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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Journal Stadies of Dong Hak

  • : 동학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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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598-7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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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0)~56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565
동학학보
56권0호(2020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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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옥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청산기포'의 의의

저자 : 임형진 ( Hyungjin Rim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4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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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옥천은 동학농민혁명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소위 제 2차 기포로 알려진 옥천지역의 청산에서 실시된 총기포령은 한순간에 동학농민혁명을 전국화시켰다.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은 사람이 하늘같이 대접받는 사회를 향한 후천개벽의 혁명을 높이 들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옥천의 동학에 대해서는 심도있는 연구가 부족했다. 여전히 논쟁의 소지가 있는 최초의 혁명거사일과 장소의 문제, 해월 최시형의 혁명 관여도의 문제, 동학군의 지휘권 문제 그리고 혁명의 전국화된 일자와 장소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옥천에 동학의 전파는 조재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재벽포는 충청도 남쪽 일대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는 해월 최시형의 청산 문바위골을 소개해줄 정도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옥천지역의 동학도를 이끌고 금산의 혁명에 참여하는 등 이 지역의 대표적인 동학접주였다. 청산에 머물던 해월 최시형은 전주화약 이후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내정간섭에 나서는 일본에 대한 대일 항전을 선언하고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총기포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날이 1894년 9월 18일이었다.
9월 18일 청산기포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이며 둘째, 똑같은 구호와 똑같은 이상사회를 향한 목표를 가지고 진행된 혁명성이고 셋째, 동학조직의 일원회된 지휘체계의 확인이었으며 끝으로 전국 동학도들의 통합성이다. 지난 2014년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구호가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였다. 그 첫 단추인 전국화가 실현된 정소가 바로 옥천의 청산이다.


Okcheon(옥천), Chungcheongbuk-do, is a region closely related to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otal gipo orders(총기포령) carried out in the clearing of the Okcheon area In a momen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nationalized. Finally,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a high praise for the revolution toward the society of hucheongaebyeog, where people are treated like heaven. However, in-depth studies have been lacking in Okcheon donghak. These are still the first controversial issue of revolutionary days and places, the issue of Haewol Choe si-hyeong's involvement in revolution, the issue of command of the Donghak army, and the issue of the nationalized date and place of revolution.
The propagation of Donghak in the Okcheon area was centered around Cho Jae-byeok(조재벽). The Chojaebyeokpo, created by him, was the most powerful force in the south of Chungcheong-do. He was trusted enough to introduce Cheongsan munbawigol(청산 문바위골) to Haewol Choe si-hyeong. At the time of the first Donghak peasant revolution, he was the representative Donghak Jeobju(접주) in the region, leading Donghak army in the Okcheon area and participating in the Geumsan(금산) revolution. During the stay in Cheongsan, Choi Si-Hyeong declared a protest against Japan and total gipo orders to Donghak army nationwide. It was September 18, 1894.
The significance of the Cheongsan gipo(청산기포) on September 18 is as follows. First is the nationalization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Second, it is a revolutionary process with the same slogan and goal toward the same ideal society. Third, it was to confirm the unified command system of the Donghak organization. Lastly, it is the integrity of Donghak-do nationwide. The relief created in commemoration of the 120th anniversary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2014 was the nationalization, globalization, and futureization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Cheongsan in the Okcheon area is the first place where nationalization, the first step, has been real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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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옥천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진압군 활동 - 『갑오군정실기』 기록을 중심으로

저자 : 정을경 ( Eulkyung Jeong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1-7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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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지역은 보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서 중요한 곳이다. 보은은 보은집회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한 곳이며, 1893년 10월부터 약 1년 동안 최시형이 기거하면서 동학교인을 통솔한 곳이다.
옥천의 동학농민군들의 움직임은 1894년 3, 4월 경으로 짐작된다. 옥천을 포함한 충북지역 출신의 동학농민군들은 전라도 내려가 전봉준부대에 합류했던 것으로 보이며, 4월 중순 이후 대부분 해산하였다. 이 시기부터 옥천의 동학농민군은 인근 지역의 동학농민군들과 호응하면서 활동하였고, 최시형이 있던 청산리를 중심으로 동학교인들이 세력을 넓혔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첫 기포는 7월 18일에 크게 봉기하였다고 하나, 관련 활동상은 파악되지 않는다.
최시형은 9월 18일 총기포령을 내렸고, 옥천의 박석규를 비롯하여 옥천 일대에서 활동하던 접주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의 첫 활동은 10월 2일로 확인된다. 10월 19일을 즈음하여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이 모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0월 중순에서 하순까지는 전봉준 부대와 손병희 부대가 공주에서 한다리 '한솔벌' 전투를 시작으로 효포전투, 이인전투 등을 전개했다. 이때 옥천의 동학농민군들이 손병희 부대로 들어가 전투를 전개했고, 한편 동학농민군 주력이 공주 방면으로 이동하고 난 이후의 옥천 주변의 동학농민군들은 10월 중순부터 회덕, 연기, 청주 등지를 거쳐 옥천으로 집결하였다.
이들은 증약전투에 이어 11월 5일에는 청산 석성리에서, 11월 8일에는 문바위골에서 전투를 벌였고 피해가 컸다. 특히, 충북 남부지역에서 민보군에 의한 동학농민군의 탄압이 가장 성행했던 지역이 옥천이었다. 옥천지역에서 양반세력과 동학농민군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공주에 있던 전봉준 부대와 손병희 부대는 10월 말경 논산으로 내려갔고, 11월 6~7일경 다시 공주로 북상했다. 이들은 남북접이 연합하여 우금치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고, 결국 실패했다. 한편 11월 8일 옥천의 양산장에 동학군 몇 천명이 모여 관군과 접전을 벌였고, 50여명이 희생당했다.
11월경 동학군과 관군에게 옥천은 중요한 장소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옥천을 중심으로 일본군은 11월 9일 옥천에서 금산, 11월 16일 문의에서 옥천, 18일 옥천에서 영동, 아산 등으로 이동했다. 옥천지역의 동학농민군의 피해도 극심했다. 11월 5일을 전후하여 옥천지역의 피해가 컸고, 11월 말경에서 12월 초에는 옥천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이 관군과 접전을 펼쳐 큰 피해를 입었다. 옥천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대표 인물은 박정빈, 김재빈, 김진오, 원준상, 육상필 등으로 파악된다. 이후 옥천 동학농민군들은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Okcheon is an important place as the epicenter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with Boeun. Boeun is the place that it began by Boeun Rally and Choi, Sihyeong lived in and directed Donghak believers for about a year since October 1893.
Donghak peasants' movement in Okcheon is estimated to have begun around March and April 1894. Donghak peasants from Chungbuk including Okcheon seems to have gone to Jeolla-do and joined Jeon Bongjun Army and most of them dispersed after Mid April. Donghak peasants in Okcheon responded to the ones near it were active since then. And it is judged that Donghak believers widened their influence with Cheongsan-ri that Choe, Sihyeong stayed in as the center. After that, they say the first uprising on July 8 was great, but the related activities are not understood.
Choe, Sihyeong ordered the whole uprising on September 18 and the district assembly leader who had been active in the whole area of Okcheon as well as Park, Seokgyu in Okcheon joined it. Their first activity was checked as October 2. Donghak peasants in the whole area gathered and developed their activities around October 19. Starting with 'Hansolbeol' Battle in Handari, Gongju, Jeon Bongjun Army and Son Byonghi Army developed Hyopo Battle and Iin Battle from mid to mate October. At this time, Donghak peasants in Okcheon joined Son Byonghi Army and developed battles. Meanwhile, the main force of the Donghak peasant army moved to Gongju and then the ones around Okcheon gathered in Okcheon via Hoedeok, Yeongi, Cheongju, etc. since mid October.
They had battles in Seokseong-ri on November and Munbawigol on November 8 after Jeungyak Battle and were baddly damaged. Especially, it was Okcheon that was the place that Minbogun in Southern Chungbuk most suppressed the Donghak peasant army. It implies that conflicts between the noblemen and the Donghak peasant army went far deeper in Okcheon.
Jeon Bongjun Army and Son Byonghi Army that had been in Gongju went to Nonsan late October and again came back to it aroung November 6 to 7. They fiercely fought in Ugeumchi Battle as Donghak Northern and Southern Assembles united and finally failed. Meanwhile, thousands of people of Donghan Army gathered and back and forth battled with the government army in Yangsanjang in Okcheon on November 8 and more than 50 people were sacrificed.
Okcheon is judged to have been an important place to Donghak Army and the government army around November. The Japanese army moved from Okcheon to Geumsan on November 9, from Muneui to it on November 16, and from it to Yeongdong, Asan, etc. on 18 with it as the center. The Donghak peasant army in Okcheon was extremely damaged. Okcheon was badly damaged before and after November 15 and the Donghak peasant army was badly damaged by having a close battle with the government army in the whole area of Okcheon from late November to early December. The representative persons who suppresse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he whole area of Okcheon are judged to be Park, Jeonbin, Kim, Jaebin, Kim, Jino, Won, Junsang, Yuk, Sangpil, etc. After the Donghak peasant army in Okcheon went to Songnisan 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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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공주전투 시기 남접과 북접농민군의 동향

저자 : 정선원 ( Seounweon Jeong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7-11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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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는 일본군·관군 연합군에 맞서 최대의 농민군 세력(남접농민군 즉 전봉준군, 북접농민군 즉 손병희 등 동학교단측 농민군)이 집결하였으며 일부 전·현직 관리들과 유생들도 동학농민군에 동참하여 투쟁한 사건이었다.
이 연구에서는 공주전투 시기에 동학농민군 주력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남접농민군과 북접농민군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연구를 위해 관변측 기록,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나오는 일본측 기록, 공주·논산 인근의 유생들의 기록을 조사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공주전투 18일의 기간 동안 중요 전투와 남접농민군과 북접농민군의 동향의 일부를 파악했다. 특히 이인전투가 10월 23일, 11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있었고 10월 23일 이인전투는 남접농민군이 주도했고, 11월 8일의 이인전투는 북접농민군이 주도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동학교단 관련 역사서에 공주전투의 하나로 나오는 '옥녀봉전투'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또한 공주전투 즈음 남접과 북접농민군의 첫 회합시기가 공주전투 직전의 논산이 아니고 공주전투 시기인 효포전투(10월 24일~25일)의 공주전 쟁터였다는 사실에 접근하였다.


The Battle of Gongju(公州) during the Donghak(東學) Peasant Revolution which took place in Gongju, in the Chungcheong province, was a struggle that united the forces of the Donghak Peasant Army on a large scale against the allied forces of the Japanese army and the royal forces of Joseon dynasty. Among the forces of the Peasant Army were the Namjob Peasant Army(南接農民軍), organized by Jeon Bong-Jun(全琫準), and the Bukjob Peasant Army(北接農民軍), led by Son Byeong-Hi(孫秉熙) who was the leader of the Donghak religious community and also some of the actual and former offici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philosophers of Confucianism.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trends in the activities of the Namjob Peasant Army and the Boukjob Peasant Army which played a decisive role in the process of forming the main forces of the Donghak Peasant Army during the Battle of Gongju.
For this purpose, research was carried out in the government archive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archives of the Japanese legation in Korea (『주한일본공사관기록』) and the archives of the Confucianists in Gongju and Nonsan.
The important battles and activities of the Namjob Peasant Army and the Bukjob Peasant Army during 18 days of the Battle of Gongju were discovered by the author. In particular, it was proved that the Battle of Ein(利仁) in Gongju took place twice, and that the Battle of Ein on October 23 was fought by the Namjob Peasant Army and the Battle of Ein on November 8 was fought by the Bukjob Peasant Army. It has been confirmed that the Battle of Oknyeobong(玉女峰) in Gongju, which had been presented in the history books of the Donghak religious community, as one of the battles of Gongju, had actually existed. It was also clarified that the first meeting between the Namjob Peasant Army and the Boukjob Peasant Army at the time of the Battle of Gongju did not take place in Nonsan, but it took place on the Hyopo(孝浦) battlefield in G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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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순철 동요집의 음악적 연구

저자 : 김정희 ( Jeonghee Kim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7-15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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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정순철의 두 동요집 『갈닙피리』와 『참새의 노래』를 중심으로 그의 음악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와 그 이면에 대해 음악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연구방법은 먼저 정순철의 삶과 음악관을 살펴본 후, 두 동요집 수록곡의 음악적 요소를 음역, 도약 횟수, 형식, 리듬형, 기법적 특성 등으로 나누어 분석할 것이다.
이 연구의 내용은 첫 번째, 정순철의 삶과 노래이다. 두 번째는 『갈닙피리』와 『참새의 노래』 수록곡의 음악적 분석이다. 세 번째는 정순철 작품의 시대적 함의와 한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그의 천도교 내 활동은 크게 천도교소년회와 색동회 활동으로 대표되며, 경성보육학교의 녹양회를 비롯하여 동덕여학교, 경성보육학교, 무학여고, 성신여고 등에서 교육활동을 통해 어린이 운동을 이어갔다. 그의 음악관의 바탕에는 최시형의 가르침과, 민중의 정서와 생활이 자리하고 있었다. 노래의 외형적 아름다움보다 내용적 이해와 표현을 더 중시하였고, 실용적 목적보다 마음을 정화해주는 동요의 심적 기능을 더욱 중시하였다.
두 번째, 정순철의 두 동요집에는 7.5조 계열이 가장 많으며, 그 외 4.4조 계열과 4.3.3조가 있다. 박자는 4/4와 2/4가 가장 많으며, 그 외 3/4과 6/8가 있다. 특정 리듬형을 반복하는 특징이 있으며, 대부분 장조이며, 『참새의 노래』에는 요나누키 단음계가 쓰인 곡이 있다. 대체로 무반음 5음계를 바탕으로 하며, 대부분 정종지를 1회만 쓰고, 음역은 1옥타브~1옥타브+완전4도 범위 내에 있다. 한도막형식과 두도막형식이 가장 많고, 그 외 작은세도막형식이 있다. 선율 반복을 즐겨 하지 않는 대신 특정 리듬형을 반복하거나 동형진행을 활용하여 통일성을 추구한다. 『갈닙피리』에 비해 『참새의 노래』에서 음악적 요소가 전반적으로 쉬워지고 다양해지며, 우리 민족 고유의 운율인 4.4조 계열이 늘어난다. 동극 활동은 정순철의 음악이 발전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그의 동요들은 당시 어린이들에게 귀한 영혼의 영양소가 되었으며, 그러한 성과와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음악 요소에서 전통적 양식을 계승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유입된 요소들 위주로 구성된 점은 시대적 한계이다. 미발굴 작품을 발굴해내고 납북 이후의 생애를 추적하는 일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from musical perspective the various elements that make up his musical world and its background, focusing on Soon-cheol Jeong's two works for children, Galnip´piri and Song of the sparrow. For the research, we will examine the life and musical thought of Soon-cheol Jeong, and then analyze the musical elements of his works by vocal range, number of disjunction, form, rhythm pattern, and characteristics of composition technique.
This study is divided into three parts. First part is Soon-cheol Jeong's life and song. Second part is the musical analysis of the songs in his two works for children. Third part is the implications of the era and limitations in his work and the problems that need to be solved.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his activities in Cheondogyo were largely represented by the Cheondogyo Boys' Association and the Saekdonghoe's, and he continued the movement for children through educational activities at Dongdeok Girls' School, Gyeongseong Child Care School, Muhak Girls' High School, and Seongsin Girls' High School. On the basis of his musical thought were Si-hyeong Choi's philosophy and the people's sentiments and life. It placed more emphasis on understanding and expression of content than on the external beauty of a song, and more on the psychological function of children's songs to purify the mind than practical purposes. Second, the songs in his two works, 7.5 is the most common syllabic rhythm, and there are also 4.4 and 4.3.3 in syllabic rhythm. 4/4 and 2/4 is the most common meter, and there are also 3/4 and 6/8. It is characterized by repetition of fixed rhythms, most of which are in major, and Song of the sparrow has a song in yonanuki minor scale. It is largely based on pentatonic scale, most of which use authentic cadence only once, and the range covers from one octave to one octave and perfect fourth.
One-part song form and two-part song form is the most common form, and there are also small three-part song form. He doesn't like to repeat the same melody pattern, but he uses fixed rhythms or sequence to pursue unity. Compared to Galnip´piri, in Song of the sparrow the musical elements generally become easier and more diverse, and the use of Korean unique syllabic rhythm 4.4 is increased. Composing music for musical drama had been a major motivation for the development of Soon-cheol Jeong's music. Third, his songs for children became a nutrient of the soul to the children and such achievements and spirits should be inherited to this day. It is the limitation of the era that the traditional style is not inherited in the musical elements and consists mainly of the elements introduced from Japan. Finding undiscovered works and tracing his life after the abduction by North Korean troops is a task that needs to be solved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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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동학혁명운동 당시 금강 중상류 척왜항전 - 호서동학군 을대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저자 : 이상면 ( Sangmyon Rhee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1-223 (6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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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甲午)년 가을 척왜항전에서 전봉준의 호남우도 동학군과 남한강에 기반을 둔 손병희의 호서동학군 갑대가 공주성을 공격하다가 무참히 패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금강중상류 호서동학군 을대가 청주 진남영에 대적하면서 일본 중로군에 승전을 거듭하며 이루어낸 공적은 모른다. 10월 29일 공주에서 일본 서로군이 연합동학군에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문의의 중로군 본대가 공주 전장으로 이동해 동학군의 배후를 치려고 하자, 옥천의 호서동학군 을대가 마달령을 넘어 봉계곡에 진입한 중로군 지대를 격파하고 문의와 청주를 치는 등 본대의 후방을 교란해 공주행을 중도에 포기하게 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는데도 여태껏 알려져 있지 않았다. 관련 자료가 부족했고, 그나마 희귀하게 존재하는 자료도 연구가 미흡했던 탓이었다.
조선정부는 공주를 치는 연합동학군을 주시해, 호서동학군 을대의 협력된 전투에 관심이 적어 기록을 남긴 것이 별로 없었다. 을대 동학군 지도자들은 전란 중 자료를 남기지 않았고, 전란 후에도 호된 탄압에 다들 숨어버려 기록이 거의 없었다. 일제패망과 해방으로 탄압은 끝났지만 80고령의 생존자는 침묵했다. 그들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21세기 초로 참전자들이 타계한지 오래라 후손들도 관심이 없었다. 1980년 대청호 담수로 전투현장인 문의 부근 지명진(芝茗津)과 증약 부근 마달령 입구 봉계곡(鳳溪谷)마저 수몰되어버려, 을대 동학군의 존재조차 잊혀갔다.
지명진과 봉계곡 두 전장이 물에 잠기고 관련 국내 자료조차 없는 가운데, 일본군의 간단한 전투상보에 의존하다보면 전투의 실상과 함의를 가늠하기 어렵게 된다. 당시 일본 지휘관이 쓴 전투상보와 「동학당정토약기(東學黨征討略記)」가 있어 일본 중로군과 부속 관군이 호서동학군 을대와 대청지역에서 대등한 전투를 벌인 사실과 후장총으로 무장한 동학군 별동대의 역할이 상당했던 것이 드러났지만, 정작 국내에는 관련 자료가 거의 없어 연구가 제대로 되기 어려웠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호중동학군(湖中東學軍) 즉, 호서동학군 을대의 선봉에 서서 전투를 지휘한 별동대장(別動隊長) 이종만(李鍾萬)의 장손으로 생존시 채집한 증언을 비롯해서 가족과 문중에 전래된 일화가 있어, 당시 관군 일본군이 남긴 자료와 함께 종합적으로 연구해왔다. 그런 증언과 고사는 필자의 기억과 메모로 존재하는 것으로 대부분 미세하고 희미한 것이지만 동학군 측 자료가 거의 없는 가운데 그런 유산이나마 있었기에, 기존의 자료에서 직접 드러내지 않는 부분을 투시해 파악할 수 있었고, 아무도 모르는 전투현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2020년 6월 26일 옥천군 청산면에서 열린 동학학회 기조강연에 즈음하여 대청호에 수몰된 두 전투 현장을 거듭 답사하고, 지역유지들과 고증을 거쳐,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동학전란의 귀중한 부분을 그나마 재현해 보았다. 그 작업은 마치 옛적 부서진 토기 파견을 주어모아 원형을 복원하는 것 같이 어려운 일이었다. 사료 부족으로 인해 불가불 전후관계와 제반사정을 고려하여 추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점이 있어 안타까웠으나 향후 자료 발굴과 논의로 보완할 수 있기 바란다.


It has been known that during the 1894 Anti-Japanese War, the United Army of the North South Donghak, attacking the natural castle Gongju the Provincial Capital, was brutally defeated by the Japanese invaders along with the puppet Korean Royal Army. However, the contribution by the 2nd Corps of the North Donghak Army, who led series of victorious battles against the Japanese in the upper middle basin of the Geum River(錦江), has not been properly appraised. The 2nd Corps, commanded by Rhee Jong-man(李鍾萬) on 29th of the 10th month in lunar calendar, stopped Minami(南小四郞)'s Japanese army heading to Gongju(公州) by attacking Cheongju(淸州) in their rear, right after defeating the Japanese branch in the Bonggye(鳳溪) passage. The 2nd Corps could win due to the leadership of Rhee who commanded the Detached Forces(別動隊) equipped with the same breechloading rifles that the Japanese used. He successfully lured the enemy into the wedged passage for a besiege, and drove them away to hills at Jimyeong(芝茗) on the southern bank of the Geum in the north. Minami(南) the field chief had to give up the march to Gongju at the report by the defeated field officer that they could not stop the 2nd Corps getting across the Geum to attack Jinnamyeong(鎭南營) the stronghold in Cheongju.
The then Korean court left many documents over the United Army of Donghak attacking Gongju, but they left scantily on the role of the 2nd Corps. The surviving Donghak leaders virtually did not leave any memoir, due to the ensuing surveillance till the end of WWII. Scanty surviving insurgents chose to keep silent. It was in the early 21st century that the Korean government restored their fame as patriotic combatants as well as honorary revolutionaries. In 1980 the battle fields in the basin of the Geum were submerged in the Daecheongho(大淸湖). Over the decades researchers depended upon the two simple combat reports left by the Japanese field officers. A memoir of the then commanding officer Minami(南) became available to Koreans later, but it was still one sided.
Fortunately the present writer happens to be the grand son of General Rhee Jong-man the field commander who conducted 2nd Corps in the battles. He tried to write the real stories through the synthetic analysis of the materials and the testimonies of his grand father et al over the bat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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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옥천 지역의 동학의 전파와 확산

저자 : 성강현 ( Kanghyeon Sung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5-267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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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옥천 지역의 동학 전파와 동학 조직의 확산을 살펴보는 데 있다. 연구 결과 충청도의 동학 유입은 최제우의 창도기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충청도의 동학 유입은 1874년 해월의 단양 이주로부터 본격화하였다. 해월은 단양을 거점으로 충청도와 전라도, 경기도까지 교세를 넓혀나갔다. 1883년을 시점으로 충청도의 도인들이 동학교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손병희·손천민·박인호·서인주·서병학·조재벽·임규호·권병덕 등이 당시 입도한 인재로 1892~3년의 4차에 걸친 교조신원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옥천의 동학 유입 시기는 임규호와 조재벽의 활동으로 보아 1886~1887년경으로 보인다. 옥천과 청산은 충청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늦은 시기에 동학이 전해졌지만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1890년대에 들어와서 옥천과 청산의 동학도들이 관의 수탈 대상이 될 정도로 교세가 급성장하였다. 옥천 동학의 중심인물은 박석규이고 청산의 중심인물을 박원칠이었다. 박석규와 박원칠은 1893년 2월의 광화문복합상소에서 봉소인으로 참여할 정도로 교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박석규는 보은 교조신원운동에서는 옥의대접주로, 박원칠은 청의대접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에 동참하여 손병희 휘하에서 우금치, 청주, 청산, 보은 북실, 영동 용산시전투 등 의 참전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박석규는 청주병영에 체포되어 참형 되었으나 박원칠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옥천 지역의 동학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교주 최시형을 정점으로 대접주- 수접주-접주의 조직을 갖추었다. 각 접에는 접사와 성찰이 있었고 포덕을 담 당하는 포덕장과 육임의 직책을 맡은 도집과 집강 등이 있었다. 그리고 동학 농민혁명 시기에 포군, 운량도총감, 선봉장, 군자금 담당 등 군사 활동과 관련 한 직책이 늘어났음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옥천 지역의 동학 조직은 동학농민혁명 이전에는 종교적 조직이었지만 동학 농민혁명 시기에는 급격히 전투조직으로 변모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pread of Donghak and its organization in Okcheon. As a result of the study, the influx of Donghak in Chungcheong-do began from the opening period of Je-woo Choi. However, the influx of Donghak to Chungcheong-do began in earnest from Choi Si-hyung's immigration to Danyang in 1874. Based in Danyang, Choi Si-hyung expanded his ties to Chungcheong-do, Jeolla-do and Gyeonggi-do. As of 1883, the church members of Chungcheong Province began to play a key role in the church. Byunghee Son, Cheonmin Son, Inho Park, Inju Seo, Byeonghak Seo, Jaebyeok Cho, Gyuho Lim, and Byeongdeok Kwon were talented people who entered the period at the time and played a key role in the four rounds of Gyojosinwon Movement(a movement to reinstate the unjust death of a religious founder) in 1892-3 years.
Okcheon's inflow of Donghak seems to be around 1886~1887 based on the activities of Gyuho Im and Jaebyeok Cho. Okcheon and Cheongsan showed rapid growth, although Donghak was passed on at a relatively late period compared to other areas of Chungcheong-do. In the 1890s, the relationship between Okcheon and Cheongsan became the targets of the exploitation of the pavilion. The central character of Okcheon Donghak was Park Seok-gyu, and the central character of Cheongsan was Park Won-chil. Park Seok-gyu and Park Won-chil played a key role in the denomination so that they participated in the Gwanghwamun Gyojosinwon Movement in February 1893 as Bongsoin(봉소인). Park Seok-gyu served as a Okeuidaejeobju(옥의대접주) in the Boeun Gyojosinwon Movement, and Park Won-chil served as a Chongeuidaejeobju(청의대접주). They participated in the second phase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participated in the battles of Woogeumchi, Cheongju, Cheongsan, Boeun Buksil, and Yongsan Market in Yeongdong under Son Byeong-hee. For the failure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Park Seok-gyu was arrested and sentenced to death by the Cheongju barracks, but Park Won-chil's actions are not revealed.
As the power of Donghak in the Okcheon region grew, the organization of serving Daejubju(대접주), Sujubju(수접주) and Jubju(접주) was established with the peak of the headmaster Choi Si-hyung. There were affixes and reflections at each side, and there were a Podeokjang(포덕장) in charge of spread and a Dojip(도집) and Jibgang(집강) in charge of the post of Yuk-im(육임). In addition, it can be confirmed from the records of participants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at the number of positions related to military activities such as artillery, Unryangdo Superintendent운량도총관), Seonbongjang(선봉장), and military funding increased during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Donghak organization in the Okcheon area was a religious organization before the Donghak Peasants Revolution, but during the Donghak Peasants Revolution, it rapidly transformed into a combat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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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수운 최제우의 콘텐츠 활용에 대한 시론(試論) -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저자 : 우수영 ( Sooyoung Woo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71-30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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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한국 자생(自生) 문화인 동학(東學) 정신의 현대적 계승을 위한 전략으로써 최제우의 역사적ㆍ문학적 콘텐츠를 공간형 콘텐츠로 활용하고 유통하는 방안을 제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콘텐츠는 문화라는 콘텐츠 영역에 머물지 않고 현실적인 지역 문화 산업과 관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기획-제작-유통의 전체 분야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가공과 창출까지의 과정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연구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 연구에서는 최제우 관련 역사 기록 및 문학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논한 후 이에 바탕하여 대구 소재 공간형 콘텐츠의 창출 과정이 진행된다. 영남지역은 한국 자생 문화 '동학'의 발상지이며 그중 특히 대구는 동학 교조 최제우(1824-1864)가 1864년 좌도난정(左道亂政)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된 곳이다. 당시 최제우의 체포와 처형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및 『천도교 창건사』에 기록되었다. 또한 이광수(李光秀)는 『개벽』수록소설 「거룩한 죽음」에서 최제우의 대구 처형 장면을 형상화하였다. 이들 세 자료들은 대구 소재 최제우의 공간형 콘텐츠의 바탕이다.
이 연구의 결과로 대구 소재 최제우의 공간형 콘텐츠가 구상되었다. 즉 대구 소재 최제우의 공간형 콘텐츠에는 수용공간ㆍ공감공간ㆍ체험공간이 구성 되고, 각 공간의 핵심가치를 전달하는 소장 콘텐츠가 배치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 한국 자생 문화인 동학에 대한 자긍심과 동학의 혁명 정신에 공감하는 대구 지역의 장(場)이 마련될 것이라 기대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uggest a plan of applying and distributing Choe Je-u(崔濟愚)'s historical and literary contents to the space-type contents as a strategy for modern succession of the Donghak(東學) Spirit, which is Korea's homegrown culture. These cultural contents are being associated with the realistic regional cultural industry without remaining in the content zone called culture. In relation to this, it is the point of time that is demanded a research available for uniting the process from understanding the whole fields of planning, production and distribution up to processing and creating into one.
This study is discussed a meaning and a value of the historical record and the literary work relevant to Choe Je-u, and then is progressed the creation process of space-type contents placed in Daegu on the basis of this. The Yeongnam region is the cradle of 'Donghak' that is Korea's homegrown culture. Among the rest, Daegu is especially a place where Choe Je-u(1824-1864) as the founder of Donghak was executed under the name of a crime dubbed Jwadonanjeong(左道亂政) in 1864. What Choe Je-u was arrested and executed at that time was recorded in 『Joseonwangjosilrok(朝鮮王朝實錄)』and 『Cheondogyo-changgeonsa(天道敎創建史)』. Also, Lee Gwang-su(李光秀) embodied Choe Je-u's scene of the Daegu execution in 「The Holy Death」, which is a novel of being included in 『Gaebyeok(開闢)』. These three materials correspond to the background of Choe Je-u's space-type content situated in Daegu.
As a result of this study, Choe Je-u's space-type content in Daegu was suggested. In other words, Choe Je-u's space-type content in Daegu will need to be operated properly for each spatial function with being secured the acceptance space, the empathy space and the experience space. This study is expected to lead to being likely arranged a place of Daegu area that empathizes with the revolutionary spirit of Donghak in addition to a pride of Donghak, which is Korea's homegrown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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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카리스마적 권위와 제도설립 그리고 확산 - 동학·천도교의 성립과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

저자 : 김남희 ( Namhui Kim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09-347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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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은총으로 받은 선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던 '카리스마'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3세기 이후 성직제도가 정착되면서, 카리스마 개념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잊혀졌다. 이후 20세기 초 막스 베버(M. Weber)가 카리스마 개념을 다시 도입하면서, 카리스마는 이제 그리스도교의 울타리를 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일반화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버의 연구를 시작으로 카리스마 개념에 대한 정의와 활용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베버가 카리스마 개념을 사회학적 개념의 틀로 정립하였다면, 슈무엘 아이젠슈타트(S. N. Eisenstadt)와 에드워드 쉴스(E. Shils)는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을 재정의하고 사회변동 과정의 요인으로 확대 적용했다. 이는 카리스마 개념이 종교가 사회를 변동시키는 요인으로서 단순히 종속변수가 아님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급격한 사회변동에 영향을 받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종교 운동'(new religious movement)의 경우, 초기 교세를 확장시키는데 있어 창교자의 카리스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신종교인 동학·천도교 안에서 카리스마의 속성과 변용과정에 주목하였다. 구체적으로 동학·천도교가 성립되고 전개되는 과정을 베버의 카리스적 권위(Charismatic Authority)와 아이젠슈타트의 제도설립(Institution Building) 그리고 쉴스의 중심과 주변(Center and Periphery)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로써 창교자의 카리스마는 종교가 일상화(routinization)되는 과정 안에서 사라지거나 퇴색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설립을 통해 중심에서 주변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밝히는데 연구 목적이 있다.


“Charisma”, which had originally been used with the meaning of “gifts received by God's grace”, was employed as an important concept in the early Christian community. Since the establishment of sacerdotalism in the third century, the concept of charisma had been forgotten in Christian communities. Later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reintroduction of this concept by Max Weber initiated its generalized use in the fields of politics, economy, society, and culture beyond the border of Christianity.
Starting with Weber's research, various studies were attempted regarding the definition and utilization of charisma. Weber may have established the concept of charisma as a conceptual framework of sociology, whereas Shmuel N. Eisenstadt and Edward Shils redefined this concept and extended its application as a factor influencing the process of social change. This shows that the concept of charisma is a factor by which religions change society, not merely a dependent variable.
Above all, for “new religious movements” that are influenced by and sensitively respond to radical social change, the charisma of religious founders plays an important role in expanding congregation in the early stages. Therefore, the present study was focused on the attributes of charisma and the process of its transformation in Donghak and Cheondogyo, which are the most representative new religions formed in South Korea. In specific,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Donghak and Cheondogyo were examined with a focus on the concepts of Weber's charismatic authority, Eisenstadt's institution building, and Shils's center and periphery. In doing so, the study aimed to verify that the charisma of religious founders did not disappear or fade during the routinization of religions, but was rather spread from the center to the periphery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institu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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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방정환 아동문학의 시대적 무의식과 천도교적 함의 -'삼손' 이야기 리메이크를 중심으로-

저자 : 김영진 ( Youngjin Kim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49-38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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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조선일보에 발표한 소파의 리메이크 동화를 통해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적 무의식을 발견하는 데 있다. 소파는 성경의 '삼손'을 조국을 위해 장렬히 전사한 '눈먼 용사 삼손'으로 그려낸 바 있다. 그런데 다시 리메이크하여 '용사 삼손'의 민족적 색채를 지우고 개인적인 고통에 분노하다가 죽어간 「삼손」을 재발표한다. 이 일은 하나의 사건으로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적 무의식과 연결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질문의 답은 상호텍스트성에 따라 원천텍스트가 되는 성경의 '삼손'과 소파의 '눈먼 용사 삼손 이야기'를 분석한 다음, 조선일보의 「삼손」이 객관적 이야기 전달을 추구한 이유를 시대적 맥락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 연구의 내용은, 첫째, 신앙심이나 신학적으로밖에 설득할 수 없는 성경의 '삼손'을 민족적 영웅으로 부활시킨 소파의 「눈먼 용사 삼손」을 비교 분석하였다. 작가는 원천텍스트의 불확정성 영역을 구체화하는 문학적 운용을 통해 용사 '삼손'을 민족적 영웅으로 재창조해냈다. 둘째, 앞선 작품에서 이룩한 서사문학의 미적 가치를 포기한 조선일보의 「삼손」을 스토리텔링으로 분석했다. 이유는 '줄거리 요약사건'을 발생시킨 지점에서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적 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성경의 '삼손'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듯 줄거리 요약사건을 발생시킨 것은 일제의 삼엄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방정환과 천도교는 일제의 특별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의 결과는, 소파는 1920년대라는 특정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아동문학을 제작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선 아동문학가이자 천도교 교인이었다. 그가 아이들을 가정과 학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도하고자 했던 배경에는 천도교가 있었다. 당시 천도교는 일제 탄압을 받던 조선의 현실에서 조선의 역사와 조선 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예술교육을 통해 소년들의 민족·독립의식을 고취하고자 힘썼다. 조선 사람에게 조선 공부란 밥과 같다는 동학사상이 예술을 통해 아이들에게 심미적 감성을 심어주려 했던 소파의 아동교육 사상이다. 소파가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야 할 어린 주역들에게 요구되는 비판적 사고보다는 감성이 풍부한 공동체적 지향이 강한 서사를 양산한 이유가 그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iscover the unconsciousness of the times of colonial Joseon through a remake of Sofa published in the Chosun Ilbo. Sofa once portrayed “Samson” in the Bible as a blind warrior who died heroically for his country. The remake, however, erases the national color of Samson and republishes him die out of anger at personal pain. This incident can be an event linked to the unconsciousness of the times of colonial Joseon. The answer to this question was to analyze the “Samson” of the Bible and the “Samson Story of a Blind Soldier” of Sofa, which are the source text according to their intertextual nature, and then to find out why the Chosun Ilbo's “Samson” pursued objective storytelling in the context of the times.
The contents of this study were first compared and analyzed “a blind warrior Samson” of Sofa, which revived the biblical “Samson” as a national hero, which can only be persuaded by faith or theology. The author recreated the warrior “Samson” as a national hero through literary operations embody the uncertainty realm of the source text. Second, the Chosun Ilbo's “Samson,” which gave up the aesthetic value of narrative literature achieved in its previous works, was analyzed as storytelling. The reason is that the unconsciousness of the times, called colonial Joseon, can be found at the point where the “story summary incident” occurred. Just as the author objectively conveys the Bible's “Samson” story, it was to avoid the Japanese colonial rule's strict censorship that caused the plot summary incident. At that time, Jeonghwan Bang and Cheondogyo were under special surveillance by the Japanese.
The result of this study showed that Sofa was children's writer and Cheondogyo believer led the production and dissemination of children's literature in the middle of a certain period of the 1920s. The Cheondogyo was behind his attempt to guide children in different ways from home and school. At that time, Cheondogyo tried to promote the sense of national independence of the boys through art education that tells the history of Joseon and the stories of Joseon great men in the reality of Joseon under Japanese oppression. For Joseon people, studying in Joseon is like steamed rice, or children's education on Sofa, which were intended to instill aesthetic sensibilities in children through art. This is why Sofa has produced a narrative with a strong emotional community rather than critical thinking required by young leaders who are supposed to lead a new era in the situation of colonial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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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동학사상에 내재된 네오휴머니티

저자 : 김영철 ( Youngchul Kim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85-399 (1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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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동학의 새로운 인간론인 네오휴머니즘의 핵심인 네오휴머니티의 의미를 밝힌다. 네오휴머니티 개념을 통해 동학사상에 내재된 독창적인 의미를 밝힌다.
이 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동학과 서양의 실존주의적 인간론의 차이점을 다뤘다. 둘째, 동학의 인간론과 서양의 인간중심주의의 차이점을 다뤘다. 셋째, 동학의 생명사상이 지닌 특징을 살폈다.
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동학은 서양의 실존주의적 사상이 지닌 한계를 극복한 사상이었다. 둘째, 동학은 서양의 인간중심주의로 인해 발생한 문제점들을 해결한 사상이었다. 셋째, 동학은 인간의 사유 영역을 전(全)지구적으로 확장한 사상이었다.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clarify the meaning of neo-humanity, the core of neo-humanism, a new human theory of Donghak. Through the concept of neo-humanity, the original meaning of Donghak thought is revealed.
The contents of this paper were as follows. First, the difference between the Donghak thought and the Western existentialist humanism was dealt with. Second, the difference between the anthropology of Donghak thought and the anthropocentricism of the West was dealt with. Third, the characteristics of the life thought of Donghak thought were examined.
The conclusion of this paper was as follows. First, the Donghak thought was a thought that overcame the limitations of Western existentialist thought. Second, the Donghak thought was an ideology that solved the problems arising from Western anthropocentrism. Third, the Donghak thought was a thought that expanded the sphere of human thought to the whol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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