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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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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6)~120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975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0권0호(2018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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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합심의 공론장 ― 1896~98년의 토론회를 중심으로

저자 : 권기하 ( Kwon Kih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0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7-4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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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협성회와 이듬해 독립협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토론회를 시작하고 이를 정례화 했다. 최근 연구들은 이들 토론회를 통해 합리적인 숙의의 문화가 도입되었다고 평가한다. 본 논문에서는 당시의 토론회로부터 다른 특질, 곧 윤리적 관점의 통일에 대한 지향을 찾아내고, 이것이 합리성 이상으로 토론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음을 주장한다. 이 특질은 다음의 배경과 연관되어 있다. 먼저, 1896년을 즈음하여 개화파가 이전과 달리 인민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조직, 통합하려는 의도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당시 등장한 신문이나 독립협회와 같은 결사 그리고 공개적인 토론회를 비롯한 각종의 집회는 이를 위한 기획의 일부였다. 다음으로, 개화파가 당대의 문제에 대해 시비의 판정을 강조하는 등 윤리적 접근을 우선시했는데, 이때 유교적 공 관념이 핵심적 준거가 되었다는 점이다. 유교에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낼 법한 의견을 공론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인해 토론회에서는 특정 문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보다 주도층의 판단을 참가자들과 공유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는 등 독특한 개성을 보이게 된다.


The Mutual Friendship Society (Hyeopseonghoe, 協成會) in 1896 and the Independence Club (Dongniphyeophoe, 獨立協會) in the following year held its first public debate meetings. Recent studies have suggested that these debate meetings fostered a culture of rational deliberation. This study argues that the meetings had another aim, namely to seek a unified ethical perspective, which was a more unique feature than rationality to determine the nature of the meetings. This distinctive aspect of discussion meetings relates to two conditions at the time. Firstly, around 1896, the Enlightenment Party (Gaehwapa, 開化派) changed its approach from seizing political power to winning the public's unanimous support. Newspapers, associations, and various assemblies including debate meetings were part of their project to turn people into supporters of the party. Secondly, the Enlightenment Party prioritized ethical judgment such as assigning right or wrong to contemporary issues, for which, the Confucian idea of fairness (Gong, 公) was adopted as a key criteria. Confucianism tends to acknowledge opinions that can potentially get the same affirmative response from everybody as an impartial view. Due to these two circumstances, the debate meetings developed their own unique characteristics, preferring sharing leaders' judgment with other participants to encouraging the exchange of diverse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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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화교의 민간신앙과 비밀결사 ― 거선당과 의선당을 중심으로

저자 : 이정희 ( Yi Jung-h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0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41-7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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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거선당과 의선당 사원을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 사원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제시했다. 첫째, 의선당과 거선당 사원의 창건 연대이다. 의선당의 토지대장과 편액을 조사한 결과, 의선당 사원은 1893년 경화도진 근처의 작은 묘우로 창건되어 활동하다, 1927년 12월 현재의 의선당 부지를 매입하여 1928년 창건되었다. 이때 건축된 사원은 몇 차례의 수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거선당 사원은 의선당과 마찬가지로 작은 묘우로 시작되다, 화교 정도덕과 이보산이 증여한 대지에 1907년 경 사원을 건축하여 이전했다. 이 사원은 한국전쟁 때 포격을 맞아 1954년 사합원 양식의 새로운 건축물이 건축되었고, 1983년에 현재의 건물이 건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둘째, 거선당과 의선당은 배신선당(拜神善堂)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제시했다. 기존 연구에 의해 거선당과 의선당이 중국 민간신앙의 신을 모신 사원이라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선당적 성격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거선당은 설립 당시 중국 민간종교의 일파인 재리교의 영향을 받아 계연주공소로 출발했으며, 불우한 화교를 돕는 자선활동을 펼쳤다. 중국 민간신앙의 신을 모심과 동시에 선당적 자선활동을 동시에 행하는 배신선당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동남아화교의 선당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셋째, 거선당과 의선당 사원은 민간신앙 제사의 공간이자 화교사회의 문화 살롱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제시했다. 거선당과 의선당 사원은 중국 민간에서 신앙하는 신을 모셔놓고 서울과 인천화교에게 종교생활의 공간을 제공함과 동시에 각 신에 대한 제사를 통해 화교의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즉, 거선당과 의선당 사원은 화교의 중국인성(中國人性, Chineseness)을 유지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넷째, 의선당과 거선당 사원은 중국 청방 계열의 비밀 결사인 재가리(달마불교회)와 동거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시했다. 재가리 경성지부는 1916년 동북 출신의 재가리 회원인 왕유곤에 의해 설치되었다. 의선당 사원내의 재가리는 1934년 1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해체되었고, 그 후 재가리의 명칭은 달마불교회의 명칭으로 정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This research traces the formation of the current Bodhidharma society of overseas Chinese in Korea. The society began with the creation of two Chinese temples in the country: the kosondang (居善堂) of Seoul and the uisondang (義善堂) of Incheon in Korea. These two temples were formed as Chinese charitable institutions (善堂) tasked with assisting overseas Chinese. They were two charitable institutions of many, which were created from the end of the Ming to early Qing Dynasties. The uisondang began as a small building dedicated to the gods in 1893. The kosondang was erected afterward in 1901. The kosondang was established as a full-scale temple in 1907 and the uisondang in 1928. The two temples not only played roles as Chinese charitable institutions, but also worshipped Chinese folk gods, including Guan Yu, Ma Zu, Zisonniangniang (子孫娘娘), Husantaiji (胡三太爺), and so on. Zisonniangniang and Husantaiji were mostly worshipped in Shandong Province and Hebei Province ― the hometown of many overseas Chinese living in Korea. Kosondang worshipped 18 more Chinese folk gods than the uisondang. After Korea's independence from Japan, kosondang combined with the popular Shandong Province religion Lijiao. The folk religion forbade its followers from drinking alcohol and smoking cigars and opium. In 1967, a Lijiao religious branch was officially established in the kosondang and uisondang. Still more, the kosondang and uisondang combined to form a secret Chinese society. The secret society of Zaijiali established itself in the uisondang. Korean Government General (Chosen Sotoku-fu) broke up the society on the grounds that it violated the Peace Preservation Law (治安維持法). Following its dissolution, the secret society changed its name to the Bodhidharma Society of Overseas Chinese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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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우표로 본 한국사회와 상징정치 ― 해방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를 중심으로

저자 : 이혜숙 ( Lee Hyes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0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75-119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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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는 발행 국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국가의 정치적 입장이나 정책이 나타나는 중요한 수단이므로 정치사회적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이 연구는 1945년 8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1953년 7월까지 시기에 발행된 우표를 통해 해방 이후의 한국의 사회상과 우표를 통한 상징정치를 검토하였다. 국가상징, 국가정당성, '전통의 발명', 권력이미지 등이 우표 도안에 나타났다. 우표는 국가의 정당성 확보와 국민적 통합을 유도하는 홍보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연구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방 후 한국은 1946년 5월 1일 해방조선기념우표 발행을 시작으로 우표를 발행하였다. 북한은 남한이 여전히 일본 식민지시대 우표를 가쇄하여 쓰고 있던 때인 1946년 3월 12일 남한보다 먼저 독자적인 우표를 발행했다. 이처럼 남북한이 독자적인 우표를 발행했다는 것은 우표로 본다면 분단국가의 진행과정이 1946년 초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둘째, 국가상징으로서 태극기와 무궁화가 우표 도안에 많이 나타났다. 태극기와 무궁화의 국가상징화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북한에서도 최초의 우표와 해방1주년 기념우표에서 태극기와 무궁화를 사용해서 태극기와 무궁화는 해방 직후 남북한 모두의 공통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우표는 상징정치의 기능을 하였으며 국가정책적인 측면에서 홍보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수단 중의 하나로 우표를 이용했으며 우표는 국가상징과 국가만들기, 국가정당성 확보와 국민만들기, '전통의 발명', 권력이미지 홍보의 수단이었다.
넷째, 남북한 모두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을 우표에 담았고 전쟁홍보나 정치적 목적으로 우표를 이용하였는데 한국전쟁기 남북한 우표를 비교해 보면 한국전쟁을 보는 남북한의 시각차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Political stamps are important data for political and social research because they visually reflect the issuing country's political stance and policy. This study examined the symbolic politics of Korean stamps issued during the period from liberation(1945) to the end of Korean War(1953). During this period, postal stamps reified national legitimacy embedded in the politics of memory and nationalism. They were also instrumental inventing tradition and national symbols through design. The conclusions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South Korea' issued its own stamps on May 1, 1946, while 'North Korea' issued its own stamps on March 12, 1946. This suggests that the process of dividing the nation had already begun in early 1946. Second, Taegeukgi and Mugunghwa as national symbols appeared on stamps. At that time, the process of national symbolization was very important, and stamps were important means in national symbolization. Taegeukgi and Mugunghwa were common symbols of both Koreas just after the liberation. Third, postal stamps were thus used as means of justifying the system and legitimating the state. Stamps were the main means to promote the creation of the nation. Fourth, both South and North Korea issued stamps on the Korean War and used stamps for political purposes. When we compare the stamps of the two Koreas, we can see the different position toward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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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정희 시대 추곡수매가 정책의 정치경제

저자 : 최민석 ( Choi Min Se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0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21-15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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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추곡수매가 결정 논리를 중심으로 박정희 정부의 농업정책 변화를 조명하고자 한다.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는 야심차게 중농정책을 표방하면서 추곡 수매가를 큰 폭으로 인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조는 바로 다음 해에 뒤집혔다. 경제운용에서 단기간에 시행착오를 겪은 군사정부는 안정화 기조를 앞세운 미국 원조당국의 정책 개입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추곡수매가 또한 재정 및 물가 관리의 틀 속에서 인상이 억제되었다.
1968년 이후 원조규모의 축소와 함께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박정희 정부는 추곡수매가를 끌어올려 증산과 농촌의 소득 증진을 도모했다. 농촌 소득의 증가는 공업의 내수시장 확대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영향력 감소에 따라 정책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입 농산물의 국내 판매에서 얻는 이익을 비교적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고미가 정책을 통해 농촌을 주곡자급을 위한 공급처이자 공업의 소비지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1973년의 지구적 식량위기는 1960년대 말부터 지속된 안보위기와 겹쳐지면서 식량 자급을 안보의 관점에서 재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때마침 개발된 통일벼가 행정체계 및 재정 지원을 통해 보급됨으로써 정부 주도의 증산 캠페인은 실질적인 성과를 보였다. 반면 증산을 지원하기 위해 추곡수매가는 시장가격 이상으로 책정 되었으며 이는 재정문제를 누증시켰다. 결국 주곡자급이 완성되는 1977년 이후 식량안보의 시급성이 완화되면서 추곡수매가는 다시금 물가 및 재정 안정의 틀로 귀속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농업정책은 한편으로는 수출주도형 공업화의 형성과 그 한계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냉전질서의 변화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즉, 냉전 속에서의 '개발'과 '생존'의 논리가 추곡수매가를 중심으로 한 농업정책의 전개 과정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This study investigates the change of agricultural policy during the Park Chung-hee era. Following the 5.16 coup, the military government ambitiously declared a 'physiocracy' which abruptly raised government's rice purchasing price. But this was reversed the next year, after realizing that the policy lacked feasibility. After a short period of economic trial and error, the new government was forced to accept US aid offices, which emphasized development based on a strict notion of stabilization. As a result, purchasing prices were strained within a framework of financial feasibility and price controls. By 1968, however, the scale of aid and US influence had declined. This provided conditions for the Park government to drastically manipulate rice prices aimed at increasing rural incomes. This led to policy changes with the goal of self-sufficiency ― transforming rural areas into the main source of supply for industry. The governmental focus on rice production was furthered intensified in 1973 when global food crisis forced along with security threats from North Korea pushed Park to hike prices above market prices to stimulate production. In this regard, Park Chung-hee's agricultural policies were the results of both export-led industrialization (and its limits) and Korea cold war politics. The cold war mentality of development and survival at the time led to the formulation of agricultural policies that centered on manipulation of purchasing pr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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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과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저자 : 윤충로 ( Yoon Chung R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0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53-193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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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민평화법정을 중심으로 최근 한국의 베트남운동의 변화와 특성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먼저 한·베 간 국가수준에서 전개되는 전쟁 기억의 갈등 양상과 특성을 검토했다. 다음으로 한국의 베트남운동과 베트남 측 '생존자들'의 연대를 '초대에 의한 정의'의 구현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시민평화법정의 주체를 한국의 베트남운동(원고 측 대변인), 부인하는 국가(피고 측 대변인), 베트남인 생존자(증인)로 나누어 각 주장의 기본적인 맥락과 담론 구성의 특성을 검토했다. 각 주체의 목소리는 식민지배, 분단, 전쟁의 경험과 기억으로 점철된 20세기 폭력 구조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체현하고 있다. 베트남전시민평화법정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한·베 간 '고통의 연대'는 아래로부터 냉전을 해체해가는 하나의 방식을 보여준다.


This research analyzes changes and features of the recent Vietnam movement in Korea with a focus on the People's Tribunal on War Crimes by South Korean Troops during the Vietnam War (April 21 and 22, 2018). It begins with an analysis of the conflict and the characteristics of war memories developed at the national level in both Vietnam and Korea. Next, the term 'justice by invitation' is applied to explain the solidarity between NGOs interested in transitional justice and the Vietnamese survivors. Finally, discourse analysis was conducted, dividing the subjects of the tribunal into Korea's Vietnam participants (plaintiff spokesmen), the denying nation (defendant spokesmen), and Vietnamese survivors (witnesses). Each of these groups and their voices embodied not only the structure of in 20th century violence, but also efforts to transcend this structure as reflected in colonial, national division, and war-time experiences and memories. The shared “solidarity of pain” experienced between Vietnam and Korea through their interaction with the Civil Tribunal provides evidence of one way in which cold war hostilities can be dismantled from be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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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극영화의 역사 (다시) 쓰기 ― <국제시장>과 <포레스트 검프>의 경우

저자 : 주은우 ( Joo Eunw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0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95-234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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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2014)이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서도 세대정치적 맥락과 역사관의 측면에서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이 영화의 상호텍스트적 준거점 역할을 하는 할리우드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와 비교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영화는 사건을 기록하고 역사의 경로를 형상화하는 가운데 증인일 뿐만 아니라 역사가로서 기능하며, 영화가 재현하는 대중역사는 대중기억과 얽혀든다. 특히 극영화가 과거를 재현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검토하는 데는 니체가 제시한 역사의 기념비적 방식, 골동품적 방식, 비판적 방식에 대한 구별이 많은 통찰을 제공해준다. 이 글은 미국 현대사와 한국 현대사의 통사적 재서술, 깃털과 나비라는 상징, 허구와 역사적 사실의 융합, 과거와 현재를 연계시키는 방식 등의 견지에서 <포레스트 검프>와 <국제시장>을 비교 검토한다. 일종의 니체적 의미의 '역사의 과잉'이란 맥락 속에서 <국제시장>은 아버지 세대의 과거 역사를 기념하고 현재를 비판하며, 지나간 시대에 대한 하나의 향수적 시선을 관객에게 강력히 부과한다.


Ode to My Father (Gukjesijang, 2014), a Korean film, was at the heart of bitter dispute in terms of generation politics and historical view while drawing over 14 million people into theatres in domestic market alone. To understand why and how this occasion happened, we have to analyze how this film (re)write history, its subject matter. A comparison with Forrest Gump (1994), a Hollywood film as the intertextual reference and the model for Ode to My Father (Gukjesijang), is helpful for this aim. Films have recorded events and shaped the course of history. They have played the roles of not only witnesses but also historians. Friedrich W. Nietzsche's differentiation of monumental, antiquarian, and critical histories provides a lot of insights for the investigation of how fiction films represent and interpret the past. This paper comparatively examines Forrest Gump and Ode to My Father (Gukjesijang) in term of the ways of their rewriting modern histories of USA and Korea, feather and butterfly as symbols, the conflation of fiction and historical fact, and the ways of connecting the past and the present. In the context of a kind of 'excesses of history' in Nietzschean sense, Ode to My Father (Gukjesijang) gives a monumental celebration to the past history of father generation and imposes on the audience a single strong gaze of nostalgia for the times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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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을 둘러싸고 한인사회의 강고한 결집력이 대내외 적으로 표출된 두 가지 사태가 전개되었다. 방글라데시 타운 신설안과 노숙인 쉼터 설치안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그것인데, 이례적으로 격렬한 민족주의적 집합 정체성 표출이라는 현상 이면에 글로벌화로 인한 도시 개발의 공간적 압력과 그로 인한 민족간·계층간 관계 재편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균열과 갈등이라는 다차원적인 사회적 압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공간이론적 관점과 인구학적 관점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한인타운의 형성 및 변천사를 살펴보고 그 특징적 양상을 도출해냄으로써 현재 LA 한인타운의 변화를 야기하고 있는 사회적 변수들의 역사적 연원을 밝혀내고자 했다.
첫째, 공간론적 측면에서 볼 때 LA 한인타운은 '입지의 도심 근접성과 규모의 광범성'이라는 특성을 띠고 있는데, 이는 LA 특유의 수평적 도시화 과정에서 창출된 다운타운 인근의 공백지대에 '아시아인 이민의 두 번째 물결'을 타고 등장한 한인들이 대거 유입되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일차적으로 결정되었다. 1965년 이후 LA 한인타운의 공간 변천사는 1992년 4·29를 분기점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대별할 수 있다. 올림픽대로가 한인타운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했던 전기가 이민 1세대 한인들의 소규모 자영업 성공 신화가 형성된 시기라면, 윌셔대로가 한인타운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 후기는 글로벌화로 인한 신자유주의적 도시개발이 본격화되어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가속화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인구학적 측면에서 볼 때 LA 한인타운은 '항존하는 혼종성과 점증하는 양극화 경향'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 고학력 도시 중산층 출신을 주류로 하는 1세대 한인 이민자들은 직업의 하향조정 경향과 높은 자영업 비율, 그리고 압도적인 개신교의 영향이라는 세 가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세대 한인들의 소규모 자영업을 통한 성공 신화와 LA 한인사회의 집합 정체성의 통합적 표상은 이러한 한인 이주민 집단의 균질성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반면 LA의 글로벌화에 따라 급격한 사회 양극화와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 국면에서는 이러한 균질성이 LA 한인타운이 처해 있는 다민족 혼성 거주지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적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LA 한인타운의 현재적 역동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당연시해온 성공한 소수민족의 신화와 민족주의적 집합 정체성의 통념적 표상을 넘어서 모순적이고 갈등적인 소수민족 혼성 거주지의 가변적 실체에 대해 입체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Recently two remarkable incidents have happened surrounding Los Angeles Koreatown, both of which issues have revealed apparently strong unity of Korean American local community. One of the two issues was the proposition to make a Bangladesh Town by splitting Koreatown area and the other was a plan to build a temporary shelter for the homeless people inside Koreatown. We can find out the tendencies of social stratification and the compulsion of urban development behind the strongest manifestation of Korean's nationalistic collective identity. Based on this awareness,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the formation and transformation of Los Angeles Koreatown in terms of space and demography.
First, in terms of spatialism, Los Angeles Koreatown has a characteristic of 'proximity of city center and broadness of scale.' It was determined through the historical process of the influx of Koreans who appeared in 'the second wave of Asian immigrants' in the blank area near the downtown created by the horizontal urbanization process unique to the city of Los Angeles. Since 1965, Los Angeles Koreatown's changing history can be divided into two periods, the first and the second, with April 29, 1992 as a turning point. The first period, when Koreatown was centered by the Olympic Boulevard, can be characterized by the making of the myth that the fisth generation Korean immigrants had succeeded in small self-employment. The second period, when Koreatown was centered by the Wilshire Boulevard, can be characterized by the accelerated the development of gentrification such as the development of consumer culture and the creation of high-class residential areas.
Second, in the demographic perspective, Los Angeles Koreatown is characterized by 'heterogeneous hybridity and increasing polarizing tendency.' The first-generation Korean immigrants whose mainstream is the highly educated urban middle class are characterized by a downward trend in their jobs, high self-employment ratio, and overwhelming Protestant influence. The middle-class success myth through first-generation Korean's self-employment and the integrated collective identity of Los Angeles Korean American society were formed based on this homogeneity. On the other hand, in the current phase of social polarization and class differentiation due to globalization, this homogeneity has been a negative factor that prevents realizing the contradictory and conflictual reality of multi-ethnic hybrid enclave of Los Angeles Koreatown area.
In order to understand the current dynamics of LA Korean Town, it is necessary to approach the realities of contradictory and conflictual multi-ethnic hybrid enclave in a stereoscopic way beyond the integrated representation of successful minority myths and nationalistic collective identities of Korean Americ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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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루소와 스미스, '장기 18세기' 상업사회의 문제

저자 : 박상현 ( Park Sang-h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0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77-31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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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 현대성의 지적 표현으로서 계몽주의는 현대사회의 모순과 한계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으로서 지속적인 재검토의 대상이 된다. '계몽의 시대'로 불리는 '장기 18세기'는 절대주의와 중상주의의 모순과 위기가 폭발한 '이행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국제적 문필공동체'의 일원이었던 루소와 스미스는 프랑스와 영국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지적 전통을 반영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출현 중인 새로운 '상업사회'를 분석했다. 루소는 프랑스의 '중상주의적 상업사회'를 배경으로 상업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고 일반의지의 도덕적 공동체에 대한 경제활동의 종속과 자급적 농업사회를 옹호했다. 반면 스미스는 영국의 시민적 상업사회를 배경으로 풍요와 자유라는 상업사회의 성과를 옹호하는 동시에 상업사회에 고유한 도덕적 위험을 완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모색했다. 루소가 현대적 '도덕경제론'의 효시라면 스미스는 현대적인 '입법자의 과학'으로서 경제학의 제안자로 간주될 수 있다.


As an intellectual expression of European modernity, 'enlightenment' has long been subject to debate as the reference point of acknowledging contradictions and limits of modern society. Known as the era of enlightenment, 'the long-18th century' culminated as 'the era of transition' in which the insurmountable problems of absolute monarchical rule and mercantilism was revealed. Rousseau and Smith, who both were members of the international 'Republic of Letters' at this time, uniquely analyzed the emergence of 'commercial society', reflecting 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contexts and on the intellectual traditions of France and Britain. Rousseau focused on the moral corruption endemic of commercial society, basing his claims on the French “mercantile commercial society”. He suggested the self-sufficient agricultural society and the subordination of economic activity to the moral community based on general will. Conversely, Smith advocated the commercial society as a mechanism the produced abundance and freedom, seeing it through the British 'civil commercial society'. But he was fully knowing the moral risks inherent in commercial societies and sought the institutional safeguards against these risks. Based on these findings, Rousseau presaged the modern 'moral economy' while Smith heralded the modern 'legislator's science'.

KCI등재

9하수도, 피해자, 위험(에 처)한 여자 ― 19-20세기 초 '의료-도덕 정치'와 성매매정책의 형성

저자 : 박정미 ( Park Jeong-mi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0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21-35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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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각각 관리정책, 폐지정책, 금지정책의 형성 과정을 '의료-도덕 정치'와 성판매여성의 재현의 측면에서 검토한다. 프랑스의 관리정책, 영국의 폐지정책, 미국의 금지정책은 모두 성병과 성적 타락에 대응하는 의료-도덕 정치의 성격을 공유했다. 그러나 의료 정치와 도덕 정치가 조합되는 양상은 달랐다. 프랑스의 관리정책은 일차적으로 성병 통제를 위한 의료 정치였으나, '정숙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을 구분하는 도덕 정치의 특징도 지녔다. 반면 영국의 폐지정책은 일차적으로 여성의 시민적 자유를 옹호하고 남성의 순결을 촉구하는 도덕 정치였지만, 동시에 제국의 위생이라는 의료 담론을 동원했다. 의료 정치와 도덕 정치가 가장 긴밀하게 결합한 것은 미국에서였다. 미국의 금지정책은 성매매가 도덕적 타락일 뿐만 아니라 성판매여성의 유전적 결함에서 비롯된 질병이라는 믿음에 기초했다. 성매매정책은 또한 성판매여성에 관한 독특한 환상을 동반했다. 관리정책의 옹호자들은 성판매여성을 '부패한 육체, 도시의 하수도'로, 폐지운동가들은 '국가 폭력과 남성 욕망의 피해자'로, 금지정책의 지지자들은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여자'로 각각 재현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이 논문은 한국의 성매매정책을 분석하기 위한 몇 가지 이론적, 방법론적 질문들을 제기하면서 끝맺는다.


This paper uses medico-moral politics and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to examine the processes through which prostitution policies formed in France, the U.K., and the U.S. from the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French regulation, British abolition, and American prohibition shared similar medico-moral politics in that each were protracted in response to sexually transmitted diseases and sexual moral degradation. However, how medico politics and moral politics combined varied. French regulation was primarily medico politics aimed at controlling STDs, but it also had the features of moral politics that distinguished “chaste” women from “fallen” ones. British abolition was primarily moral politics that vindicated prostitutes' human rights and demanded male chastity, but simultaneously utilized medical rhetoric, speaking of the “Empire's hygiene.” The two elements were combined most closely in the U.S. American prohibition was based on the belief that prostitution is not only moral degeneration but also a kind of disease caused by prostitutes' hereditary defects. Prostitution policies also were informed by unique fantasies of prostitutes. In this regard, regulation advocates saw prostitutes as “corrupting bodies and urban sewers,” while abolitionists depicted them as “victims of male desire and state violence.” Proponents of prohibition considered these “dangerous women” threats to society. This paper concludes by positioning Korea's prostitution policies within this discourse, posing several theoretical and methodological questions pertinent to addressing Korea's polic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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