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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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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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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37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292
대구사학
137권0호(2019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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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의 대재부(大宰府) 교섭

저자 : 조이옥 ( Cho Lee 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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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의 외교 관계는 大宰府를 매개로 한 관인 사이의 교섭 형태를 통해 유지하고 있다. 왕권이 직접 주재하는 조정의 외교의례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방식과 달리 九州 서북단의 쓰쿠시(筑紫)에 위치한 다자이후에서 이루어지는 신라와 일본의 공식 교섭은 문서 대신에 口頭로 국가적 의사를 교환하는 동시에 신라사신이 가져온 물품은 筑紫大宰의 관여 하에 중앙에 전달하는 등 이른 시기부터 전해오는 외교형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7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의 외교 교섭은 조공국과 피조공국 쌍방의 관계를 실제로 확인하는 외교의례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조공방식과는 다른 형식과 방식으로 이루어 졌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대체로 율령제 확립을 위한 내정 개혁에 매진하던 天武·持統년간 일본 조정은 신라사를 비롯한 외국사절을 다자이후에서 맞이하고 교섭하는 외교 형태로 견지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이 율령제 완성을 통한 일원적인 외교권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요컨대 다자이후 현지에서 이루어지는 신라사와 筑紫大宰 사이의 외교형식을 통해 7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상하 조공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隣國으로 交隣關係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화사상의 실현을 위한 전제로서 일본이 신라를 蕃國으로 인식해 의식상에서 상하관계의 禮를 요구하거나, 신라사신이 일본의 요구를 감수해 朝貢이라는 臣從의 禮를 취하는 등 번국으로 하위의 외교형식을 암묵적으로 감수한 것으로 이해한 기존의 선행 연구는 객관성이 결여된 일본 본위의 시각에서 비롯한 자의적·일방적인 해석임을 알 수 있다.


The diplomatic ties between Silla and Japan in the late 7thcentury take the form of negotiations among government officials though the medium of Dazaihu. The type of diplomatic etiquette in this era is characterized to follow the old tradition. For example, Silla and Japan had official negotiations at Dazaihu located at the north west tip of Kyushu. During the negotiation, officials from both countries exchanged opinions verbally instead of documents and goods from the Silla envoy were controlled by Tsukushi-dazai before delivered to the central government.
Therefore, the diplomatic negoti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the late 7thcentury were most likely conducted in away different from the way of paying atribute, which includes the process of confirming the relation between atributary state and the one taking atributein the diplomatic protocol. While focused on reformation of domestic affairs to establish the law system, Japanese government had a consistent diplomatic policy of having negotiations with Silla by the medium of Dazaihu. This is a good explanation that aunitary diplomatic right was not completed in Japan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the emper or'spower. 
In light of the type of diplomatic etiquette between the Silla envoy and Tsukushi-dazai, Silla and Japan are seen to have a favorable relationship as neighboring countries. With a premise for realization of sinocentrism, the precedent study interpreted that Japan requested the manners for the subordinate- superior relationship by considering Silla a savage country or a Silla envoy, under a tacit approval, accepted the low-grade type of diplomatic etiquette by paying a tribute, as a part of the manners for the king- subject relationship. However, it is revealed that the interpretation of the precedent study is arbitrary and unilateral as it is based on the Japan-centered perspective that lacks objec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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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현종대 군률(軍律) 제정과 전몰자(戰歿者) 예우

저자 : 임지원 ( Im Ji W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5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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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은 후대의 사서에서 고려를 중흥시킨 왕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당면한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고려 왕조의 틀을 굳건하게 다져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종의 즉위 초 정국은 순탄하지 않았다.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옹립된 고려 현종은 내적인 정치 기반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으며, 외적으로는 정변을 구실로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에 직면하였다. 고려군은 총사령관이었던 강조의 실책으로 패배하였고,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떠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피난길에서 현종은 갖은 고초를 겪었다. 호종하던 신하들 가운데 소수를 제외하고는 도망가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못한 지역 세력들에게 수모를 겪는 등 衆心이 흔들리는 상황을 직접 경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을 통해 현종은 직면한 대내외적인 과제를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여러 신하들의 기지를 통해 가까스로 위기를 극복한 현종에게 시급한 것은 대내외적인 안정이었다. 이를 위해 현종은 관료 및 군의 기강을 먼저 잡고자 하였다. 당시 시행된 군율 정비와 전몰자 예우 조처는 그러한 상황과 연결된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의 군율은 현종 2년(1011)에서 9년(1018) 사이에 제정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고려·거란 전쟁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즉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여러 조문들이 정비되어가면서 현종대의 군율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현종대의 군율 제정은 거란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절실하였던 군 기강 확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군율은 효율적으로 군을 통제하고 운용하기 위한 조항이므로 필연적으로 엄한 처벌 규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구속만으로는 충성심을 온전히 이끌어낼 수 없고, 지나치게 강한 규율은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따라서 현종은 10여 년 간 지속된 고려·거란 전쟁 과정에서 전공자 및 전몰자에 대한 예우 조처도 수시로 시행하였다. 군의 기강을 잡기 위해 군율을 제정하면서 동시에 전몰자에 대한 예우 조처를 적절히 취함으로써 군사들의 충성심을 제고하려는 전략이라 볼 수 있다. 현종은 위로는 공신들을 위무하고 군공자들을 포상하면서 충성을 이끌어내고자 하였고, 아래로는 다수의 장병들에 대한 위로와 더불어 전몰자에 대한 예우 조처까지 행하며 내부적 결속을 다지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는 고려·거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King Hyunjong is considered to be the monarch who brought the Goryeo Dynasty back to its peak by conquering the interior and exterior difficulties through his reign and secured the foundation of the Goryeo Dynasty. But King Hyeonjong's early reign was far from easy. King Hyeonjong's political ground was unstable, for his ascension to the throne was accomplished by Kangjo's rebellion, thus risking his legitimacy to a stake. What's more, the Goryeo Dynasty had to confront the massive invasion of Khitans at the same time.
The Army of the Goryeo Dynasty, which was drafted in a hurry, faced a crushing defeat, due to Kangjo's foolish misstep. In such urgency, King Hyunjong had to abandon the capital and fled to Naju. He had suffered many hardships on his way to Naju. Many subjects attended for the king had abandoned their liege and fled. The king also had to bear humiliations from the prominent local vassals, who showed their hostility to the king. King Hyunjong experienced the agitated public sentiment directly and realized that he must attend to the urgent tasks at hand: both interior and exterior matters.
After King Hyunjong overcame the crisis with the assistance from his royal subjects, the urgent priority was to stabilize both domestic and foreign situations. So, King Hyunjong decided to tighten the reins of bureaucratic and military discipline. According to the historical sources, the military law of the Goryeo Dynasty was established around the year of 1011 to 1018, which almost coincide with Goryeo-Khitan War. This fact shows that the military law of the Goryeo Dynasty was modified and organized due to wartime necessity. The enactment of military law in King Hyunjong's reign was to establish strict military discipline, which was direly required for the war against Khitans.
Considering that the military law is a principle required to control and manage the army, enforcement with severe punishment was inevitable. Yet regulation alone cannot secure loyalty, and harsh discipline can result in strong resistance from the soldiers in service. To prevent this situation, King Hyunjong rewarded those war veterans and fallen soldiers on a regular basis during the 10-years-war against Khitans. Such action was to minimize the resistance from the soldiers under regulation and secure their loyalty. A strategy to serve both ends he needed the most: establishing military discipline through the law enactment and inspiring soldiers' loyalty by honoring the dead and the veteran.
King Hyunjong tried to retain loyalty by soothing and rewarding contributors and planned to strengthen the internal unity by comforting and honoring soldiers and the war-deads. Such a carrot-and-stick strategy was one of the factors that lead Goryeo to take some upper ground in the war against Khitans. Furthermore, the military prowess enhanced through military law and the organized reward system had greatly influenced the aftermath of the war, allowing King Hyunjong to maintain the Goryeo-Khitan relationship and stabilize his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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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여성사에 대한 인식과 새로운 여성사 서술 방향 모색 - 전근대 시기를 중심으로 -

저자 : 신유아 ( Shin You A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7-9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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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교육과정이 시행된 이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고려와 조선의 가족제도와 여성의 지위에 관한 내용을 별도의 주제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에는 1부1처제가 원칙이었고 딸도 호적에 연령순으로 기재되었으며, 재산도 아들과 똑같이 상속받았던 것 등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일상 생활면에서 남성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확산되면서 장자 위주의 상속이 이루어지고 재혼한 여성의 아들은 과거 시험을 칠 수 없게 되는 등 여성에 대한 대우가 낮아지게 되었다는 내용이 서술의 기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6차 교육과정 시기로부터 이미 수십년이 흘러 새로운 연구 업적의 축적이 상당히 이루어졌고, 여성사를 보는 시각도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행 교과서에서도 그 서술 기조가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원칙적으로' 1부1처제를 취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재산 상속의 경우에도 조선의 경우 18세기 중엽까지도 균분상속이 나타나고 있는데, 17세기를 기점으로 마치 조선 사회 전체가 장자 위주의 상속으로 바뀐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여성의 지위가 낮아진 원인을 오직 성리학의 확산에만 있는 것처럼 인식하도록 하는 것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사용될 역사 교과서에서 여성에 관한 내용은 여성의 지위가 '가정 내에서' 어느 시대에는 높았고, 어느 시대에는 낮았다는 것을 단정적으로 서술하기보다는, 사회ㆍ경제적인 측면에서 여성들이 어떤 처우를 받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학생들로 하여금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After the seventh curriculum was implemented, high school history textbooks began to cover the family system of Korea and Joseon and the status of women under separate themes. In general, women's status during the Goryeo Dynasty was high, but it was said that women's status decreased due to the spread of Sunglihak(性理學: Ju-Hee's teachings, a kind of study of Confucianism) after the late Joseon Dynasty. The reason for the claim that the status of women in the Goryeo Dynasty was high was the Goryeo Dynasty wedding customs was monogamy in principle, secondly, a daughter was listed on the family register in order of age, and son and daughter inherited the same property. However, since the 17th century, the spread of Sunglihak(性理學) philosophy has led to decrease the treatment of women. For exemple, the eldest son inherited most of his parents' property and the son of a remarried woman, who cannot take an administrative test. From ancient times to the Joseon Dynasty, however, there was no time in our history when it was not a principle of monogamy. in the case of property inheritance, even though even the middle 18th century of the Joseon Dynasty shows a uniform division, it should be reconsidered to describe the entire members of Joseon as if they had inherited their wealth to their eldest sons from the 17th century. It also does not seem appropriate to allow a woman to perceive the reason for her lower status as if it were only in the spread of Sunglihak(性理學).
In the history textbooks to be used in the future, rather than stating that women's status was high at some time and low at some time, the focus should be on clarifying the unfair treatment historically imposed on women and allowing students to develop critical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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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파리장서운동과 성주유림

저자 : 권영배 ( Kwon Young Ba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5-12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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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이다. 이 운동은 1919년 2월 19일부터 6월경까지 약 4개월 동안 전개되었다. 파리장서운동의 발단은 두 가지 중요한 계기적 사실에서 기인하였다. 하나는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에서 유림대표가 빠졌던 데 대한 유림층의 충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친일인사들이 「독립불원서」라는 글을 작성하여 일본에 전달하려 했던 음모에 대한 유림층의 분노 때문이었다.
「파리장서」는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학계의 통설상 '김황본'이 '곽종석본'의 저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는 '곽종석본'은 '장석영본'을 저본으로 하였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전개 과정에서는 '곽종석본'이 서울에서 호서계열의 '김복한본'을 만나면서 '최종본'으로 수정되고, 이것이 상해로 가서는 '상해본(발송본)'으로 확정되어 파리평화회를 비롯한 각 유관기관 및 국내 향교에까지 발송되었다. 아쉽게도 상해본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파리장서운동은 김창숙을 비롯한 성주유림들이 주도하였다. 또한 성주는 전국 군단위에서 가장 많은 서명자를 배출하였다. 그것은 성주지역의 전통적인 유림의 학통과 이와 관련된 인맥과 문중 인사들이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의 3.1운동이었다. 3.1만세운동이 일본을 대상으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라면, 파리장서운동은 세계열강을 대상으로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는 성주유림이 있었다.


Pari Jangso Undong is The movement for petition of Korean independence by the Confucian literati. This movement had developed for four months between around February 19 and June of 1919. The petition movement was provided by the tow following facts: Confucian literati's sense of loss that their representatives were excluded from the thirty-three "representatives of all the Korean people" who signed the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their resentment of the pro-Japanese collaborators who presented their "declaration against independence" to the Japanese imperialists.
After several revisions, Pari Jangso was finally completed. It started as the "Chang Sok-yong edition". It then was revised to the "Kwak Chong-sok edition", which added to the "Kim Pok-han edition" to be the "final edition." This "final edition" was revised to the "Shanghai edition" in Shanghai. By now the "Shanghai edition" has not been confirmed. The conventional wisdom is that the draft of the "Kwak Chong-sok edition" is regarded as the "Kim Hwang edition", but it is contrary to the fact. It is obvious that in the course of drawing up, the "Chang Sok-yong edition" was the draft of the petition.
Pari Jangso Undong was led by the Confucian literati from Songju. The Songju region produced fifteen signers of the petition. This resulted from the fact that in the Songju region school ties of the traditional Confucian literati were very strong and the yangbanfamilies succeeded them generation after generation.
In sum, Pari Jangso Undong was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the Confucian literati. While the March First Movement declared Korean independence against Japan on a national scale, Pari Jangso Undong sought to plead Korean independence to the world as well as declare Koreans' will for independence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 Confucian literati from Songju played the central role in the momentous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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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운동에서 나타난 지식인들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일고찰: 대구·경북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저자 : 정태식 ( Jung Tai S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9-16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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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3·1운동 당시는 물론 3·1운동을 전후해서 나타난 기독교 종교지도자들의 지식인으로서의 위치와 역할에 대하여 역사사회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구체적으로는 지식인의 새로운 사상과 인식의 수용관계에서 나타나는 기존의 인식체계나 사회정치적 상황 등과의 변증법적 조응관계에 대하여 지식인 사회학과 지식사회학적 측면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인식의 실천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식인의 역할과 한계에 대하여 고찰한다. 먼저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관계, 그리고 이들 국가와 피선교지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의 사회정치적 위치와 역할 등에 대하여 논한다. 다음으로 기독교를 수용한 한국인 지식인들의 교회 정치화와 민족화 움직임, 그리고 이를 막고자 하는 선교사들의 교회 탈정치화와 탈민족화 정책 전개, 그리고 교회 탈지식인화와 대중종교화를 위해 설계된 평양대부흥운동 등에 대하여 논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종교지도자들 주축의 3·1 만세운동과 대구의 3·8만세운동에 대하여, 그리고 이후 민족자치교회 선언을 통해 반선교사 활동을 펼친 이만집 목사 등의 대구 기독교 종교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하여 검토한다.


This study tries to make an interpretation with the perspectives of historical sociology about the status and roles of Christian leaders as intellectuals at the time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s well as before and after the movement. Specifically, from the aspects of sociology of knowledge and sociology of intellectuals, we discuss on the dialectical relations with existing cognitive systems or social and political situations in the reception of new ideas and perceptions by intellectuals, and examine the roles and limitations of intellectuals. For this, first, we review the US-Japan relation over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socio-political status and roles of American Protestant missionaries in the last period of Korean Empire. Next, discussion is being made on the movement of politicization and nationalization of the church by Korean intellectuals who embraced Christianity as their new meaning system, on the movement of de-politicization and de-nationalization of the church by missionaries who wanted to prevent the movement of nationalization and politicization of church, and on the Pyongyang revival movement designed by the missionaries for the de-intellectualization and popularization of church (building of mass religion). Finally, we try to analyze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March 8th Independence Movement of Daegu led by Korean religious leaders, and specifically the roles of Christian leaders of Daegu represented by Rev. Lee, Man-jip who, after the Independence Movement, by declaring Korean National Autonomous Church, operated the anti-movement against the American mission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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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국 거주 난민의 구술사: 타자화 경험과 인종문제

저자 : 박상희 ( Park Sang He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3-208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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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난민들이 한국에서 거주하며 어떻게 배제를 경험하는지 타자화(othering)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이를 난민의 목소리를 통해 탐구했고 인종문제와의 관련성을 논하였다. 이글은 구술사(oral history) 연구방법론을 따랐으며, '난민이 한국에서 겪은 배제 경험에 대해 직접 구술 증언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국에 거주하는 난민 16명을 심층면담하였다. 또한 문헌연구방법을 통해 한국의 난민정책을 분석하여, 연구참여자 발화가 터해 있는 객관적인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술 자료를 이해하고자 했다. 연구결과, 난민들은 한국인과 동등한 인간 혹은 시민으로서 한국사회에 소속되지 못했다. 난민들이 경험하기에 한국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난민을 한국인과 다른 존재로 규정했는데, 열등성을 부여하고, 사회문제로 구성하는 측면이 있었다. 열등성은 '한국어를 못하고, 한국인이 아니며 못 사는 나라의 불쌍한 사람'이라는 특성이었다. 사회문제는 '난민이 “불법”이나 가짜, 거짓말쟁이' 등 한국인(우리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는 '그들, 난민들'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면대면 상황 뿐 아니라 정책에 기인하기에 사회구조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난민은 무시와 혐오, 차별을 경험했다. 인종은 난민의 타자화 경험에 변이를 주었다. 이글은 한국의 발전주의 국가 논리가 인종주의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경제적 요인뿐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요소도 중요하게 작용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글은 한국이 난민에 대한 인종주의 사회라고 평가하기에는 이르며 포용사회를 위한 논쟁과 논의의 과정 중이며, 이를 위한 이론적·정책적 함의를 제안한다.


This research analyzes how refugees experience exclusion in Korea, focusing on “othering”, and discusses their relevance to racial issues. This was explored through refugee voices, following the methodology of oral history research, which means “writing history from below through oral testimony of refugee experiences in Korea.” In-depth interviews with 16 refugees residing in Korea were conducted. By analyzing the refugee policy in Korea through the literature review method, the objective social context in which the research participants spoke was analysed. The findings show that refugees find that they barely belong to Korean society as equal humans or citizens as Koreans. Koreans have identified refugees as being different existences from Koreans in their everyday lives, giving them inferiority and constructing them into social problems. Inferiority is characterized as 'miserable persons from poor countries who are not korean and unable to speak in korean.' Social problems consisted of “they, refugees,” who may be a problem for Koreans(us), being “illegal”, fake refugees or liars. Othering is a socially structured phenomenon because it not only happens in face to face situation, but also originate in problems of policy. In the process, refugees experienced being ignored, hated and discriminated against. Race gave variations to the refugees's othering and exclusion experiences. This research points out that Korea's developmentalism can provide the basis for racism; not only economic factors but also cultural factors such as Korean language and Korean ethnicity are found to be important. However, it is too early to evaluate Korea as a racist society, as it is in the process of debate and discussion for embracement of refugees. Theoretical and policy implications are discussed to contribute to an embracement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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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묘지명을 통해 본 대원제국 말기의 정국 -'새인적답홀(賽因赤答忽) 묘지명'의 분석을 중심으로

저자 : 권용철 ( Kwon Yong Cheo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9-23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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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사인치다쿠의 묘지명을 중심으로 대원제국 말기의 정국을 살펴보았다. 至正 11년(1351)에 汝州, 穎州를 중심으로 발생한 홍건적의 반란은 제국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제국 정부 측에서 반란군을 일거에 제압하지 못한 것은 제국의 군사력 약화를 표면적으로 드러냈고, 이에 지방에서 개인적으로 군사를 모은 세력들이 정치적ㆍ군사적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반란이 일어난 河南江北行省 일대 출신의 군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대대로 河南 固始縣에 거주했던 사인치다쿠가 '義兵'을 모아 활약했던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인치다쿠는 역시 河南에서 거병한 차간테무르의 휘하에서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제국 조정은 그 전공을 인정하여 빠른 속도로 그의 관품을 높여주었고, 최종적으로 從1品의 관직과 正1品의 文資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개인적으로 병사들을 모아 활동을 시작했던 사인치다쿠가 국가의 고위 관료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했다. 사인치다쿠의 아들인 쿠케테무르는 자신의 외삼촌인 차간테무르의 휘하에서 활약했고, 차간테무르의 '養子'가 되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至正 22년(1362)에 차간테무르가 암살되면서 쿠케테무르는 그 군대를 이끄는 지위에 올랐고, 제국 조정도 이를 승인했다. 쿠케테무르는 이후 제국 조정의 정치 분쟁에 개입하면서 중서좌승상이 되었다. 쿠케테무르가 이렇게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부친 사인치다쿠의 戰功이 존재했다. 사인치다쿠 묘지명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고, 또한 원대 말기 정국의 흐름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쿠케테무르는 明代의 자료에서는 주로 '王保保'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고, 이는 쿠케테무르가 漢人이고 원대 말기에 몽골인이 아닌 漢人 군벌이 등장하여 제국을 좌지우지했다는 인식이 형성되는 데에 일조한 바 있다. 하지만 사인치다쿠 묘지명을 통해서 쿠케테무르가 몽골 바야우트 씨족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고, 쿠케테무르의 부친이라고 여겨졌던 차간테무르조차도 漢人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묘지명을 통해서 正史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들을 밝혀낼 수 있다는 점이 새삼 드러나는 대목이다. 차후에도 사료의 부족과 왜곡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묘지명 자료의 발굴이 계속 이루어져 원대 말기의 정국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현재 정리되어 있는 묘지명, 석각 자료들에 주목하고 기존 正史 등과 면밀하게 비교 분석하는 연구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 범주는 원대 말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中國前近代史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In this paper, I reviewed the state of the end of the Yuan Empire with the epitaph of Sain-Čidaqu. In 1351 the Red Turban rebellion occurred around the provinces of Ruzhou(汝州) and Yingzhou(穎州), and this incident was the cause of the fundamental shake of the Yuan Empire. Yuan government could not suppress Red Turban rebels, it revealed the weakening of the empire's military power, which led to emergence of individual military forces in the province. It is especially noteworthy that warlords from the Henan(河南) began to appear. Under this circumstances, Sain-Čidaqu who lived in Henan for generations, gathered military forces and acted as “righteous army”(義兵).
Under leadership of Čagan-Temur, who was also a strong warlord in the Henan, Sain-Čidaqu made great achievements in suppressing the insurrection forces. The Yuan Court acknowledged his achievements and rapidly promoted his status. This meant that Sain-Čidaqu, who had personally gathered soldiers and started activities, was recognized as a high-ranking official of the Yuan Dynasty. Köke-Temur, the first son of Sain-Čidaqu, played an active part under his uncle Čagan-Temur and was so trusted to be Čagan-Temur's “adopted son”. When Čagan-Temur was assassinated in 1362, Köke-Temur became the leader of the army, and the Yuan Court approved it. Köke-Temur later intervened in the political disputes of the Imperial court, and became the Junior Chief Councillor of the Central Secretariat(中書左丞相). The background of Köke-Temur's rapid growth was his father, Sain-Čidaqu. The Sain-Čidaqu epitaph reveals this historical background, and it is also a source of information about the situation of Late Yuan dynasty.
Köke-Temur appeared mainly the name Wangbaobao(王保保) in sources of Ming, which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the notion that Köke-Temur was a non-Mongol(Chinese) warlord. However, Sain-Čidaqu epitaph clearly confirms that Köke-Temur is a Mongol Baya'ut clan, and even Čagan-Temur, who was considered the father of Köke-Temur, was not a Chinese. Likewise, epitaph reveals the facts that were not revealed in the official history. In the future, it is hoped that excavation of epitaph that can overcome the shortage and distortion of sources. And I also hope that epitaph will help to analyze the politics of the Late Yuan Dynasty from various viewpoi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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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러시아 역사에서 해양 공간 다시보기

저자 : 박원용 ( Park Wony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37-26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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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역사학계에 비해 해양공간을 러시아의 역사와 결부시켜 파악하려는 시도는 러시아 역사학계에서 상대적으로 미흡했다. '내부 식민화'만을 강조하면서 해양공간이 러시아 역사에 어떻게 작용했고 또한 그것에 대한 반작용은 어떠했는지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한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성찰을 반영하는 3권의 연구서를 중심으로 해양공간이 러시아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다각도에서 제시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러시아 해군의 건설을 표트르의 서구화 정책에만 한정하지 않고 초기 로마노프 왕조의 시도부터 소급해서 보아야 한다는 필립스의 연구는 '내부식민화'라는 시각에서 대륙으로의 팽창만을 서술하는 러시아의 역사상에 대한 재고를 요구한다. 해양공간의 통제력 확보를 위한 시도는 러시아의 역사에서 짧지 않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필립스는 지적한다. 다양한 종족의 교역공간으로 기능하면서 그들의 복합적인 정체성 유지를 가능케 했던 흑해라는 해양공간이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패권경쟁 및 주변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각축의 공간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 킹의 연구 또한 시사점이 적지 않다. 흑해를 중심으로 벌어진 장기적 관점의 역학 관계를 검토하여 킹은 해양공간이 내포하고 있었던 '개방성'이 '폐쇄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북태평양으로의 러시아 팽창을 해양 생태계와 지역 원주민에게 미친 영향과 결부시키면서 환경사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 존스의 연구는 해양공간에 대한 연구가 가지는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18세기 북태평양 연안의 생태계 변화를 목격했던 유럽 지식인들의 경고를 또한 소개하면서 존스는 당시의 우려가 전 지구적 차원의 우려사항이었다고 주장한다. 생태계의 그러한 파괴는 북태평양 연안에서 볼 수 있었던 바다소와 같은 해양동물을 멸종시킬 정도로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This review essay attempts to recast the Russian history through the reviews of three books focusing on the maritime spaces related to Russia. The reasons for the choice of books are that from my perspective they are reflecting main research trends of maritime history of the west and portraying the characteristics of Russian history as well.
Phillips's book The Founding of Russia's Navy helps us to change long-established conception on the Russian navy. We usually have the notion that before Peter the Great the Russian monarchy did not sought to create the strong navy, the notion of which Phillip tries to revoke in his book. Phillip points out that the period of the first two kings of Romanov dynasty can be called the transitional period of the navy culture in Russia. While the princes of Kiev and Moscow principality sought to obtain just economic benefits by running ships on rivers and seas, the tsars of Romanov dynasty directly had something to do with making and navigating ships, which meant that with the start of the Romanov dynasty the modern task of creating state navy was launched. For fulfilling the task it was necessary to 'modernize' the state system and to have a ruler breaking down old habits. It was the Peter the great who could achieve the undertaking. Phillip describes the process of Peter's success with the interaction of four elements such as impetus, technology, environment and resources.
By describing the long ranges of the Black Sea's history, King's The Black Sea gives us the insights on the conflicts surrounded with the control of Black Sea regions. If we attempt to portray the history of the Black Sea regions in a larger context, it is no longer possible to identify various groups of people with the definition of nation states consolidated from the middle of the nineteenth century. The occupation, religion and the simple geographical differences of the region had influenced far greater on the people than the nation and state in a larger context. King's monograph makes another contributions to recently highlighted topics such as nation, periphery and border by utilizing one of the maritime spaces of Russia.
Jones's Empire of Extinction shows us another aspect of Russian imperialism by relating the expansion of the Russian state power to the extinction of maritime animals in the North Pacific. Maritime animals, especially sea cows, were finally disappeared due to the economic greed from merchants as well as from the state. But this kind of extinction was not just confined to the regional extermination. It was the disappearance of maritime animals in a global context, which was also given to the Russian policy makers by the western naturalists participated in the exploration on the North Pacific. Jones's book is the good example of extending the maritime spaces of Russia to the world environment, which is still having clear imprints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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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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