다. 이후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 이 삽입음들이 통일되었는데, 주선율인 당피리·대금은 가장 삽입음이 많은 『雅樂部樂譜』의 당적보(唐笛譜)로, 종경은 종경보(鐘磬譜), 해금·아쟁은 아쟁보(牙箏譜)로 선택되었다. 이들이 절주(節奏)를 맞추는 것은 주선율이 삽입음을 연주할 때 나머지 악기가 쉬거나 본음을 지속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삽입음들은 반드시 본음(本音)의 앞에만, 반드시 본음보다 음고(音高)가 위였다. 이러한 특징이 해방 이후 전승악보집 시리즈의 악상기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했다.
『樂章要覽』·『俗樂源譜』 권4까지는 각 음이 고유한 시가(時價)를 가졌고, 『俗樂源譜』 권6부터 현재까지 1음1박이다. 다만 『俗樂源譜』 권6은 1음1박만 나타나고, 그 1박이 3분박인 것은 『雅樂部樂譜』부터 시작되는데, 명시(明示)가 아니라 암시(暗示)되어 명확하지 않다. 또한 『雅樂部樂譜』부터 본음끼리 결합, 본음과 삽입음의 결합이 시작되어 1/3-2/3박, 2/3-1/3박 구조가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나, 역시 명시가 아니라 암시였다. 3분박이라는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근거는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 이후에 찾을 수 있었다.
환입(還入)은 『樂章要覽』·『俗樂源譜』 권4, 권6까지는 모두 명기되었다. 그러나 『雅樂部樂譜』에서는 『俗樂源譜』 권6과 같은 위치에 종경(鐘磬)·필률(觱篥)·아쟁보(牙箏譜) 3종에서만 점(·)이 작게 찍혀있었고, 『雅樂生敎科綴』에도 환입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필기만이 있었다.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는 아예 환입이 사라지고, 환입이 시작음인 南으로 음악이 끝났다. 해방 이후에는 1978년부터 다시 환입이 원래의 위치대로 연주된다.
이상을 종합하면 『樂章要覽』과 『俗樂源譜』 권4의 조선조 “낙양춘”과 『俗樂源譜』 권6의 “낙양춘”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다. 『俗樂源譜』 권6에서는 1음1박화라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고, 이후 『雅樂部樂譜』―『雅樂生敎科綴』―『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를 거치며 일어난 음고의 교체 및 결합, 그리고 근거없는 음의 삽입과 악기군에 따른 선율의 분화 등이 현행 “낙양춘”의 형성에 중대하게 작용했다. 또한 이는 전승과정 속에서가 아니라 재연과정, 더 엄밀히 훼손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따라서 “낙양춘”을 설명할 때 “전승과정 속에서 변하였다”는 서술은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행 “낙양춘”은 조선시대가 아니라 『俗樂源譜』 권6과 1929~31년경(『雅樂部樂譜』)부터 1936~39년경(『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까지 일제강점기 약 10년 안팎의 세월동안 변화를 겪었고, 최종적으로 1936~39년경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 완성됐다. 이후에는 선율적인변화 없이 환입의 재사용, 편성에 방향과 박을 추가, 노래선율의 추가 등만 있었다.


“Nagyangch'un” 洛陽春(Spring in Lo-yang, Lo-yang-ch'un in Chinese) is the only two of remained tangak 唐樂(Chinese-derived music), though its importance, use exp lanation without concreteness such like “As one of Song 宋 saak 詞樂(music for poe try of Sung China, tz'u-yueh in Chinese) delivered during Koryo 高麗 dynasty, “Na gyangch'un” has changed with the process of transmission until today.” This study ex amined for concrete describing the formation of “Nagyangch'un” by reviewing all the existing documents that contained the melody of “Nagyangch'un”.
First of all, it needs to clear the period of documents that examined the paragraph of dots(·) in Akchang yoram 『樂章要覽』. The dot(·) was breathing marks for the taegum 大笒 and each tone in the Akchang yoram has its own rhythm, not one-tone one-beat music. Therefore “Nagyangch'un” in the Akchang yoram and the fourth volum e of Sogak wonbo 『俗樂源譜』 were the same music.
The followings are the features that are founded. The name of “Nagyangch'un” du ring Choson 朝鮮 dynasty was “Nagyangch'un” and wrote by itself onl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however, it changed to “Kisu yongch'ang chigok” 旣壽永昌之曲(“Piece of Kisu yongch'ang”, also called “Kisu yongch'ang”). Even after the post - liberation era, “Kisu yongch'ang” used as original in the 1970's not used as second ary until 2007. As for “Kisu yongch'ang”, it has never been used as the name of “Nagyangch'un” from Koryo 高麗 to Choson dynasty.
Changgu 杖鼓(hourglass drum) was necessary for Choson's “Nagyangch'un” but di sappear in the colonial period, cholgo 節鼓(large drum) listed instead any relations with the Nagyangch'un's identity. As same as perspective of any relations with identi ty, chwago 座鼓(seated drum) listed during liberation era and still same in today.
There were some replaces of pitches without melodic variation. During the Japanes e colonial era, the scale of “Nagyangch'un” changed into '黃·太·姑·仲·林·南·應'(c·d· e·f·g· a·b) and these are still the same in nowadays which had never been in the Cho son period. A phrase '太仲太黃'(d-f-d-c) at the Choson period changed into '太林太黃'(d-g- d-c) and once more divided into '太林太黃'(d-g-d-c) and '太-太黃'(d-res t-d-c)' at the colonial period.
There was an existence of insertion tones without any basis of documents that ma kes impossible play as an ensemble. These insertion tones are always exactly in front of original tones and exactly higher than original tones' pitch so make musical unnat ural and disharmony with no musical intention. It had arranged to possible that coul d play ensemble during the same era but one original melody divided into three mel odies by instrument groups and also insertion tones were never gone.
Each tone had its own length and “Nagyangch'un” had its own rhythm during th e Choson period, yet changed to one-tone one-beat music while colonial era as well one beat composed with three small beats. The one beats were comprised of 1/3-2/3 and 2/3-1/3 beat forms by combined original-insertion tones or original tones themsel ves.
In the Choson period, Hwanip 還入(re-entering, i.e. dal segno) was expressly mar ked but in the colonial era, it didn't mark but hint and soon disappeared. Today, H wanip is marked correctly due to the results of some researches.
In conclusion, current “Nagyangch'un” completed around 1936~1939 and there w asn't altered of melody structure after this. The formation of the current version of “Nagyangch'un” is not transmission but distor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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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전투원들에게 주는 노래집'에 나타난 북한 전시가요의 특징

저자 : 이정아 ( Lee Jeong-a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2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59-29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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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金日成)은 전쟁이 개시되자 음악예술인들의 행동강령으로 인민과 인민군대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음악가들을 격려하고 고무하였다. 그는 음악예술이 전쟁승리를 위한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해야 하며, 미제침략자들을 반대하고,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것이 근본임무임을 교시함으로써 전시가요 창작의 방향을 제시했다.
한국전쟁이 개시되자, 김일성의 교시대로 창작된 전시가요(戰時歌謠)를 가지고 북한의 모든 음악연주단체들은 전시체제에 맞게 여러 명칭의 소편대연예공작대로 편성되어 전방과 후방에서 음악소조활동을 벌였고 전쟁 승리를 위해 이용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김일성의 교시가 전쟁당시 발간된 전시가요집의 가사에 반영된 것을 찾고자 했으며, 동시에 한국전쟁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 '소련과 스탈린'이 전시가요가사에서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그리고 중국에 대한 국제적 친선관계도 함께 그 특징들을 알아보았다. 특히, 한국전 당시 북한에서 군의 사기진작과 인민에 대한 정치적 교화를 목적으로 제작되어 널리 보급된 『전투원들에게 주는 노래집』의 가사를 분석하여 김일성 정권이 인민을 통치했던 어젠다를 살펴보았다.
전시가요의 가사의 특징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첫째, 지도자 찬양과 우방국에 대한 친선을 강조했는데 특히 '소련과 스탈린'찬양과 중국에 대한 친선이 강조되었으며 지도자를 찬양하는 송가(頌歌) 스타일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둘째,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보위(國家保衛)를 위한 임무와 역할의 강조이다. 군대 보직과 관련된 노래와 후방 인민들이 중공군을 돕는 등 각자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애국주의(愛國主義) 강조다.
전시가요는 선전선동의 역할을 했으며, 끊임없이 전쟁 참여에 대한 독려와 전쟁 승리를 고취하였다. 국가유지를 위한 사상적 기반이 되는 이데올로기가 함축적으로 가사에 내재되어 있었으므로 지금도 사용되는 노래들이 있다. 그리고 전시가요는 이후에도 북한의 효율적 군사체제의 강화를 위한 밑거름의 역할을 하게 된다.


I have carefully examined the lyrics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music during the Korean War(1950-1953) era. As I was studying, I wanted to see what kind of direct ion the music was taking and how the patriotic war theme guided the people and the army of North Korea. For, I covered a subject about what kind of musical activi ty North Koreans did.
Kim Il-sung 金日成 [Kim Il-song], the dictator of North Korea during the time of the war, wanted musicians to use their musical skills in order to boost the countr y's morale. He proposed a code of conduct that musicians were required to create an d play music in order to defeat American soldiers. Musicians were required to integra te lyrics that were easily understandable by both children and adult. The lyrics have to be specific and well-defined and realistic. It had to include family members being attacked by enemy soldiers in order to make the lyrics feel realistic with emotions an d thoughts. The lyrics had to portray a very tragic things happening to North Korea n families in order to make it emotional to the listeners. Kim wanted the musicians to use music as weapons as the musicians plant the seed of morality to the people of North Korea.
As the Korean War began in June of 1950, Kim instructed and created the patrio tic war theme and passed the music out to the public musical performance groups across the nation. The musicians played the music across the nation in order for ever yone to hear. I have researched about musical compositions during the wartime, what the influential lyrics of Stalin and Soviet Union described, and China's international relation with other countries.
As a result, the patriotic war theme music books included considerable amount of translated songs of the Soviet Union that was similar to Stalin's praise and expression. The book also emphasized China's friendly relations. Soon after, the book also had songs that described the duties of a soldier. The people and the soldiers were heroic and stubborn. It also explained how they wanted to protect their homes and family with a mournful heart. But through comradeship, the book planted hatred of the ene my into a child. This is what the book have sh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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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공지능 시대의 무형유산 '전승' 논의

저자 : 전지영 ( Jeon Jiyoung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2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95-31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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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예술적 상황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며, 향후 예술분야에 있어서도 기능적 차원이나 지식적 측면에서는 인공지능이 상당부분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는 무형유산 분야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공지능이나 4차 산업혁명이 기술차원의 영역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회적 삶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자본과 권력질서 차원에서 조망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그렇듯이 인공지능 시대의 무형유산 역시 기예능 차원의 전승 논의가 아니라 기성 전승질서의 권력적ㆍ이데올로기적 함정을 넘어서 새로운 개념규정과 의미맥락을 구축해야 할 대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생태적ㆍ유기적 삶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무형유산의 '전승'이라는 인위적 개념의 인공호흡기가 불필요하듯, 향후 무형유산에 있어 '전승'은 윤리적 차원의 기표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제도와 권력에 의해 규정된 정태적 의미 장(場)을 비판하고 생태적 삶을 위한 '기획'으로 전승은 새롭게 담론화되어야 한다.


There have been various arguments about the new arts paradigm upon the era of the artificial intelligence or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and many of them have predicted that the aspects of technique and knowledge in arts will replace humans. It is important that the signifier of the 'artificial intelligence' or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rules not only the field of science and technology but also the capitalistic system and dominant order of society.
The 'transmission'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has been regarded as a term for technical point of view, but on the era of the artificial intelligence, it should be reconstructed or re-signified. In the ecological and organic contexts of life, the term 'transmission' may not be necessary. The transmission inevitably has the artificial and compulsory point of view about cultural heritage.
It can be argued that we should re-form the signifier 'transmission' upon the ethical and ecological point of view. We should aim for the era that the artificial and compulsory term of 'transmission' disappears. The 're-formation' of transmission will be possible where we discourse it upon the 'planning' point of view for the ecologic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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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북한에서의 안성현의 민족음악활동연구

저자 : 최옥화 ( Cui Yuhua ) , 장탄허 ( Zhang Tanhe )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2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17-34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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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현(安成賢: 1920~2006)은 한국과 북한의 서로 다른 사회체제와 문화를 두루 체험한 작곡가이자 지휘가로서 20세기 한민족이 낳은 저명한 음악예술가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예술활동은 남북분단의 고민과 아픔을 안아야 했던 한민족예술가들의 정신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영향 하에서 음악예술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남한에서 이미 중학교 음악교원, 우수한 작곡가로 성공했고 북으로 옮겨간 이후에는 주류담론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도 뛰어난 음악지휘가·작곡가로 대성하기도 했다.
그의 삶과 음악활동은 전 생애에 걸쳐 부친 안기옥(安基玉)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정면적 영향은 그로 하여금 성장의 발걸음을 빠르게 하였고, 부면적적 영향은 그의 예술활동의 황금기를 잃게 하였다. 아울러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사상과 추구를 소유함으로 하여 새로운 음악세계를 창출해 낼 수 있었고, 평범한 음악교사로부터 뛰어난 작곡가 · 지휘가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그는 민족음악의 현대적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고,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민족음악가였다. 또한 그는 민족음악고전을 정리하여 후대에게 넘겨준 음악문헌 정리자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그는 특수한 원인으로 하여 주류담론에서 밀려 음악창작활동의 황금기를 잃고 “유명”예술인으로부터 “무명”예술인으로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족예술에 대한 정체성(正體性)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부침 많았던 삶의 노정에서 민족음악의 민족성(民族性)과 현대성(現代性), 그리고 자율성(自律性)을 추구하여 민족음악예술가로서의 지조와 재능을 과시했다. 아울러 안성현의 음악창작 활동은 남북 음악교류의 중요한 한 분야로 되며 그가 민족음악 발전에서 이룩한 업적은 남과 북, 내지는 전 세계에 있는 한민족 모두의 자랑스러운 정신적 유산으로 될 것이다.


An Song-hyon 安成賢(An Cheng-xian, 1920-2006) was a composer who experienced the different social system and cultures of North Korea and South Korea. He also was a famous Korean national music artist of the 20th century. His magnificent life and artistic activities were a kind of spirit and historic record for Korean artists who felt worried and bitter about the separation between the north and south. Under the influence of his father An Ki-ok 安基玉(1894-1974), he followed the art of music, and became a high school music teacher and a good composer in South Korea. Without relying on the power of mainstream and in very unfavorable conditions he also became an outstanding music conductor and composer when he got to North Korea.
His music activities gave him a strong connection with his father. Its positive influence made him grow fast, but on the other hand, its negative impact is that he missed the gold period of the art activities. Because of his unique aesthetic thinking and pursuit, he created a new world of music and went from an ordinary music teacher to being an outstanding composer of music. He has made a significant contribute to the modern development of national music and became a world famous folk musician. He organized Korean folk music literature and left it to future generations. At the same time, he was sidelined by the mainstream because of his personal reasons, and he missed the gold period of music creation. Suddenly he turned out to be an unknown artist among the famous artists, but he did not loose enthusiasm for national art.
Although he had many ups and downs in his life, he always sought to the character, and self-discipline of national music and to show the national moral integrity and ability of a music artist. His music creation activities become important areas for the civil communication. The achievement that he created in national music is a kind of spiritual wealth, Korean people all over the world are proud of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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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해음악학(一海音樂學)이 이룬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결실 - 한국음악사학회의 성장과 발전 양상 -

저자 : 宋芳松

발행기관 : 한국음악사학회 간행물 : 한국음악사학보 62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47-38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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