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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journal of history of education

  • : 한국교육사학회
  • : 사회과학분야  >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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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5-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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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2권0호(1978)~42권4호(2020) |수록논문 수 : 675
한국교육사학
42권4호(2020년 1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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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1865년 식년문과 회시 강경(講經) 응시자 연구

저자 : 김경용 ( Kim¸ Gyungyong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2권 4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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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대표적인 과거라고 할 수 있는 식년문과의 회시 초장인 강경(講經)에 사용한 방목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제도 시행의 구체상을 좀 더 면밀히 살피고자 하였다. 1865년 식년문과 1소 강경방목과 각 지방의 향시방목, 『승정원일기』 등을 활용하여, 응시자 개인이 처할 수 있는 다양한 경우로 나누어 식년문과 급제에 성공한 경우뿐만 아니라 실패한 실태까지 가급적 상세히 밝히려 했다. 이 연구의 주요 성과와 후속연구에 대한 제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식년문과 초시의 하나인 관시(館試)가 어느 시점엔가 폐지되었고, 1865년 식년문과에서도 관시의 입격정원을 한성시 1·2소에 분배했다. 한성초시 입격자의 거주지가 여러 지방에 걸쳐 있었는데, 이런 점과 식년문과 관시 폐지가 연관되어 있었다고 추정한다. 문과초시에 입격할 때 석차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았으며 성균관 과시에서 급분의 혜택을 받은 인원은 한성초시에 나아갔다. 또한, 식년문과 초시에 입격한 인원 당사자 및 부친의 지위는 별시문과 응시자의 그것과 차별적이었다. 생원·진사로서 식년문과 초시에 입격한 인원이 희소했으며, 응시자나 부친 모두 별시의 경우에 비해 유학·학생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식년문과 회시 초장 강경에 참여하는 인원규모는 직부회시자·통독입격자 등으로 인해 법규에 근거하여 산정한 인원보다 많았다. 식년문과 회시의 합격률은 대강 10% 이하, 경쟁률은 10:1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성균관 과시에서 강경에 따른 은사자는 식년문과, 제술에 따른 은사자는 별시문과를 선호했다. 식년문과와 별시문과에 대해 서로 다른 선호도를 보이는 게 전국에 걸친 일반현상인지, 성균관 과시 출신 은사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강경으로 식년시에 직부, 강경으로 별시에 직부, 제술로 식년시에 직부, 제술로 별시에 직부 등 네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직부전시 급제자들의 거주지 분포와 급제 당시 지위 및 추후 관력(官歷)과 부친의 지위는 무엇인가 등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필요하다. 제술·강경을 모두 고시(考試)하는 통독을 거쳐 급제하거나 탈락한 인원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다. 195명의 강경방목 등재자 가운데 추후 소과 입격자가 1명밖에 없었다는 점도 조선후기 과거응시 경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사항이다. 별시문과 초시 입격자가 급제에 실패한 이후 보인 동향과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상당수 한미한 집안 출신이 문과에 도전하여 초시에 입격했다는 점, 관함자의 아들이지만 초시입격에 그쳤고 누차에 걸쳐 도전했는데 급제에 실패한 경우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This study is an interpretation on the candidates for public regular examination which took place every three years to appoint civil service officers. By this study, we can have general ideas on the successful cases and unsuccessful cases as well.
The result of this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The passers of preliminary test for public triennial examination had different social status component from the passers of preliminary test for special decennial examination. There was no one who had passed the So-Gwa(小科) among the candidates enlisted in the lists for oral test of triennial examination.
2) There has been distinct trend of application between passers who had passed of oral test from passers of written test in Grand School(太學·成均館).
3) The rate of competition and success calculated from formular did not coincide with the real concrete situation. The former was approximately more than 10:1(not 7.4:1), the latter was less than 10%(not 13.6%).
4) Afterward the year 1865, there was only one who passed the So-Gwa(小科) among 195 number of candidates. It was distinguished trend between the passers of preliminary test for public triennial examination and the passers of preliminary test for special decennial examination.
5) To the end, 141 number of candidates were unsuccessful to pass the public examination. For the most part of them were not from the high family. But some of them were son of man who had social title.
It is necessary to stand behind several researches on social mobility at that times resulted from this public examinati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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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해방 후 학기제 변천 과정 검토

저자 : 김상훈 ( Kim¸ Sang-hoon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2권 4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5-6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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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한국인 교육자와 미군정 학무국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4월 학기제와 1년 3학기제는 9월 학기제와 1년 2학기제로 변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문교부에서는 교육법 안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9월 학기제를 전제로 한 문교부 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 문교 사회위원회에서는 4월 학기제가 규정된 '대한민국 교육법안'을 만들어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교육법이 공포된 직후인 1950년 1월에 문교부는 9월 학기제가 포함된 교육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부결되었고, 1950년 11월 제2대 국회에 교육법 개정안을 다시 제출했지만 이것도 미결되어 원안이 유지되었다. 결국 1952학년도부터 4월 학기제는 법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장면 내각 때인 1961년 4월 국무회의에서 3월 학기제를 의결했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 일어났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장면 내각의 3월 학기제 변경안을 이의 없이 통과시켰다. 본고를 통해 해방 후 9월 학기제에서 4월 학기제를 거쳐 3월 학기제가 정착되기까지 논란이 되었던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당시의 쟁점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인지, 아니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지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학기제 변천 과정에 대한 1차적인 사실 확인의 결과를 활용한 다양한 연구가 이어져서, 앞으로 진행될 학기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After liberation, Korean educators and the U.S. Military Government Academic Affairs Bureau changed the April school term system and the 3 semester to the September school term system and 2 semester.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Ministry of Education formulated an education law based on the September school term system and submitted it to the National Assembly. However, the National Assembly passed the education law stipulated in the April school term system. The Ministry of Education submitted two revisions to the education law, but all were abolished. Eventually, from the 1952 school year, the April school term system began legally. And the March school term system began in 1962. Through this paper, you can check the controversial parts from the September school term system to the April school term system and the March school term system after liberation. Based on this, it is possible to examine whether the issues of the time still cannot be solved today or whether they are no longer a problem, and this will help to discuss the school term system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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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율곡의 정심공부에 관한 고찰

저자 : 박현인 ( Park Hyun In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2권 4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3-82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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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율곡의 교육 사상 중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와 표출 관계를 들여다보고, 공동체 안에서 사람다움을 지향하는 공부 방법을 다루고자 함이다.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의 정심은 함양과 성찰로 그 공부 방법을 나눈다. 그리고 그 원리는 경건이다. 율곡은 경건의 시작을 수렴, 끝을 정심이라고 보았다. 일상에서 자신의 언행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급하고 경박하지 않은 삶의 방식을 가지게 한다. 숙고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있을 때, 공부한 것으로 자신을 채워나갈 수 있게 된다. 말은 마음의 소리이고, 몸은 마음과 세상을 잇는 통로이다. 경건함과 숙고함은 언행에서 비롯되는데, 이것이 정심공부의 준비과정이다. 함양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 자신에게 들어오기 전, 일상에서 마음을 기르는 일이다. 함양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잡생각이 일어나 않으나, 정신이 또렷한 상태이다. 맑은 거울이나 잔잔한 물과 같은 상태로 마음이 보존되는 것이다. 성찰은 일이 일어난 후, 이치에 맞게 그 일을 마음속에 있는 잣대에 따라 잘 처리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잣대를 잘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앎의 체득인 궁리이다. 율곡에게 정심은 지(知)공부가 아니라, 행(行)공부이다. 율곡은 마음을 이해해야 할 영역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행동주체로 여긴다. 마음은 몸의 주인이다. 마음은 명확한 행동 주체로 능동성을 가진다. 몸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일상생활 속 이치를 표현하는 도구적 역할을 한다. 마음은 드러나지 않지만, 행(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공부[正心]의 층위에 따라 일상과 삶의 모습은 달라진다. 따라서 생활 속 정심공부의 실천은 개인의 자족과 사회적 역할 속 자족이 조화를 이루며,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the true self of humanity as a way of life in the time of domination of human mind by the material civilization. This study especially will cover a few educational thoughts of Yulgok - the understanding of a human mind in one's daily life and look into expression relation, and the study method which pursues human nature in communities. JeongShim, which means to reform the mind, is divided into ①Hamyang [Cultivation of mind] and ②Seongchal [Self-examination·Reflection] for the way of study. And the principle is Gyonggunn. Yulgok saw the beginning ofGyonggunn as Suryeom [Correcting the words and attitudes], and the end as JeongShim. Suryeom, which means to collect, gather, means the correction in attitude and posture. Being aware of one's speech and behavior allows a way of life in which is not impatientand frivolous. When there is space in mind for deliberation, one is allowed to fill oneself by studying. The speech is the sound of the mind, and the body is a gateway to the world from the mind. Reverential and deliberation begins in speech and behavior;and this is the preparation process of the study of JeongShim. ①Hamyang is a way to grow the mind in one's daily life before an incident occurs or an object comes in possession. Hamyang calms the mind, does not arouse trivial thoughts, but keeps lucid state. The mind is preservedlike a clear mirror or calm water. Thus, when an incident occurs, one can reflect on Doli and Seongchal. ②Seongchal is an ability which allows well-handled process following the standard in one's mind according to Yiqi after an incident occurs. The way to study Seongchal is to avoid cunning, and through faithfulness, followYiqi and react by understanding one's feelings. Here, Yiqi means the standard of the mind, and to right this is Gungli [accumulation of knowledge]. To Yulgok, JeongShim is not Ji [Knowledge], but Haeng [Doing]. Yulgok saw the mind as not something to be understood, but main body of action. The mind owns the body. The mind has audience activity as clear main bodyof action. The body acts as a tool to express Yiqi in one's daily life as the mind makes orders. The mind cannot be seen, but carries out a role as Haeng. Thus, depending on the horizon of mind studying, one's daily life and the life differs. Therefore, thepractice of studying JeongShim in one's daily life balances 'one's self-sufficiency' and 'self-sufficiency in the role of society', and allow one to live like a decent human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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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시대 사대부 투호례의 변화양상과 그 예교적 함의

저자 : 육수화 ( Yuk¸ Su-hwa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2권 4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3-10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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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왕실문화에서 사대부문화로 확장된 조선시대 투호례의 변화양상을 추적해 보고, 그 예교적 의미를 구명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은 향촌사회의 지배와 교화를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향음주례와 향사례의 보급을 위해 노력하였고, 『국조오례의』의 완성으로 향음주례와 향사례의 시행은 법제화 되었다. 그러나 향음주례와 향사례의 경우 행례 자체가 너무 번거롭고 거창하여 거행하기 힘들었다. 투호례의 경우 그 의식이 간단하여 행하기가 쉬우면서도 그 효용성이 커서 향사례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투호례가 사대부 문화로 확장되는 전기가 되기도 하였다. 투호례의 심신수양과 덕성함양이라는 교육적 효용성은 투호가 사대부 문화로 정착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퇴계는 경(敬)공부의 일환으로, 율곡은 심신의 수양과 긴장의 이완을 위한 교육방법론의 하나로 투호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투호례의 특징은 투호회의 결성과 투호례의 대중화를 들 수 있다. 물론 17세기의 투호례는 여전히 상류층의 문화로 유희와 예교가 공존하였다. 이른바 대중적이라는 것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김두열 『투호아집도』와 신윤복의 <임하투호>는 이러한 변화를 확연히 보여준다. 투호회의 결성은 학파간의 결연 혹은 문중 간의 결속, 정치적 결속력의 강화 등 단순한 친목을 넘어 그들만의 유대강화가 목적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특성은 김좌명과 김두열이 각각 주관한 투호회를 통해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This study traced the changing patterns of Tuhorye(投壺禮, Tuhoritual), which was extended from the royal family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culture of the gentry, and examined its educational meaning. Joseon, which had Confucianism as its national policy, made efforts to spread Hyangeumjurye(鄕飮酒禮, Rite of Drinking) and Hyangsarye(鄕射禮, Rite of Archery) at the national level, and with the completion of 『Gukjo Oryeui(國朝五禮儀)』, the implementation of Hyangeumjurye and Hyangsarye became legislated. This aimed at the edification of customs, but behind it, the government had a great intention to lead the domination and edification of the country village society. However, it was not implemented properly due to the negative attitudes of the Hungu(勳舊) forces and the purge of literati. Moreover, in the case of Hyangeumjurye and Hyangsarye, the ceremonies themselves were too cumbersome and grandiose, so they were impossible to perform. However, in the case of Tuhorye, the ceremony was simple and easy to perform, but its usefulness was so great that it took the place of the Hyangsarye. This also served as a turning point for the expansion of Tuhorye into the culture of the gentry.
One of the reasons that Tuhorye was able to be established as the gentry culture was because it included educational utility of mental and physical training and character development. In the Tuho(投壺) of the upper class in the Joseon Dynasty, there was a ceremony of Yeoneum(宴飮) and the custom of making poetry. This is something that was not found in Chinese ancient traditions, and is a tradition that was not seen in previous records in Korea. Toegye(退溪李滉) suggested Tuhorye as a part of the study of Gyeong(敬), and Yulgok(栗谷李珥) propsed Tuhorye as one of the educational methodologies for mental and physical training and relaxation of tension.
The characteristics of Tuhorye in the late Joseon Dynasty include the formation of Tuhohoe(投壺會, Tuhogathering) and popularization of Tuhorye. Admittedly, the Tuhorye of the 17th century was still a culture of the upper class, where both entertainment and ceremonies coexisted. The popularization was only possible in the late 18th century. Kim Doo-yeol's(金斗烈) 『Tuhoajipdo(投壺會圖)』 and Shin Yun-bok's(申潤福) < Imhatuho(林下投壺) > clearly show these changes. The formation of the Tuhohoe aimed at reinforcing their own bonds beyond simple friendships such as solidarity between schools, solidarity between cultures, and political solidarity. This characteristic can be clearly found at the Tuhohoe organized by Kim Jwa-myeong(金佐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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