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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논총 update

THE TOEGYE HAK NONCHONG

  •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738-399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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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5)~36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424
퇴계학논총
36권0호(2020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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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퇴계(退溪)의 문학(文學)에서 유인(幽人)의 생활(生活) 담론(談論) 연구(硏究)

저자 : 金秉權 ( Kim¸ Byeong-kweon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3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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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의 聖學은 마음과 대화하며 사물의 이치를 知覺[깨달음]하는 마음공부이다. 마음의 구조는 虛靈하며, 그 기능은 대상의 이치를 知覺하는 것이다. 마음이 이치를 탐구하여 통달하고 그것을 익혀서 실천하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 된다. 따라서 마음공부의 목적은 자아의 맑고 깨끗한 本性을 발견하고 修養함으로써 自由自在한 聖人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退溪의 詩는 자연과 대화하며 山水가 마음에 저절로 준 즐거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쓴 문학이다. 이때의 즐거움은 억지로 구하여 얻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억지로 구한 즐거움은 마음의 집착이 되므로 無欲의 청정한 마음에서 일어난 즐거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청정한 마음의 自由自在한 즐거움이 참된 즐거움[眞樂]이며, 이는 말로써 형언할 수 없으나 말하지 않으면 즐거움을 전할 수가 없으므로 비유의 형식인 詩로 지은 것이다.
退溪의 生活은 사람과 대화하며 道理를 지키는 德行의 실천이다. 그는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큰 病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제자들은 退溪에게서 이것이니 저것이니 구분하는 境界가 없었다고 전한다. 구분은 공동체가 분열하는 원인이 된다. 남을 따르지 못하는 病은 구성원이 대립하는 원인이다. 따라서 퇴계의 생활은 분열하고 대립하는 현실에서 사회적 統合과 구성원의 和樂을 가르치고 실천한 의미가 있다.
이치에 통달하는 마음공부, 이치가 마음에 준 즐거움을 표현한 문학, 도리를 지키고 덕행을 실천한 생활은, 공동체의 화합과 즐거움을 지향한 인간의 本性的 價値를 合理化한 談論이다. 이러한 退溪의 談論은 인욕에 집착함으로써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에 自我를 完成하고 他人과 調和를 이루며 살아가는 道理와 德行을 과거에도 안내해 왔으며 현재와 미래에도 안내할 것이다.
이 연구의 목적은 退溪의 心學에 근거하여 그의 詩 가운데 幽人이 등장하는 「天淵翫月」에 표현한 즐거움의 본질을 분석함으로써 공동체의 和合을 지향한 談論을 도출하는 데 있다.


This article draws a discourse of value rationality to pursue a cohesive community by reviewing Teogye's poem, titled 天淵翫月(Cheonyeonwanwol) and analyzing it based on his theory of mind.
In his poem, a metaphor is used to compare the clear moon symbolizing Toegye's theory of mind and the moon blocked by the cloud describing any personal avarice such as obsession and greed. The theory of mind is based on two concepts: a structure of innocent mind and perception regarding how people perceive this structure as a matter of principle. These two essential concepts contribute to establishing the behavioral ethics of studying a structure of mind and perceiving a principle. The behavioral ethics suggested by Toegye should be continuously exercised to prevent any personal avarice from differentiating between the two ideological hegemony. Then the innocent mind can be upheld by these efforts. Like the clear moon shining on the land, people following these behavioral ethics can enjoy an essential pleasure without worrying about personal avarice and ideological conflicts.
Toegye's life and pursuit of purpose can be inferred in his poem. Toegye, in his life, actually pursued his behavioral ethics, studying a structure of mind and perceiving a matter of principle by communicating with members of his community. He also had efforts to keep a lookout for personal avarice and to avoid differentiating between ideological conflicts. The poem, titled 天淵翫月 (Cheonyeonwanwol), reflecting an essential pleasure caused by his exercising behavioral ethics, implies how the transitional stage to transforming mechanized and digitalized society overcomes ideological conflicts and establishes a cohesive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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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퇴계(退溪)와 칸트의 도덕성에 관한 고찰

저자 : 안유경 ( An¸ Yoo-kyoung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6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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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퇴계(이황, 1501~1570)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도덕성을 고찰한 것이다. 퇴계의 도덕성을 구성하는 내용으로는 理, 氣, 性, 心, 情, 意 등이 있으며, 칸트의 도덕성을 구성하는 내용으로는 선의지, 이성, 의지, 의무, 도덕법칙 등이 있다. 이들 개념은 모두 각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퇴계와 칸트의 도덕성을 구성하는 사유구조는 누구나 선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음을 성(리) 또는 선의지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기 또는 경향성이 지배하는 감성계로써 현실 속에 만연한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칸트가 개념 사용과 원칙에서 다양한 비유와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방식을 전개하는 반면, 퇴계는 도덕적 당위를 강조하는 당위적이고 수양적인 사유방식을 정립한다.
결국 이들이 도덕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념과 방법상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본질을 관통하는 사유구조는 다르지 않으며, 그 목적 역시 인간의 선한 도덕성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이로써 퇴계와 칸트의 도덕성에 대한 사유구조와 그 목적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morality of Toegye(Yi Hwang, 1501~1570) and Kant(1724~1804). The contents that constitute the morality of Toegye include Li, Ki, Sung, Sim, Jung, and Eui, and the contents that constitute Kant's morality include good will, reason, will, duty, and moral law. All of these concepts do not exist separately, but act as a basis for organically combining human morality.
It can be seen that the thought structure that constitutes Toegye and Kant's morality reflects the absurd situation of human beings rampant in reality as an emotional system dominated by chi or tendency, explaining that anyone has good morality by sex or good will.
It is explaining that the thought structure that constitutes Toegye and Kant's morality has good morality, either by sung or by good will. At the same time, we can see that it reflects the evil situation of human beings rampant in reality as Ki or emotional system dominated by tendency. In this process, Kant develops an objective and analytical way of thinking, such as presenting various figurines and concrete examples in the use of concepts and principles, while Toegye establishes a justifiable and cultivated way of thinking that emphasizes moral justification.
This means that, in the course of explaining morality, although there may be some differences in concepts and methods, there is no difference in the thought structure that penetrates the essence, the purpose is also to elicit good morality from human beings. Here you can see the similarity between the thought structure of Toegye and Kant's morality and its purp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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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追放された神々ー文明史からみる<ポスト3 · 11>

저자 : 佐藤弘夫 ( Sato-hiroo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5-80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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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明史로부터 보는 追放된 神들 <포스트 3 · 11>: 자연에 관한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열도 사람들은 불가피한 재앙을 초월적인 존재(카미, 神)의 소행으로 연결해, 그 출현의 필연성을 이해하려고 했다.
고대 사회에서 자연재해는 신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로 해석됐다. 불교가 수용되어 세계에 대한 체계적 해석이 정착되는 중세사회에 들어서자 재해에 대해서도 그 발생을 治罰과 救濟의 因果律 속에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근원적 존재의 현실감이 쇠퇴하여 사망자를 피안의 부처에 의한 구제시스템에 맡길 수 없게 된 근세에는 災害와 天災로 받아들이는 한편, 불우한 사망자를 조상신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장기간에 걸친 의례와 습속이 창출되었다.
「근대화」의 프로세스는 산자와 카미 · 사자가 공존하는 전통 세계에서 후자를 내쫓는 동시에 특권적 존재인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사회의 재구축임이 틀림없었다. 바로 동일본 대지진이 그러한 근대의 異貌性을 떠올리게 하여, 우리의 현재의 위치와 진로를 재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自然に関する科学的な知識を欠いていた前近代社会では、世界の他の地域と同様、日本列島の人々は不可避の災禍を超越的存在(カミ)の仕業と結びつけ、その出現の必然性を了解しようとした。古代社会では、自然災害は神が人間に与えるメッセージと解釈された。仏教が受容され世界についての体系的な解釈が定着する中世社会になると、災害についても、その発生を治罰と救済の因果律のなかで説明しようとする傾向が強くなった。根源的存在のリアリティが衰退し、死者を彼岸の仏による救済システムに委ね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近世では、災禍を天災として忍受する一方、不遇な死者を祖霊に上昇させるための長期にわたる儀礼や習俗が創出された。
「近代化」のプロセスは、生者とカミ․死者が共存する伝統世界から後者を閉め出すとともに、特権的存在である人間を主人公とした社会の再構築にほかならなかった。東日本震災は、そうした近代の異貌性を浮かび上がらせ、私たちの立ち位置と進路を再考させる契機となるものだった。)


Without scientific knowledge, the people of premodern societies in Japan tried to understand natural disasters through their association with transcendent beings (kami). In ancient Japan, natural disasters were interpreted as messages, that is, vengeful curses, from the kami. With the establishment of a systematic cosmology during the middle ages, the causes of catastrophes were explained in terms of the law of cause and effect according to which punishment and salvation were delivered by the kami. With the onset of the early modern period, the sense of reality inherent in the perceptions of fundamental beings declined, and the salvation of the dead could no longer be entrusted to the other-worldly kami. People then came to terms with catastrophes as natural disasters that must be faced. Rituals and customs, carried out over long periods, were put in place to raise the dead to the status of ancestral spirits.
In addition to a shift from the traditional world in which kami, the living, and the dead coexisted, toward a shutting out of the latter group,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brought with it a restructuring of society around the exclusive rights and interests of human beings. The experience of the Great East Japan Earthquake has been an opportunity to reconsider the path ahead, and to reconsider responses to catastrophe which display the modern tendency to focus on the concerns of the living to the exclusion of those of the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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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석곡(石谷) 이규준(李圭晙)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이해

저자 : 成昊俊 ( Sung¸ Ho-jun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1-10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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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 후기 儒醫 石谷 李圭畯의 이기합체와 심성일물에 근거한 인심도심설에 관한 내용이다. 석곡의 인심도심설에 관한 주장을 整庵 羅欽順과 穌齋 盧守愼의 경우와 비교하여 서술하였다. 석곡의 심학이 정암과 소재의 연장선에 있다고 판단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석곡 스스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학문을 정립했다는 내용은 찾을 수 없지만, 문헌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면서 상당한 유사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암과 소재의 인심도 심설의 특징은 도심과 인심을 모두 심의 이발인 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朱子와 달리 '道心-性-未發-體' '人心-情-已發-用'이라 주장한 것에 있다. 程朱學의 天理-道心 私慾-人心의 대립적 구도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석곡은 도심을 미발의 천도로 인식하고 형기를 타고 이미 발하여 선악이 나누어지는 것을 인심이라고 하였다. 이는 형신합일적 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천도인 심과 혈육의 심이 둘이 아닌 하나로 이해한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석곡이 도심과 인심의 논의에서 정암이나 소재와 다른 점이 있다. 곧 정암이나 소재는 명시적으로 '도심-미발-성' '인심-이발-정'으로 설명한 바 있으나, 석곡의 문헌을 훑어보면 '도심-성' '인심-정'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한 내용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정암이나 소재의 '도심-미발-성' '인심-이발-정'으로 언급한 내용과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석곡의 인심도심에 관한 논의는 중화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석곡은 성보다는 심을 도덕적 근거로 설정하고 선악의 문제는 심이 五藏 혹은 形氣를 제어하는지 여부에 달린 것으로 이해하였다. 심은 미발의 중 곧 도심이 되고, 심이 오장 혹은 형기를 제어하여 중절한 경우는 이발인 인심의 화(和)라고 하여 중과화를 말하였다. 그리고 이를 一本과 萬殊로도 설명한다.


This paper is about Human mind(人心) and Moral mind(道心) of Yi Gyujun (李圭畯) in the late Joseon Dynasty. His theory is based on the unity of Li-Chi (理氣) and the unity of Xin(心) and Xing(性). His arguments about Human mind and Moral mind were compared to those of Luo Qinsun(羅欽順) of the Ming Dynasty and Noh Sushin(盧守愼) of the mid-Joseon Period. t stems from the judgment that Yi's Xinxue(心學) is in the extension of Luo Qinsun and Noh Sushin. No literary evidence can be found that Yi himself was influenced by Luo and Noh, but he found considerable similarities while comparing and reviewing the content. Luo and Noh are different from Zhu-zi,(朱子) which both Moral-mind and Human-mind understand as Qing(情)-Yifa(已發). Their features are what they claim to be Moral mind-Xing(性)-Weifa(未發)-Ti(體), Human mind-Qing(情)-Yifa(已發)-Yong(用). It is a negative opinion on the confrontational structure of Tianli(天理)-Moral Mind and Siyu(私慾)-Human Mind, which is spoken in Chengzhuue(程朱學). Yi Gyujun recognized Moral Mind as Tiandao(天道) of Weifa. And it was called Human Mind that appeared through the human body and divided good and evil. Tiandao-Xin(Mind) and Xin(Heart) of the blood are one, not two. But there is something different from Luo or No in the discussion of Yi's Moral-mind and Human-mind. Although Luo and Noh have been explicitly described as 'Moral Mind-Xing-Weifa' and 'Human Mind-Qing-Yifa', it is not easy to find the explicit reference of 'Moral Mind-Xing' and 'Human Mind-Qing' in the case of Yi. The discussion of Yi's Moral-mind and Human-mind leads to the discussion of Zhonghuo(中和). Yi sets Xin on moral grounds rather than Xing. Good and evil understood that it depends on whether Xin controls Wuzang(五藏) and the body or Wuzang and the body leads Xin. According to Yi, Xin becomes the Moral Mind, which is Zhong of Weifa. If Xin controls Wuzang and the body and is suitable for theft, it is called Huo(和) of Human Mind, Yifa. And he describes this as the relationship between Yiben(一 本) and Wanshu(萬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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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의 이성이기론(二性二氣論)과 그 비판

저자 : 이상익 ( Lee¸ Sang-ik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9-1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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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빈 성리설의 특징은 '二性二氣論'과 '『中庸』의 喜怒哀樂과 『禮記』의 七情은 다르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二性二氣論에 입각하면 퇴계와 고봉 등 여러 학자들의 성리설을 각각의 本旨에 맞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또한 『中庸』의 喜怒哀樂과 『禮記』의 七情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하면 七情을 둘러싼 여러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논쟁을 예방할 수 있다.
論者는 하빈의 '二氣論'과 '『中庸』의 喜怒哀樂과 『禮記』의 七情은 다르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하빈의 '二性論'에 대해서는 그 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하빈의 二性論은 결국 기존의 '性命과 形氣'를 二性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런데 하빈은 '形氣'에 대해서 '理'로 규정하기도 하고 '氣'로 규정하기도 하여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 하빈의 이러한 논법은 수긍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하빈의 二氣論은 사실 기호학파에서 氣를 지각의 주체인 '心氣(마음)'와 욕망의 근원인 '形氣(몸)'로 구분해서 논하는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인바, 그렇다면 이는 '하빈의 독창적 주장'은 아닌 것이다. '二性論'은 하빈의 독창적 주장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 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하빈의 진정한 공헌은 '『中庸』의 喜怒哀樂과 『禮記』의 七情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해명한 데 있다고 하겠다.


The philosophical features of Habin(河濱 愼後聃) summarize the argument that “we have two natures and two Ki(氣)” and that “Zhong Yong(中庸)'s xi nu ai le(喜怒哀樂, pleasure, anger, sorrow, joy) and Li Ji(禮記)'s Chiljung(七情, Seven Feelings) are different.” Based on the two-nature two-Ki theory, there is a way to understand the theories of various scholars such as Toegye and Gobong. Also, a clear perception of the differences between Zhong Yong(中庸)'s xi nu ai le and Li Ji(禮記)'s Chiljung can prevent many meaningless and unnecessary disputes over the issue.
I strongly agree with the arguments of “two-Ki theory” and “Zhong Yong's xi nu ai le and Li Ji's Chiljung are different.” But I find it hard to acknowledge the validity of Habin's “two-nature themory.” Habin's “two-nature themory” is what eventually considered the existing “xingming(性命) and xingqi(形氣)” as two natures. Habin's argument is very difficult to accept.
Habin's “two-Ki theory” is in fact in line with the current trend of discussing Ki(氣) as the mind which is the subject of perception and the body that is the source of desire. So this is not Habin's original theory. “Two-nature theory” is Habin's original theory, but it's hard to accept its validity. Then, Habin's real contribution lies in clarifying that “Zhong Yong's xi nu ai le and Li Ji's Chiljung are diffe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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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마도(對馬島)와 한반도(韓半島)와의 관계 - 특히 부산(釜山)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저자 : 성해준 ( Sung¸ Hae-jun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9-16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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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인 위치가 일본 본토보다 부산과 가까운 대마도는 오랫동안 한일 양국문화가 중첩된 무대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지 간에 한일 양국문화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마도는 원래 산악지대로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밖에서 구해야 생활을 유지하므로 고려 시대 말기부터 한반도로부터 쌀을 지원받았지만, 그 땅에 기근이 들 때는 해적이 한반도 도서 연안을 침범하여 약탈하므로 한반도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대마도로부터 해적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경상도 관할로 편입하여 島主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일정량의 식량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또 조선의 通信使가 대마도를 거쳐 에도(江戶)로 향할 때는 대마도민들이 극진하게 맞이하며 길 안내의 선두에 나서기도 하였다. 지금은 2019년 말 일본발 무역 규제조치 이후 일시적으로 왕래가 주춤하고 있지만, 1990년 이후에 줄곧 매년 수십만 명이 넘는 한국인 관광객이 대마도를 방문하였다. 그 관광객 중에서는 단연 부산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현재 대마도는 지리적 · 심리적으로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우호의 섬으로 일본 관광객에게도 소원한 곳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인상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대마도의 역사적 소속 및 유래와 지형, 한반도와의 관계와 교류의 역사를 고찰하였다.


Thushima, whose geographical location, along with historical and cultural facts, is closer to Busan than the mainland of Japan, has long served as a bridge between Korea and Japan, which connects the culture of Korea and Japan, both in good and bad terms. However, Thushima was originally provided with rice from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late Goryeo Dynasty because the land was small and barren in the mountainous areas, but when the land was famine, pirates invaded and looted the coast of the Korean Peninsula, which led to a military crackdown on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Joseon Dynasty, he was given a pledge not to engage in piracy, and was incorporated into the jurisdiction of Gyeongsang-do to give a certain amount of food to Governor of Tsushima Island. In addition, when Joseon's mission to Edo via Thushima, Thushima residents were also at the forefront of the road guidance by treating the carrier with utmost care. Now, traffic is temporarily slowing down due to trade regulations and the Korona incident from Japan at the end of 2019, but since 1990, more than hundreds of thousands of Korean tourists have visited Thushima every year. Among the Korean tourists, Busan has the largest number of people. Therefore, in this paper, we would like to examine the historical affiliation and origin of Thushima and the history of its relations and exchanges with the Korean Penins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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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淸俗紀聞』 연구 - 동아시아 상호인식의 관점에서

저자 : 정훈식 ( Jung¸ Hun-sik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9-20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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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에도시대 후기에 長崎奉行 나카가와 다다테루(中川忠英, 1753-1830)가 펴낸 『淸俗紀聞』의 전반적 성격을 살피고, 이를 연행록과 견주어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동아시아의 상호인식의 관점에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우선 예비적 단계로 텍스트의 전반적 성격을 고찰하였는데, 이 책의 간행목적과 방식은 序跋과 附言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세 편의 서문에는 이 책의 간행목적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무엇보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1759-1829)가 추진하는 간세이 개혁의 중점 정책 중 하나인 무역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자료라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어지러운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풍속교화도 간세이 개혁의 중요한 방향이었는데, 『청속기문』은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는 데 유용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간행되었음을 서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당통사가 청 상인에게 직접 묻고 답한 내용을 정리하고, 여기에 삽화를 그려 함께 배치하는 방식으로 편집하여 간행했다. 문답의 방식은 『華夷變態』, 『淸朝探事』 등의 책에서 보듯이 막부가 대외정보를 취득하는 오래된 방식이며, 繪入의 방식은 에도시대 출판문화에서 그림이 삽입된 회본이 중요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다음으로, 구성과 내용 고찰을 통해 『청속기문』의 성격을 살폈다. 청대 민속의 전반적 내용을 포괄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크게 두드러진 성격은 우선 淸商人의 관점이 반영된 민속지라는 점이다. 또한 이 책은 당시 사다노부가 추진하고 있는 世敎, 즉 풍속교화 정책의 참고자료로서의 성격도 있다. 물론 기초자료는 청상인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지만, 이를 편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당시 사다노부가 실권을 쥐고 있던 시기의 일본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되었다.
이상과 같이 고찰한 『청속기문』의 전반적 성격을 바탕으로, 이를 연행록과 비교해 보면서 해당시기 조선과 일본의 중국 인식을 비교해보았다. 연행록과 『청속기문』은 그 저술 목적과 방식 그리고 성격에서 현저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연행록에서 청 풍속을 기록하는 일은 청의 대륙 웅거에 따른 중화문명의 성격을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조선의 대외정책적 판단이라는 과제와 맞물려 있다. 그러나 『청속기문』은 무역관리의 참고자료 확보와 풍속 교화의 참고자료 수집이라는 당대 막부의 집권자의 정책과 관련된 한시적 목적에 의해 저술된 텍스트다. 따라서 이 책은 에도시대 일본의 중국인식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18세기말이라는 매우 한정된 시기에 한정된 의도를 반영한 텍스트라고 규정할 수 있다.


This article focuses on examining the overall character of the Chungsokgimun published by Nakagawa Tadateru(1753-1830) in the late Edo Period and comparing it to the Chinese travel records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is ultimately a process to understand text from the perspective of East Asian mutual recognition.
As a preliminary step, the overall nature of the text was considered, and the purpose and manner of the publication of this book was based on preface, introduction, and additional words. The three preamble illustrates the purpose of the book's publication, and most of all, it is to implement trade policies, one of the key policies of the Kansei reform promoted by Sadanobu Matsuda (1759-1829). In addition, customization was an important direction for the reform of Ganshei to correct the chaotic customs, and the way Edo Bakufu acquires foreign information is the old way to implement these policies, and the way paintings are inserted is the absolutely important part of the publishing culture of the Edo period.
Next, we looked 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Cheongsokmun through the composition and contents of the book. It can be seen as a comprehensive coverage of the folklore of the Qing Dynasty, but its remarkable characteristic is that it is a folk paper that reflects the perspective of the Qing merchants. This book is also a reference to the customization policy pursued by Sadanobu at the time. Of course, the basic materials project the perspective of the merchants of the Qing Dynasty, but the editing and organizing of the materials reflected Japan's view of China when Sadanobu was in power at the time.
Based on the overall characteristics of the Chungsokgimun, which was considered as above, we compared the Chinese perception between Joseon and Japan by comparing the Chungsokgimun with the Yeonhaengnok. Yeonhaengnok and the Chungsokgimun reveal significant differences in the purpose, manner, and character of its writing. The exploration of the customs of the Qing Dynasty by YeonHaengnok is the process of interpreting the changes in Chinese civilization following the rule of the Qing Dynasty. The process coincides with the task of foreign policy judgment in Joseon. However, the Chungsokgimun is a text written by a temporary purpose related to the ruling party's policy of securing reference materials for trade management and collecting reference materials for custom edification. Therefore, from the macro perspective of the Chinese style of the Edo period, this book can be defined as a text reflecting the limited intention of the end of the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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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유구(琉球) 유학(儒學)의 계보(系譜)와 학통(學統) - 「묘학기략(廟學紀略)」을 중심으로

저자 : 이성혜 ( Lee¸ Seong-hea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3-22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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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의 유학은 중국 복건성 민인 36성과 명청 교체기에 유구로 건너온 네명의 학자에 의해 토대가 마련되었다. 쿠메마을은 처음 유구로 건너온 민인 36성이 모여 산 곳으로 이른바 유구 한학의 시발지이다. 네 명의 중국학자도 이곳에 거주했다고 보인다.
유구의 유학 계보와 학통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쿠메마을계이고 다른 하나는 수리왕부계이다. 쿠메마을계는 유구 유학이 시작된 곳일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유구 유학을 대표한다. 공자묘와 명륜당도 이곳에 설립되어 사실상 유구 유학의 메카였다. 그러나 이곳은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곳이다. 즉, 唐學계보이다. 그러므로 18세기 말, 젊은 尙溫王은 王城이 있는 수리에 官生 후보자를 육성하기 위한 國學을 설치하는 내용을 포함한 관생제도개혁을 단행했다. 말할 것도 없이 쿠메마을에서는 극심한 저항을 하는 등, 이른바 관생소동을 일으켰다. 관생제도개혁이 의미하는 것은 쿠메마을에서 독점하던 文敎와 敎權이 수리로 넘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권위를 당할 수는 없었다. 이른바 수리왕부의 國學계보가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1798년, 유구 왕성이 있는 수리에 公學校所가 창건되었고, 이는 1801년에 국학으로 改稱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상온왕 자필의 「海邦養秀」라는 편액이 걸렸다. 이후 수리출신이 관생으로 파견되면서 수리왕부에 의한 국학계보의 유학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유구 역사의 결과로 보면, 매우 늦었다. 수리에 국학이 설립된 지, 채 100년도 되기 전인 1879년에 일본메이지정부에 의해 琉球處分되면서 유구왕국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구처분되기 이전의 소용돌이 상황까지 생각하면 수리의 국학에서 차분하게 유학자를 기르고 배출한 시기는 더욱 짧다. 따라서 수리 출신의 儒子들은 쿠메마을 출신보다 적고, 업적 역시 많지 않다. 하지만 왕부가 끝나기 전, 수리에 국학을 설립하고, 수리 출신의 유학자를 배출하여 왕부의 자존심을 세운 것은 의미가 있다.


Fundamentals for the Ryukyu Confucianism were set by 36 family clans from Fujian Province of China and four Chinese scholars who moved to the Ryukyu Kingdom at the time of Chinese power transition from the Ming to the Ching dynasty. Kumevillage was where people of those 36 clans first settled and lived together, becoming the starting place of Ryuku's own Chinese scholarship.
The genealogy or scholastic mantle of the Ryuku Confucianism was largely based on two pedigrees. One was the pedigree of Kumevillage and the other that of Suriwangbu, which was the political and administrative entity of the Ryuku Kingdom. Kumevillage was where the Ryuku Confucianism started, quantitatively or qualitatively representing the Confucianist scholarship of the Ryuku Kingdom. With both the Confucius' Tomb and Myeongryundang formed there, Kumevillage was apparently the mecca of the Ryuku Confucianism. By the way, the village was initially formed by people who immigrated from China and their offsprings. In other words, scholastically, Kumevillage stood itself on the schools of the Chinese Tang nation.
In the late 18th century, eventually, King Sho-on, the then young monarch of the Ryuku Kingdom drove so-called the scholar official system reforms that included the establishment of gukhak or national academy, in which candidates for the position of gwansaeng or scholar official would be brought up, at the royal castle in Suri. This led to extreme resistance from Kumevillage, so to speak, the Gwansaeng Riots because those reforms meant exclusive rights to control and manage the education of Confucianism would be forcedly handed over from the village to Suri. However, the village was succumbed to royal authority, which meant the very beginning of Suriwangbu's national academybased pedigree of the Ryuku Confucianism.
More specifically, an public educational institution of Confucianism named Gonghakgyoso was founded in 1798 in Suri where the royal castle of the Ryuku Kingdom was stationed. It was renamed as Gukhak in 1801 and simultaneously a tablet saying 「Haebang Yangsu」 written by King Sho-on himself was hung onto its premise. Since then, Suriwangbu's national academy-based genealogy of Confucianism firmly positioned itself as scholar officials of Suri origin were brought out and dispatched around the kingdom. These developments were, however, so late in terms of Ryuku's history, for the kingdom was completely disappeared by the Japanese Meiji government's so-called the Ryuku disposal in 1879, less than even a century after the establishment of gukhak or national academy in Suri.
Thus, Confucian scholars of Suri origin were fewer and less achieving than those of Kumevillage origin. However, it deserves to be evaluated that Suriwangbu built up its own pride by founding gukhak before its demise and bringing up scholastic Confucianists of Suri origin.

KCI등재

9『석씨요람(釋氏要覽)』에 관한 연구

저자 : 김순미 ( Kim¸ Soon-mi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7-25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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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고는 11세기 초에 중국에서 처음 간행된 『석씨요람』(4권 2책)이 불가의 규범서로 이용되면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음을 서발문을 통해 밝혔고, 그 과정에서 구성과 내용, 성격과 사상을 살펴보면서 역사적 · 자료사적 가치를 확인하였다. 저자 석도성은 처음 법문에 입문하는 출가자들이 본말을 몰라 조롱을 받을까 염려하여 『석씨요람』을 편찬하였다. 중국판본 『석씨요람』(4권 2책)이 우리나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佛門의 喪儀集을 만들 때 참조하였다는 기록으로 분명히 重刊· 유통 되었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간행한 판본이 발견되고 있지 않아서 단정 짓기는 어렵다.
이 책은 불교 용어를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근거 있고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고, 『화엄경』의 菩薩十種知에 의거하여 佛門의 요점을 잘 간추렸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우리나라 불교계와 학계에서는 학술적인 글에 많이 인용하고 있다.
중국판본과 일본판본을 비교하여 보면, 내용상 27편 679조목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고, 구성상 2책을 3책으로 분권하면서 편차를 대폭 바꿨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11세기 초 4권 2책의 초판본(12행 23자)이 만들어지고 백 년이 안 되어 3권 3책(10행 20자)으로 분권한 것은 서발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석씨요람』은 일본에서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禪刹에서 중요한 규범서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중국판본과 일본판본이 있는데,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다는 2책 본이 소장되어있어서 그 자료사적 가치와 더불어 역사적 가치 또한 높다하겠다.


This study examined the composition, contents, features, and thought of the Seokshi yolam (釋氏要覽) and confirmed its value in terms of history and the history of documentary materials. The original version of the Seokshi yolam, including four volumes of two books, was first published in China in the early eleventh century. As it began to be used as essential readings for Buddhists, the Seokshi yolam was published several more times.
The Seokshi yolam was compiled by Daocheng. He wrote the book in order to help monks who first encounter Buddhist writings to understand Buddhist writings, such as the notion of the alpha and omega (本末).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Chinese version of the Seokshi yolam is now kept in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it is evident that the Seokshi yolam was imported into Korea from China. Moreover, there remain some historical records that the Seokshi yalam was referred to when the Buddhist funeral manuals (喪儀集) were written. Through this documentation, it is assumed that the Seokshi yolam was once issued and distributed in Korea. However, this is difficult to ascertain since the Seokshi yolam that was published in Korea has not yet been found.
The Seokshi yolam primarily conveys the underlying and accurate meanings of Buddhist terminology in the way of documentary archaeology. The Seokshi yolam also summarizes the salient points of Buddhist writings based on the ten kinds of Buddha's wisdom (菩薩十種知) in the Avatamsaka Sutra(『화엄경』). For these reasons, Korean Buddhist and academic circles frequently cite the Seokshi yolam in their academic writings.
Comparing the original Chinese version and Japanese versions of the Seokshi yolam, they both include 27 chapters and 679 articles. However, the Japanese version is clearly different from the Chinese version in terms of composition, since the Japanese version was divided into three books from two books. Their prefaces and postfaces demonstrate that in the early eleventh century, the first edition of the Seokshi yolam consisted of four volumes of two books (12 lines and 23 letters) and was reorganized into three volumes of three books (10 lines and 20 letters) within a hundred years. Later, the Seokshi yolam was introduced into Japan and published several times to be used as Buddhist guidelines in temples of the Zen sect. Today,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has both the Chinese and Japanese versions of the Seokshi yolam, and owns its two-book edition, which is worthy of note since it is rare in China. Therefore, it can be considered highly valuable in terms of history and the history of documentary materials.

KCI등재

10오키나와 운가미(海神祭)의 구조와 특징 - 시오야만(塩屋湾)의 제장(祭場)과 제신(祭神)을 중심으로

저자 : 이현숙 ( Lee¸ Hyun-sook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55-28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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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전통신앙은 고대 원시 자연신앙과 인간의 죽음에서 시작되는 조상신 신앙에 근거한 애니미즘적인 다신교이다. 바다와 산으로 형성된 시오야만에서는 바다의 敬畏에서 '니라이카나이' 세계관에 대한 깊은 인식과 산악신앙에 기원을 둔 '우타키(御嶽)'신앙이 두텁다. 그래서 '운가미(海神)'의 바다에서의 거처는 '니라이카나이', 산에서의 거처는 '우타키', 마을에서의 거처는 '카미아사기(神アサギ)'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시오야만(塩屋湾)의 운가미는 우타키에 기원을 둔 카미아사기가 주요 제사 장소이다. 그 외 마을의 여러 기원장소(拜所)는 물론 노로殿, 宗家, 해변, 강변, 바다, 마을 공민관 등 祭場의 다양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운가미의 표상적인 祭神은 바다에서 오는 海神이다. 이는 바다 저멀리 아득한 끝에 있다는 니라이카나이의 타계관에 의한 것이다. 니라이카나이는 죽은 자가 가는 저승임과 동시에 새 생명이 탄생하는 생명의 근원으로 아기의 영혼이 탄생하고, 祖靈은 조상신으로 신격화되는 곳이다. 이러한 점에서 운가미의 신은 바다를 지키는 海神뿐 만 아니라 조상신을 포함한 여러 신의 존재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니라이카나이가 바다에 있고 바다를 통해서 온다고 인식하는 해신은 시오야만 주민들의 의식 속에 신의 상징적 의미로 자리 잡고 있다. 즉 시오야만의 운가미의 祭場과 祭神에는 복합적이고 다양성을 가진 구조와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논문은 시오야만의 마을공동체 종교의례인 운가미의 祭場과 祭神를 중심으로 운가미의 구조와 특징을 고찰하였다.


Okinawa's traditional faith is an animistic polytheistic religion based on ancient primitive naturalism and ancestralism that begins with human death. In Shioya Bay, which is formed by the sea and mountains, there is a deep understanding of Niraikanai's world view and Utaki belief, which originated from mountain worship, in the piousness of the sea. Ungami's residence in the sea is Niraikanai, Utaki from the mountains, and Kmiasagi from the village. With this worldview, Ungami in Shioya Bay has its origins in singing and is the main place for festivals. In addition to the various prayer sites in the village, you can see the diversity of the festival sites such as the palace, the head family, the beach, the riverside, the sea, and the village community center.
However, the symbolic deity of Ungami is the sea god. This is due to Niraikanai's view of the world far away from the sea. Niraikanai means that the soul reborn as the root of the life in which a new life is born as well as the god of death that the dead go, is a baby, and the god reborn as an ancestor. In this respect, the various gods of Ungami need to recognize the existence of various gods, including not only the sea god who protects the sea but also the ancestral god. In particular, the sea god, who recognizes that Niraikanai is in the sea and comes through the sea, has the symbolic meaning of God in the consciousness of the residents of Kamaya. In other words, there are complex and diverse structur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Unkami Festival site and various gods in Shioya Bay. In this sense, this article focuses on the structure and characteristics of Ungami, a religious ritual of the village community in Kuriya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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