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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문학연구 update

Studies in urban humanities

  •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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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1호(2009)~10권2호(2018) |수록논문 수 : 152
도시인문학연구
10권2호(2018년 10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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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폴리스 안에서의 상호 채무 관계에 기반을 둔 정의 - 플라톤 『국가』 1, 2권의 논의를 근거로

저자 : 이종환 ( Lee Jong Hwan )

발행기관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간행물 : 도시인문학연구 10권 2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7-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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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국가』1권 케팔로스와 폴레마르코스가 제시하는 정의, 그리고 2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국가의 구성 원리로서의 정의 사이의 연속성에 주목한다. 빚진 것을 갚고 각자의 몫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희랍의 정의관은 『국가』의 소크라테스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정체를 제안함으로 정당화된다. 서로 빚을 지고 있으며 모두가 이를 갚아가는 과정에서 성립하는 인간관계를 통해 공고해지는 도시 공동체의 결속은 아테네 사회를 살아가던 일반인인 케팔로스나 폴레마르코스에게 있어서도 가장 근본적인 전제였고, 『국가』의 소크라테스는 이를 시민 각자가 자신의 일을 하고 자신의 소유를 가짐으로 서로 의존하고 신세를 갚는, 이상적인 폴리스를 구성하는 원리로서 발전시킨다. 시민 중 한 사람인 철학자도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동굴 안을 실재와 가장 가깝게 만들어가는 삶이 철학자로서는 빚을 잘 갚는 삶이고, 오직 그 때만 그는 행복할 수 있다. 모두가 서로의 빚을 갚으며 서로의 덕으로 살아갈 때에 그 공동체는 하나의 나라가 된다는 것이 『국가』에서 제시하는 정의이다.


This article argues that there is a continuity between the notions of justice, suggested by Cephalus and Polemarchus in Book 1 of Plato's Republic, and the justice of the Fine City, proposed by Socrates in Book 2. The traditional Greek idea of justice, proposed by Cephalus and Polemarchus, is closely related to repaying one's debts and having one's own share. Socrates develops such a traditional idea into the ideal system of the Fine City, where all the citizens rely on each other by doing one's own works. This principle of justice as paying each other's debts was widely accepted by the ordinary Ancient Greeks like Cephalus and Polemarchus, and justified by Socrates. Even the philosopher-king, one of the citizens of the Fine City, should repay her debts by ruling and making the city similar to the reality as much as possible. Only when every citizen of the City pays her debts, Plato argues, the city becomes a single-minded beautiful community and everyone in it lives a happ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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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광통교, 조선 후기 한양의 핫 플레이스 - 강이천의 「한경사」를 중심으로

저자 : 서정화 ( Suh Jung-hwa )

발행기관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간행물 : 도시인문학연구 10권 2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7-6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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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세기 후반 광통교에서 다채롭게 펼쳐진 각종의 문화예술 전반을 고찰함으로써 광통교가 한양의 '핫 플레이스'로 재부상했음을 주장하였다. 광통교는 선행연구에서 조선 후기의 도시 발달과 관련하여 많이 다루어졌음에도 그 비중은 늘 부수적이고 파편적이었다. 본고는 강이천의 「한경사」를 주 자료로 삼되 세시기나 문집, 역사서 등을 보조 자료 활용하여 '핫 플레이스로서의 광통교'를 집중 부각시켰는데, 이렇게 해야만 18세 이후 한양의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하던 광통교의 위상에 걸맞기 때문이다. 광통교가 '핫 플레이스'로 재부상하게 된 요인 중 하나는 청계천 준설이다. 영조가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여 청계천을 체계적으로 준설하고 2,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청계천을 유지·보수함으로써 청계천은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고, 이의 영향으로 광통교 일대도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이 준설되어 하천으로서의 제 모습을 찾은 데다 도시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종루(鍾樓) 상권이 확대되는 상황과 맞물려 18세기 후반 문화 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기 시작한다. 특히 입지 조건을 최대로 활용하여 다리밟기와 연날리기와 같은 세시풍속이 행해지고, 속화(俗畵)가 전시되고 판매될 정도로 서화의 유통 공간으로 자리 잡고, 투계(鬪鷄)와 타구(打毬) 시합과 같이 전문화된 스포츠가 개최되기도 하는 등 복합 문화 공간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울러 한양 및 주요 도시에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특정 장소 역시 본고에서 광통교를 부각시켜 서술한 것처럼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지로서 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본고에서 행한 작업은 이 점에서 유미할 것으로 판단된다.


This paper examines the wide range of culture and arts in the late 18th century Kwangtong bridge(廣通橋), and argues for the re-emergence of Kwangtong bridge as a hot place of Hanyang(漢陽). The previous studies about Kwangtong bridge has been dealt with much in relation to urban development in the late Chosun Dynasty, but its proportion has always been collateral and fragmentary. This paper analyzes Kang, I-Chun(姜彛天)'s Hangyungsa(漢京詞) as the main text, and utilizes the almanac(歲時 記), the collection of the works, and the history books as the supplementary ones. In doing so, this paper highlights Kwangtong bridge as a hot place, which has been the cultural center of Hanyang since the 18th century. One of the reasons why Kwangtong bridge is re-emerging as a hot place is the dredging of Cheonggyecheon(淸溪川). Since it was systematically dredged by Yeongjo(英祖), Cheonggyecheon was maintained and repaired periodically every two or three years. Accordingly, Cheonggyecheon regained its original shape and also the area around the Kwangtong bridge could be revitalized. Also, Kwangtong bridge was able to hold the prominent position as a cultural space in the late 18th century, due to the fact that the Cheonggyecheon is dredged to find its original shape as a river, and the development of urban commerce and industry through the Jonglu(鍾樓) commerce's exten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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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2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과 조선인 자본가

저자 : 김제정 ( Kim Jejeong )

발행기관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간행물 : 도시인문학연구 10권 2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67-9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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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반 통일관세제도와 이입세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관세 개정이 이루어졌다. 산업정책, 특히 관세는 속지적 성격을 갖고 있었고, 조선인과 재조일본인 자본가는 이입세 폐지에 따른 여러 문제에 대해 동일한 이해관계에 있었다. 1920년대 초반의 산업정책은 조선 지역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대변하지 않았다. 이입관리들이 총독부의 고위 관리군을 형성하며 내지연장주의를 기조로 정책 수립을 주도하였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국가적인 보호장려책을 시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역시 재조일본인 자본과 이해관계가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이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조선인 본위'의 보호정책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일본 자본 또는 재조일본인 자본과의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으로, 사회진화론에 대한 비판이 동반되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산업자본가로 성장하는 데에는 국가의 보호장려책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인식하였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운데 이입세 철폐로 위기를 느낀 조선인 자본가들은 1923년부터 물산장려운동을 펼쳐 나갔으나, 운동의 퇴조와 함께 국가적 보호장려책의 요구로 회귀하였다. 1920년대 초반의 조선 총독부는 조선 지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았고, 조선인 자본가층도 적극적인 협력의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초기에 자국 산업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국가가 '수행해야' 하며 식민권력인 총독부에 이를 요구할 수 있다고 인식한다면, 총독부의 태도 변화에 따라 조선인 자본가들의 총독부에 대한 태도 또한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었다. 조선인 자본가들이 갖고 있던 지역적ㆍ계급적 이해관계와 국가에 대한 의존의식은 체제내화의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In the early 1920s, the Chosun Governor-General of Korea amended the tariff system to include a uniform tariff system and the elimination of import taxes. Industrial policy, especially tariff policy, had a locality, so Korean and Japanese capitalists in Korea remained in the same interests on various issues related to the abolishment of import taxes. The Korean capitalists demanded to implement protection incentives. They insisted on the 'Korean-oriented' protection policy. Their demands came from a fear that they might not survive the competition with Japanese capitalists, and was accompanied by a critique of social evolution. The Korean capitalists perceived the necessity of national protection incentives to grow into industrial capitalists. Without their demands being accepted, the Korean capitalists, who felt a crisis due to the elimination of the import taxes, raised the movement for the Encouragement of Korean Products since 1923. With the decline of the movement, however, they returned to the demand of national protection incentives. At that time, Chosun Governor-General Office did not represent the regional interests of the Chosun peninsula and the Korean capitalist group also did not take an active stance of cooperation. If they recognized that the state should perform its role as the protector of its own industry in the early days of capitalism, the attitude of the Korean capitalists to Chosun Governor-General could change according to the latter's attitude toward them. The regional and class interests of the Korean capitalists and their dependence on the state always implied the possibility of coop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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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무단에서 스크린으로 - 1930년대 롄화가무반(聯華歌舞班) 연구

저자 : 김태연 ( Kim Taeyoun )

발행기관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간행물 : 도시인문학연구 10권 2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99-12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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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중국대중음악이 영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질적, 양적 성장을 이루게 되는 과정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중국 대중음악의 '鼻祖'로 호칭되는 리진후이(黎錦暉)가 이끌었던 롄화가무반(聯華歌舞班)이라는 단체를 중요한 고리로 설정한다. 1931년에 결성되어 1932년에 해산한 이 단체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롄화영화사(聯華影業公司)와 리진후이의 가무단이 결합한 조직으로서, 롄화 영화사가 유성 영화 제작을 위해 필요한 인력―영화음악의 작곡자, 연주자, 가수 및 배우―을 확보하고 양성하기 위해 당시 가장 인기 있던 리진후이의 가무단을 인수한 것이다. 롄화가무반은 중국 대중음악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가무단이 영화계로 진입하는 단계를 보여준다. 따라서 롄화가무반이 결성되는 맥락, 롄화가무반의 구성 및 활동, 롄화가무반의 특성과 해체 후의 향방 등을 추적하는 것은 중국 대중음악이 영화와 결합하면서 어떤 형태적, 질적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중국 30-40년대의 대중음악과 영화산업의 관계는 사실 매우 방대한 주제이기 때문에 본고에서 다룬 것 외에 고찰해야 할 부분이 매우 많이 남아있다. 본고에서는 연구의 실용성을 위해 롄화가무반이라는 하나의 고리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이 하나의 고리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향후 작업에서는 더욱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시각에서 중국의 대중음악이 영화산업과 결합하여 어떠한 질적·양적 변화를 창출해내는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 것이다.


This paper studies the organization called Lianhua Song and Dance Group, led by Li Jinhui, who is called now “The First Man of Chinese Pop Music,” as the key figure to study the relation between Chinese pop music and the movie industry in the 1930s Shanghai. Established in 1931 and disbanded in 1932, the group has, as its name suggests, produced by Lianhua Pictures and Li Jinhui. Lianhua Song and Dance Group shows the stage in which a group of singers, closely related to the creation of popular music in China, enters the film industry. Therefore, it is possible to track the context in which Lianhua Song and Dance Group is made, the composition and activities of the singing group, and the direction of Chinese popular music with the growth of the movie industry. In fact, the relationship between popular music and the film industry in China in the 1930s and 1940s is such a huge subject that there is a lot to be considered other than what was covered in the paper. In the future studies, it would be required to look at what qualitative and quantitative changes Chinese pop music made by combining with the film industry from a more holistic point of view by adding a study of film music by leftist music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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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 필자는 다음의 네 가지 주장을 하고자 한다. 첫째로, 디지털 도시화는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 이슈와 경향에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가령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불법촬영물의 촬영, 유포, 소비에 대한 저항은 전에 없던 강력한 페미니즘의 이슈가 되었다. 둘째로 디지털 도시화 시대에 우리 사회에는 기계와 유기체의 혼종인 사이보그가 탄생했다. 새로운 인간종인 사이보그가 경험하는 자아와 세게는 유기체로만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가령 불법촬영물에 대한 공포는 피해를 당하거나 당할 가능성이 높은 사이보그-여성들에게 특히 극대화된다. 셋째로, 우리 사회의 사이보그-페미니스트는 해러웨이의 예상과 달리 잡종성과 주변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여성' 등 자연적 통일적 단일적 정체성에 기반하여 인정투쟁을 벌이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중심적 도시 상상계를 비판하는 가운데 부지불식중에 이 상상계가 만들어 놓은 육체적 실재의 지도를 답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넷째로 사이보그-페미니스트들이 생물학적 정체성 등 자연적 원본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사이버 공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폐쇄적 장소를 만들어 가는 정치를 펼쳤기 때문이다. 사이보그-페미니스트들에게 남성중심적 문화가 지배하는 사이버 공간은 자유라기보다 제약의 공간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폐쇄적 장소를 만들어 도피하는 가운에 이에 저항했다. 그러나 폐쇄적 장소의 정치는 여성의 정체성을 물화하고 내부의 차이를 삭제할 위험을 안고 있다.


Fist of all, the age of digital urbanization has announced the emergence of a new form of human existence. The digital urbanization has created a new way of physicality and experiences, which is very alien to those who have experienced it through other media. Cyberspace in the digital age has created cyborg, a new form of human species that combines machines and human bodies, whose physical experience can be hardly understood for people living only in organic entities. Every cyborg, however, could not be free in the cyberspace. Especially cyborg-women have felt restraints, because the cyberspace is dominated by the urban imaginary based on the androcentered cultural imperialism. So the cyborg-women have tended to be closed in a place of gated community and to appeal an identity politics based on the biological sex of woman in order to ensure their safety. This paper argues that, as a result, this kind of cyborg-feminists cannot avoid the limits of identity politics that ignore the inner differences and chan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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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분쟁 이후 도시에서 기억의 실행: 키르기스스탄 오쉬의 기념물을 중심으로

저자 : 김태연 ( Kim Tae Yon )

발행기관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간행물 : 도시인문학연구 10권 2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53-18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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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분쟁 이후 오쉬 도시공간에 건립된 기념물의 형상화와 공간성을 살펴보고, 리쾨르의 기억의 실행 개념에 의거하여 기념물 건립을 통해 의도된 기억이 실행된 결과와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다. 1990년 및 2010년 오쉬 분쟁 이후 세워진 애도와 화해의 기념물을 통해 실행된 기억은 치료적 차원에서의 기억의 오용, 즉 '차단된 기억'이며, 2010년 오쉬 사태 이후 들어선 민족정체성 표상의 기념물을 통해 실행된 기억은 실천적 차원에서의 기억의 오용, 즉 '조작된 기억'이다. 한편 민족정체성 표상의 기념물이 의도한 목적과 수반한 결과는 민족적 차이의 가시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유형의 기념물 모두를 통해 실행된 기억은 윤리적 차원에서의 기억의 오용, 즉 '충분치 못한 기억'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억의 오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건의 희생자에 대한, '사건의 잉여'에 대한 '공정한 기억'이 실행되어야 한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look into the figuration and spatiality of the monuments constructed in the urban space of post-conflict Osh and to explore the outcomes and meanings of the exercise of memory intended by the construction of the monuments based on Paul Ricoeur's concepts of the exercise of memory. While the memory exercised through the monuments of mourning and reconcilement erected after the Osh conflicts in 1990 and 2010 is 'blocked memory,' an abuse of memory on the therapeutic dimension, the memory exercised through the monuments representative of national identity built after the Osh events in 2010 is 'manipulated memory,' an abuse of memory on the practical dimension. Meanwhile, the aim intended by and the outcome produced by the monuments representative of national identity is a visualization of ethnic differences. And the memory exercised through both types of monuments is 'not enough memory,' an abuse of memory on the ethical dimension. In order to correct these abuses of memory, more than anything else, 'just memory' about the victims of the event, about 'the surplus of the event' has to be exerci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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