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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Japanese Military and Culture

  • : 한일군사문화학회
  • : 사회과학분야  >  정치/외교학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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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8-8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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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3)~29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385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0호(2020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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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일본의 대응전략 분석

저자 : 전진호 ( Jeon Jinho )

발행기관 : 한일군사문화학회 간행물 :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2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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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일본의 대응전략을 분석하고 있다. 즉 일본은 북한 핵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 왔는가?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일본은 어떠한 구체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분석했다.
북한의 핵개발을 억제할 수 있는 직접적 수단이 없는 일본은 미일 동맹과 유엔을 통해 북한을 제어하는 간접적인 방법에 의존해 왔다. 일본은 북한의 핵개발이 시작된 1990년대 초부터 북한 핵을 심각한 안보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미일동맹의 강화와 미국의 핵우산을 통해 북한 핵에 대처해 왔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되면서 일본은 유엔과 미국의 대북 재제에 참가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국의 독자적인 재제를 강화하고 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외교안보 역량 및 군사력 강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북한을 억제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도 초기 단계에서부터 일본은 북한의 비핵화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6자회담에서도 일본은 외부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는 아베 정권이 북한과의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납치문제에 대해서 북한이 아무런 성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북한에 대해 유엔 안보리 규제의 성실한 이행을 촉구하면서 독자적인 제재를 강화하는 것으로 6자회담에 임했다. 6자회담 결렬 이후도 일본은 대북 강경정책으로 일관했다.
최근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등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이 한국을 경제제재 등으로 압박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과 전략적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이 아니라, 일본의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국가라는 일본의 인식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counterstrategy of Japan of denuclearization of North Korea. Japan, whom does not have the direct measures to suppress the nuclear development of North Korea, has depended up on the indirect method which controls North Korea through the US-Japan alliance and the United Nation. Since the early 1990s when the nuclear development of North Korea has begun, Japan recognized the North Korean nuclear as serious security threat, and has dealt with the North Korean nuclear weapons through nuclear umbrellas of the US and the reinforcement of US-Japan alliance. As the restrictions of the international society of North Korea strengthened, Japan participated in the remanufacture toward North Korea with the UN and the US, and on the other hand, strengthened the native independent reproduction. Also, proposed policies to aggressively suppress North Korea through diplomatic security capacity and strengthening of military power.
Meanwhile in Japan, opinions, which prioritizes the build of peace regime with Republic of Korea more than denuclearization of North Korea, are rising. Rather than the denuclearization of North Korea which requires considerable amount of time and agreements, the build of peace regime with Republic of Korea due to the conclusion of the peace treaty which closes the state of truce of Republic of Korea is much simpler.
However, as the Korea-Japan relationship degenerates due to the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compulsory manpower draft, etc., Japan has been suppressing Republic of Korea with economic sanctions and such. The awareness of Republic of Korea by Japan which sees Korea not as an alliance whom shares the strategic values, but a country with negative effect toward Japan's national security come across as negative toward the peace regime system of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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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자위대, 존재적 모순의 역사

저자 : 손경호 ( Son Kyengho )

발행기관 : 한일군사문화학회 간행물 :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1-5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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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일본 자위대가 평화헌법과 배치되어 존재적 모순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자위대의 발전 과정을 조망함으로써 이 모순에 나타나는 변화 양상을 추적하였고 특별히 일본 정부가 존재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하여 특정한 시기에 한정하지 않고 형성으로부터 최근 시기까지를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그 자체로 지닌 모순에 착안하여 변화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제2차 대전에 패배함으로써 평화헌법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6·25전쟁이 발발함으로 인해 헌법과 배치되는 자위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자위대의 형성은 근본적으로 헌법에 배치되는 것으로 존재적 모순이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처음 미국의 주도로 추진되었으나 일본 정부 역시 안보 상황에 따라 이를 수용하였다. 다만 일본 정부 스스로 헌법과의 모순을 다소나마 해소하기 위해 전수방위 원칙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본 정부는 산업 발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자위대의 전력을 육성하는 이중 노선을 선택하였다.
자위대는 안보투쟁을 지난 뒤 소득 배증의 사회적 여건 속에서 급격하게 규모를 확장해 갔다. 이 추세는 1970년대 들어 오일 쇼크의 충격을 받게 되었으며 자위대 전력의 목표로 기반적 방위력 구상이 탄생하였다. 이는 자위대의 지나친 확장을 억제할 수 있는, 헌법과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기제였다. 하지만 신냉전이 도래하면서 일본은 불침항모로서 소련의 군사적 팽창을 견제하고 적극적으로 씨레인 방어를 추구하면서 기반적 방위력 구상의 틀을 넘어서는 전력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 시기 자위대의 존재적 모순은 두 가지 측면에서 더욱 심화하였다. 자위대의 전력이 단순한 자위 차원의 조직이 아니라 웬만한 국가의 군대 이상의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아울러 자위대는 현장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쓰야연구와 같이 법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방편을 구사하여 실질적인 군대의 기능에 충실한, 결과적으로 헌법과는 더욱 모순된 존재로 변화하였다.
냉전 종식 이후 자위대는 적극적으로 법제를 바꾸어 대외적인 활동 기반을 넓혀 가면서 북한의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 보다 근본적으로는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과 가이드라인을 수정하면서 새로운 개념을 속속 도입하였다. 아베 정부는 이러한 자위대의 활동을 정당화하고 보장할 수 있는 안보법제를 제정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헌법을 개정하여 자위대를 헌법에 근거한 조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위대가 헌법에 명시되고 향후 국방군으로 개명되어 자위권과 함께 헌법에 근거를 갖게 된다면, 자위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근본적으로 헌법과의 존재적 모순을 해결하게 될 것이다.


This study attempts to shed light on the developmental history of Japan's Self Defense Force(JSDF) as a contradictory organization to its Peace Constitution and the role of Japanese government to solve the contradiction with special care. To this end, this study includes the whole period of JSDF's history from its creation to current situation for the scope of research not to finite specific eras.
Because of the defeat of the Imperial Japan at the end of World War II, Japan was able to retain the Peace Constitution. However, with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Japan should arm herself by launching JSDF, which had been banned by the constitution. This was initiated by the U.S. however, Japan played an important role to strengthen the JSDF. In fact, Japanese governments sought a measure to reduce the constitutional contradiction like Dedicated Defense Principles, meanwhile the same Japanese governments adopted proactive military build-up plans to develop industries.
Since the end of the security struggle, the JSDF had been able to increase the size of its forces rapidly amid double income boom, however, with the Oil Shock, the JSDF established Basic Defense Idea which was a measure to deter over expansion of JSDF as a result, a method to reduce the contradiction with the constitution. The idea ended in vain, because the JSDF turned into an invincible carrier to check Soviet naval expansion and concentrated on securing sea-lanes. There were dual aspects which worsened contradictions: the JSDF became overpower armed forces of neighboring countries, and the JSDF sought ways to solve defense problems beyond their laws and rules, like Mitsuya Study.
After the end of the Cold War, the JSDF has widened its scope of activities by changing security laws, amended Guide Lines with the U.S., and launched new defense concepts to deal with North Korean nuclear and long-range missile developments and the rise of China, a more fundamental threat. The Abe Ministration has made an effort to established legislation to accommodate the new horizon of JSDF' activities, and, eventually, to set the foundation of the JSDF in the constitution. If the JSDF becomes National Defense Forces based on the constitution, the Japan's military will solve the contradiction fundamentally, but in the opposite direction to its ow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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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미국의 점령정책과 요시다 정권의 전후 구상

저자 : 이종국 ( Lee Jongguk )

발행기관 : 한일군사문화학회 간행물 :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9-8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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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미국의 점령정책이 시작되면서, 그것이 일본의 전후 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그리고 연구범위는 점령기 부터 요시다 정권기를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주요내용은 점령당국의 대일 점령정책과 일본정부의 대응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미일 양국이 어떠한 논의를 전개하였는가 외교정책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요시다 시게루의 선택이 일본의 전후구상의 틀을 형성하였으며, 전후 일본의 보수정치 형성에 역할을 하였음을 설명하였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는 조기강화에 따른 명예스러운 국제적 지위획득을 우선시하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냉전정책의 전개의 필요성에 따라 강화와 안전보장문제가 불가분의 관계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주로 점령통치의 전개되면서, 요시다를 중심으로 일본의 보수 세력이 결집하였음 보았다. 동시에 미국과 일본의 현실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연합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식민지 청산이나 역사문제는 냉전의 강화로 후퇴하였다.


This study analyzes how the US occupation policy began, and how it affected Japan's post-war initiatives. And the scope of the research was from the occupation period to the Yoshida regime. The main contents explained the foreign policy history of the discuss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Japanese occupation policy and the Japanese government's response.
He also explained that the choice of Shigeru Yoshida formed the framework of Japan's post-war concept and played a role in the formation of conservative politics in Japan after the war. At that time, Shigeru Yoshida set a goal to prioritize the acquisition of a prestigious international status due to early strengthening. However, in accordance with the necessity of deploying the Cold War policy in the United States, the strengthening and security issues were inseparable.
In addition, as the development of occupation rule, the conservative forces of Japan were concentrated in Yoshida. At the same time, coalitions were formed around the realists of the United States and Japan. As a result, colonial liquidation and historical issues retreated with the intensification of the Cold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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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해병대 전략문화와 행동 양식에 관한 연구

저자 : 차동길 ( Cha Donggil )

발행기관 : 한일군사문화학회 간행물 :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5-11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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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대한민국 해병대(이하 해병대라 함)의 역사와 전통, 국민에게 각인된 인식, 정체성과 조직문화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전략문화를 탐구할 목적으로 연구하였다. 전략문화는 곧 행동 양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특정 군(軍)의 전략문화 연구가 전무(全無)한 상태에서 해병대를 연구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육·해·공군과 달리 해병대는 독자적인 전장 영역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작지만 강한 국민의 군대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화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 신념, 이념, 관습, 규범, 전통, 상징체계, 지식 및 기술체계 등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구성원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을 특정 조직집단에 적용 시 이를 조직문화라 하고, 문화가 국가안보 및 군사 영역에서 국방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전략문화라 하는데 특정 군(軍)의 전략문화 연구가 중요한 것은 그 군(軍)의 전투 수행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해병대는 창설로부터 6.25 전쟁 및 베트남 전쟁 참전과 해군에 통폐합되는 역사적 과정을 배경으로 형성된 내생적 조직문화와 일본 육전대 대화혼(大和魂) 정신과 미국 해병대의 Semper Fidelis(Semper Fi) 정신의 영향으로 형성된 외생적 조직문화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조직문화를 배경으로 전략문화가 형성되었고, 이는 해병대만의 특별난 행동 패턴으로 표출된다. 해병대의 행동 양식은 공격적이고 위계적이며, 민(民)에게는 양(羊)처럼, 적(敵)에게는 사자처럼 행동한다. 해병대원들은 해병대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가장 위험한 곳에서 선봉군임을 자처하며, 미국해병대와의 동질의식이 매우 강하다는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국가는 해병대를 어디에서, 어떻게 운용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ore the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 (hereinafter referred to as the Marine Corps) history and tradition, the perception imprinted on the people, identity and organizational culture, and the strategic culture that exists based on the values it seeks. I believe that strategic culture holds research value because it results in a pattern of behavior. The reason why the Marine Corps has been selected for this research is that unlike the Army, Navy and Air Force, the Marine Corps does not have an exclusive field of battle and yet, is considered a small but strong military of the people. In general terms, culture is an abstract and macroscopic concept that influences a member's behavior, as it refers to the collective values, beliefs, ideologies, customs, norms, traditions, symbols, knowledge and technological systems shared by the members of a society. Applied to an organizational group, this concept is called organizational culture, and when it influences certain policy decisions regarding the military or national security it is called strategic culture. The study of strategic culture of a specific branch of the military is important because it affects the way of battle. Since its inception, the Marine Corps was influenced by the endogenous organizational culture formed against the backdrop of the historic process of engaging in the Korean War and the Vietnam War, and merging with the Navy, as well as the exogenous organizational culture formed by the Imperial Japanese Navy Land Forces' spirit of Yamato and the United States Marine Corps' spirit of Semper Fidelis. Thus, strategic culture was formed against this backdrop of organizational culture, which is expressed as a special pattern of behavior unique to the Marine Corps. The way Marines wage war is aggressive and hierarchical, and behaves like sheep to the people and like lions to the enemy. Marines regard the Marine Corps honor as their highest value, claim to be a spearhead force in the most dangerous places, and have a very strong sense of homogeneity with the U.S. Marine Corps. Therefore, the nation will have to consider where and how the Marine Corps will be effective to ope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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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국방개혁의 성공을 위한 영향요인 분석 및 평가 -노태우 정부 이후 주요 국방개혁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김기원 ( Kim Kiwon ) , 이상현 ( Lee Sanghyun )

발행기관 : 한일군사문화학회 간행물 :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5-14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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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은 현재가 잘못되었다는 인식하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조정해 나가는 것이다. 한국의 국방개혁 또한 1960년대 박정희 정부로부터 10여 차례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다시 개혁할 정도의 문제를 식별하였는지 그리고 국방태세의 향상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시 된다. 또한 당면한 상황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당시 정부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전 정부의 정책을 부정하는 등 의례적인 정책으로 추진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한국의 주요 국방개혁 사례들에 대한 분석 및 평가를 통해 향후 국방개혁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교훈을 도출함으로써 정책추진에 도움을 주고자 실시되었다.
이를 위해 국방개혁과 관련한 국내의 연구와 미국의 국방개혁 사례 등에 대한 선행 연구물들을 살펴보았으며, 이를 통해 국방개혁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영향요인으로 ① 개혁상황 인식, ② 지도력, ③ 자원, ④ 수용성 등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 4가지 주요 요인을 토대로 노태우 정부 이후 실시되었던 주요 국방개혁 사례에 대해 분석 및 평가를 해 본 결과, 그간의 국방개혁 추진에 적절성과 타당성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재 추진 중인 「국방개혁 2.0」, 그리고 향후 있게 될 국방개혁에서도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 본 연구결과로부터 얻은 교훈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성공적으로 추진되길 기대한다.


Reform is to adjust in a new direction under the perception that the present is wrong. South Korea's defense reform was also steadily pursued by the Park Chung-hee government in the 1960s, more than 10 times. However, it is questionable whether the government has identified enough problems to reform again each time it is replaced and has achieved an improvement in its defense posture. Some also say that the policy was pursued with ceremonial policies, such as focusing too much on the current situation and denying the policies of the previous administration in accordance with the political orientation of the government at that time. 
Accordingly, this study was conducted to help promote policy by analyzing and assessing major defense reform cases in Korea and drawing lessons for successful future defense reform. 
To this end, we looked at the domestic research on defense reform and the U.S. case for defense reform, which led to the recognition of the reform situation 1 and 2 leadership, 3 resources, and 4 receptivity as the main factor of successful promotion of defense reform. Based on these four key requirements, the analysis and evaluation of major defense reform cases conducted since the Roh Tae-woo administration showed the appropriateness and feasibility of the defense reform drive. Therefore, we hope that defense reform 2.0, which is currently being pursued, and the future defense reform will also be successfully implemented by actively reflecting lessons learned from the results of the study that have been taken away from the existing iner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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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만의 국방개혁에 관한 연구 - 현황과 평가, 한국에의 함의 -

저자 : 양정학 ( Yang Jeonghak ) , 방준영 ( Bang Joonyoung )

발행기관 : 한일군사문화학회 간행물 :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5-17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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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덩후이(李登輝) 총통 이래로 대만은 국민당과 민진당이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차지하였다. 국민당과 민진당이 추구하는 정치노선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대만의 군사전략도 정권의 변화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았다. 물론 대만의 군사전략은 정권교체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안보환경의 변화, 특히 중국과의 관계 변화와 미국과의 관계 조정 등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본 논문은 대만 최초의 직선제 총통인 리덩후이 총통시기부터 현재의 차이잉원 총통시기까지 대만의 국방개혁 내용 및 특징을 대만의 군사전략 조정 및 국내외적인 안보환경 변화와 연계하여 시계열적으로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국민당 총통이 집권한 시기에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하여 중국과의 교류를 중시하였고, 그로 인해 군사전략 또한 수세적 방어에 중점을 둔 군사전략을 채택하였다. 반면, 민진당 총통이 집권한 시기에는 대만의 독립 성향이 강하게 표출되어 중국과의 관계가 경색되었고, 군사전략 역시 수세적 방어보다는 적극적 방어를 위한 '억지'에 중점을 둔 군사전략을 채택하였다. 국방개혁도 전반적으로 이러한 군사전략 조정 내용을 반영하여 추진되었다. 하지만 정권교체에 따라 국방개혁추진 내용도 상당한 차이가 났기 때문에 일관적이고 장기적인 국방개혁 목표 달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분석의 결과는 국방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정부에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Since President Lee Teng-hui(李登輝),Taiwan took power by the Kuomintang (KMT, 國民黨) and the Democratic Progressive Party(DPP, 民主進步黨) alternately. Taiwan's military strategy has been greatly influenced by changes in the regime because the political lines pursued by the KMT and the DPP are significantly different. Assuredly, Taiwan's military strategy has also been influenced by changes in the external security environment―especially changes in the relations with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PRC) and the United States.
As a time-series analysis of Taiwan's military strategy adjustment and reaction to changes in the domestic and external security environment, this paper analyzed the content and characteristics of Taiwan's defense reforms from the period of President Lee Teng-hui to the current period of President Tsai Ing-wen(蔡英文). The results indicated that when the President of the KMT assumed power, principally based on the One-China principle, the exchange with the PRC was emphasized, and the military adopted a defensive defense strategy. In contrast, during the period of the DPP president, Taiwan's tendency towards independence was strongly expressed. Thus, there were strained relations with the PRC, and the military adopted a deterrence strategy for active defense. In general, defense reform was carried out to reflect these military strategy adjustments. However, there were limitations to achieving consistent and long-term defense reform goals, as there were significant differences in the content of the defense reform according to the regime change.
The results of this analysis will be a useful reference for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hich engaged in defense re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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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차 산업시대를 대비하는 현용 전차, 장갑차 원격사격통제체계(RCWS) 장착 필요성 고찰

저자 : 곽해용 ( Kwack Haeyong ) , 김영준 ( Kim Youngjun )

발행기관 : 한일군사문화학회 간행물 :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1-20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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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이 우리 저변을 변화시키고 있다. 한반도에서 미래전의 양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무인 무기체계로 구성된 유기적인 복합체계에서 무인중심으로 전투주체의 변화도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동시에 초저출산 시대에 직면한 한반도의 안보상황에서 인명중시 사상도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미국, 일본 등 전 세계적으로 이미 상용화가 하고 있는 원격사격통제체계(RCWS)를 우리 군에서도 함정과 일부 해병대 장비에는 탑재하여 운용하고 있으나 아직 현용 전차와 장갑차량에는 상용화가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무인체계로 이전하기 이전 중간단계에도 계속 운용해야 할 현용 전차 및 장갑차량에 대해서 우선 성능개량을 통해 현존전력의 전투효과를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RCWS 장착 필요성에 대해 미국, 일본 등 해외 사례와 미의회수학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전투효과도 분석 등을 통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The fourth industry is changing our base. It is also affecting the aspect of future wars on the Korean Peninsula. In the organic complex system composed of manned and unmanned weapons system, the subject of combat has also changed. At the same time, these changes are more important than ever in the security situ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facing the very low birthrate. Currently, the RCWS, which is already commercially available worldwide in the US and Japan, is installed in ships and some Marine Corps equipment. For the current tanks and armored vehicles that must continue to operate in the intermediate stages before moving to the unmanned system, it is necessary to improve the combat effect of the existing power through the performance improvement. Therefore, this paper will examine the necessity of installing RCWS through the analysis of the battle effect based on the foreign models such as the United States and Japan and the US Congress's mathematical mo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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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우가키(宇垣) 군축으로의 길 - 1920년대 초 일본 육군 내의 군비 축소 논의 -

저자 : 박완 ( Park Wan )

발행기관 : 한일군사문화학회 간행물 :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7-23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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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야마나시(山梨)·우가키(宇垣) 군축이 단행되기 전인 1920년대 초에 일본 육군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군비 축소 논의를 검토한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은 부국강병 노선과 대외 전쟁을 통해 끊임없이 육군 군비를 확장해나갔고,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전에는 그 정점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1차대전 종결 후 찾아온 경기 침체와 재정 압박으로 인해 더 이상의 군확은 불가능해졌고, 또 워싱턴 회의를 계기로 군축을 요구하는 의회와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다니바야시 도쿠타로(谷林德太郞), 유히 미쓰에(由比光衛), 다치바나 고이치로(立花小一郎) 등 일부 고급 군인들은 육군 수뇌부에 군축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들의 보직이나 파벌 관계 등은 제각각이지만, 이와 무관하게 이들의 의견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존재하였다. 우선 1차대전 이후 군비근대화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인원 삭감 혹은 사단 폐지 등을 단행해서라도 육군이 스스로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다음으로 국민의 반 육군 여론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군비 축소, 재영 기간 단축, 잡역 감면 등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육군 소속 부서의 통폐합 및 이관 문제에서는 경제적 합리성을 중시함과 동시에, 국방의 책임을 군이 독점하려던 기존의 자세를 수정하고 국민 및 국가의 각 기관과 이를 분담하고자 하였다.
물론 당시 육군 내에서 군축 용인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참모본부는 워싱턴 회의를 전후하여 육군 내외에 군축 반대론을 선전하였다. 참모본부는 장래에 아시아 대륙에서 러시아·중국·미국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군축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무기·장비가 복잡해지고 병사의 독단이 중시되는 상황에서는 현재의 재영 기간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홋카이도(北海島) 주둔 제7사단 예하 부대의 약 35%는 참모본부의 군축 반대론에 비판적이었으며, 이들의 의견에서는 위의 육군 고급 군인들의 군축 의견과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와 같이 군비 근대화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군축은 용인해야 한다는 인식이 육군 중앙 및 일선 부대에서 공유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이후의 군축을 가능하게 한 밑바탕이 되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discussion on disarmament in the Japanese Army in the early 1920s, before Yamanashi reductions(1922-23) and Ugaki reductions(1925). Since Meiji Restoration, the Imperial Japan incessantly expanded the size of the Army under the doctrine of so-called 'a wealthy country and a powerful army' and by waging several wars, and it reached the zenith before the end of The First World War. However, the postwar depression and the financial difficulty made further military expansions impossible. Also, with the Washington Conference in 1921-22, the voice demanding army reductions was growing from the Diet and the Japanese people.
Under the above circumstances, some high-ranking officers like Tanibayashi Tokutaro, Yuhi Mitsue and Tachibana Koichiro submitted their opinions about disarmament to the Army leadership. They varied in posts or factions in the Army, but their opinions had something in common. At first, they felt the necessity of modernization of arms after the First World War so seriously, that they insisted the Army should secure budget for it by its own efforts, even by cutting its personnel or eliminating some divisions. Secondly, they did not turn their eyes away from the public antagonism against the Army, but wanted to restore the national support toward the Army by reducing the arms, shortening the period of active service, and lessening the soldiers' burden of miscellaneous services. Thirdly, from the view of economic effectiveness, they proposed to unify some army organizations, or transfer those to the Cabinet or the other Ministries. In doing so, they intended to abandon the Army's monopoly of the responsibility for national defence, and share it with the Japanese people and other national agencies.
Of course, the Army did not reach the entire agreement to accept disarmament. Particularly, before and after the Washington Conference, Army General Staff made anti-disarmament propaganda inside and outside the Army. They urged that it is impossible to reduce the arms, in order to win a future war against Russian, Chinese and U.S. allied forces in Asian Continent. Also, because of the complexity of modern weapons and the importance of each soldier's decision-making skills in combat, they stressed the necessity to maintain the current period of active service. However, the 35% of the units belonging to the 7th Division in Hokkaido disagreed this anti-disarmament propaganda. And their opinions about disarmament had some features in common with the above high-ranking officers' opinions. In another words, the thinking that it is necessary to accept disarmament to some degree for modernization of arms was being infiltrating into the Army, from high-ranking officers to the first-line units, and this laid the groundwork for arms reductions carried out soon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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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메이지(明治) 시대 일본 문헌 속의 이순신 담론

저자 : 김준배 ( Kim Joonbae )

발행기관 : 한일군사문화학회 간행물 :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35-26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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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메이지 시대에 간행된 일본 문헌 속에서 이순신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1870년대부터 1890년대 초반까지의 일본 문헌 속 이순신 담론이 에도 시대 문헌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는 데에 그쳤다면, 청일전쟁기 간행된 임진왜란 관련 문헌은 명과 조선을 비판하고, 일본군의 정의로운 모습을 강조하여 당면한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한다. 이 안에서 이순신은 훌륭한 장수로 그려짐과 동시에 일본을 칭송하고 명을 비하하여, 일본의 전쟁 정당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삼국간섭에 따른 무력감에 의해 무력 양성을 주장하는 서적이 간행되며, 임진왜란을 패배한 전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에 임진왜란 패배의 원인으로서 해전이 전략적 측면에서 주목받게 되었으며, 이순신은 기존의 단순한 '명장'이라는 이미지를 넘어서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패배 원인 중 하나인 해전을 이끈 장수로서 주목받게 된다. 동 시기 일본 해군은 이순신의 활약상을 강조하여 자국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며, 이로 인해 이순신은 일본 해군에 전파되어 가기 시작한다. 1900년대 문헌은 초기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조선의 역사를 부정적인 것으로 그려나가는 데에 주력한다. 이때 이순신은 조선 정부에 의해 직위를 잃거나 고통 받는 모습이 부각되며, 그로 인해 이순신은 조선의 정치체제를 더욱 부패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처럼 메이지 시대 일본의 이순신 담론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형성되어 갔다.


This paper examines how Yi Sun-sin was depicted in the Japanese literature during the Meiji period. The discourse of Yi in the Japanese literature from the 1870s to the early 1890s only followed the discourses of the Edo period. The literature about the Imjin War published before the Sino-Japanese War criticized Ming and Joseon, and tried to secure legitimacy of the immediate war by emphasizing the righteous figure of the Japanese military. In this, while being depicted as a great admiral, Yi played the role of emphasizing the righteous figure of the Japan, by praising Japan and degrading Ming. After the Sino-Japanese War, Japan was interrupted by the Three Kingdoms, so some books claiming to foster force are published in Japan, and it was started to accept the Imjin War as a defeated war, feeling a sense of helplessness. As a result, the naval battle became the focus of strategic attention as a cause of the defeat in the Imjin War. By this, Yi was regarded as a admiral who led Japan's defeat during the Imjin War, beyond the simple image of “Great Admiral,” At the same time, the Japanese Navy emphasized the performance of Yi and used it as a means to strengthen their own naval powers, which led to the spread of Yi in the Japanese Navy. In the 1900s, Japanese literature focuses on portraying the history of Joseon as negative for the purpose of 'management of Joseon', and the story of Yi losing his position or suffering by the Joseon government is highlighted. This story of Yi was portrayed as a figure that makes such Joseon history look more corrupt. Yi's discourse in the Japan of the Meiji period was formed in close relation with the times.

KCI등재

10일본인들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내셔널리즘적 사고 연구 - 하토야마 유키오 전 수상의 “독도=한국영토론”을 둘러싸고 -

저자 : 최장근 ( Choi Jangkeun )

발행기관 : 한일군사문화학회 간행물 : 한일군사문화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3-28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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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의 영토내셔널리즘을 고찰한 것이다. 연구 자료는 다음과 같다.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의 마루야마 호타카(丸山穂高) 중원의원이 독도를 전쟁을 해서라도 되찾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하토야마 유키오 전수상이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토야마 전 수상의 발언에 일본네티즌들이 격하게 반응하였다.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하토야마를 매국노라고 했다. 내셔널리즘의 특징은 일본인이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영토이라는 것이다.
하토야마는 독도가 한국영토인 증거로서 전후 미국이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했을 때, 일본정부가 미국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독도는 영토적 권원으로 볼 때 한국영토이다. 그래서 미국이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했다. 미국은 1946년 1월 SCAPIN 677호로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하였고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1951년 9월 8일 대일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연합국은 독도의 소속을 명확하게 결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독도가 한국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독도가 분쟁지역처럼 되었다. 대일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 영국은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했고, 미국은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했다. 미국과 영연방국가들이 독도 영유권에 대해 서로 생각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한일 양국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 네티즌들은 하토야마 전 총리를 매국노라고 비난하며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영토내셔널리즘이다.


The study looked at Japan's territorial nationalism. The research data was a former prime minister Yukio Hatoyama said Dokdo is Korean territory was expressed. Japanese netizens reacted furiously to Hatoyama's remarks. Most netizens called Hatoyama a traitor. The characteristics of nationalism is that Dokdo is Japanese territory because the Japanese. 
Hatoyama said Japan, Dokdo is Korean territory, as evidence before and after the U.S. Dokdo as Korean territory, the Japanese government is not against the decision of the United States. In fact, Dokdo is Korean territory when in territorial title. That is why the United States of the Dokdo as Korean territory. The United States in January 1946, scapin at 677 in recognition indicates Dokdo as Korean territory. South Korea will effectively ruled by the Dokdo. 
The Treaty of Peace with Japan was signed on September 8, 1951. United Nations is not not be the part of the Dokdo. The reason is as Japan`s sovereignty claim despite the Dokdo as Korean territory. Dokdo will be like a conflict. But Japanese netizens claimed that Dokdo is Japanese territory. He accused Hatoyama of being a traitor. This is the Dokdo for the territory of Japanese 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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