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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정석해의 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

Nationalism and Democracy Movements of Tseung Suk Hai(정석해, 鄭錫海)

이기훈 ( Lee Ki Hoon )
  •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 : 학림 4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9년 09월
  • : 213-238(26pages)

DOI


목차

1. 머리말
2. 정석해의 민족운동
3. 해방 이후 정석해의 현실 참여-4월 혁명과 이후 반독재 투쟁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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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해(1899~1996)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인으로 생활하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한학에 대한 소양을 쌓으면서 지사로서의 태도를 갖추었다. 또 중등학교 재학 시절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강한 민족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연희전문 문과 2학년 재학 중에 3·1운동을 맞이한 정석해는, YMCA 간부로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배포하는 등 시위의 확산에 기여했다.
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간 정석해는 김동평이 주도한 비밀 조직에서 무기의 반입, 국내 연락, 요인 호위 등 만주와 국내의 운동 조직을 연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목숨을 걸고 수행했던 이때의 민족운동 경험은 이후 해방 이후 현실 참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하이를 거쳐 유럽에 유학하는 동안에도 흥사단과 유학생 모임 활동을 지원하는 등 민족운동에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해방 이후 모교의 철학과 교수가 된 정석해는 1960년 4월 25일 교수 모임에서 의장을 맡아 교수단 시위를 이끌어 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교수단 시위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한국교수협회를 결성하여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려 했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한일회담 반대와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다. 정석해는 교육자로서의 길을 가면서도 청년 시절 독립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는 지성인으로서 면모를 보였다.
Tseung Suk Hai(1899~1996) was born and raised in a Christian family, but was also educated in traditional Chinese classics, through which he learned the basics of becoming a scholar and leader. While still in middle school, Tseung befriended many independent movement activists and through the exchanges developed strong committment towards Nationalism. Tseung was a sophomore in Yonhi School when the March 1st Movement took place. As a member of the YMCA leadership, Tseung participated in the Mansae movement and helped its further spread by printing and distributing copies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seung went to Manchuria and joined an underground resistance group led by Kim Dong-Pyung. Tseung served as a liaison between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Manchuria and the Korean Peninsular through procuring weapons, delivering messages and protecting key figures. The task often put Tseung in life-threatening situations and the experience greatly sculpted his activities in the years after the independence. While studying in Shanghai and Europe, Tseung continued to support various nationalism movements, including the Heungsadan Movement and other overseas Korean student groups.
Following independence, Tseung became a philosophy professor at his alma mater. On April 25 1960, when students took to the streets to protest against the Rhee dictatorship, Tseung served as the chairperson of the professors association and eventually played a key role in the professor’s group joining the protests, which played a pivotal role in bringing down the Rhee Seung-Man government. In his later years, Tseung continued to serve as a responsible intellect in the society by founding the Korea Professors Association and standing up against dictatorship and the South Korea-Japan Treaty.
Tseung never forgot the soldiers in the independence army that he saw as a child. Their spirits guided Tseung when he had to make importance decisions in teaching and academic endeavors, as well as when to let go of his privileges and take action. He was always determined and decisive. Taking the righteous but not always easy path in life, Tseung demonstrated the most important virtues of a respected intell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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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죽림고회를 통해 본 무신정권기 문인들의 네트워크와 고문론(古文論)

저자 : 최봉준 ( Choi Bong J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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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 무신정권기에 활동하였던 竹林高會와 그 주변인물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통해 古文이라는 문학적 지향성을 어떻게 공유하였는가? 그리고 그 이후 사상적 변화의 가능성을 확인함으로써 성리학 수용 직전 문인 및 유학자들 사이의 사상지형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이들이 정치권력을 멀리 하였다는 기존의 통설과 달리 권력지향성을 지녔으며, 고문론에서도 이들은 동일한 관점과 지향성을 지닌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내부적으로 다양한 관점이 있었다는 것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네트워크로는 죽림고회 중심의 네트워크와 이후에 형성될 이규보 중심의 네트워크로 나눌 수 있으며, 이는 네트워크에 따라 문학적 지향성에 차이가 발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림고회 인물들은 고문을 지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륙변려체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죽림고회에 잠시 참여한 경험이 있던 이규보가 죽림고회가 죽림칠현을 지향하였던 점을 비판한 것은 무신정권기에 사상적 분화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무신집권기 문인들이 고문론을 의식적으로 공유하면서도 성리학 수용 직전 사상적 변화와 발전까지 담보하였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2이곡(李穀)의 사회관계망과 재원(在元) 고려인 사회 -『가정집(稼亭集)』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저자 : 김윤정 ( Kim Yun J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77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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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가정집』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이곡을 둘러싼 사회관계망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在元 고려인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의 일생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관계는 단연 과거를 통하여 구축된 좌주-문생, 동년 관계이다. 하지만 이곡은 14세기 고려와 원제국 양국에서 활동하였던 인물이었던 만큼, 그의 작품에는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려 출신인물과 더불어 원제국 출신의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더욱이 고려인들과의 관계 역시 상당수가 고려가 아닌 원을 배경으로 묘사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은 그가 원 制科 급제자로서 그 명성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당대 많은 고려인들이 원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곡은 원을 방문하는 고려 使臣 및 지인은 물론, 당시 宦官, 宿衛, 佛僧 등 다양한 방식들로 大都 및 遼陽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많은 기회가 잠재되어 있던 제국에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학문적 목적으로 운집한 고려인들로 인하여 재원 고려인 사회가 구축되어 있었고, 『가정집』은 이러한 14세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3고려말 불교계의 단월과 사회적 연결망 연구

저자 : 김인호 ( Kim In Ho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9-11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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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고려말 중요한 사찰이 된 신륵사를 통한 인간관계망을 살펴보려는 것에 있다.
우선 단월 이외의 인간관계망을 살펴보았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관계망은 가문의 확장이란 목표를 위해 친밀성을 다지려 하였다. 대표적 사례는 고려후기 안동 권씨 가문이다. 하지만 가문의 분화로 인해 의재와 같은 경제적 목적의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과거 시험을 매개로 한 동년 등의 관계망은 도통의식을 통해 같은 구성원이라는 의식을 다지는 수단이었다. 동년 관계는 동료이지만 관료적 출세에서 경쟁 관계였다. 다만 유대감은 과거 시험 장원들의 모임인 용두회보다 좋았다.
계는 모임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운영을 맡은 계장을 두었다. 계가 친목만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변중량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편 사찰 모임 중 대표적인 것이 향도이다. 향도는 포교와 신앙활동을 위해 만들었다. 그런데 향도 내부의 인간적 연결 관계는 밀착성을 지녔다. 만불향도는 무뢰배 수순의 친밀도를 지녔을 것이다.
단월은 승려나 사찰 등에 시주를 베푸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단월은 시주만으로 그치지 않고, 모임을 가졌다. 특히 불사가 끝났을 경우에는 단월이 특정한 행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주목한 단월은 신륵사 사리석종과 대장각의 참여자이다. 그 중 후자는 권근의 아버지 권희의 발의로 시작하였다. 참여자 중 비구는 국사, 왕사와 같은 고위 승려들이었고, 이성계의 왕사가 되는 무학이 있다. 이런 비석의 완성은 석종기가 1379년(우왕 5), 대장각기가 1383년(우왕 9)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신륵사는 상류층의 인적 연결망의 거점이다. 석종과 대장각 건립에 모두 참여한 남성 단월은 총 11명이고, 대부분 종친과 고위직이다. 영창부원군 왕유는 1369년(공민왕 18) 사망했지만 두 비문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가 일찍 사망했음에도 명단에 들어갔다.
「대장각기」에 나오는 왕요는 후일 공양왕이 되었다. 이성계는 왕요를 왕위에 올리기에 힘썼다. 두 사람의 관계는 대장각을 위한 모임 등에서 이루어졌을 수 있다.
「대장각기」에는 공민왕과 우왕의 왕비들이 있다. 공민왕 사망 이후 왕비들은 모두 비구니가 되었지만, 명단에는 전부 왕비로 표시하였다. 또한 대장각 건립사업에는 가족 단위가 많았다. 이림, 우현보, 이색, 권희 등이 그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왕조 건립에 반대 입장이다.
단월 가운데 고위직은 이후 고려말 정치적 변동 속에서 숙청이나 유배 등에 처해져야 했다.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이성림, 도길부, 최영은 물론이고, 윤이 이초 사건 이후 이색, 이림, 우현보, 우인렬, 이숭인, 권근, 이종학 등이 정계에서 숙청되었다. 하지만 대장각의 단월은 그 이전의 상호 연결망으로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하였다.

4김종직 강학(講學) 네트워크와 도덕적 권위의 확산

저자 : 최민규 ( Choi Min Gyu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3-15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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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표는 김종직 문인들의 결집 과정, 그리고 정치세력화, 상호 협력과 갈등을 통한 성리학 지식 확립과 확산 노력을 네트워크라는 관점에서 살펴본 글이다. 김종직의 강학 활동은 경향의 유교 지식인 간의 네트워크를 촉진하고 그것이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당으로 불릴 정도로 정치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명분 의리의식을 매개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는 붕당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붕당으로 나아가는 전초 단계를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김종직 문인들은 조정에서 상호 협력하는 가운데 도학자적 지향을 강화시켜 나갔으며, 상호 간의 논란을 통해서 도학의 성격을 재규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점에서 김종직 문인들은 15세기 후반 권력구조적인 차원에서는 군주 중심의 수직적 질서의 균열 속에서 공통된 학문을 통한 상호 결집된 정치집단의 원형을 형성하였고, 당시 사회·경제적 변동과 맞물려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계층인 사족들에게 새로운 권위의 원천으로 도덕적 권위를 창안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는 16세기 사림세력의 정치, 사회론의 원형을 이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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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고려 성종대 실시되었던 사면과 그에 수반되었던 은전 등에 관하여 분석하였다. 제1대 군주였던 태조대부터 제6대였던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총 16회의 사면이 실시되었다. 그런데 성종대에만 11회의 사면이 단행되었다. 그 이전에는 겨우 5회만 실시되었다. 성종을 제외한 다른 임금들은 재임 기간 중 평균적으로 단지 1회만 단행한 셈이다. 더불어 그에 수반되었던 은전도 매우 풍성한 편이다. 이렇게 전임 국왕들보다 자주 사면을 실시했던 이유를 밝히는 것이 본 논문의 기본 목표이다. 사면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속하는 것이 동기다. 무슨 이유로 사면을 실시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성종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즉 전임 임금들이 내세웠던 동기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우들을 추가시켰다. 새로 추가되었던 것들 중에는 중국의 송, 거란으로부터 冊封을 받았거나 송으로부터 『藏經』이 전달되었던 것 등이 포함되었다. 이런 이유로 사면을 실시한 것은 성종이 처음이며 유일했다.
그 외에 책봉을 받은 뒤 지방에 행차하며 사면과 은전의 베풂을 선포하기도 했다. 송으로부터 받았을 때에는 西京에 행차해서 사면을 실시하였다. 거란에게 받았을 때에는 東京으로 행차하면서 사면을 단행하였다. 이 역시 성종이 최초이며, 더구나 동경 행차는 유일했다.
성종이 전임 국왕들과 달리 사면을 자주 실시했던 것은 특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민심을 추스리며 스스로 추진했던 외교 및 국내 정책들의 지지도를 크게 높이려 했다.

6서산 정석해의 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

저자 : 이기훈 ( Lee Ki Ho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3-23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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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해(1899~1996)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인으로 생활하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한학에 대한 소양을 쌓으면서 지사로서의 태도를 갖추었다. 또 중등학교 재학 시절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강한 민족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연희전문 문과 2학년 재학 중에 3·1운동을 맞이한 정석해는, YMCA 간부로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배포하는 등 시위의 확산에 기여했다.
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간 정석해는 김동평이 주도한 비밀 조직에서 무기의 반입, 국내 연락, 요인 호위 등 만주와 국내의 운동 조직을 연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목숨을 걸고 수행했던 이때의 민족운동 경험은 이후 해방 이후 현실 참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하이를 거쳐 유럽에 유학하는 동안에도 흥사단과 유학생 모임 활동을 지원하는 등 민족운동에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해방 이후 모교의 철학과 교수가 된 정석해는 1960년 4월 25일 교수 모임에서 의장을 맡아 교수단 시위를 이끌어 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교수단 시위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한국교수협회를 결성하여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려 했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한일회담 반대와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다. 정석해는 교육자로서의 길을 가면서도 청년 시절 독립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는 지성인으로서 면모를 보였다.

7정석해의 교유관계와 연희대학교

저자 : 도현철 ( Do Hyeon Chul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39-27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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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정석해의 교우 관계와 교육 행정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정석해 개인뿐만 아니라 해방 직후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연희대학의 역사와 대학 교수의 현실 인식과 사회적 실천 활동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정석해는 동료 교수들 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사적인 유대감과 함께 학교와 사회의 대소사를 논하고 진실의 구현, 정의의 실천에 앞장섰다. 그는 동료 대학교수들과 4·19 혁명과 6·3 한일협정 반대 시위 그리고 연세대학의 학원 자율화, 민주화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연희대학의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추구하여 권위적이고 비합리적인 태도를 수정해갔다. 그의 이러한 지식과 행동은 연세대학의 학교 운영이나 후배 교수의 교육 연구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8여말선초 '성리학' 연구의 논점들

저자 : 이상민 ( Lee Sang Mi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9-31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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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여말선초 성리학 연구에 대해 검토한 연구이다. 이 연구를 통해 본고에서는 기왕의 '성리학' 연구에서 나타난 논점들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이들 각각의 문제제기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기왕의 연구들에서는 성리학이 여말선초의 역사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입각하여 1) 성리학은 이 시기 주류 사상의 변화를 야기한 중요한 요인이며, 2) 고려 말 정치세력들을 중심으로 성리학은 한 차례 분화되었으며, 3) 이들은 조선 건국 후 융합되어 16세기까지 질적인 변화 없이 한반도에 전파되었다는 입장이 정착되었다.
다만 이후의 연구들에서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1) 고려 말 정치·사상적 변화는 성리학 성리학자들과 무관하며, 2) 이 시기에 사상적 분화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3) 성리학은 15·16세기에 걸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들의 새로운 입장들이 모두 유의미하지만 기존의 연구들을 대체하기에는 미진한 부분 또한 있다고 파악하였다. 앞으로의 더 많은 논의가 활성화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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