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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T`oegye Studies

  • : 퇴계학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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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225-4398
  • : 2713-8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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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3)~148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573
퇴계학보
148권0호(2020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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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퇴계와 '보편성'

저자 : 와타나베히로시 ( Watanabe¸ Hiroshi )

발행기관 : 퇴계학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보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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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李退溪와 같은 성리학자가 지폐의 초상화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16세기의 주자학ㆍ성리학자가, 자유로운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분명히 朱子學ㆍ性理學 자체는 대한민국과 같은 현대국가의 사상ㆍ신조가 될 수는 없는데, 왜일까요? 아마도 고상한 도덕을 추구하는 퇴계의 이상주의적인 태도가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는데, “四端”과 “七情”을 구분하는 그의 독특한 이론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 보편성의 중요성에 대한 퇴계의 확고한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치우치지 않는 道里과 합치하게 행동한다는 것인데, 이는 어떤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이 과도하게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퇴계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상징이 되는 것이 납득 됩니다.


It is unthinkable in Japan that a portrait of Zhu-Xi Neo-Confucianist like Yi Toegye is on the bill issued by the central bank. Why is it possible in Korea, a free, democratic country that a Zhu-Xi Neo-Confucianist in the 16th century would be treated as a symbol of the nation? Clearly Zhu-Xi Neo-Confucianism itself cannot be the orthodoxy of a modern nation like ROK. Then why? Probably, one reason is Toegye's idealistic attitude to pursue lofty morality, which is shown in his unique theory on the distinction between “the four beginnings” and “the seven emotions.” Another reason might be Toegye's firm belief in the importance of universality. For him, to be ethical is to behave in accordance with the universal principles, which can be applied to any human beings. If these interpretations are not off the point, it is understandable that Yi Toegye is a proud symbol of the Korean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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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퇴계의 양명학 비판과 조선유학의 성립

저자 : 김형찬 ( Kim¸ Hyoung-chan )

발행기관 : 퇴계학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보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9-6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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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 李滉과 栗谷 李珥가 직접 참여했던 16세기 '四端七情論爭'은 조선의 학자들이 理氣心性論 관련 논의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는 조선유학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그런데 퇴계와 율곡, 그리고 이후 조선유학자들이 理氣心性論 논의에 집중하게 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건국 이래로 그들이 추구해 온 주자학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그에 대한 대안 혹은 보완책 모색이라는,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의 과제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주자학을 비판하며 성장한 양명학이 유행하고 있었고, 조선 지식인들의 철학적ㆍ이념적 반성은 그러한 양명학의 영향과 무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양명학은 강렬한 비판에 직면하였고, 조선유학은 양명학을 배제하고 이기심성론 논의에 주력하면서 독특한 학문적 기틀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한 논의 과정의 중심에는 양명학 비판에 결정적 역할을 한 퇴계가 있었다. 퇴계는 양명학의 학문적 성과를 수용하는 대신에, 양명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양명학의 주자학 비판에 적극 대응하며 주자학을 보완하는 길을 택하였다. 퇴계의 理發說, 理自到說 등은 바로 양명학의 주자학 비판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성과였다. 퇴계는 양명의 知行合一說이 形氣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있으나 義理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유학에서 지향하는 것은 義理에 관해서도 形氣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본능적ㆍ자발적으로 도덕적 감정ㆍ판단ㆍ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고, 맹자가 도덕감정의 자연 발현의 예로 제시했던 孺子入井의 상황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퇴계는 도덕감정ㆍ판단ㆍ행위의 자발성을 理의 '역할(發 또는 自到)'로 설명함으로써 양명의 비판을 주자학의 기반 위에서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극복하려 하였고, 이는 마음[心] 중심의 陽明 心學을 理 중심의 退溪 心學으로 대체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조선지식인들이 반대 혹은 찬성의 의견으로 논의에 참여하게 되면서 조선유학은 주자학을 보완하고 양명학을 넘어선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이처럼 퇴계가 양명학을 비판하며 주자학의 토대 위에서 그 문제의식을 포용해 냄으로써, 양명학이 조선에서 뿌리 내릴 여지가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理氣心性論의 심화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 유학이 성립되고 발전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The controversy over the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四端七情論爭), which occurred in the sixteenth century with both Toegye Yi Hwang (退溪 李滉) and Yulgok Yi I (栗谷 李珥) being directly involved, became a crucial catalyst that made scholars of the Joseon Dynastypay special attention to discussions around the theory of li, gi, heart-mind and nature (理氣心性論); eventually, this became a key characteristic of Joseon Confucianism. Nevertheless, if one seeks to find theroot cause of Toegye, Yulgok, and future Joseon Confucianists' concentration on the theory of li, gi, heart-mind and nature, one should focus onthe Joseon-era intellectual community's task at hand: to reflect critically on the theories of Zhuxi (朱熹), which had been the mainstream school of neo-Confucianism since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late fourteenth century, with the intent of improving on it or finding an alternative. Around this time, Yangmingism had gained popularity in China, establishing itself through the criticism of the teachings of Zhuxi; there was no way for the Joseon-era intellectuals to be free from the influence of Yangmingism in the self-criticism of their own philosophy. However, Yangmingism faced strong criticism in Joseon, and the school of Joseon Confucianism started establishing a unique academic tradition that focused on discussions of the theory of li, gi, heart-mind and nature while avoiding the ideas of Yangmingism.
Toegye stood at the heart of such discussions, because he had made crucial contributions to the criticism of Yangmingism. Instead of accepting the academic achievements of Yangmingism, Toegye chose to complement the theories of Zhuxi as he actively addressed Wang Yangming's criticisms toward it. Theories such as the theory of the manifestation of li (理發說) and the theory of li arriving of its own accord (理自到說) were the outcome of Toegye's critical assessment of Yangmingism's criticisms of the theory of Zhuxi. Toegye criticized Yangming's theory of Chin-hsing ho-yi (知行合一說), claiming that it could only be applied to the concept of material disposition (or physical matter, 形氣), not to the concept of moral norm (or righteous principle, 義理). Yet, the actual aim of Confucianism was to promote instinctive and spontaneous moral actions, decision-making, and emotions for moral norm (義理), just like what people would do for material disposition (形氣); one such example is Mencius' thought-experiment on the natural manifestation ofmoral emotionality, which says "anyone would feel benevolence (惻隱之心) if they were to see a child crawling toward a well (孺子入井)." Toegye desired to actively accommodate and overcome Yangming's criticisms upon the foundations of Zhuxi's theories by explaining the spontaneous nature of moral actions, decision-making, and emotions as the "role" (facilitated by 發 or 自到) of li (理). As Joseon-era intellectuals joined such discussions, some agreeing and some disagreeing with Toegye, Joseon Neo-Confucianism took its unique path that complemented the theory of Zhuxi and as a result overcame the school of Yangming. Thanks to Toegye's critical attitude toward Yangmingism and the successful counterargument to it within the framework of Zhuxi's theory, Yangmingism fundamentally lost the opportunity to take root in Joseon. Amidst these circumstances, Joseon Confucianism took the opportunity to establish itself as aunique version of Confucianism, characterized by deeper and more complex discussions of the theory of li, gi, heart-mind and nature (理氣心性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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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세기 도학의 심법론 : 퇴계를 중심으로

저자 : 정도원 ( Jeong¸ Do-won )

발행기관 : 퇴계학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보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1-112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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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조선 유학은 스스로를 도학이라고 일컫는다. 도학은 내성과 외왕의 기반을 “마음”에 둔다. 이 마음은 천리를 담은 도덕 주체로서 모든 실천의 뿌리이다. 이 마음의 이상에 관한 담론을 “심법”이라고 한다. 조선 도학의 마음에 관한 담론은 주자의 新說을 전제, 퇴계의 담론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퇴계는 '평상의 마음을 유지하는 삶 속에서 집착이나 강박관념 없이 각각의 사태에 대처하라'는 심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는 선이든 악이든 마음에 담아두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계승한 것이다. 남명은 無欲을 추구하는 공부를 끝까지 밀고 나가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다. 퇴계의 제자들은 이 상태를 실체화하고, 직관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간재나 우계 등은 퇴계의 심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들의 담론으로 전환하였다. 율곡은 퇴계와 달리 心意에 보다 주목하였으므로 심법 역시 달랐다. 그는 '가볍게 가볍게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 조절하라'고 하였다. 이는 퇴계의 '집착이나 강박관념 없이 각각의 사태에 대처하라'는 지침과 유사하지만, 本體에 대한 논리 구조는 달랐다. 퇴계를 계승했든 퇴계와 다른 길을 찾았든, 퇴계 이후의 학자들이 퇴계를 기준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세웠다는 점은 동일했다. 이후로도 퇴계의 심법은 모든 관련 논의의 기준이 되었다.


Neo-Confucianism in Joseon in the 16th century is said to be DaoXue (道學, a Confucian school of philosophy of the Song dynasty). The DaoXue is based on self-completion and the realization of political ideals on the “heart and mind”. This heart-mind is the moral subject that contains the heavens and is the root of all practices. This discourse about the ideal of the mind is called "rule of heart-mind(心法)". The discourse on the heart-mind of Chosun DaoXue presupposes the new theory of ZhouXi, and Toegye Yi-Hwang's discourse serves as the standard. Toegye had a guideline to 'address each situation without obsession in a life that maintains a normal mind.' This is the inheritance of the teaching that Be it good or evil, you must not keep it in your heart. Nammyeong Jo-Sik tried to push this to the end and reach the point where there is nothing in mind. Toegye's disciples had a tendency to materialize this state and perceive it intuitively, but Ganjae Yi-DukHong and Woogye Sung-Hon made their own discourse by taking it as it is. Unlike Toegye, Yulgok Yi-Yi paid attention to reason, consciousness, or psychological orientation, so the discourse about the mind was also different. He set up a guideline saying, 'Let's lightly and lightly examine your own mind and control.' This is similar to Toegye's guideline of “address each situation without obsession”, but the logic of the ontological structure of the heart-mind was different. Whether they succeeded Toegye or found a path different from Toegye, it was the same that they all set their own logic based on Toegye. Since then, Toegye has become the standard for discussion of all "discourses on the mind." And all of these discussions were aimed at discussing the realization of social ideals. Therefore, how these discussions turn into discussions for realizing social ideals should be followed by further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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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입학도설(入學圖說)』의 심성론에 대한 철학적 재해석

저자 : 田炳郁 ( Jeon¸ Byoung-ok )

발행기관 : 퇴계학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보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3-14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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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村 權近(1352~1409)의 『入學圖說』은 처음에 天人心性과 관련한 合一과 分釋의 두 가지 그림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글들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나중에 『四書』와 『五經』의 내용까지 담게 되었다. 이 저작은 한국 성리학의 현존하는 최초의 저작이라는 점에서 꾸준히 주목을 받았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간 연구자들은 양촌이 朱子를 뛰어넘었거나 극복한 면모를 드러내려고 시도하였다. 주자의 『四書集註』 등이 과거시험의 표준이 된 시기에 '入學圖說'이라는 서명을 가지고 성균관 교육에 사용된 이 책이 주자의 이론체계를 극복하거나 초월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을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양촌은 해석의 과정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관점을 곳곳에서 드러내었으며 그 관점은 일관된 이론체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太極圖說』이나 『中庸章句』의 원전만으로는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의 해석을 통해서 만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太極圖」와는 상당 부분 다르게 그려진 그림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그림이야말로 「태극도」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그림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태극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양촌의 세계관은 주자학에 기반하고 있지만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더욱 발전된 형태로 구축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양촌의 철학체계는 하나의 연구주제가 되기에 충분한 이유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 연구에서는 양촌의 철학이 주자의 철학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가급적 거론하지 않고 그의 심성론을 재해석하는 데 집중하였다. 양촌 철학에 설정된 心과 性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性發爲情과 心發爲意가 一體二用으로 규정되는 이유를 밝혔고 四端과 七情에 대한 그의 독특한 관점을 설명하였다. 그런 한편 胡炳文 뿐만 아니라 程復心의 영향도 간혹 언급함으로써 양촌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상당히 다채로웠음을 드러낸 것도 이 연구의 작은 기여일 것이다.


Yangchon(1352-1409)'s Iphakdosoel is a series of commentary focusing on the unity and analysi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Heaven and human, mind and nature. Later, it includes explanations of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This is the first existing work on Neo-Confucianism in Korea, so it has been paid close attention to and has carried out a lot of research. The researchers tried to show that Yangchon surpasses or overcomes Zhuxi. Of course, during the period when Zhuxi's collection of Four books, the Bible, became the examination standard for civil servants, under the education of Seonggyun-gwan, a book titled Introduction to Neo-Confucianism could not have been aimed at overcoming or surpassing Zhuxi. Yangchon introduced the method of entering the academic world of Neo Confucianism in his own way, and established his own philosophical system in the process of interpretation. In Yangchon's view, scholars can't understand the meaning of Taiji diagram theory and the Notes of Mean, but through his own interpretation to achieve a correct understanding. In particular, he put forward quite a few different paintings from the Taiji diagram, believing that his paintings are the way to correctly understand the Taiji diagram. So, although Yangchon's world outlook is based on Zhuxi's theory, it can be said that it is based on his own understanding. From this point of view, Yangchon's philosophy system has a good reason to become a research topic.
This study tries not to discuss the difference between Yangchon's philosophy and Zhuxi's philosophy, but focuses on reinterpretation of his mind nature theory. Through the analysi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mind and nature in Yangchon's philosophy, this paper shows the significance of one essence (體) and two functions (用), and explains his unique views on Four and Seven(four ends and seven emotions). In addition, the influence of Cheng Fu-Xin is occasionally mentioned in this study, which shows that Yangchon is quite rich in philosophical problem consciousness, which is also a small contribution of the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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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송암 기정익의 기수설(氣數說) -박상현·윤증과의 논변을 중심으로-

저자 : 이선열 ( Yi¸ Sun-yuhl )

발행기관 : 퇴계학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보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9-18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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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7세기 율곡학파 내부에서 奇挺翼과 朴尙玄, 尹拯을 중심으로 논의된 氣數 논변의 학술적 의의를 규명하고 기정익의 사유가 지닌 특징적 면모를 탐색한다. 氣數說은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氣와 그 현실의 명운을 결정하는 數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관한 논의로 지금까지 조선 성리학 연구에서 다뤄진 적이 없는 다소 특이한 담론이다. 논변의 주요쟁점은 氣와 數를 동일하게 볼 것인지 구분해서 볼 것인지, 그리고 氣와 數의 가변성과 불변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논변은 기정익의 주장에 대해 박상현과 윤증이 반론을 제기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박상현과 윤증은 기와 수를 구분하지 않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으나, 박상현의 경우기와 수를 모두 불변적·고정적인 것으로 여긴 반면 윤증은 반대로 기와 수를 모두 가변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에 가까웠다. 그들과 달리 기정익은 기와 수를 둘로 나누어 가변적인 것과 불변적인 것으로 철저히 구분하는 입장을 취했다. 기수설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운명을 과연 얼마나 극복하고 바꾸어나갈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함축한다. 아울러 이러한 물음은 기에 의해 국한된 현실 속에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노력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탐색하는 율곡학적 문제의식 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논변의 중심에 있었던 기정익은 박상현과 윤증의 주장에 대응해 자신의 기수설을 확립해가며 의지와 숙명의 길항 관계를 깊이 숙고하는 사유를 보여준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academic significance of the arguments of gi (氣) and su (數) discussed in the 17th century Yulgok School, focusing on the debate among Ki Jeong-Ik, Park Sang-Hyun, and Yoon Jeung. The Gi-su argument is a discussion about how to see the relationship between gi that makes up the real world and su that determines the fortune of the reality, and is a rather peculiar discourse that has not been dealt with in the study of Chosun's Confucianism. The main issue of the argument was whether to see gi and su identically or separately, and how to understand the variability and immutability of gi and su. The philosophical question implied in the argument is to ask how much a person can overcome and change the destiny that has been given since birth, based on the worldview of the li (理) and gi (氣) theory of Neo-Confucianism. In addition, this question can be said to be embodied in the agony of the Yulgok School, which explores how far human efforts beyond the limits are possible in the reality confined by gi. Ki Jung-Ik, who was at the center of the discourse, responds to the arguments of Park and Yoon, establishing his theories and deeply pondering the relationship between will and f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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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예학(禮學)의 성격과 위상

저자 : 김윤정 ( Kim¸ Yun-jung )

발행기관 : 퇴계학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보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5-229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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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주의 예학은 고례를 통한 조선후기 疑禮의 고증을 중심으로 하였다. 임성주는 『의례』, 『예기』 등의 고례를 근거로 제시했고, 당시 통용되던 『상례비요』와 김장생 예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임성주는 고례를 기준으로 예설을 연구하면서, 학파적 경향성을 보이지 않았다. 스승인 이재의 예설을 묵수하지 않았고, 박세채와 정경세의 예설을 적극적으로 인용하기도 했다.
상례절차를 중심으로 行禮의 측면을 살펴보면, 임성주는 조석곡전을 하나의 의례로 간주했고, 조문 시 생전에 알지 못했던 사람을 위해서도 곡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장례 시 玄纁을 널 위 가운데 약간 서쪽에 올려서 직접 받는 의미를 강조했다. 小祥 시 슬픔을 줄여가는 과정에 주목하여 참최의 練服도 大功服의 제도에 따라 가장자리를 꿰매도록 했다. 大祥 시 祥服을, 禫祭 시 禫服을 입는 원칙을 제시하고, 祥服의 제도를 백색으로 규정했다. 계후자가 追服하는 경우에도 소상과 대상을 만 1년과 만 2년에 거행한 후 궤연을 철거하고, 계후자는 계후가 결정된 날을 기준으로 삼년복을 입도록 했다. 대상 후 신주를 사당에 合祔하지 않고, 길제 때 바로 사당의 正龕에 모시는 吉祭入廟를 주장했다.
복제논의에서는 장자의 傳重服에서 가공언소를 비판하고 경문의 내용에 따른 '正體'의 기준을 강조했다. 오대조 승중은 4대봉사에 어긋나지만, 고례를 근거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임성주는 尊者인 아버지의 존재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모복과 처복에 대해서, 고례의 경문을 따른다는 명확한 입장을 취했다. 동자의 상복 역시 『의례』의 조문을 재검토하여, 遞減하지 않고 本服을 입는 것으로 결정했다.
임성주의 예설 중 오대조 승중이나 동자복의 경우는 널리 통용되었지만, 길제입묘나 부재위처복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임성주는 고례를 근거로 조선에서 정례화된 예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예설을 제시했고, 이로 인해 고례에 지나치게 빠져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임성주가 제시하는 고례는 실제 行禮에 적합하고 情理에 합당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실에서 괴리된 고례를 이론적ㆍ학문적으로 탐구하기 보다는 실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거로서 고례를 고증했다. 따라서 고례는 俗禮와 일치하기도 하고 情理를 표현하는 방식이 될 수 있었다.


Im Seongju's precepts were centered to examine questionable protocol through the ancient rites in the late chosun Dynasty. Based on ancient rites such as Yi-Li and Li-Ji, the 12items of the rite contains a critical view of Sangrebiyo and of Kim Jang-saeng's ritual theory, Lim Seongju presented his own example by actively reviewing his teacher's example rather than acquiescing to it.
Looking at the aspects of protocol practice, focusing on the funeral process, Lim Seongju regarded the Joseokgokjeon as a ritual and believed that he could also perform it for those who did not know it in their lifetime. In the mourning discussion, the scripture of ancient rite was the most important.
Most of the ancient rites presented by Lim Seongju were suitable for the protocol practice and appropriate for mind. Rather than exploring the ancient rites separated from reality theoretically and academically, the ancient rites were venerated as grounds for solving real problems. Thus, the rite could be a way of expressing mind and matching popular customs,. Although Lim Seongju's Ritual Theory shows no academic tendency, it can be said that it covers the examples of various categories through the coordination of ancient rites and actu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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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다산 「석지부(惜志賦)」에 대한 고찰

저자 : 김은미 ( Kim¸ Eun-mi )

발행기관 : 퇴계학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보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31-26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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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2500여 수에 이르는데, 다산의 賦는 단 2편만 전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석지부」를 대상으로, 다산의 부 창작 이유와, 寡作의 배경, 그리고 유배기와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부가 우리 문학사에 들어온 것은 남북국 시대의 일이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科賦로 정착하게 되고 형식주의로 치우치게 된다. 과거를 준비하는 잠재적 관료들의 부 습작 열기는 뜨거웠지만, 더 이상 부는 문학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조선 후기 문인들의 문집에 부가 실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산의 부가 2편만 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산이 과거를 준비한 18세기 후반도 이미 부가 과부로 정착한 후 였다. 다산 역시 과시를 준비하며 부 창작을 연습했지만 부를 향유한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던 다산이 1801년 長鬐 유배기에 새삼스럽게 부를 지은 것이다.
유배지의 다산은 스스로 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고, 자신을 당쟁의 희생자로 인식하였다. 장기에서 쓴 글에서는 신유박해가 천주교와 유교의 사상적 대립이 아닌 당쟁의 결과라는 다산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異端과 異端邪說도 구분했는데, 다산에 따르면 천주교는 이단이지 이단사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다산은 천주교 때문에 유배객이 된 것이다.
유배지의 다산은 부의 기원을 생각했다. 失志한 선비들의 문학 양식이던 부와, 정치적 불우함을 드러내던 楚辭를 떠올렸다. 다산은 이미 1790년 海美 유배 무렵의 시에서도 정치적 곤경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초사의 영향을 보여준 바가 있다. 자신은 죄가 없는데도 당쟁의 결과 유배객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다산은 유배지 장기에서 초사와 부를 소환했고, 辭와 賦의 양식을 통해 자신의 정서를 드러내었다. 「석지부」에서 다산은 公冶長과 張橫渠를 거론하여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말하였고, 韓愈와 蘇軾을 언급하여 자신의 현재적 곤경을 넘어서는 미래적 전망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운명에 순응하는 체념적 정서가 아니다. 오히려 깊은 뿌리와 무성한 가지를 이루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죄가 없으므로 떳떳한 다산은 자신이 천명을 받들고 있어 불만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이전의 문인들이 사와 부를 지었던 실지의 상황처럼, 지금 다산이 처한 상황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외부 문제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도 '惜志'인 것이다.


The number of Dasan's poems amounts to 2,500, and only two works of Dasan's Bu (賦) have been handed down. This is a study that traces the relationship between Dasan's reasons for creation of Bu, the background of fewer work productions (寡作), and the relevance to his exile period for 「Seokji-bu」.
It was during the North and South States Period that Bu entered our history of literature, but in the late Joseon, it was settled as Bu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 (科賦), leading to being biased toward formalism. The practice writing fever of potential government officials preparing for a civil service examination was hot, but Bu was no longer the object of literary enjoyment. As a result, Bu was rarely included in the literature of the literati in the late Joseon. It was the reason that only two works of Dasan's Bu have been handed down.
In the late 17th century, when Dasan prepared for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t was already after Bu was settled in Bu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 Dasan also practiced Bu creation to prepare his civil service examination, but there is no trace that he enjoyed Bu. Then Dasan newly wrote Bu during the exile in Janggi (長鬐) in 1801.
Dasan in the exile place did not consider himself guilty, and he recognized himself as a victim of the party struggle. Dasan's thoughts that the Shinyu Persecution is not an ideological confrontation between Catholicism and Confucianism, but a result of the party struggle, is revealed in the writings written in Janggi. Dasan also distinguished between yi duan (異端) and yi duan xie shuo (異端邪說), and according to Dasan, Catholic was yi duan, not yi duan xie shuo. Nevertheless, Dasan, who was in the position of deportee, had a hard time accepting his situation.
Dasan in the exile place thought of Bu's origins. He recalled Bu, the disappointed (失志) scholars' literary style, and Chosa (Cho poetry; 楚辭), which showed political discomfort. Dasan had already shown Chosa's influence in the process of embodying political predicament even in poems around his exile of Haemi (海美) in 1790. Dasan, who thought that he became a deportee as a result of the party struggle even though he was innocent, summoned Chosa and Bu, and revealed his emotions through the style of Sa-Bu (辭-賦).
In 「Seokji-bu」, Dasan spoke of Gong Ye Chang (公冶長) and Zhang Heng-qu (張橫渠) to express his unfair feelings, and by mentioning Han Yu (韓愈) and Su Shi (蘇軾), he presented a future outlook beyond his present plight. It was not a sentiment of resignation that conforms to fate. Rather, it was a commitment to oneself to achieve deep roots and lush branches. Dasan, who is proud of himself because he is innocent, says he is not dissatisfied with the heavenly mandate. This is because, like the disappointment that the literati wrote Sa and Bu before, Dasan's situation is not his own fault, but an external problem. That is why the title of the work is also 'Seokji (sorrow; 惜志)'.

KCI등재

8주희 『감흥시(感興詩)』의 『시』 교육론적 의미

저자 : 陳耀輝 ( Chan¸ Yiu-fai )

발행기관 : 퇴계학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보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7-332 (6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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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의 학자들이 '『시』로서 간언함'을 시학 연구의 주요 목표로 간주한 것은 정치ㆍ역사적 뜻에서 합리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론적 인도 아래 정치 관료들이 통치자에게 간언하면 제지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격려를 받음으로서 국정이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제도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희는 '『시』로서 간언함'은 결코 공자가 시를 간추리고 『시』를 정리한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시인의 생존 활동과 감정 상태를 살펴서 학문과 사고 과정의 출발점으로 삼고 성현의 학문함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진일보하여 '『시』를 가르침으로 삼는' 시학의 관점을 제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희의 비평과 입장은 理學의 학문 취지와 근거 등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에 『시』의 경학적 연구에서 한대ㆍ송대 간의 싸움을 열게 된다. 사실 주희가 창작한 『感興詩』는 공자 학문의 시교육의 본질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성학 체제'의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의 필요성을 밝히기도 했다. 더욱이 그 영향력은 동아시아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많은 중요한 학자들에까지 미쳤으며, 그들은 이미 『감흥시』에 대한 침잠에 힘입어 한대 시학의 사상적 길과는 다른 '감흥시 계보'를 열어 밝게 드러냈다. 이 글이 분석을 거친 다음 만약 이를 바탕으로 더욱 깊은 연구를 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기세가 드높고 규모가 큰 시학의 경관을 구성할 수 있으며 아울러 그것이 일상 속으로 흐르게 하여 윤택한 학술 생명의 사상형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Scholars of the Han dynasty regarded the Book of Songs as a way of admonishment as the main theme of the study. It has its political and historical significance. Under the guidance of the theory, rather than being restrained, the goverment officals were encougraged to admonish their kings for it wrongdoings. It then developed into a system that could guarantee the effective work of the administration. However, Zhu Xi believes that Confucius's original purpose to revise the Book of Songs was not for admonishment, but as means of enlightenment. That is, through learning the poet's inner activies and emotional state, one commences his journey of studying Confucianism. And in this way, he would find it possible to deeply understand how sages determine what is at stake. Zhu Xi's criticism on the Han study, however, generated problems including the purpose and foundation of neo-Confucianism, therefore introducing the long-lasting disputes of the Han-Song studies on the Book of Songs. As a matter of fact, Zhu Xi's work Ganxingshi, inheriting Confucius's spirit on the Book of Songs, not only illustrated the necessity of self-cultivation but also provided its theoretical framework of enlightment. The influence of his enlightment theory of the Book of Songs in the Ganxingshi extended to Confucian scholars throughout the East Asian countries. The purpose of this paper, therefore, is to provide the examination that Zhu Xi's thoughts of the Book of Songs in the light of the Ganxingshi could lead to a path differs from the Han studies that nourish our study of 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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