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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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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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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39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309
대구사학
139권0호(2020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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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남 소론계 가문의 존재와 계승 양상 - 봉화 진주강씨 강각(姜恪) 가문을 중심으로 -

저자 : 채광수 ( Chae Gwang-s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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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영남에서 드문 소론 가문 진주강씨 강각 가문을 다룬 글이다. 병자호란 때 이 가문은 서인계 가문으로 영남에 내려와 입향조의 장·차남 후손들이 각기 노론과 소론으로 색목을 지향하였다. 한 가문 내 老少가 분기한 사례는 영남에서 거의 유일한 경우로 보여진다.
차남계열의 소론계 강각 가문은 입향 때부터 남인계가 절대 다수인 지역 사정을 감안해 줄곧 남인계와 혼반을 지속하였다. 특히 19세기 접어들어 혼인의 격이 크게 향상되는데 이는 소·대과 급제자의 격증 및 유일천 배출 등으로 가문이 성장하는 것과 연관이 있었다. 또한 일찍이 영남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는 근기지역에서 안동권으로 경제 기반을 전환 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은공파의 파조 강각의 장남 강찬이 윤증을 사숙한 이래 후손들은 소론 학통을 계승하게 된다. 그는 도학에 천착하고자 서실을 세워 강학과 후학 양성소로 삼았다. 이 서실은 가학 연원이자 상징적 공간이었으며, 문중이 단결하는 구심처 역할을 하였다.
가풍을 확장시키는 가교적 역할을 한 강재항은 백부 강찬에 이어 윤증에 입문하였다. 그는 색목에 크게 구애 받지 않는 유연한 소유자로 그 교유 범위가 남인, 노·소론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바로 '반소반남'의 가풍을 확고히 계승한 인물이었다.
이어 강필효는 윤증·윤동원의 적통을 계승한 윤광소의 고제로 본 가문에서 배출한 최고의 학자이다. 영남에서 소론학풍의 고양은 그가 개설한 법계서실 운영과 서원 활동으로 나타났다. 전자에서는 정기적 강학과 특강을 통해 소론계 강학처로서 기능을 했고, 후자에서는 서원 방문과 문자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지속적으로 상기 또는 소환하여 형상화하였다. 이처럼 영남의 대표적인 소론인 강각 가문에 대한 연구는 조선후기 영남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데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This study deals with Jinju Gang Doeungongpa belonging to Soron family that is hardly found in Yeongnam. Two son descendants of the iphyangjo (入鄕祖) coming down to Yeongnam during Byeongjahoran pursued their own saekmok separately as Noron and Soron. The case that the old and the young were divided in a single family seems to be the one and only in Yeongnam. Soron-faction Doeungongpa of the second sons continued their marital relations constantly with Namin considering the regional situation that Namin had formed the absolute majority since the iphyang (入鄕). Especially from the 19th century, the status of marriage was elevated considerably, and it was associated with this family's growth, for instance, the dramatic increase of those who passed So·Daegwa or the discharge of Yuilcheon. Also, the will to be one of Yeongnam people could be already found in the change of economic grounds from Geungi to Andong area. After Doeungongpa Pajo Gang Gak's firstborn son, Gang Chan, did sasuk (私淑) pursuing Yun Jeung, the descendants succeeded the Soron school. Scrutinizing ethics, he built seosil and took it as a place for ganghak and cultivating younger scholars. This seosil played roles as the origin of gahak and symbolic space and also the pivot of uniting the clan. Gang Jae-hang who had bridging roles in extending the family tradition entered yunjeung following the uncle, Gang Chan. He was a flexible person that was rather free of saekmok, and the range of his association included Namin and No·Soron people broadly. He was a figure that succeeded the family tradition of 'Bansobannam' firmly. Gang Pil-hyo, the gojae (高弟) of Yun Gwang-so who succeeded the main line of Soron, was the top scholar discharged from the family. His Soron-related deeds in Yeongnam are found as the operation of Beopgyeseosil and the activities of seowon. About the former, with his regular ganghak and special lectures, it functioned as a place for Soron-related ganghak. Concerning the latter, through visiting seowon and munja, he kept recalling and bringing up the academic origin of his and embodied that. As shown above, research on Soron Doeungongpa that can represent Yeongnam appears to have significant meaning in revealing the diversity of Yeongnam society in late Chosun.
(Institute of Korean Cultural Studies, Yeungnam University / corhkdtn911@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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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다양한 역사관의 공존(共存)을 위한 역사교육 방안에 대한 모색

저자 : 신유아 ( Shin You-a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1-7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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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다양한 시각에 의한 역사 서술과 이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함양을 역사교육의 목표로서 지향하는 반면, 북한은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도구로서 역사교육을 이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 내용 체계 및 해석이 크게 상이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관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통일이 된 이후라고 해도 달성하기 어려운 과업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역사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실이고 과거를 현재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완전히 뒤바꾸어 서술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다시 말해 목적에 따라 다르게 서술할 수 있는 부분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국한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통일 후 사회 통합을 위한 역사 서술의 방향성에 대해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논의를 거쳐 어느 정도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오히려 남한 내에서의 '한국사'의 내용구성에 관한 것이다. 근현대사의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해석과 용어 문제는 물론이고, 전근대와 근현대의 시대별 비중 역시 하나의 쟁점이 되어 있다. 방법론적으로는 고등학교 '한국사'와 '한국근현대사' 과목을 분리하여 선택과목화 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또, 현재 국가에서 정책연구의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단일한 교육과정 제정 및 검정 절차를 각 시ㆍ도 교육청별로 다양화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만 한다. 국가에서 획일적으로 교육과정을 제정하여 이를 전국민에게 배우도록 하는 것은 단일한 가치관을 주입하게 될 위험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지역의 실정을 고려한 지역단위 교육과정의 편제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관점의 역사 서술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고, 또 필요한 사회다. 미래 사회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자신과 다른 관점과 생각을 이해하고 이를 종합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다. 통일 이후의 역사교육의 방향을 모색하는 작업은 어느 하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의 역사서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In the case of the Republic of Korea, there is no unified view of historical descriptions, and the development of historical descriptions and critical thinking on them by various perspectives is the goal of history education. On the other hand, using history education as a tool to complete the class revolution, North Korea views history as a process of revolutionary struggle to regain the independence of the working class, and consistently describes from this point of view to the primitive period to modern history.
Presently, descriptions of history textbooks between the two Koreas show a wide gap in terms of their direction and how they are described, and overcoming these differences may seem like a task that is hard to achieve even after reunification.
Given the historical time the two Koreas have shared, however, what the two sides are doing differently is interpretation and perspective, not the historical facts themselves. Therefore, it may not be at all impossible to reach an agreement to some extent after extensive and ongoing discussions on the direction of historical descriptions for social integration after reunification.
Methodology is also worth considering how to diversify the single curriculum enactment and approval procedures currently being conducted in the form of policy research by provincial and municipal education offices. It is difficult to rule out the risk of instilling a single value idea to establish a uniform curriculum in the country and learn it from the entire nation. Therefore, it will be worth considering the compilation of the regional curriculum considering the local situation.
Modern society has more emphasis than ever on historical descriptions from various perspectives. The most necessary ability for students to live in a future society is the ability to understand their different perspectives and thoughts and to make the right decisions about them.
The work of seeking the direction of post-unification history education could come amid efforts to form a social consensus on historical texts from various perspectives, away from the obsession that history should be described from either point of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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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화대혁명과 경제주의(자) - 사회주의체제하의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

저자 : 孫承會 ( Son Seung-hoi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3-11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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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주변'의 시각을 문혁시기 경제주의자에 대한 검토에 적용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7년 동안 구조화된 사회체제 내에서 새롭게 하층민으로 전락한 계층이 존재했다. 계급 없는 사회를 추구했던 사회주의에서도 '새로운 계급·특권층'과 정치·경제·문화적 하위계급이 등장했다. 문혁은 임시공·합동공·外包工·下鄕 知靑·퇴직 군인 등에게 신분·계층·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문혁파는 이들의 경제적 요구를 경제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탄압했다. 이들의 정치적 급진화는 이와 같은 경제적 요구의 좌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지청의 도시 戶口 요구, 체불 임금 요구, 퇴직 군인의 생활 보장 등은 사회주의체제의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사회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내에서도 새로운 계급 대립의 문제가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문혁이란 격변기의 일시적 현상을 이해해야 하는가? 문혁파는 '정치'를 앞세워 '경제'를 침묵시켰지만 대중의 경제적 요구와 투쟁은 쉽게 사라질 수 없었다. 따라서 경제주의자의 요구는 새로운 형태, 즉 정치요구의 형태로서 표면화하거나 내재화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경제주의자의 요구와 운동의 변화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었다. 이들 '주변(인)'의 文革은 제대로 규명된 바 없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억압당한 채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This paper specifically applied “the view of the periphery” to an examination on the “economists” who were in the period of the Cultural Revolution. During the 17 years since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was established, there had been a certain class which was newly reduced to lower classes within the structured social system. Despite its pursuit for a classless society, socialism also saw the advent of the new and privileged class as well as politically, economically, culturally lower classes. The Cultural Revolution provided the temporary worker(臨時工), the contract worker(合同工), the outsourcing worker(外包工), the downward youth(下鄕知靑) and the retired military personnel the opportunity to raise their economic status, rank, and pay. However, “the clique of Cultural Revolution”(文革派) suppressed these demands by labeling them as “the economist.” Their political radicalization was caused by the setbacks of such economic demands. In fact, it is more sound to say that such problems as the regularization of non-regular workers, the downward youth's demand for urban relief, the demand for unpaid wages and demand for assurance about their rest of lives are intrinsically existing problems of capitalism rather than of the socialist system. If that is the case, did the new class-conflict problem arise also within socialism? Otherwise, should we understand their rebel(造反) merely as a temporary accident during the period of the Cultural Revolution? Though “the clique Cultural Revolution” silenced “the economy” in terms of “politics,” the public's economic demands and struggles could not easily disappear. Therefore, the demands of “economists” were more likely to either externalize or internalize as a new form, that is to say, a form of political demand. There have been enduring unclarity regarding the overall aspect of changes in the demands and movements of the “economists.” The revolution of these “peripheral economist” has not been fully revealed comprehensively, and their voices are awaiting a new interpretation while they are still experiencing suppress.
(Yeungnam University / sonshoi@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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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전(戦前) 일본지정학의 성립과 전개

저자 : 채수도 ( Chae Soo-d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3-153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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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본지정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선행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근대 일본지정학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京都학파」의 고마키 사네시게(小牧実繁)와 「東京학파」의 이모토 노부유키(飯本信之)의 지정학 논리에 대해 분석하였다.
당시 지정학은 자신의 민족이 미래에 살아가야하는 생존공간을 반드시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태동되어 발전되었기 때문에 한 국가가 무력으로 국력을 신장하고 팽창하는 과정에 있어서 무력적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지정학은 제국주의 침략정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사상적 도구내지는 수단으로써 작용하였으며, 특히 후발선진국인 독일과 일본은 구미제국의 구질서를 해체하고 신질서구축하는 정당한 논리를 제공하였다. 이 두 개의 지정학 단체의 내용적 활동과 회원들의 사상적 성향을 미루어본다면, 단순히 학문적 단체가 아니라, 일본의 대외정책을 보조하는 외곽단체로서의 역할을 뛰어넘어 대륙팽창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실천적인 활동을 수행한 싱크탱크였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일본지정학의 최종지향점은 성공적인 대동아공영권 구축과 전개에 필요한 이론적 근거와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에 있었다고 보여 진다.


This paper did the theoretical analysis of the geopolitics of House Hopper, the prototype of Japanese geopolitics. Based on this, it analyzed the geopolitical logic of Sanseige Komaki of the so-called "Kyoto school" and Imoto Nobuyuki of "Tokyo school," which are the main stream of modern Japanese geopolitics.
Because Geopolitics at that time began with the sense of urgency that one must secure a living space for one's own people to live in in the future, it was seen that an armed conflict was inevitable in the process of a country advancing and expanding its national power by force.
Therefore, geopolitics served as an ideological tool or means of rationalizing and justifying the imperialist invasion policy. In particular, Germany and Japan, the late developed countries, provided legitimate logic for dismantling the old order of the old American Empire and building a new order.
Given the content activities of these two geopolitics groups and the ideological inclinations of the members, it is judged that they were not merely academic organizations, but think tanks that theoretically supported and carried out practical activities beyond their role as an outside organization assisting Japan's foreign policy. And the final orientation of Japanese geopolitics seems to have been the theoretical basis and justification necessary for the successful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he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soodo_chae@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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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아우구스투스의 종교 정책 연구 - 아우구스탈레스(Augustales)를 중심으로 -

저자 : 김활란 ( Kim Hwal-la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5-18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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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아우구스투스가 창안한 아우구스탈레스(Augustales)를 통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종교 정책을 살피는 것이다. 아우구스탈레스는 황제 숭배 의례 수행에 참여했던 사제 계급이다. 이들의 약 85%-95%를 차지했던 사람들은 해방 노예들이었고 제국의 서부나 이탈리아에서 발견되는 약 2천 5백 개의 비문들에 그 존재가 집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비문들은 아우구스탈레스가 그들이 맡았던 직책을 자랑하면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세운 묘비들이거나 그들이 속했던 도시 지자체에서 아우구스탈레스가 도시에 행한 공적인 시혜에 감사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일반적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정치적인 갈등과 사회적인 분열을 정리하고 새로운 프린키파투스 체제를 열게 되면서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안정과 로마 사회의 화합을 추구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이 같은 화합 정책의 한 방식으로 이전에 노예 신분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공적이고 행정적인 부문에 진출이 제한된 해방 노예들에게 아우구스탈레스라는 사제직을 수여했던 것 같다. 아우구스탈레스는 황제 숭배 의례와 관련된 기념물을 봉헌하거나 살아있는 황제에게 신전을 바치는 방식으로 황제 숭배 의례에 참여했다. 그들에 의해서 황제 숭배 의례는 실질적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아우구스탈레스의 역할 가운데 또 다른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도시 공동체에서의 공적인 시혜와 관련된 것이다. 그들은 도시의 공공건물을 보수하거나 신축하기도 했고 도시민들을 위한 만찬을 배설하거나 선물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혹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인기가 있던 경기를 개최하기도 했고 자신들의 재산을 도시에 유증 하기도 했다.
이 같은 아우구스탈레스의 행위는 그들에게 크나큰 영예들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구별되는 좌석에 앉을 수 있었고, 특별히 영예로운 토가(toga)를 입을 수 있었고, 때로는 파스케스(fasces)를 든 릭토르(lictor)들의 수행을 받을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그들의 조상(statue)을 도시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세워서 그들의 업적을 기리기도 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탈레스라는 새로운 사제직은 황제 편에서는 황제 숭배 의례를 확산시키거나 각 도시의 복지에 도움을 주며 해방 노예의 편에서는 사회의 공적인 삶에 당당히 편입할 수 있는 상호 호혜 관계를 이룰 수 있었던 교묘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해방 노예를 위해 수립한 아우구스탈레스 제도는 정치적 안정, 사회적 결속력, 경제적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된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숭배의 사제직인 아우구스탈레스의 수립이라는 그의 종교 정책을 통하여 그의 정치체제를 견고히 하고 동시에 로마 사회의 소통과 화합을 이루어갔다고 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urvey Augustan religious policy through Augustales created by Augustus. The Augustales were a class of emperor cult priest. 85%-95% of them were freedmen, whose existence appears extensively through 2,500 inscriptions found in Italy and the western part of the Empire. These inscriptions were generally either written by Augustales to boast about their position and show their presence, or made by the people of the cities to which the Augustales belonged, wanting to thank them for their dispensations.
It is considered that Augustus pursued political stability and the reconciliation of Roman society by resolving the political conflict and social split of Rome and by initiating a new system of Principate. Regarding his reconciliation policy he seemed to bestow priesthood on the freedmen who had been restricted from public and administrative position because of their former slavery.
Augustales got involved in emperor cult in a way either of dedicating monuments related to the emperor cult, or of devoting temples to a living emperor. The emperor cult was widely diffused by the Augustales and they are also related to public dispensations in their cities. They either repaired or built the public buildings of their cities, and either held dinners for the citizens or gave presents to them. Or they held favorite games in Roman society in those days and leave their properties to the city by will.
Such deeds of Augustales resulted in granting themselves a great honor; a distinguished seat, an honorable toga, and sometimes they could be attended by lictors with fasces. Their statues were erected in the most important part of a city to admire their accomplishments. Therefore the new priesthood, Augustales, was an ingenious and reciprocal device, which for emperor either made the emperor cult diffuse or helped the welfare of cities. Most importantly for freedmen, it incorporated them into the public life of society. It seems that the system of Augustales, which Augustus introduced for freedmen, made political stability, social reconciliation, and economic communication possible. Augustus made his political system firm and accomplished the communication and reconciliation of Roman society by the establishment of the priesthood, Augustales.
(Chonnam National University, Department of History / hellenkim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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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진리”의 가르침 그러나 “현실도피”의 종교: 독일 인도학자 레오폴드 폰 슈레더의 불교인식

저자 : 박용희 ( Park Yong-he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1-22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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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 서구에 불교가 알려지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은 한 독일 인도학자가 불교를 접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에서 도달한 불교이해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서구의 불교수용사는 비서구 사회 지성이 서구사회에 미친 영향의 대표적 예로 간주되곤 한다. 이때 그것은 “서양사회를 계몽한 동양사상”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서구지식인의 눈에 비친 불교는 그들 자신의 관점, 이해 등에 따라 자신의 방식으로 수용되고 의미 부여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세기말 레오폴드 폰 슈레더는 인도학자 중에서도 드물게 불교에 우호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발트해 지역 독일소수민족 출신으로 독일 루터파의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런 그가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기독교를 멀리하고 불교를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이나 그는 불교를 단순히 학술적 관심사 정도로 여겼던 것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에서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불교에 우호적이게 된 배경에는 자신의 종교적 문제의식이 있었다. 원래 종교적 지향이 강했던 그는 유럽에서 기독교가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하고 신앙적 진실성을 가진 대안종교를 찾고 있었으며, 마침내 불교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고, 그는 다시 기독교도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는 다시 기독교도임을 선언하게 되었으며, 이때 그는 철저하게 기독교적 구원에 대한 믿음과 함께 그 종교가 가진 우월성을 주장해 갔다. 동시에 그는 불교를 허무주의적 경향을 가지며, 따라서 “현실도피적 종교”라고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초기에 보였던 불교가 가진 신앙적 진실성에 대한 믿음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유럽인으로서 넘어설 수 없었던 종교적, 문화적 한계를 거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In the 19th century, Buddhism became known to the West and was becoming a concern of many intellectuals. This article reveals how a German indologist interested in Buddhism came to understand Buddhism. Often, the history of Buddhism in the West is regarded a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the influence of non-Western intelligence on Western society. It is considered as the epitome of "the Eastern Ideas that enlightened Western Society."
But there is no denying that Western intellectuals understand Buddhism in their own way from their point of view. Since Buddhism was known, they have understood Buddhism differently according to their needs. Sometimes it was considered a true religion, and sometimes it was an Asian religion with many problems. So, it should be said that cultural prejudice was inevitably forced to intervene in Western Buddhist understanding.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indologist in Austrian Wien Leopold von Schrader was a rare Buddhist-friendly intellectual. He was born into a German Protestant family in the Baltic region. However, as a young man, he suddenly turned away from Christianity and accepted Buddhism. He was paying attention to Buddhism not just as an academic concern, but as a matter of faith. In fact, his approach to Buddhism was due to a change in his religious perception. He thought Christianity was in crisis in Europe and was looking for alternative religions. And he thought Buddhism was an excellent religion with religious integrity.
But his choice did not last long. He declared himself a Christian again, and this time he argued for the superiority of Christianity. He became completely convinced of his faith in Christian salvation. At the same time, he began to think of Buddhism as a nihilistic religion and came to perceive Buddhism negatively as a religion of "escaping reality." So, he reached a conclusion completely opposite to the belief in the religious integrity of Buddhism, which was seen in the early days. In his appearance like this, he showed surely religious and cultural limitations that could not be overcome as a European.
(Dongguk University / pyh@dongg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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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페스트, 제국의학의 헤게모니를 바꾸다 - 신규환 저, 『페스트 제국의 탄생』(역사 공간, 2020) -

저자 : 유연실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5-239 (1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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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중락,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존 녹스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까지』 (흑곰북스, 2017)

저자 : 김성룡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1-246 (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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