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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연구 update

THE JOURNAL OF HUMANITIES

  •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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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9-5485
  • : 2671-8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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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6)~48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509
인문학연구
48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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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사촬요(攷事撮要)』를 통해 본 조선 전기 한국문헌 출간 양상

저자 : 裵圭範 ( Bae¸ Kuy-beom ) , 민관동 ( Min¸ Kwan-dong )

발행기관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학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4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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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魚叔權의 『攷事撮要』 <八道程途>에 수록된 책판 목록 중 한국문헌 211종을 대상으로 類門 분포와 經史子集의 주제별 분석을 시도하여 16세기 이전 조선의 출판 문화 양상을 정리했다. 국내 문인의 저술 211종은 삼국시대 2종, 고려시대 29종, 조선시대 168종, 연대미상 12종이며, 주제별로는 경부 11종, 사부 38종, 자부 62종, 집부 97종, 분류미상 3종이다. 『고사촬요』에 수록된 서적은 총 26종의 유문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아직 이 시기에는 특정 유문에 집중되는 단순함을 보여주고 있다. 개별 서적을 주제별로 분석해 본 결과 첫째, 조선 전기 국내 교육서 중 한국문헌의 간행을 통해 성리학의 한국적 발전을 시도하고 있다. 둘째, 行政 技術書와 生産技術書의 간행을 통해 국가 체제 정비에 힘썼다. 셋째, 개인 文集類와 世藁의 간행을 통해 문학적 기풍과 가문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나갔다는 점을 확인했다.


Among the list of book in 魚叔權(Eo-Sook-kwon)'s 『攷事撮要(Ko-Sa-Chwal- Yo)』, 211 kinds of Korean literature are attempt to analyze by 類門(You-Moon) distribution, topic of 經史子集(Kyung-Sa-Ja-Jip). Therefore, It summarized the aspects of Joseon's publishing culture before the 16th century. There are 211 kinds of Korean literature written by Korean writer, that 2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29 during the Korea Dynasty period, 168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and 12 were unknown. By subject there are 11 types of 經部(Kyung-Bu), 38 types of 史部(Sa-Bu), 62 types of 子部(Ja-Bu), 91 types of 集部(Jip-Bu), and 3 types of classification unknown. There are 26 sorts of 類門(You- Moon) can be classified inside the 『攷事撮要(Ko-Sa-Chwal-Yo)』, It still shows the simplicity of focusing on a particular 類門(You-Moon) during this period. The results of analyzing individual books by topic; First, It is attempting to develop Neo-Confucianism in Korea through the publication of domestic literature in the early Joseon period. Second, through the publication of administrative and productive description, they worked hard to improve the national system. Third, through the publication of personal literary collections and 世藁(Se-go), it was confirmed that it developed a literary spirit and a sense of self-esteem for the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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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10년대 한글 편지의 사회·종교적 상황과 어휘 분석 - 김병권 언간의 번역과 주석을 중심으로

저자 : 이희영 ( Lee¸ Hee-young )

발행기관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학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9-8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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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국으로 돌아온 한글편지-레슬리 송 기증』(2018, 국립한글박물관)의 김장연 일가 편지 중 <김병권 편지1,2,3>의 어휘를 분석하여 일반 편지에서 발견되는 당시의 언어적 특성을 연구함과 동시에 편지가 담고 있는 사회적 상황을 조망해 보았다. 이 편지들은 초기 한인 이주의 단면과 더불어 당시 수원 지방의 남감리교 포교 현황을 담고 있어 기존의 한글 자료들과 구별되는 사회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만큼 이 편지들이 지니는 사회문화적 가치가 높음을 말해주는 일이라 하겠다.


This paper aims to analyze linguistic features and observe social and religious aspects of Hangul letters written by Kim Byung-gwon in 1910. These letters also shows the early South methodist churches' missionary activities in Suwon area, so they have value distinguished from other Hangul letters. They are very valuable in respect of social and cultural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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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80년대 『문학과지성』의 공간과 아우라 - 『우리 세대의 문학』에서 『입 속의 검은 잎』까지

저자 : 최민지 ( Choi¸ Min-ji )

발행기관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학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5-11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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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다수의 무크지가 출현한 1980년대 문학 장에서 『문학과지성』의 문학적 대응 양상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70년대 후반 무렵 대두된 민중문학론은 해당 시기 '새로운 문학 주체'의 등장이라는 문학적 귀결을 가져왔지만, 이후 발전적으로 흡수되지 못한 채 소멸의 형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즉, 80년대와 90년대에 가로놓이는 '단절론'을 발생시키며 해당 연구를 저어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따라서 앞선 시기를 양분한 『문학과지성』이 강제 폐간을 경험하면서도 『문학과사회』 창간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지점을 파악하는 것으로, 1980년대를 연대기적 시선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해당 시기 『문학과지성』은 시대적 요구에 따른 문학적 대응을 보여줄 수 있는 지면을 상실했지만, 『우리 세대의 문학』 혹은 『우리 시대의 문학』으로 그 맥을 이어나간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문학 담론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비평 영역을 다음 세대와 양분하거나, 평론에 한정되었던 편집진을 다양한 장르로 확대하였으며, 대립 구도에 놓여있던 상대 진영까지 포함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출판에서는 대표적으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으로, 80년대의 특수성을 90년대의 보편성으로 연결지으며, 연계적 작업에 대한 단서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에 본고는 해당 시기 『문학과지성』의 문학적 대응 양상을 분석하기 위해, 『우리 세대의 문학』 혹은 『우리 시대의 문학』과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분석을 통해 『문학과지성』이 『문학과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인을 파악하는 것으로, 1980년대의 '단절론'을 극복할 수 있는 연대기적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This study aims to consider the literary response aspects of “Literature and Intellect” in the literature 1980s, when a number of mooks emerged. The popular literature theory, which emerged around the late 70s, brought about the literary conclusion of the emergence of a “main agent of new literary” at that time, but it was later problematic in that it showed a form of extinction without being absorbed developmentally. In other words, it creates a “theory of discontinuity” that lies across in the 80s and 90s, causing the research of the period to be awkward. Therefore, 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movement of < literature and intellect >, which were divided into the “periods of the two major quarterly magazine”, to the foundation of its developmental form, “Literature and Society”, and to approach the 1980s with a chronological perspective.
At that time, < Literature and intellect > lost its place to show literary responses to the demands of the times, but continued its movement to develop into < Literature in Our Generation > or < Literature in Our Time >. In this process, < Literature and Intellect > divided the areas of criticism that could directly affect literary discourse into the next generation or expanded the editorial staff, which was limited to reviews, to various genres. It also showed movements, including the opposing camp, which had been in the confrontation. Also, in terms of publication, the representative example is “A Black Leaf in Mouth” of Ki Hyung-do. This book connects the specificity of the 80s to the universality of the 90s and shows clues about the linkage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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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일본 표류민(漂流民) 그림과 한글묵서에 대하여 - 예술의 전당 전시 <조선인일본표착서화(朝鮮人日本漂着書畫)를 중심으로

저자 : 정승혜 ( Chung¸ Seung-hye )

발행기관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학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1-13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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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19년 일본의 돗토리현에 표착한 12인의 표류민에 대한 기록들과 이들을 그린 그림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특히 예술의 전당에서 'ㄱ의 순간'이라는 주제로 전시된 그림 중 국내 최초로 공개된 <조선인일본표착서화(朝鮮人日本漂着書畫)>를 소개하고, 이 그림의 모티브가 된 안의기 일행의 일본 표류사건과 관련된 기록들을 정리하였다.
<조선인일본표착서화>는 기존에 알려진 안의기 일행의 표류도와 매우 비슷한 구도로 그려졌고 상단에 한글묵서가 있다. 본고에서는 이 그림과 상단의 한글 묵서(墨書)를 판독하고 그에 대한 해제를 행하였다. 한글 묵서는 초당(初唐) 시인인 노선(盧僎)의 '남망루(南望樓)'를 한글로 쓴 것으로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1월에 집을 떠나 일본에 표착한 후 돗토리현에서 4개월을 보냈으니 이국에서 봄을 맞으면서 느낀 소회를 이 시를 통해 나타낸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은 표류민 가운데 '이동백'은 본명이 '이용곤'이었고, 통역을 하여 '이동백'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그림에 적힌 인명의 일본어 표기를 통하여 19세기 한자음을 살펴보았다. 한글로 쓰인 한시와 표류민의 이름에 쓰인 한자음은 19세기 방언 한자음을 반영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This study examined the records of the 12 drifters who arrived in Tottori Prefecture in Japan in 1819, and the paintings of them. In particular, it introduced < The Caligraphy & Painting of Korean Drifters to Japan(朝鮮人日本漂着書畫) >, which was open to the public for the first time, among the paintings displayed under the theme of “The Moment of ㄱ” at the Seoul Arts Center, and summarized records related to the drift to Japan of the group of people including Ahn Eui-ki, who was the motif of this painting.
< The Caligraphy & Painting of Korean Drifters to Japan > was drawn in a very similar composition to the previously known drift painting of Ahn Eui-ki's group, with black-and-white Hangeul writing at the top. This study decoded and interpreted the Hangeul writing in black-and-white(墨書) at the top. The black- and-white Hangeul writing is “Nammangnu(南望樓)” of Noh Seon(盧僎), a poet in the early Tang Dynasty(初唐), which expressed loneliness in a foreign country after leaving hometown. They left home in January and spent 4 months in Tottori Prefecture after landing in Japan, so this poem expresses their thoughts greeting spring in a foreign country. A new fact unknown in the previous study is that the original name of “Lee Dong-baek” among the drifters was “Lee Yong-gon” and he was granted the name “Lee Dong-baek” as an interpreter. In addition, this study looked into the pronunciation of Chinese characters in the 19th century through Japanese notation of names written on this painting. It was confirmed that the Chinese poem written in Hangeul and the Chinese pronunciation written in the names of drifters reflected the pronunciation of Chinese dialect spoken in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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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도 분단 소설에 나타난 비극의 양상 연구 -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행 열차」를 중심으로

저자 : Anshuman Tomar , 서덕순 ( Seo¸ Duk-soon )

발행기관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학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9-17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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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인도의 저명한 시크교 작가인 쿠쉬완트 싱(Khushwant Singh)의 소설에 드러난 비극의 양상을 집단학살, 가족의 해체, 여성수난의 항목으로 점검하여 인도분단소설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있다. 쿠쉬완트 싱은 다양한 종교에 속해있으나 평화롭게 공존하던 마노마즈라 마을의 사람들이 분단 후 종교적 갈등과 증오가 증폭되면서 대량 학살, 강간, 자살, 약탈 등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가는 양상을 마을의 한 살인 사건을 시발점으로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인도 분단의 역사적 의미와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다. 특히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의 침묵이 드러나고 폭력·학대를 당하는 여성들의 삶의 냉혹한 현실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쿠쉬완트 싱은 소설에서 분단과 통합, 증오와 사랑, 분노와 애정, 복수와 희생을 긴밀한 서사적 긴장을 통해 그려냈으며 마을의 행동과 휴식, 수면의 시간을 알리는 열차의 운행이 절망, 어둠과 파괴의 상징으로 변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소설 곳곳에서 인도의 문화, 종교, 신분제, 관습에 대한 묘사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소설에서 분단과 통합, 증오와 사랑, 분노와 애정, 복수와 희생의 힘을 번갈아 그려냈다. 또한 신분제에 대한 언급도 나타나고 하위 계급 사람들이 당하는 차별도 다루어지며 분단 상황에 놓인 인도사회의 제반 문제들이 전방위적으로 서술된다.
한국의 경우에도 분단은 현재까지 한국 사회의 근본 모순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국토 분단으로 인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와 민중의 고통을 드러내는 소설들이 창작되어 왔다. 특히 여성인물들은 전쟁 중 강간이라는 신체의 훼손을 겪는 피해자임에도 주변의 모멸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사회의 가치관을 파괴한 가해자로 여기는 이중의 수난을 겪는 양상은 인도 분단소설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국에는 쿠쉬완트 싱의 대표적 작품인 「파키스탄행 열차」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며 양국의 분단 시기를 다루는 비교문학 관련 연구 역시 미미한 실정이다. 따라서「파키스탄행 열차」의 분단의 비극 양상 분석은 인도의 분단과 그 시기의 암담한 현실, 그리고 민중의 고통과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일조함과 동시에 양국분단문학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는 한 시도가 될 것이다.


This study discusses the savagery, suffering, pain, and agony faced by the people of the subcontinent during the partition. Train to Pakistan shows the violence, communal hatred, mass migration of the common people, and how their lives got changed after the announcement of partition. Khushwant Singh describes the significance of the trains, different realities of the Indian society, and religious tensions in communities. The novel shows the physical tortures and psychological outbursts of the common people who couldn't even imagine leaving their hometown and moving to a new place just because their religion was different from others.
India is a multi-religious, multi-cultural and multi-lingual country. But due to the British's 'Divide and Rule' policy, hatred between different religious groups started and it finally led to the partition of India in 1947. A country where Hindus, Muslims, and Sikhs lived together in peace for generations nobody ever thought of any communal violence or a separate state for Muslims. Partition was imposed on the people of India which resulted in mass murders, killings, and migrations. Thousands of people were homeless, looted, and assassinated and tried their best to survive this cruelest situation.
This novel also shows how women are targeted during the partition and how they are raped, kidnapped, and mutilated by men. It also shows the discrimination and exploitation of women based on colour, caste, and religion. The writer describes the problems of common people during the partition and also criticizes the political leaders for the partition of India that just led to plunder, hatred, massacre, and suffering. This study provides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history, culture, society of India, and the hardships of people during the part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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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철기~삼국시대 강원 영동지방의 철기 제작 공정 전통 - 강릉지역을 중심으로

저자 : 심재연 ( Sim¸ Jae-yoaun )

발행기관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학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3-20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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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 강원 영동지방에 분포하는 마을의 자체적인 철기 제작 증거는 기원후 2세기경부터 확인된다. 그리고 중심 마을은 동해 송정동유적, 강릉 병산동유적이다. 이후, 영동지방은 4세기 중·후반경부터 신라화가 진행되었지만, 물질문화의 변동은 급격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특히, 주거 형태는 전통적인 주거 형태와 방형 신라 주거가 공존하였다.
철기 제작 기술도 강릉 병산동유적에서 (반)환원괴를 정련하여 철 소재와 철기를 만드는 정련단야와 단련단야 공정이 지속되고 있어 획기적인 변화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선철은 주조용해공정의 존재를 논의할 수도 있지만, 제철 복원 실험 결과, 괴련철 생산 체계에서 우연히 생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철기시대부터 병산동 마을은 강릉지역 철기 생산 중심지였는데 신라진출 이후에도 한시적으로 지속되었다. 병산동 마을에 거주하던 단야 장인이 초당·강문동, 송정동, 안인리 마을을 순회하면서 철기 제작 및 수리를 담당하였다. 이후, 신라화에 따라 조성된 고분 중에 일상용 철기를 제작하는 단야 장인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처럼 삼국시대 강릉지역은 신라화 이후에도 철기 제작에 필요한 철 소재 수요는 급격하게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환원괴의 반입은 유지되었다. 왜냐하면 자체적으로 철 생산을 하는 비용 보다, 외부에서 반입하는 것이 부가가치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 생산 장인의 분묘가 확인되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강릉지역은 신라의 영역화에도 불구하고 철기 제작 기술은 철기시대 전통이 지속되었다.


Iron Age, The existence of ironware manufacturing technology in Gangwon- Yeongdong Region is confirmed from around the 2nd century AD. Traces of iron making are found in most villages, but the main villages are the Songjeong-dong site in the Donghae city and the Byeongsan-dong site in Gangneung city.
It was thought that the ironware manufacturing technology in Gangneung area would change according to the Silla Dynasty from the middle and late 4th century, but it was confirmed that the ironware manufacturing technology was maintained. On the other hand, in the Iron Age, Yeo·Cheol-Shaped(여·철자형) dwellings and square-shaped Silla dwellings coexisted.
In terms of ironware manufacturing technology, it cannot be said that a revolutionary change has occurred as the process of refining and danrying iron materials and iron tools by refining (semi)reduced ingots at the Byeongsan-dong Village in Gangneung continues.
And pig iron may discuss the existence of a casting and melting process, but as a result of the iron making restoration experiment, it should be considered that it were produced during a bloomery smelt.
Byeongsan-dong Village has been the base for making ironware in the Gangneung area since the Iron Age, and its function was maintained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during the Shilla process. At that time, itinerant blacksmith living in Byeongsan-dong village would have been in charge of making and repairing ironware in Chodang·Gangmun-dong, Songjeong-dong, and Anin-ri villages.
Even after Silla's effective control over the Gangneung area was complete, the demand for raw materials for iron making did not change rapidly. For this reason, iron was not produced in the Yeongdong region, and the import of (semi) reduced ingots(≒ wrought iron) produced outside, that is, in the Yeongnam region, was maintained. This is because importing of externally produced products was more economically effective than in-house iron production. For this reason, it is presumed that iron production-related relics are not found in Silla tombs, and the existence of black smiths is confirmed in a small nu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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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연산군대 금표 설치와 강무장 확대의 영향

저자 : 신동훈 ( Shin¸ Dong-hoon )

발행기관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학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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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연산군 대에 시행된 금표가 백성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 그로 인한 민심 변화가 어떻게 반정(反正)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연산군은 즉위 초반부터 사냥에 적극적이었다.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히면, 고제(古制) 혹은 북방의 군사적 긴장감 등을 근거ㆍ명분으로 활용하며 자신의 사냥을 정당화했다. 갑자사화를 전후하여 광활한 지역에 금표를 설치하고 사람들을 쫓아냈기 시작했는데, 경기 지역의 금표 설치는 강무장 확대 및 출입 금지라는 명분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강무장 확대 및 출입 금지는 야생 동물의 개체 수를 늘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후 사람들로 하여금 이 지역이 사냥터라는 것을 분명하기 인식시키기 위해 해당 지역을 더욱 확대했다.
이러한 금표 설치는 가옥 철거와 이주를 동반할 뿐 아니라, 도성과 경기의 교통로를 변화시켰다. 경기 지역은 대규모 유민이 발생했고, 이들 중 일부는 금표 지역을 근거지로 두는 도둑이 되었다. 대부분의 간선도로가 막히고 도성과 외방을 잇는 길이 협소해지면서, 도성은 외방 특히 경기로부터 땔감 등의 생활필수품 공급량이 감소했다.
연산군의 금표 설치는 지역과 시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금표 구역을 지정했고, 백성들은 예상치 못한 급격한 삶의 변화를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백성들이 맞이한 삶의 변화는 사회 불안으로 이어져 반정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Yeonsan-gun set up forbidden zones in large areas through Gapjasahwa[甲子士禍], and expelled people. The signs emerged from the beginning of the reign. After the Gapjasahwa, Yeonsan-gun expanded the hunting grounds and established prohibited areas. For this, Yeonsan-gun presented the evidence. The presentation of the basis of the king was a characteristic of Joseon politics.
Meanwhile, the expansion of the Gangmu field[講武場] was a combination of the expansion of the forbidden area of Doseong[都城] and the ban on hunting for hunting. The ban was to increase wildlife, and the expansion of the forbidden zones was to make it clear to people that it was a hunting ground.
Such rapid establishment of prohibited areas caused direct damage and social unrest due to the demolition of houses. This led to support for the Jungjong restoration[中宗反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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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아키히토[明仁] 천황의 '황실외교'에 관한 연구 - 중국 방문을 중심으로

저자 : 이수빈 ( Lee¸ Soo-bin )

발행기관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학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9-26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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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국교정상화 20주년이라는 대의명분하에 '우호 관계 증대와 친선강화'로 진행된 천황의 중국 방문에도 불구하고 중일(中日)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원인을 명확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쇼와[昭和] 천황의 사망 후, 즉위한 아키히토 천황은 쇼와 천황 재위 기간에는 불가능했던 아시아 순방길에 오르게 된다. 아키히토 천황의 1992년 중국 방문은 전후(戰後) 일본 '황실외교'에 있어서 최초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상흔이 지워지지 않은 동북아시아에 첫발을 딛고 '오코토바'를 낭독한 역사적인 순간으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천황의 중국 방문은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로써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과거사 문제의 결착을 보기 위한 일본 정부의 전략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었기 때문에 일본 국내의 신중론과 반대론을 물리치고 추진되었다. 그러나 과거사 결착 없이 중국 인민의 사회적 합의 없이 국제적 고립 타개라는 중국 공산당의 외교 방책 중 하나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양국 간의 과거사 문제는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한계로 인해 천황의 방중의 의의는 퇴색되었다고 볼 수 있다.


Although the Japanese Emperor's 1992 visit to China was meant to signal increased cooperation and intimacy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Japan has yet failed to overcome the age-long antagonism to date. This paper seeks to define the causes of this failure in terms of the fundamental limitations of Emperor Akihito's visit to China in 1992. This observation will, in turn, provide an useful lesson and insight for discussing the Emperor's future visit to Korea.
Upon succeeding the throne, Emperor Akihito embarked on a round of visits to Asian nations. This had been impossible during the reign of his father, Emperor Showa. Akihito's visit to China in 1992 is especially seen as a historical milestone, for it was the first time for the Imperial Family of Japan to take a diplomatic step toward the North Asian countries that had directly suffered from the Asia-Pacific War. Akihito's visits were made possible by shrewd calculation of interests on both sides. The Chinese government, having been internationally isolated ever since the Tiananmen Massacre, sought a way out by approaching Japan. On the Japanese side, it was deemed as a part of a possible diplomatic solution to the past affairs problem resulting from the Asia-Pacific War, so the government pushed on forward. However, the Emperor's visit to China left more to be desired in that it was carried on forward by the Chinese government and without sufficient public consensus. Therefore, it never was, nor could ever be, a fundamental solution to the lingering resentment and animosity between the two people.
In conclusion, as verified through the fact that China and Japan are still in sharp conflict over the 'past affairs' even after the Japanese Emperor's visit to China in 1992, it is clear that the Japanese Emperor's visit to Korea should be conducted only after the final consensus of the 'past affairs' between Korean and Japan governments has been made and the controversy over different perceptions of history has been resolved between two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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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전진교(全眞敎)의 수행과 사회활동에 반영된 근세개혁도교의 일 면모: 초기전진교 문헌을 중심으로

저자 : 최수빈 ( Choi¸ Soo-been )

발행기관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학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7-314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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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초기 전진교(全眞敎)의 금욕적 수행, 평신도 조직을 통한 포교활동, 이타적 사회활동 등에 반영된 종교적 특성을 고찰함으로 써 중국 근세 개혁도교의 고유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북송이후, 근세 도교의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삼교합일적 지향, 대중화 경향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진교는 초세간적인 출가주의를 표방하는 엘리트적 성격의 분파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인상과는 다르게 전진교는 대중에 대한 강한 관심과 사회참여적 지향을 보여준다. 사제(師弟) 관계를 통한 밀의적 전수방법 대신 집단강좌와 교육을 통해 교리와 수행법을 전수하였으며 오회(五會)와 같은 재가신도조직을 결성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개방된 도법(道法)의 전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도(修道)의 길에 입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의례나 주술 대신 경전의 교육과 강의의 방식을 채택한 것은 신도들 스스로가 신앙의 본질에 접근하고 도교적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대승적 보편구원에 대한 전진교의 확고한 신념에 기반 한다. 전진교에서 재가신도는 현세적 문제해결을 위해 주술적 힘을 요구하거나 단순한 선행을 통해 복을 도모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이나 번뇌를 없애고 마음을 청정하게 유지하는 한편 종교적 구원을 위해 윤리적 삶을 선택하는 신앙의 주체로 대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공행쌍수(功行雙修)를 강조하는 전진교에서는 종교적 수행만큼이나 이타적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공익과 대중구제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사회활동도 꺼리지 않았다. 그리고 입세적 사회활동 속에서도 세속적 욕망이나 악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철저한 수행과 '청정(淸靜)', 혹은 '평상심(平常心)의 유지를 강조하였다. 원(元)대 당시 지성인들의 눈에 비친 전진교 도사들의 모습은 청빈하고 금욕적인 동시에 근면하고 헌신적이어서 서구 청교도의 윤리적 생활양식과도 비견된다.
본 논문에서는 초기 전진교의 문헌을 중심으로 도사 및 재가신도들의 수행과 윤리적 실천, 그리고 그것과 성선(成仙)과의 관계에 대한 고유한 사고를 살펴보고 그러한 결과를 낳게 한 전진교의 사상적 맥락-자력적, 보편적 구원관의 확립, 수행자 개인의 주체적, 합리적 자각에 대한 강조 등-에 대해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그 이전, 혹은 당대의 다른 도교 교단이나 분파와 전진교의 차이점과 고유성을 확인하는 한편 근세라고 하는 시대적 조류에 발맞추어 도교가 어떠한 새로운 유형의 종교로 변모하고 있는 지를 고찰하였다.


This paper aims at examining the peculiar religious characteristics of Daoism reflected in the Complete Perfection School(Quanzhen School), one of representative sect in Jin and Yan period of China. Especially this paper focuses on the ethical and altruistic social activities of the early Quanzhen School. Through these considerations, this paper seeks to identify new aspects of Daoism in the 12-13 centuries of China.
The doctrinal core of Quanzhen School can be summed up by the two issues, “Dual Cultivation of Body and Mind(性命雙修)” and “Dual Cultivation of Self and Altruistic Behaviors(功行雙修)”. The latter of the two refers to the balanced practices of both active social participation as the altruistic pursuits and the ascetic self-cultivation of Daoist masters(and adepts) based on monastic life, which are the most representative elements of the School of Complete Perfection. We can find the most unique attribute of Quanzhen School distinctly different from other Daoist sects contemporary or earlier in its awareness of and attitude toward the lay believers. The masters of Quanzhen School seemed to be convinced that the lay believers had potentialities without no difference from them to grasp the profound meaning of doctrines and cultivate themselves for attainment the Dao and so they organized the associations for lay people and held the public lectures to transmit the doctrines and cultivating skills to them.
The paper examines how the religious doctrines of the 'dual cultivation of self and altruistic practices' of the School of Complete Perfection are reconciling conflict objects like as the holy world and the secular world, inner worldly-orientation and other-worldly orientation, while at the same time examining the doctrines and practices for universal salvation of that school. This paper, especially tried to figure out and analyze the ambivalent characteristics of pursuit for ascetic and monastic practices, and enthusiastic participation and altruistic attitude for people of the Quanzhen Scool in the religious and sociological aspects.

KCI등재

10아베 타이잔(阿部泰山)의 12운성(運星) 이론 고찰

저자 : 최정혜 ( Choi¸ Jeong-hea ) , 최정준 ( Choi¸ Jeong-jun )

발행기관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학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5-34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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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본 명리학자 대표인 아베 타이잔(阿部泰山)의 12운성(運星) 이론에 관한 연구로서 12운성 개념(槪念)과 활용(活用) 및 견해(見解)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2운성은 포태법(胞胎法) 혹은 절태법(絶胎法) 이라고 불리면서, 특히 12운성의 12가지 과정은 인생(人生)의 생로병사(生老病死)나 물상(物象)의 생성소멸(生成消滅)과 긴밀한 연관이 있고, 그 구체적 명칭 또한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역학의 발달사 관점에서 12운성은 한대(漢代) 괘기역학(卦氣易學)의 12벽괘(辟卦) 이론이 송대(宋代) 이후 명리서에 등장하면서 그 명칭과 개념이 명리학적으로 재정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표적 명리서인 『연해자평』에서는 12운성을 시결(詩訣) 등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명대(明代)의『명리정종』이나『삼명통회』 그리고 청대(淸代)의 『명리약언』, 『자평진전』, 『적천수천미』에서도 12운성은 줄곧 등장한다.
다만 아베 타이잔은 천간(天干)의 오행(五行)이 12지지(地支)를 만나 순환하는데, 천간 그 자체의 왕쇠(旺衰)를 변별한 것이 12운성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12개의 이름은 차용해서 붙인 것에 불과하며, 본질적으로는 천간의 강약을 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지지는 음양이 일정한 상도(常道)로 순환하기 때문에 길흉(吉凶)은 천간의 동적(動的)인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런 천간지지의 동정(動靜)의 차별성은『자평진전』〈논음양생사(論陰陽生死)〉의 12운성 개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2운성의 명칭을 재정립한 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그가 명리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명리약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가 실제 상담자의 위치에서 12운성의 명칭이 사람들의 심리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그 명칭을 개칭하였다는 점이다.
한편 『삼명통회』의 〈논오행왕상휴수사병기생십이궁(論五行旺相休囚死並寄生十二宮)〉에서 말한 12운성의 선악(善惡)을 세 종류로 분류한 사귀(四貴), 사평(四平), 사기(四忌)는 사주 천간의 왕쇠를 찾기 위한 것이며, 이에 12운성이 생왕(生旺)해서 반드시 길(吉)이고, 휴수사절(休囚死絶)해서 나쁜 것이 아니므로 12운성 이름에 메여서는 안 된다는 부분을 그대로 수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12운성의 네 가지 활용법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명리고전의 월지(月支) 중심 사고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각 명리고전에 내재되어 있는 12운성의 활용방법을 종합하고 통합하여 유기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현재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활용 변통되고 있는 12운성은 아베 타이잔과 상호 영향관계성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토(土)의 동궁설(同宮說)과 관련해 볼 때, 아베 타이잔은 오행역(五行易) 및 육임신과(六壬神課)의 장생(長生)은 수토(水土)를 쓰는 반면, 사람은 태양과 함께 운명을 논하니 명리에서는 '화토동궁설(火土同宮說)'을 쓴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명리학 고전을 통합적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기 나름대로의 상담방편으로서의 개칭을 시도한 아베 타이잔의 명리이론에 관한 고찰은 일본명리를 살펴보기 위한 기초연구로서의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theory of the 12-Unseong(運星) of Abe Taizan(阿部泰山), the representative of the Japanese Myeongli(命理) scholar, and intends to examine the concept, use, and views of the 12-Unseong(運星). 12-Unseong is called Potaebeop(胞胎法) or Jeoltaebeop(絶胎法), and in particular, the 12 processes of 12-Unseong are closely related to the birth(生), the age(老), the sickness(病), the death of life(死), and the creation and annihilation of objects, and their specific names also appear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times. Specifically, from the perspective of developmental history of The Changes(易學), it is reasonable to view the 12-Unseong as the name and concept of gwaesang- science of changes(卦氣易學) that were re-established myungriologically as the theory of 12-Byeokgwae(辟卦) of the Han-Dynasty(漢代) appeared in Myeongri book after the Song-Dynasty(宋代).
In 『Yeonhae Japyeong(淵海子平)』, which is a representative myeongri book, the 12-Unseong is explained in detail. Also『Myeongri Jeongjong(命理正宗)』 and 『Sammyeong Tonghoe(三命通會)』 in Ming-Dynasty(明代), and 『Myeongri Yakwon(命理約言)』, 『Japyeongjinjeon(子平眞詮)』, 『jeokcheonsucheonmi(適天髓闡微)』 in the Qing-Dynasty(淸代), the 12-Unseong appears all the time. However, it can be seen that Taizan Abe thinks that 12-Unseong circulate the ohaeng(五行) of the cheongan(天干) meet the 12 jiji(地支), and cheongan(天干) itself's wangsoe(旺衰) is different.
In other words, the 12 names are merely borrowed, and they are essentially understood to show the strength and weakness of cheongan(天干). And because Jiji(地支) is yin-yang(陰陽) cycle through a constant phase, it is thought that the Gilhyung(吉凶) comes from the dynamics of cheongan(天干). This distinction of cheongan(天干) and Jiji(地支) can be seen to be influenced by the by the concept of 12-Unsoung in『Japyeongjinjeon(子平眞詮)』' < Noneumyangsaengsa(論陰陽生死) >. Also, two meanings are implied in relation to the re-establishment of the name of 12-Unseong. One is that he was greatly influenced by 『Myeongri Yakwon(命理約言)』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history of Myeongri. Another is that he renamed the name considering the impact of the name 12 on the psychology of people when he sees the actual counselor's position.
On the other hand, it can be seen that the part mentioned in < lonohaengwangsanghyususabyeong-gisaengsib-igung(論五行旺相休囚死並寄生十二宮) > of 『Sammyeong Tonghoe(三命通會)』, Sagi(四貴), Sapyeong(四平), and Sagi(四忌) classified into the good and evil(善惡) of the 12-Unseong are in order to find the Saju(四柱) of cheongan(天干)' wangsoe(旺衰). The 12-unseong are always not Gil(吉) because they are Wangsaeng(生旺) and always not bad(凶) because they are Hyususajeol(休囚死絶). Therefore it can be seen that it accepted that should not be tied to the name, 12-Unseong.
In addition, there are the following characteristics in relation to the four ways of using the 12-Unseong. First, it inherits the Wolji(月支) centered thinking of the Myeong-classic. Second, it is that it organically used the method of use of the 12-unseong contained in each Myeong-classic by combining and synthesizing it. Third, it can be seen that the influence of Taizan Abe, which is currently widely used in Korea, is significant. Furthermore, in relation to the Tou(土)' Donggung theory(同宮說), Taizan Abe asserts that the ohaeng-yeog(五行易) and the longevity of yug-imsingwa(六壬神課) use water and soil(水土), whereas People discuss fate with the sun, so in Myeongri, 'Hwato-donggung theory(火土同宮說))' is used.
Therefore, as can be seen from this review of Abe Taizan's theory of myeongri, As he accepted the classics of Chinese Myongri in an integrated way and at the same time tried to change the name as a counselor in his own way, I think that it will have meaning as a basic study to examine JapaneseMyeungri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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