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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cultural rel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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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7)~38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81
문물연구
38권0호(2020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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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곤지(昆支)의 도왜(渡倭)와 그 후손들

저자 : 박재용 ( Park Jae-yong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9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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昆支는 5세기 후반 왜국으로 장기간 파견되었다. 이는 곤지의 백제 내 세력을 억제하고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한 개로왕의 조치였다. 곤지는 河內飛鳥 지역에 정착한 후 그곳의 백제계 이주민들을 보호·결속시키면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곤지는 왜국에 체재하면서 후손을 형성하게 되고, 백제내 세력과도 관계를 맺으면서 국내외적으로 지지기반을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웅진초기 대내외적 혼란한 속에서도 아들인 동성왕이 즉위할 수 있었다.
왜국 내에서는 飛鳥戶造氏라는 후예씨족이 곤지의 명맥을 잇게 된다. 비조호조씨는 河內國 安宿郡에 기반을 두고 大和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이후 奈良·平安시대에 이르러서는 율령관인들을 다수 배출하는데, 그 후손들은 계속해서 백제 곤지의 후손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곤지의 후손들은 고대 일본에 백제색이 농후한 문화를 형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The Gongji was sent to Waeguk for a long time in the late 5th century. This was a measure of King Gaero to restrain Konji's forces in Baekje and to inherit the throne to his children. After settling in the Kawachi-Asuka area, Konji protected and united the Baekje immigrants and built an economic foundation. It is believed that Konji formed descendants while staying in Waeguk, and formed a support base both domestically and internationally by establishing relationships with the forces in Baekje. Based on this foundation, his son, King Dongseong, was able to take office despite internal and external chaos in the early days of Woongjin.
In Waeguk a descendant clan named Asukabenomiyatuko-si succeeds Konji. Asukabenomiyatuko-si grows up by forming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Yamato Kingship based on the Asukabe-gun Kawachi-guk. Later, in the Nara and Hyeian era, many bureaucrats of statute were produced, and their descendants continue to emphasize that they are the descendants of Baekje Gonji. These descendants of Gonji played an important role in forming a culture rich in Baekje color in ancient Japan.

2가야 왕성의 공간구조와 경관

저자 : 최경규 ( Choi Gyong-gyu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5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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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제국에서 왕 또는 지배자가 거주한 성이 조사된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다라국을 대상으로 주변 유적 등 고고학적 양상을 정리하여 가야왕성으로서의 구조적 특징과 경관에 대해 거시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가야 왕성의 공간구조와 경관에 대해 검토해 본 결과, 신라와 백제와 같이 도시구획을 기본으로 하는 도로와 사찰은 조성되지 않았지만, 고대 도성체제의 구성요소인 왕궁, 취락, 왕묘, 제의시설, 생산시설 등은 두루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왕궁과 왕묘역이 1km 이내 상당히 지근거리에 인접하며 상호 가시권에 포함되는 경관은 가야 왕성만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로 이해된다. 가야는 왕궁을 보호하는 위곽시설인 토성을 축조하면서 왕성의 공간구조를 확립해 나가는데, 특히 중요시설을 중심지로 배치하고 특수생산시설 등을 외곽으로 이동시키는 양상은 도성체제의 인식을 보여주는 정황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금관가야의 경우 토성 성립 이후 400년 고구려 남정과 신라의 서진 등으로 인해 도성체제로의 발전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며 후기가야의 대국이었던 대가야와 아라가야 또한 5세기 후반 토성성립에서 멸망기까지 도성 개발에 진력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가야는 미완의 도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을 바꿔 생각하면 한반도 고대국가의 도성체제로의 이행기의 양상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가야 왕성으로 볼 수 있다.


Among the Gaya empires, Geumgwan-Gaya, Dae-Ggaya, Ara-Gaya, and Dara-Guk were found to have fortresses where kings and rulers lived. The archaeological aspects, including the surrounding ruins, were organized and the structural features and scenery of the Gaya Kingdom were explored in a macro-level manner. No roads or temples were built based on urban areas such as Silla and Baekje. However, it was confirmed that royal palaces, settlements, royal tombs, ritual facilities, and production facilities were all part of the ancient capital city system. And the view that the royal palace and the Wangmyo station are close to each other within a kilometer of distance can be seen as one of the common characteristics of Gaya's royal castle. Gaya established the space structure of the fortress while building the fortress, which is a memorial facility for the royal palace. In particular, the pattern of placing important facilities in the center and moving special production facilities to the outskirts can be seen as evidence of the perception of the capital city system. However, in the case of Geumgwan Gaya, it must have been difficult to develop into a capital city system due to the 400 years of the southern conquest of Goguryeo and the westward advance of Silla after the establishment of an earthen rampart. It is understood that Dae-Gaya and Ara-Gaya, which were great kingdoms of the end of the Gaya period, were also not in a condition to concentrate on the development of the capital from the establishment of an earthen rampart to the late 5th century. In other words, Gaya is an unfinished city, and in other words, the best archaeological data showing the transition period of the ancient Korean peninsula's capital system is Gaya's royal castle.

3고분 축조기법과 매장의례를 통해 본 소가야권 고분군 축조집단의 성격 - 대형 봉토분과 분구묘를 중심으로 -

저자 : 정인태 ( Jung In-tae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9-9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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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야권의 3대 고분군인 산청 중촌리고분군, 합천 삼가고분군, 고성 송학동고 분군은 각각의 특징을 가지며 독특한 고분문화를 전개해 간다.
산청 중촌리고분군은 목곽묘 단계에서 대가야계 위세품인 단봉문환두대도가 출토되고, 봉토분 축조단계에서는 제방상성토기법, 호석, 다량의 석재 성토재 등가야권에서 가장 먼저 봉토분이 축조되는 대가야 고분 축조기법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삼가고분군 묘제와 봉토 축조, 대가야 석실 축조기법의 관련 아래 오랜 기간 고분군을 조영해왔으며, 남강 수계를 통한 대가야와 소가야의 가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합천 삼가고분군은 소가야권 고분군 중 가장 오랜기간 가장 많은 봉토분이 축조된 고분군이다. 다곽식의 구조로 봉토를 되파서 일정한 패턴으로 배치하거나 수평·수직으로 증축하여 봉토를 확대해 나가는 독특한 축조방식을 이용하였다 고분 배치의 매장규범은 송학동고분군과 내산리고분군에 영향을 주었고, 봉토 증축 방식은 합천 창리고분군과 대가야 최고 지배집단 묘역인 지산동고분군의 하위 고분 축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봉토 축조기법에서는 대구획석축, 목가구구조 등 아라가야 고분 축조기법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고성 송학동고분군은 가장 외래요소가 강한 곳으로 분구묘(통영 남평리 10호분), 배장묘 배치(삼가고분군), 잠형주구·1B호분 석실(왜), 표형분(신라), 마구·토기(대가야·왜·신라)의 영향이 확인된다. 축조기법의 특징으로는 점토블럭을 성토재와 구획재로 널리 사용하였으며 묘역정지 시 전면에 걸쳐 점질토를 깔거나 선대 무덤을 파괴하지 않고 봉토를 축조하는 매장풍습이 보인다.


The three ancient tombs in the So-gaya are the Jungchon-ri ancient tombs in Sancheong, Samga ancient tombs in Hapcheon, and Songhakdong ancient tombs in Goseong.
Jungchon ancient tombs were influenced by the construction technique of Dae-gaya ancient tombs and relics such as the long sword with ring pommel.
Ancient tomb construction techniques include soil-building techniques, circular burial stone marker, and soil-building materials.
Later, the construction techniques of Samga ancient tombs and Goa-dong stone chamber were also influenced. It served as a link between Dae-gaya and So-gaya.
Samga ancient tombs is a multi-bracket system that extends the land horizontally and vertically.
It is possible to have affected the lower tombs in Dae-gaya ancient tombs.
The construction techniques of Ara-gaya ancient tombs, such as compartmental soil-building techniques and wooden structures, were influenced. 
Songhak-dong ancient tombs are the most strongly married places, including the structure of tombs, tomb layout, ditch enclosure, junction, twin tombs and horse harnesses.
And clayblocks was used a lot in the construction of the clay.

4안흥진성(安興鎭城)의 축조(築造)와 이설(移設)

저자 : 심정보 ( Sim Jeong-bo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3-134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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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수군영진의 해상방어는 고려의 해상방어론을 계승하여 선상수어(船上守禦) 원칙에 의하여 만호의 지휘하에 병기와 양식을 병선에 적재하고 선상에서 대기 근무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수군의 선상수어 원칙에 의하여 성보(城堡)를 축조하지 못하다가 성종 15년에 경상도와 전라도에 한정하여 병기와 육물(陸物)을 저장할 작은 규모의 석보(石堡)를 축조할 것을 건의하게 되었으며, 각 포에 성보를 축조하면 만호의 거처가 된다는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성종은 “일이 이미 거행되었으니, 멈출 수 없다. 뒤에 만약에 변고가 있으면 별도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여 축성을 강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종 17년 10월 제포에 축성한 것을 시작으로 중종17년(1522) 까지는 서해안과 동해안의 수군진도 성보를 축조하게 되었다.
안흥진성의 초축시기는 문헌상으로 확인이 되지 않고 있으며, 효종 4년(1653)에 화정도로 이설(移設)한 후 효종 6년부터 축성하기 시작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대동지지』, 『증보문헌비고』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화정도로 이설하여 축성한 기록이 수록된 『대동지지』를 인용하여 안흥성 조사보고서에는 안흥진성이 효종 6년(1655)에 축성되었다고 하였고, 문화재청 문화유산 검색창에서도 안흥성이 효종대에 축조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대동지지』에는 현종 10년에 안흥진을 화정도 신진(新鎭)에서 본진(本鎭)으로 다시 이설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에는 구진(舊鎭)과 신진(新鎭)과의 이설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분명히 초축시기의 안흥진 본진(本鎭)과 화정도 신진(新鎭)의 성곽이 축조되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문헌상에 누락된 안흥진성 초축시기를 밝혀줄 수 있는 각자성석(刻字城石)이 1993년 공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안흥성 조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각자성석의 명문은 「萬曆十一年癸未閏二月…」로 시작하는 내용으로 만력(萬曆) 11년은 선조 16년(1583)에 해당되어 이 때를 안흥진성 본진의 초축시기로 파악하게 되었다. 또한, 안흥진성 체성에 대한 2차례의 발굴조사 결과를 통하여 두 시기의 축조기법이 확인되어 초축시기 및 수축시기로 판단하게 되었다.
최근에 이루어진 안흥진성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많은 연구성과가 있었음에도 신진(新鎭)과 구진(舊鎭)의 축성 및 수축사실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이와같은 오류를 야기한 것은 효종 4년에 안흥진을 화정도로 이설하여 현종 10년 본진(本鎭)으로 다시 이설하기까지 16년간 안흥진이 화정도의 신진(新鎭)에 있었다는 것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정도의 신진(新鎭)에는 축성되지 않았고, 본진이었던 구진(舊鎭)의 수축공역은 신진의 축성 사실과 구진의 수축 사실을 혼합하여 효종 7년 3월 이전에 시작하여 효종 7년 10월에 완공되었다는 오류를 낳게 되었다. 이는 숙종 1년 기록인 『비변사등록』, <안흥방어사사목(安興防禦使事目)>에서 구진(舊鎭)에 수축공역이 8월에 시작되어 10월에 완공되었다는 3개월간의 수축공역을 왜곡한 것이다.
문헌기록에 본진(本鎭)과 구진(舊鎭)으로 수록된 현재의 안흥진성은 선조 16년(1583)에 초축되었고, 신진(新鎭)의 축성 도중인 효종 6년 8월에서 10월까지 수축공역이 완공되었다. 『비변사등록』, <안흥방어사사목(安興防禦使事目)>에서 구진(舊鎭)의 수축년도가 적시되지 않아 혼동을 주고 있지만 총감독관인충청도 감사 권우(權堣)의 재임시기를 적용하여 대비하면 효종 6년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이 수축공역에는 충청도의 5진영 중 좌영(左營) 속오군 2,200여명을 선발하고 승군(僧軍)으로 돕도록 하여 축조하였다.
효종 4년에 화정도로 이설한 안흥진 신진(新鎭)에 대한 축성은 효종 6년에 축성공역이 시작되어 효종 7년에 성곽축조는 완공되었으며, 이때는 축성공역으로 도내가 소요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충청도 전 고을에서 축성군을 동원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효종 8년에는 안흥 신진(新鎭)의 물 부족 문제로 존치문제가 거론되었으나 대신들과 비변사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신진(新鎭) 안흥진성을 계속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종 10년 2월 4일 예조판서 김좌명이 '안흥의 구진(舊鎭)이 형세가 매우 좋았는데, 신진(新鎭)으로 이주한 이후 불편한 일이 많고, 토병(土兵)들도 원망하며 괴롭게 여기고 있다'고 하자, 좌의정 허적이 안흥첨사진을 구진(舊鎭)으로 옮기고 별장(別將)도 혁파하여 신진(新鎭)에서는 수군을 모두 철수하는 겻으로 건의하였으며 이를 현종이 재가하고 있다. 그리하여 효종 4년(1653)에 화정도로 이설(移設)하였던 안흥진은 현종 10년(1669)에 구진(舊鎭)인 현재의 안흥진성으로 다시 이설하게 되었다.


During the early Joseon period, the Korean navy's maritime defense consisted in loading up a battleship with weapons and provisions and in standing by on board, led by the officer. Such a naval system was based on the principle of on-board defense. Such a maritime defense principle had been initiated during the Goryeo period. This principle of on-board defense kept the country from constructing fortifications. During the 15th year of King Seongjong, there was a suggestion of building small stone fortifications in Gyeongsang and Jeolla Provinces in order to store up weapons and provisions there. Some government officials were against this idea, saying that the newly constructed fortifications at military posts would end up being officers' residences. Nevertheless, King Seongjong said, “The project was already launched so we can't stop it. If there is any problem later on, we will need to take separate measures.” In this way, the king went on with the construction project. Under these circumstances, a fortresss was built first at the Jepo port in October of the 17th year of King Seongjong. By 1522 (17th year of King Jungjong), Joseon built fortifications for the navy stationed at its east and west coasts.
The first construction of Anheungjinseong Fortress is not documented. However, historical documents do explain that the fortress was moved to Hwajeongdo in 1653 (4th year of King Hyojong) and that it began to be built during the 6th year of King Hyojong. Such records are found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Bibyeonsa Deungrok (records of the Border Defense Council of Joseon), Daedongjiji (geography book) and Jeungbo Munheon Bigo (encyclopedia). Referring to Daedongjiji, which describes how the fortress was transferred to Hwajeongdo to be built again there, the “Anheungjinseong Studies Report” says that the fortress was constructed in 1655 (6th year of King Hyojong). The cultural heritage search engine on the website of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also says that the fortress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Hyojong.
However, Daedongjiji makes clear that Anheungjinseong Fortress was moved again from its new location in Hwajeongdo to its original location during the 10th year of King Hyeonjong. In additio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Bibyeonsa Deungrok elaborate on how the fortress was moved between its old and new locations. This means that Anheungjinseong Fortress was first constructed in its original location and that it was also constructed in its new location in Hwajeongdo. The date of the fortress' first construction, which doesn't appear in historical documents, has been unveiled thanks to a stone monument with a text inscribed on it. This monument was discovered in 1993 when Kongju National University Museum conducted research on the fortress. The text on the monument mentions the “11th year of the Wanli Emperor,” which is 1583 (16th year of King Seonjo). Therefore, the year 1583 came to be regarded as the date of the first construction of the original fortress of Anheungjinseong. Furthermore, two excavation projects of the fortress body of Anheungjinseong led to clarifying construction techniques dating from two historical periods, which came to be known as the period of its first construction and that of its additional construction respectively.
Although a great volume of research has recently been conducted on the occasion of symposiums on Anheungjinseong Fortress, researchers have failed to shed light on the construction and additional work of the old and new fortresses. They have failed to explain the matter because they have overlooked the fact that Anheungjinseong Fortress was in its new location in Hwajeongdo for 16 years from the time when the fortress was moved to Hwajeongdo (4th year of King Hyojong) to the time when it was transferred again to its original location (10th year of King Hyeonjong). Supposing that the fortress wasn't built in its new location in Hwajeongdo, they have tried to explain the construction of the old (original) fortress by mixing the facts about the new and old fortresses. Consequently, they have wrongly concluded that the fortress began to be built before March of the 7th year of King Hyojong and that it was completed in October of the 7th year of King Hyojong. Such a conclusion distorts the three-month construction work in the old location which was launched in August and completed in October. This is explained in the chapter “Anheung Bangeo Sasamok” in Bibyeonsa Deungrok, historical records of the 1st year of King Sukjong.
Today's Anheungjinseong Fortress, whose original and old location is described in historical records, was first constructed in 1583 (16th year of King Seonjo). The fortress was completed from August to October of the 6th year of King Hyojong, during the construction work in its new location. Bibyeonsa Deungrok (“Anheung Bangeo Sasamok”) doesn't specify when the old fortress was built, generating confusion. Nevertheless, considering the tenure of Gwon Wu, governor of Chungcheong Province who supervised the construction project, it is certain that the fortress was built during the 6th year of King Hyojong. The project mobilized about 2,200 reservists from the left camp, one of the five military camps in Chungcheong Province, as well as monk soldiers.
During the 4th year of King Hyojong, Anheungjinseong was moved to Hwajeongdo and its new fortress was built. This construction work was launched during the 6th year of King Hyojong and completed during the 7th year of King Hyojong. Historical documents say that the construction project caused a commotion throughout the province at that time. This implies that the project would have mobilized workers from all the villages in Chungcheong Province. During the 8th year of King Hyojong, the very existence of Anheungjinseong Fortress was jeopardized due to the water shortage at the new fortress. However, subjects at the Border Defense Council of Joseon and government officials persuaded the country to keep running the fortress in its new location.
On February 4 of the 10th year of King Hyeonjong, Kim Jwa-myeong, then minister of culture and education, said, “The topography of the old fortress of Anheungjinseong was very good but ever since it was moved to its new location, we have had so many problems. Local soldiers have also complained about it while having a hard time.” At this, Heo Jeok, then first vice-premier. suggested moving the fortress to its old location and withdrawing local officials and naval forces from the new fortress. King Hyeonjong approved the suggestion. As a result, Anheungjinseong Fortress, which had been moved to Hwajeongdo in 1653 (4th year of King Hyojong), came back to its old location in 1669 (10th year of King Hyeonjong). The fortress is still found there today.

5조선후기 백자필통 연구

저자 : 류주형 ( Ryu Ju-hyeong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5-15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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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통(筆筒)은 문방구(文房具) 중 하나로 연적(硯滴)과 함께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제작된 기물(器物)이다. 문방구는 서화를 그리고 책을 읽기 위하여 서재의 책상 위에 비치하는 기물로, 그 중 도자제 필통의 경우 모두 백자로 이루어져 있다.
백자필통은 18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제작되기 시작하여 기형, 장식기법, 문양이 점차 다양해지고 수량 또한 증가하는데 이러한 흐름은 19세기까지 이어진다. 특히 조선후기 백자필통에서의 문양은 부귀, 영화, 다산, 장수 등의 의미를 가지며 길상적인 의미를 강하게 띄는데, 이는 수요자의 취향이 반영된 것으로 백자필통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을 통해 백자필통이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일상품이면서도 완상용으로 만들어졌고, 길상문양을 시문함으로서 완상물인 동시에 기복과 염원의 매개체, 상징물로 기능하였음을 의미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 백자필통의 출현은 분원의 사번화, 학문의 발달, 양반층의 확산, 사치화 경향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자필통은 조선의 문인들이 선호하고 따르던 완상문화의 유입의 가시적 증좌이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완상문화는 문방애호사상으로 발전해 조선의 예술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또 백자필통은 조선시대 사대부에만 한정되어있던 백자 수요층이 확대된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조선후기는 백자 문방구의 전성시대였던 것이다.


A brush case is to hold brushes used to write or paint and is one of the stationery objects. A brush case was one of the stationery objects that were made in the largest amount along with Yeonjeok during Joseon. Porcelain-type brush cases were all white porcelain, and their production began in the latter part of Joseon, when white porcelain brush cases were not only made to serve practical purposes, but also cherished by classical scholars as a piece of living art to appreciate.
There were three shapes of white porcelain brush cases: circle homotype, and square. The former was made more than the latter because it was easier to make and the most convenient to hold brushes. White porcelain brush cases were also divided into the ones with no patterns and the ones with patterns. They can further be classified into Somun, Cheolhwa, Cheonghwa, Yangak, Eumgak, and Tugak according to decoration techniques. Various patterns were used including plants, animals, flowers, and geometric ones, of which plant patterns recorded the highest percentage.
The production of white porcelain brush cases became active in the latter part of Joseon, when the production of the entire white porcelain stationery objects including brush cases was more active than the previous period. The emergence of white porcelain brush cases in the latter part of Joseon holds significance in two ways: first, the introduction of the appreciation culture became visible. At the end of Ming, there was a huge trend among literary figures to make the old tradition of literary figures' culture a part of their life, appreciate it, and enjoy is as part of their daily convention. The trend was still in vogue during the latter part of Joseon and resulted in the collection and appreciation of stationery antiques enjoyed by the noblemen. White porcelain brush cases emerged in the latter part of Joseon and made the introduction of this appreciation culture visible.
Secondly, it represented the popularization of white porcelain. In the latter part of Joseon, white porcelain was characterized by the Sabeon and privatization of branches, which created an opportunity for porcelain, which used to be restricted only to the ruling class, to spread to various social classes. White porcelain brush cases emerged and mass produced for these reasons.

6일제강점기 부산 곡정 총천사 연구

저자 : 최은령 ( Choi Eun-ryung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7-18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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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총천사(總泉寺)는 일제강점기 일본 조동종이 조선에 개교한 최초의 사찰이었다. 총천사가 위치한 곳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상 곡정(谷町)인데, 이곳은 일본인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던 곳이다. 개항 이후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조계지 안에서 시가지와 가까운 복병산에 묘지를 조성하였고, 1907년 시가지 정비를 위해 복병산에 있던 일본군 부산수비대와 공동묘지 등을 이전하였다. 복병산에 있던 일본인 공동묘지는 곡정(谷町)으로 이전하면서 최신시설의 화장장도 건립하게 되었다.
현재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 입지한 곳이 곡정공동묘지 일대이고, 아미초등학교 자리가 총천사가 있었던 곳이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공동묘지였던 곳을 조선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모여들어 거주지로 변모시켰다. 지금은 부산의 대표적인 산복도로마을로 알려진 곳이고 시간적으로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형성된 이곳의 공간성은 역사, 건축, 민속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연구자들의 관심이 되고 있다.
총천사가 위치한 곡정 일대는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와 화장시설로 이루어진 죽음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곳에 유일한 종교시설로서 총천사가 입지한 점은 그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의문점을 갖게 한다. 당시 일본의 종교시설은 일본인의 거주지 주변에 인접하여 위치한 것이 일반적이었고 다른 종단의 불교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부산 곡정 총천사는 일본 조동종이 조선에 개교한 최초의 사찰로서, 일본인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던 곡정에서 일본인을 위한 장례업무를 주로 전담하며 일본인 사회에 공조하였다. 특히 총천사는 일본의 전쟁을 합리화하는 데 앞장서서 내선불교를 내세우며 일본인의 전쟁 참전자를 위한 법회 및 충령탑 건립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러한 부산 곡정 총천사는 부산지역에 많은 포교소를 건립하여 오직 일본인을 위한, 일본 정부를 위해서 조선 땅에서 일본 불교 조동종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강점기 부산 곡정 총천사가 있었던 자리에 해방과 함께 교육시설이 들어섰고, 아미초등학교가 지금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학교 뒤편 보이지 않는 능선에 석조보살상과 '수호탑'이라는 석조기단, 기타 석재편이 남아있어 과거 총 천사가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고, 이 보살상과 석조기단은 조선의 불상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어서 일제강점기 총천사에 있었던 불상인 것을 추정할 수 있다.


Chongcheonsa Temple in Busan was the first temple to be opened in Korea by the Japanese Jogye Order. The location of the Chongcheonsa Temple is Gokjeong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administrative district, where the Japanese cemetery and crematorium were located.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the Japanese built a cemetery in Bokbyeongsan Mountain, which was close to the city's capital, and relocated the Japanese military's Busan Guard and the cemetery in 1907 to maintain the city's area. The Japanese cemetery on Bokbyeongsan Mountain was relocated to Gokjeong, and a crematorium for the latest facilities was built.
Currently, Biseok Culture Village in Ami-dong, Seo-gu, Busan, is located in the Gokjeong Cemetery, where the ARMY Elementary School was located. Ami-dong Biseok Culture Village was transformed into a residential area after the Korean War, where refugees gathered to live. It is now known as Busan's representative mountain corridor village, and the spatiality of the site, which has been formed since Japanese colonial era, has attracted many researchers in various fields, including history, architecture, and folklore. The Gokjeong area, where the Chongcheons were located, is a place of death consisting of Japanese cemeteries and cremation facilities, and the fact that the Chongcheons were the only religious facilities makes us wonder about their existence and role. At that time, it was common for religious facilities in Japan to be located adjacent to the Japanese residence, and the same was true of other Buddhist sects.
The Gokjeong Chongcheonsa Temple in Busan was the first temple to be opened in Joseon by the Japanese Jogye Order. It was located in Gokjeong, where the Japanese cemetery and crematorium were located, and mainly dedicated to funeral services for the Japanese people and cooperated with the Japanese community. In particular, the general angel took the lead in rationalizing the war in Japan and actively cooperated in the construction of a court and the Chungryeong Tower for Japanese war veterans.
The Gokjeong Chongcheonsa Temple in Busan established many mission centers in the Busan area, solidifying the role of the Jogye Order of Japanese Buddhism only for the sake of the Japanese people and for the sake of the Japanese government until the liberation of Joseon.
Japanese colonial era Education facilities were built with liberation on the site of the general angel of Gokjeong in Busan, and Ami Elementary School has remained there until now. A stone statue, a stone base called the Suho Tower, and other stone sculptures remain on the invisible ridge behind the school, and the surrounding information boards indicate that the statue and stone base were in a completely different form from those of Korea, suggesting that it was a Buddha statue of Japanese colonial era's general angel. In this paper, we could not discuss in detail the events and figures that appeared in the newspaper articles of the general angel of Busan, but we would like to leave them as assign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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