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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원 의례의 종류와 의의: 강학례, 향사례 그리고 향음주례

The Types and Significances of Korean Seowon Rituals

한재훈 ( Han¸ Jae-hoon )
  • : 한국서원학회
  • : 한국서원학보 11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12월
  • : 27-53(27pages)

DOI

10.30594/kss.2020.12.11.2


목차

Ⅰ. 여는 말
Ⅱ. 한국 서원의 ‘강학’ 의례
Ⅲ. 한국 서원의 ‘향사’ 의례
Ⅳ. 한국 서원의 ‘향음주례’
Ⅴ.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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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講學)’은 학문적 내용을 강명(講明)하는 것이다. 그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고,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 훨씬 유효하다. 율곡은 책을 함께 읽고 의리(義理)를 강명하는 것이 강학을 하는 근본 목적이라고 했고, 퇴계는 의리를 강명하는 것은 결국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서원은 강학의 이와 같은 의미를 의례화함으로써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갖는 학문적·실천적 중요성을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것이 이른바 ‘강학 의례’이다.
당대(唐代)에 장서(藏書) 기능으로 출발한 서원은 이후 강학(講學) 기능이 더해졌고 북송(北宋)시대에 향사(享祀) 기능이 더해졌다. 서원 향사 의례의 독자적 위상은 아무래도 남송(南宋)시대에 주자가 창주정사(滄洲精舍)에서 봉행한 석채의(釋菜儀)를 기점으로 형성되었다. 중국의 서원 향사는 공자(孔子)를 향사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한국의 서원 향사는 대체로 공자를 향사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향사에 진설되는 제품(祭品)의 규모의 차이로도 연결되었다. 한국 서원의 향사 의례는 자신의 좌표를 향교(鄕校)와 향사(鄕祠)의 중간에 설정하려는 의식을 강하게 보여준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향음주례(鄕飲酒禮)’를 제정한 목적은 크게 ‘흥현(興賢)’과 ‘상치(尙齒)’ 두 가지다. 향음주례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의례의 시행 장소가 ‘학교’라는 사실이다. 향음주례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역대 국가는 ‘독약(讀約)’ 또는 ‘독률(讀律)’ 조항을 첨가하고, 시행 장소도 관청으로 변경하면서 향촌 지배의 목적으로 이 의례를 이용했다. 조선의 향음주례는 당·송·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새로운 노선을 개척했다. ‘독약’ 또는 ‘독률’로 상징되는 국가 주도의 향음주례를 지양하였고, 향음주례를 시행하는 장소 역시 관청이 아닌 ‘학교’로 바로잡았다. 16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향교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서원이 등장하였고, 자연스럽게 향음주례도 서원에서 시행하게 되었다.
First, Korean Seowon ritualized the lecture at a personal or collective level in order to effectively perform the 'Gungri(窮理: explore the law)' required in the learning process to make human behavior conform to the law of nature. The Ganghak ritual can be divided into the Hoegang (會講: gather together to study) and the Ganghoe(講會: gather to demonstrate one's study), and they were again composed of rituals that were divided into two parts: a Gaejeop(開接: start a study group), a Geojeop(居接: live in a study group) and a Pajeop(罷接: complete a study group).
Next, the Korean Seowon has improved the ritual of 'Hyangsa' in order to clarify the standard of 'Dotong(道統: Succession of the Way)' raised in the perception that the scholar, the authority of the Way, is the subject leading the world. To this end, the coordinates of Seowon Hyangsa were set in the middle of the Munmyo(文廟: national official shrine) and Hyangsa(鄕祠: a local shrine), and the target was also selected according to the achievement of Taoism. To this end, Seowon first set his coordinates in the middle ofthe Munmyo(文廟: national official shrine) and Hyangsa(鄕祠: a local shrine), and set the criteria for selecting the sacrifice objects according to the contribution of the Dotong. And according to these standards, they have improved all kinds of rituals such as the time of sacrifice and the food to be sacrificed.
Finally, according to the Jurye(周禮), there are two main purposes for establishing Hyangeumjurye(鄕飲酒禮), ie a drinking ceremony held in the local village. One is to recommend good talent, and the other is to respect older people. Another thing to pay attention to in this ceremony is the fact that the venue for the ceremony is school. China's previous dynasties used this ceremony with the aim of making its people submissive. In Joseon, however, the state did not lead this ceremony and the place where it was implemented was changed to a school. Seowon, which emerged in the 16th century when it criticized the actual state of the Hyanggyo, naturally implemented this ceremony on its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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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中国书院礼仪的类型与特征

저자 : 兰甲云 ( Lan¸ Gap-u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26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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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서원의 의례는 중국 고대 각급 관학의 학례 제도로부터 기원한 것임을 분석하였다. 서원의 주요 의례로는 석전례(釋奠禮), 석채례(釋菜禮), 서원 강회에서의 의례, 일상 속에서 스승과 학생이 강학하는 의례 등의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각 서원의 향현 제사와 전례 제사 대상은 모두 향리의 선현이며, 지방마다 특색을 가지고 있다. 서원 의례와 관학 학례는 함께 중국 고대예제·예교·예치의 교육 체계와 학술 계통을 구성한다. 서원 의례 제도는 지방고을의 산촌 격지에도 고대 예의를 가르쳐 보급하는 것을 보증하는 중요한 교육·교화 제도였다.

2한국 서원 의례의 종류와 의의: 강학례, 향사례 그리고 향음주례

저자 : 한재훈 ( Han¸ Jae-hoo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7-5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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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講學)'은 학문적 내용을 강명(講明)하는 것이다. 그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고,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 훨씬 유효하다. 율곡은 책을 함께 읽고 의리(義理)를 강명하는 것이 강학을 하는 근본 목적이라고 했고, 퇴계는 의리를 강명하는 것은 결국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서원은 강학의 이와 같은 의미를 의례화함으로써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갖는 학문적·실천적 중요성을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것이 이른바 '강학 의례'이다.
당대(唐代)에 장서(藏書) 기능으로 출발한 서원은 이후 강학(講學) 기능이 더해졌고 북송(北宋)시대에 향사(享祀) 기능이 더해졌다. 서원 향사 의례의 독자적 위상은 아무래도 남송(南宋)시대에 주자가 창주정사(滄洲精舍)에서 봉행한 석채의(釋菜儀)를 기점으로 형성되었다. 중국의 서원 향사는 공자(孔子)를 향사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한국의 서원 향사는 대체로 공자를 향사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향사에 진설되는 제품(祭品)의 규모의 차이로도 연결되었다. 한국 서원의 향사 의례는 자신의 좌표를 향교(鄕校)와 향사(鄕祠)의 중간에 설정하려는 의식을 강하게 보여준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향음주례(鄕飲酒禮)'를 제정한 목적은 크게 '흥현(興賢)'과 '상치(尙齒)' 두 가지다. 향음주례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의례의 시행 장소가 '학교'라는 사실이다. 향음주례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역대 국가는 '독약(讀約)' 또는 '독률(讀律)' 조항을 첨가하고, 시행 장소도 관청으로 변경하면서 향촌 지배의 목적으로 이 의례를 이용했다. 조선의 향음주례는 당·송·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새로운 노선을 개척했다. '독약' 또는 '독률'로 상징되는 국가 주도의 향음주례를 지양하였고, 향음주례를 시행하는 장소 역시 관청이 아닌 '학교'로 바로잡았다. 16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향교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서원이 등장하였고, 자연스럽게 향음주례도 서원에서 시행하게 되었다.

3조선시대 서원의 향사의례에 대한 특징과 의미 -남인계·서인계 서원을 중심으로-

저자 : 임근실 ( Lim¸ Geun-sil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5-8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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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원의 享祀儀禮가 가지는 특징을 살펴보았다. 주요 내용은 향사일, 참석인원과 제물, 의식절차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조선시대 서원의 향사의례는 16세기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황과 그의 제자에 의하여 정립되었고, 황해도 지역에서는 이이를 중심으로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후 두 지역의 서원에서 시행된 향사의례는 역사적 변천을 거치면서 지역별로 변화되었다. 이황과 그의 제자가 정비한 서원의 향사의례는 경상도 지역의 남인계 서원의 전범이었다. 그리고 이이가 제정한 서원관련 규정에서 볼 수 있는 향사의례는 황해도 지역에서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서인계 서원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향사일은 남인계 서원에서는 仲月 中丁日과 季月 上丁日이었고, 서인계 서원에서는 중월 중정일이었다. 남인계 서원에서는 재계할 때 제관들은 홍단령을 착용하고, 행례할 때 제관들은 흑단령을 착용하여 차이를 두었다. 서인계서원에서는 흑단령을 착용하였다. 남인계 서원에서는 향사의례의 犧牲으로 鷄腥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서인계 서원에서는 향사의례의 祭物로 形鹽을 사용하여 籩豆의 수가 일치하지 않았다.
의식 절차는 남인계 서원에서는 현재까지 향사의례를 비롯하여 정알례, 삭망분향례 등 서원에서 정기적인 의례를 축소하지 않고 시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경상도 지역의 남인계 서원에서는 家禮에서 시행하는 의례들이 서원의 향사의례에서도 나타났다. 서인계 서원에서는 의식 절차에 講會가 많이 포함된 점이 특징적이었다. 또한 시기적으로 현대에 복원된 서원의 향사의례에서는 향교의 문묘에서 시행되는 석전의례의 영향을 여러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4朱子书院文化与韩国书院的发展

저자 : 张品端 ( Jang¸ Pin-da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1-102 (1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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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朱子書院文化가 조선시기 서원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고, 이 영향을 받은 조선시기 서원들이 이를 토대로 어떻게 건립되고 발전한지를 논술했다. 이를 위해 논문은 <한국 서원 건립에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주자서원문화>와 <한국 서원문화의 발전>으로 나누어 고찰했다.
1장 <한국 서원 건립에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주자서원문화>에서는 世宗시기부터 宣祖 시기까지 서원이 설립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세종 때는 朱子의 『白鹿洞書院揭示』의 영향을 받아 서원들이 점차 세워졌다. 中宗 시기에 과거제도의 부실운영과 관학의 학생 수 급감으로 서원이 널리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서원이 제도화되고 독립성을 갖게 된 것은 李彦迪과 李滉 등의 노력이 있었다. 이언적은 『玉山書院學規』를 이황은 『白鹿洞學規集注序』와 『白鹿洞規圖』를, 李珥는 『隱屛精舍學規』를 만들어 서원운영을 체계화하였다. 마지막에는 19세기에서 지금까지 서원의 상황과 서원의 복구 및 서원의 역할 등을 설명했다.
2장 <한국 서원문화의 발전>에서는 주자서원문화의 영향을 받고 설립된 조선시기 서원들이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중국 서원과 대별되는 조선시기 서원들의 독특한 발전특징을 기술했다. 논문에서는 조선시기 서원들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유가의 지식전수와 문화전승, 제사활동, 禮學의 발전과 『朱子家禮』의 전파, 예학 저술의 발달, 주자를 높이는 활동 등을 꼽았다.

5理学背景下武夷精舍与玉山书院周边的“人居环境” 比较研究 - 以中国武夷九曲和韩国玉山九曲为中心

저자 : 彭鴻緖 ( Peng¸ Hong-xu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3-124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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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중국 武夷山 武夷精舍와 玉山書院 주변의 '人居環境'을 武夷九曲과 玉山書院九曲을 중심으로 비교한 논문이다. 본 논문은 총 5장으로 이뤄져있으며 중국 九曲園林과 한국구곡원림의 연원관계, 한중 구곡원림의 공간분포, 한중 구곡원림의 비교로 기술되어있고, 마지막에는 결론 부분과 옥산구곡서원의 발전방향에 대한 조언이 담겨있다.
1장 <한국 서원 밖의 인거환경>에서는 중국에서 九曲이 설정되는 배경을 설명하고, 조선시기 서원들이 서원 밖의 '인거환경'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모방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2장 <한국의 구곡원림과 중국의 배경연원>에서는 조선시기 유학자들의 朱子 숭배와 당쟁에 대한 회의로 산수자연을 이상향으로 간주하면서 구곡원림이 설정되었다는 점과 구곡의 造型상의 특징을 기술했다. 또한 무이산 하천과 한국의 하천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언급하고 구곡이 들어선 입지를 설명했다.
3장 <한국 구곡원림의 공간분포>에는 전국에 분포된 구곡을 지역별로 통계를 내고, 구곡이 집중된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연원을 설명했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에서 현재까지 설정된 구곡도 설명했다.
4장 <한중 구곡원림 비교>는 무이구곡과 옥산구곡의 특징을 각각 기술하고, 이를 토대로 두 곳을 비교했다. 이곳에서는 지형과 지질, 구곡의 설정자와 후대 학자, 문화와 사상, 시화와 석각, 경관 구성, 경의의 부여 등 여러 방면으로 나눠 상세하게 설명했다.
5장 <연구 정리와 발전 건의>는 이상의 연구를 정리하고 옥산서원과 옥산구곡이 갖는 현대적인 의미를 설명하고, 옥산서원과 옥산구곡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몇 가지 조언을 했다.

6조선시대 경주 옥산서원의 위상 변화

저자 : 이병훈 ( Lee¸ Byoung-hoo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5-183 (5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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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서원 제도가 도입되던 초창기에 건립되어 대원군의 원사 훼철 시에도 존치되었던 곳으로서 한국 서원의 변천사를 대표하는 곳 중의 하나이다. 옥산서원은 건립 당시부터 경주지역 수원(首院)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위상은 제향인의 위상과 사액의 유무를 기본으로 정해진다. 여기에 사회·정치적 기능, 경제적 기반, 출판·도서관적 기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옥산서원은 이러한 요소가 시기별로 상호작용하면서 그 위상이 부침을 거듭하였지만 경주지역 수원으로서의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옥산서원은 문묘 종사 대현인 이언적을 제향하는 서원으로서 경주부윤과 향인, 후손, 문인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또한 건립 직후 사액이 되면서 국학에 준하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건물과 장서를 온전히 보존하였던 옥산서원은 전란 이후 경주지역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위치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거재와 거접 등의 강학을 강화하면서 유생 교육의 중심처로 위치하였다. 당시는 당쟁이 심화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제향된 이언적이 당색과 무관한 인물이었으며, 서원의 운영 방향도 당쟁과 거리를 두면서 당색을 불문하고 많은 인사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또한 지방관의 방문도 계속 이어지면서 옥산서원의 사회적 위상이 제고되는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경주부내의 당파간 신분간 분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면서 18세기부터는 경주부 남쪽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문중서원의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서원 운영에 참여하던 원유들의 이탈로 서원 운영에도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각종 규정을 제정하고, 원임의 선발 범위를 경주부 전역으로 확대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시도하였으나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정조의 즉위 이후 이언적의 학문에 대한 국왕의 관심이 커지면서 그를 제향한 옥산서원에 대한 관심도 함께 커져갔다. 그 결과 인조반정 이후 단절되었던 치제가 재개되고, 서적의 하사도 이어지면서 옥산서원의 위상이 제고되었다. 이때부터 옥산서원은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의 양대 서원으로 위치하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서원 운영의 어려움이 더욱 심화되면서 원장의 선발도 도내로 확대하고 후손들의 서원 참여율도 더욱 증가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헌종 5)의 구인당 화재로 서원 재정은 악화되었지만 재사액과 국왕의 특명에 따른 치제가 거행되면서 서원의 위상은 재정립되는 효과를 얻었다. 그 후 원장에 경주부윤이 천망되면서 서원운영에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서원 운영의 핵심가문인 경주손씨와 학문연원 시비가 발생하면서 19세기 중반 이후 손씨들이 옥산서원에서 완전히 이탈하였다. 나아가 신향들의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시비도 격화되어갔다. 그러나 대원군의 원사 훼철에도 존치되면서 더욱 위상이 높아져서 1884년(고종21)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를 주도하기도 했다.

717세기 말-18세기 초 석실서원의 강학 실제와 특징 -농암 김창협의 강학 활동을 중심으로-

저자 : 김자운 ( Kim¸ Ja-woo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5-21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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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반까지 김창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석실서원 강학의 실제와 특징을 고찰하고자 한다. 석실서원은 김상용과 김상헌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56년에 건립되어 조선후기 서울 지역 노론계의 대표적 서원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 계기 중 하나는 '충절서원'으로 출발한 석실서원이 '강학서원'으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후기 사회의 정치적 동향과 안동김씨 가문의 정치적 입지, 당시 서울·경지 지역의 문화적 특징과 서울 학계의 변화 등을 기반으로 김창협 형제는 전통 주자학의 의리론을 고수하던 당시 주류 노론과는 구별되는 매우 독특한 학풍을 지니고 있었고, 석실서원에서의 강학과 교류는 그들의 학풍이 서울 학계에 확산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김창협 사후 당쟁의 여파로 18세기 초반 한 때 침체되었던 석실서원은 18세기 중반 이래 김원행이 부활시킨 강학활동을 계기로 낙론의 학문을 전파하고 이후 전국 각지에서 정치적, 학문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많은 문인들을 배출함으로써 낙론의 본거지로서 학문적, 정치적 위상을 재정립하게 된다.
지금까지 정치사와 사상사 분야에서는 석실서원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석실서원의 정치적 성격과 위상, 사상적 특징과 호락논쟁 사이의 연관성, 김원행 학문의 특징과 강학활동, 석실서원을 통한 지식과 지식인의 재생산이 조선후기 북학사상의 태동에 끼친 영향, 낙론 사상의 계승과 변모 양상 등이 상세히 구명되었다.
그러나 석실서원 강학에 대한 선행연구는 주로 김원행이 제정한 석실서원 학규와 강규에 대한 소개, 그리고 김원행 시기의 강학활동에 집중되어 있을 뿐 김창협의 강학활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시도된 바 없다. 그 이유는 김창협의 강학에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농암집』에 수록된 시, 편지, 제문, 어록, 연보 등에 산견되는 기록을 최대한 검토하여 김창협 시기 이루어진 강학의 일상과 풍경의 단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선행연구의 한계를 부분적이나마 보완하고,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반까지 김창협이 수행한 강학의 실제와 특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Ⅱ장에서는 김창협이 석실서원에서 본격적으로 강학을 시작한 시기, 강학의 운영 주기, 입원 자격과 조건, 강학 참여자들의 출신지역과 계층 및 배경, 서원에 유숙한 기간, 서원에 상주하며 강학에 참여한 문인들의 규모, 입문 절차와 입문 의례, 科業에 종사하는 유생들의 입원 허용 여부, 서원에서 공부한 서책, 강학의 방식과 형태, 강학의 절차와 강학 의례, 서원 공간의 활용, 김창협 부재 시 문인들의 학업 지도 등을 중심으로 김창협이 운영한 석실서원의 강학 실제와 운영 양상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18세기 중반 김원행이 수행한 강학활동과의 차이를 일정부분 해명할 수 있었다.
Ⅲ장에서는 과거 공부에 대한 김창협의 독특한 시각과 현실 대응관을 조명하였다. 그의 관점이 석실의 문인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관철되고 있었는지를 석실 문인들의 과거 공부에 얽힌 몇 가지 일화들을 통해 소개하였다. 또한 과거 공부에 대한 그의 독특한 입장과 현실 대응은 퇴계와 율곡의 관점을 어떤 점에서 절충하고 넘어선 것이었으며, 김원행의 관점과는 어떤 차이를 드러내는지 구명하였다. 또한 김창협이 석실의 문인들에게 강조한 독서법과 공부론에 있어 그의 스승 이단상과 조성기의 관점을 어떤 점에서 계승하고 발전시켰는지를 아울러 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 Ⅳ장에서는 김창협 사후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석실서원이 겪은 수난과 김창협을 이어 이재와 김원행에 의해 석실서원의 학풍과 강학이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간략히 검토하였다.

8조선시대(朝鮮時代) 서원(書院) 각판본(刻板本)의 연원(淵源) 연구(硏究)

저자 : 裵賢淑 ( Pae Hyon-suk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9-25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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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조선시대 사학으로서 先賢을 祭享하면서 講學과 학문연구를 하던 기관이었다. 강학하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서적을 수장한 문고를 두고 있었고, 또 서적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정조연간 편찬한 『鏤板考』에는 총 84개소 서원에서 판각한 184종의 서원판이 수록되어 있다.
종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적을 간행한 서원은 평안도 中和의 淸凉書院으로 알려져 왔었다. 필자는 도산서원 자료를 탐색하다가 과연 중화의 청량서원 장판본을 서원판으로 볼 수 있느냐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에 중화의 청량서원 판본의 성격을 규명하고, 아울러 조선시대 서원 刻板의 시원에 대해 살펴보았다.
청량서원과 관련 있는 서적은 명종 20(1565)년 간행한 『續文範』, 명종 21(1566)년 간행한 『近思錄』과 『漢書傳抄』, 선조 원(1567)년 간행한 『庸學釋義』, 선조 1(1568)년 간행한 『古史通略』이다. 중화에서 전후 5종을 간행한 것이다. 이들 서적을 각판한 인물은 中和郡守 安瑺(1511-1571)이었다.
『용학석의』는 저자인 이황이 소각시킬 것을 지시하여 판목이나 간본이 전래되지 않는다. 『속문범』의 지문에는 “遂鋟榟藏于淸凉書院”이란 기록이 있고, 『근사록』의 권말에는 “嘉靖丙寅郡守安瑺刊藏中和淸凉書院”이란 간기가 있다. 『한서전초』의 발문에는 “玆敢入榟藏于淸凉書院…”이란 기록이 있다. 『고사통략』에는 “隆慶戊辰(1568)刊 藏淸凉書院”이란 간기가 있다. 이들 지문에는 판각한 후 판목을 청량서원에 수장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성주의 川谷書院에서 선조 7(1574)년에 『薛文淸公讀書錄』, 선조 8(1575)년에 『夙興夜寐箴』과 『朱子書節要』를 간행하였는데, 당시 서원의 원장은 鄭逑(1543~1620)였다. 『설문청공독서록』에는 “萬曆甲戌(1574)春 川谷書院刊”이란 간기가 있다. 『숙흥야매잠』에는 “萬曆乙亥(1575)夏川谷書院刊”이란 간기가 있고, 『주자서절요』에는 “萬曆乙亥(1575)季夏重刊于川谷書院朞年而工畢”이란 간기가 있다. 이들 간기에는 장판한 곳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판각한 곳은 천곡서원임을 밝히고 있다.
청량서원의 책판은 군수가 판각한 후 그 판목을 서원에 장치했던 것이다. 따라서 알려진 바와 달리 서원 각판의 효시는 성주의 천곡서원이라 하겠다.

9白鹿洞书院的建立背景与中国书院的变化 -宋元明清-

저자 : 邓洪波 ( Deng Hong-bo ) , 赵伟 ( Zhao Wei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51-297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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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唐代 사인의 서재나 관에서 서적을 보관·정리하는 기관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새로운 인쇄술의 발달과 유불도 융합의 문화 배경 하에 중국 고대 선비들이 서적을 둘러싼 藏書, 讀書, 敎書, 講書, 修書, 著書, 刻書 등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문화연구, 창조, 누적 및 전파활동을 진행하는 문화교육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으로부터 五代十國시기까지 이어진 전란을 겪고 宋代에 와서 새로운 발전 기회를 맞게 되었다.
北宋서원은 교육·교학 기능이 강화되면서 관학의 대체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天下四大書院”이 있다. 이어서 南宋 시기에 서원은 하나의 문화교육제도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남송 초기의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은 지식인들에게 인심수습과 倫常의 재건, 새로운 가치이념을 찾아서 민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제시하였다. 장식, 주희, 여조겸, 육구연의 “남송사대서원”에서의 강학은 학술의 번영을 일으키면서, 理學과 서원의 일체화의 형성에 일조하였다. 이 과정 중에 주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남강군지사 시절 백록동서원을 중수하여 <백록동서원게시>를 제정하고 이학의 입장에 서서 학생들에게 새 교육이념을 전파하였다. 새로운 교육이념의 전파에 따라 서원의 규제가 점차 완비되고, 학문연구, 교학과 전도, 장서, 刻書, 학파종사의 제향, 전답경영 등 이른바 서원의 6대 사업도 형성되었다. 이는 서원이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문화조직이 발전되었고, 그리고 중국의 교육 사업이 관학, 서원, 그리고 사학이 병행하는 시대에 진입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원나라 건립 후 과거제도가 재개됨에 따라 성리학이 다시 정통학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주희도 각 지방에서 널리 모시게 되는 제향인물이 되었다. 元代서원의 가장 큰 공헌은 遼金시대의 결함을 보충하고, 서원과 성리학을 북방지역에 널리 확산시키면서 남북 문화의 차이를 축소시킨데 있다. 원대 서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성리학과 일체화가 된 서원이 관학과 동일시되었다는 것과 건립주체의 다양성 및 교육 규정이 더욱 상세화 되었다는 점이다. 원나라 조정에서 서원의 건립을 적극 장려하면서 蒙古, 色目人도 서원을 건립하였다.
명나라 초기에 程朱學이 또다시 정통학술로 확립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서원은 주원장의 서원혁파 정책과 관학 지원책으로 인해 백 년간 침체기를 맞았다. 원나라 말기 전란에 의해 훼손된 백록동서원, 악록서원 등도 장기간 동안 복구되지 못하였다. 명 중엽에 들어 관학교육의 폐단이 발생함에 따라 서원의 설립이 하나의 해결책이 되었다. 주희의 백록동서원을 모범으로 서원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당시 胡居仁은 백록동서원 산장으로 부임하여, <속백록동서원학규>를 제정하여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한편으론 王守仁, 湛若水 등이 정통 철학에 대한 비판의 입장에 서서 전국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心學 전파운동을 전개하였다. 두 사람의 제자 및 후학들은 서원을 설립하고 강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남송 이래의 중국 서원과 학술이 또다시 성황을 이루었다. 이런 와중에 주자학 근거지였던 백록동서원은 왕수인 및 그 후학들의 노력과 서원 정비를 통해 양명학의 일대 진영이 되었다. 명 말기에 서원은 지식인들이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기구화 되었다. 이로 인해 가정, 만력, 천계연간 세 번의 훼철을 겪으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대에 서원 제도가 조선으로 도입되었고, 이와 동시에 백록동서원도 조선 서원의 본보기가 되었다.
청나라 초기 주자를 숭상하는 문교정책에 따라 그의 <백록동규>를 본받아서 서원을 설립하였다. 강학 활동을 통해 양명학을 배척하고, 주자학을 숭상하는 “辟王崇朱”의 풍조가 형성되었다. 청대 초기 하남지역 이학과 서원의 부흥은 바로 이런 풍조 하에 나타난 결과물이다. 옹정 연간에 각 성에 '省會서원' 설립의 시작과 동시에 관의 세력이 서원설립에 강력하게 간여하여 각급 '官辧書院'들이 전국 각 지역에서 크고 작은 학술교육의 중심지가 되는 현상이 형성되었다. 관과 민의 공동노력에 청대서원은 도시와 향촌에 널리 보급되어 미증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한편으로 <백록동서원게시>와 <독서분년일정>은 詔令을 통해 공포되어 각 성회서원에서 통용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張伯行, 王澍 등 일부 관리와 사인들은 송·명 두 시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여 <학규류편>과 <주자백록동조목>을 제정하여 주희와 백록동서원이 지식인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촉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대서원의 과거화, 관학화 정도가 심화됨에 따라 阮元을 비롯한 건륭·가경대의 한학 중심학자들은 송학의 상투적인 틀에서 벗어나 詁經精舍와 學海堂을 세워서 經史훈고학에 전념하였으며, 이로써 청대서원은 변혁의 길을 열었다. 道光 이후의 서원은 개항으로 유입되는 서양문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내용과 형식상의 재편을 통해 서학과 신학을 도입시켜서 신식서원을 구축하였다. 한편으론 청대 서원의 해외 수출도 계속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백록동서원 정신을 중심으로 한 세계서원문화 체계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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