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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HUMANITIES

  •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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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5)~26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259
인문과학연구
26권0호(2018년 0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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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획논문 -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함흥지방법원 검사의 기소자료에 나타난 함경도 지역 3·1운동

저자 : 최우석 ( Choi Woo-seok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9-3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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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함흥지방법원 소속 이시카와 노부시게(石川信重, 1871∼?) 검사가 작성한 기소자료를 분석하였다. 이 기소자료는 2010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처음 공개하였다. 본고는 이에 대한 첫 번째 연구로서 자료에 대한 기초적인 정리를 통해 향후 연구 과제를 발굴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이시카와 노부시게는 1908년 통감부 검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처음 부임하였고, 1919년 당시 함흥지방법원에 근무하면서 3·1운동 참가자들의 탄압에 관여하였다. 기소자료에는 총 115개 사건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기본 형태는 세 대목으로 나뉜다. 사건제목, 기소내용, 적용 법률과 형량이 그것이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세 번째 대목이다. 기소단계에서 적용 법률과 형량이 미리 제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호로 기재된 형량은 변동된 예도 있어 기소단계에서 형량이 조율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기소자료 중 22건은 기본 형태에 더해서 다양한 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각 운동 참가자들의 수준을 '주모자/모의자/솔선자/선동된 사람' 등으로 구분하고 폭력행사여부나 자백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기소자료 목록상에 제시된 기소 총 인원 550명 이외의 인물들 역시 본 자료에 등장한다. 6건의 자료에서 기소중지, 기소유예, 불기소 등의 이유로 138명의 이름과 행적이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일제가 어떤 기준으로 기소와 형량을 결정했는지를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소자료는 상당히 내밀한 자료로서 3·1운동을 처벌하려고 했던 식민지 관료의 인식구조와 행위를 이해하는 재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사건을 기소한다는 뚜렷한 목적성이 있기 때문에 자료를 읽는데 조심성이 요구된다. 기소자료는 매우 명백하고 깔끔하게 개별사건의 내용들을 정리해나가고 있다. 이 자료를 마주한 연구자는 자료의 정치성을 염두에 두면서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This article analyzed the prosecution materials prepared by Ishikawa Nobushige. He was a public prosecutor belonged to Hamheung District Court. The prosecution materials was first disclosed by The Center for Historical Truth and Justice in 2010. This article is the first study about the prosecution materials. The goal is to find out new research tasks through basic theorems of data. In 1908 ishikawa was appointed to public prosecutor belonged to Japanese Resident-General of Korea. In 1919, while working for the Hamheung District Court, he repressed March First Movement participants. A total of 115 event items are included in prosecution materials. The basic form is divided into three parts, the case title, the content of the indictment, the applicable law and the sentence. What is characteristic here is the third part. In the prosecution stage, it seems that the applicable law and sentence were presented beforehand. Especially sentences written in symbols have been changed. It shows the possibility that the sentence was coordinated at the prosecution stage. 22 of the prosecution materials include various tables in addition to the basic form. Through tables, the level of each participant is classified into 'ringleader / conspirator / executor / instigated person' and confirms whether or not violence is exercised or confession. Also, figures other than the total of 550 indictments listed on the Prosecution Materials List appear in this document. There are 138 names and behavior written on 6 of the prosecution materials for stay of prosecution, interrupting prosecution, and non-prosecution. This will allow us to review the criteria by which Japanese jurisdiction decided on charges and sentences. The prosecution materials are very intimate data. It would be a material to understand the structure and conduct of the colonial bureaucracy who was trying to punish March First Movement. On the other hand, there is a clear purpose of prosecuting the case, so caution is required to read the materials. Prosecution data is very clear and neatly summarizing the contents of individual cases, The researchers facing these materials should strive to reach the historical truth while keeping in mind the politics of the data.

2<기획논문 -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3·1운동 관련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현황과 특징

저자 : 박경목 ( Park Kyung Mok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5-108 (7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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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 분석을 통해 1919~1920년 사이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인원 1,013명을 확인하였다. 본고는 이들의 연령대, 신분과 직업, 죄명과 해당 형량, 수감자 사이의 관계망을 살펴보았다. 수감자들의 연령은 10대부터 60대까지 전 연령대에서 고르게 참여했다. 특히 20대의 참여 비중이 57%에 달하는 독립운동 전반의 경향과 비교하여 20대의 비중이 42%로 보다 연령대별 고른 참여분포가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3·1운동은 전 계층이 참여한 민족운동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직업분포도 70여 종에 이르는 다양한 직업이 확인되었다. 학생, 종교인, 교사 등 지식인층은 물론 상인, 자영업자,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3·1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특히 일제 식민통치의 말단으로 여겨졌던 면사무소 면장과 면서기, 순사보 등도 참여하여 3·1운동이 전조선인의 거족적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 수감자들은 일제로부터 정치사상범으로 인식되어 '보안법 범'으로 취급당했다. 따라서 '보안법 위반'등 정치사상적 죄명이 붙여졌다. 이들 가운데 99% 이상이 6개월이상의 형량을 받아 높은 행형이 적용되었다. 일제는 3·1운동을 체제 변혁 운동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단순 범죄가 아닌 정치적 사건으로 취급하였고 상대적으로 무거운 형량을 적용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추적을 통해 이들이 혈연 관계, 지역적 연고, 학교 관계로 상당 부분 연결되 있음을 확인했다. 3·1운동은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지역적 관계망을 통해 급속도로 전국에 전파되고 효과적으로 계획, 추진되면서 적극적인 운동의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이상을 통해 3·1운동은 단순한 '운동'차원을 넘어 일제 식민 체제를 변혁하려는 전 민족의 정치적 변혁 운동의 단계였음을 임을 알 수 있다.


This study analyzed Seodaemun Prison's Inmate Record Cards(6,259 cards) to discuss the age, social status and occupation, offense and sentence, and relationships of 1,013 inmates who were confined at Seodaemun Prison because of the 3.1 Movement between 1919 and 1920. The inmates(收監者) had a wide distribution of age from teens to the 60s. In particular, 42% were in their 20s and participated most actively. There were about 70 kinds of occupations, from students, religious leaders, and teachers to merchants, business owners, and labor workers. They participated in the 3.1 Movement in their own ways. Chiefs, secretaries, and assistant police officers of town office, who were considered the pawns of the Japanese Imperial Rule, also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manifesting that it was a national movement for the people of Joseon. The inmates were recorded as political criminals who 'violated the Security Act(保安法 違反), etc.' and over 99% of them were sentenced to over 6 months in prison, which was longer than the sentences for general crimes. Japan treated them as political criminals because the 3.1 Movement was considered as a reformation movement. The inmates' mutual relationships were tracked to find that they were mostly related by kinship(血緣), regionalism(地緣), school relation(學緣) background. In other words, the 3.1 Movement quickly spread nationwide through kinship, regionalism, school relation as an active movement. This study concluded that the 3.1 Movement was not a mere 'movement', but a political reformation movement to reform the Japanese Imperial Rule.

3<기획논문 -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3·1혁명과 친일파의 대응 양태

저자 : 이준식 ( Lee Junsik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09-1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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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의 3·1혁명은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전환을 가져온 일대사건이었다. 3·1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과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의 실현이라는 민족혁명의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의 꿈은 민족혁명에만 그치지 않았다. 3·1혁명은 국민이 주권을 갖는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제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 실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3·1혁명은 민주혁명이기도 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혁명은 혁명에 대한 반동 곧 반(反)혁명을 수반한다. 3·1혁명도 반혁명에 직면했다. 3·1혁명이 이루려고 한 민족·민주혁명의 일차적인 반대세력은 식민통치권력이었다. 일제는 비무장의 만세시위대를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했다. 그 와중에 수천 명이 학살되었고 수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3·1혁명의 반대편에 선 것은 일제만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3·1혁명을 거족적이라고 한다. 실제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3·1혁명에 참여했다. 그러나 3·1혁명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나아가서는 3·1혁명에 반대한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친일파가 그랬다. 3·1혁명은 민족·민주혁명을 추구한 민족운동 세력과 반민족·반민주의 길을 걸은 친일파의 분화가 본격화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3·1혁명은 민족운동에도 새로운 전기가 되었지만 친일파에게도 일제 식민통치의 동반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친일파는 그 기회를 현실화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친일파는 일제의 강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친일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다. 친일파에게도 나름의 친일 논리가 있었다. 특히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도 유력한 정치세력이 되기를 원했던 친일파의 경우는 더 그랬다. 이러한 의미에서 3·1혁명은 친일파에게도 강제병합 못지않은 일대사건이었던 것이다. 일부의 친일파는 3·1혁명으로 조성된 일제 식민통치의 위기를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로 파악했다. 그러면서 3·1혁명 이후 일제가 추진한 친일파의 육성이라는 새로운 정책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려는 했다. 친일파는 각종 매체를 통해 3·1혁명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더 나아가서는 노골적으로 3·1혁명 저지를 내건 단체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기꺼이 반혁명세력이 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3·1혁명 이후 일제가 표방한 문화정치 아래 친일파는 참정권운동 등의 활발한 정치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3·1혁명은 역설적으로 반혁명세력인 친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로도 작용한 것이다.


Every revolution in the world is accompanied by a reaction to the revolution, so-called counterrevolution. March First Revolution also faced its counterrevolution. Japanese Empire did not stand alone against the Revolution. The pro-Japanese collaborators also opposed the revolution and refused to participate in it. March First Revolution became a turning point for a National revolution in Korea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and simultaneously a political opportunity for the pro-Japanese collaborators. The pro-Japanese actively tried to make the opportunity real. They realized the crisis of Japanese rule as a chance to get their political desires in Korea. The pro-Japanese collaborators clearly stated that they opposed March First Revolution and took the head in stopping it. Under the cultural rule that had proclaimed by the Japanese Empire since the Revolution, the pro-Japanese led political movements such as suffrage movement. For this reason, March First Revolution also served as a momentum to strengthen the political power of the pro-Japanese collaborators in Korea.

4<일반논문> 6세기 초 신라 갈문왕의 지위변화

저자 : 양자량 ( Yang Ja Ryang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39-160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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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문헌사료와 금석문을 통해 6세기 초 신라의 지증왕·법흥왕대 왕권과 그에 따른 갈문왕의 지위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6세기 초 금석문을 통해 갈문왕은 귀족회의에서 주요 국정 현안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소지왕 말기 왕권이 약화되자 지도로 갈문왕은 강대한 세력의 지지에 힘입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갈문왕은 왕위계승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명분은 취약했을 것이다. 자신의 약한 명분과 약해진 왕권을 살리기 위해 지증왕은 즉위 이후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530년대는 6부체제가 해체되고, 법흥왕대 집권화된 지배체제가 완성되어 가는 시기였다. 이는 왕권이 성장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법흥왕은 갈문왕으로서 왕위에 오른 지증왕의 전례를 견제하고자 갈문왕의 지위를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갈문왕의 지위가 격하됨에 따라 그 역할을 대신 한 것이 바로 법흥왕 18년(531) 설치된 상대 등이다. 법흥왕은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로 갈문왕이 아닌 상대등을 설치하여 갈문왕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유명무실한 위치, 왕족에게 주는 명예직화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지증왕 이전에는 6부체제의 아래에서 왕권이 약했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있던 갈문왕을 동반자로 여겼다면, 지증왕 이후 스스로 왕권을 강력하게하기 위한 개혁을 통해 혈연관계로 있던 갈문왕이 아닌 관료화된 상대등을 동반자로서 두었던 것이다.


In this research paper, the literature historical material and geomsuckmun(金石文) are examined to look the change of galmunwang's status in the early 6th century caused by the royal authority of both King Jijeung and King Beopheung. Through the geomsuckmun in the early 6th century, the galmunwang had political influence tha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determining main issues of government at a council of novel. Finally, as the royal authority weakened in the late King SoJi, Jidoro Galmunwang came to the throne in the abnormal way with support of strong powers. However, since galmunwang did not have the right of succession, his justification might be weak. It will have to be understood in such a situation not to call the Maripgan(麻立干) on the nangsuribi in 503. In this way, to overcome own weak justification and royal authority, King Jijeung carried out reformations of the strengthen and stability of royal authority after his enthronement. A 530's was a period completed a centralized system in the King Beopheung era, dissolving Yukbu(六部) system. On the one hand, King Beopheung tried to weaken galmunwang's authority to prevent the King Jijeung's precedent that took the throne as galmunwang. As the galmunwang's status was weakened, it was the Sangdaedeung (上大等) to substitute for its role. King Beopheung established the sangdaedeung as his political partner instead of galmunwang. And then, the galmunwang degenerated as a honorary position, which is just given to royal families, and this position was also regarded as a nominal position that no longer has political influences. In short, before King Jijeung, the royal authority under the yukbu system was weak, so the king regarded galmunwang as his partner who was based on the blood-relationship. On the other hand, after King Jijeung, the king engaged not galmunwang but the bureaucratized sangdaedeung through reformations for strengthen royal authority by himself.

5<일반논문> 『하재일기(荷齋日記)』를 통해 본 19세기 말∼20세기 초 지역 지식인의 변화

저자 : 신경미 ( Shin Kyoung-mi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61-181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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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하재일기』를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살았던 지역 지식인의 삶을 알아보는 데 목적이 있다. 지규식은 전통적 지배 계층도 새로운 지식 계층도 아니었지만 지역 내 지식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는 조선의 전통적인 성리학적 가치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과거를 통한 입신을 희망하였으며 외세의 침입을 받은 청의 소식을 접하고는 “순망치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청과 조선을 밀접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지규식은 전통만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지규식은 1904년을 기점으로 다수의 신문을 접하며 실력양성을 통한 애국계몽사상을 추구하게 된다. 특히 교육에 관심이 많아 학교를 설립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1910년에 이르면 일제의 침투에 서서히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지규식의 모습은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서 평범한 민중이 어떤 삶의 태도를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The article aims to explore the lives and thoughts of ordinary local intellectuals at that time through the 『Hajaeilgi』 of the late 19th-early 20th. According to his diary, Chi Gyusik was pursuing Confucian values. When we heard Qing's invasion of foreign countries, regarded the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Qing as closely related by using the term “If there is no lips, teeth are chilled.” However, he did not pursue the tradition continuously. Since 1904, he will read many newspapers and pursue an enlightenment campaign about patriotism by nurturing the nation's talents. Nevertheless, by the time of 1910, it showed a gradual adaptation to the Japanese invasion. This form of Ji Gyusik shows the daily life of ordinary people at the crossroads of tradition and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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