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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병, 죽음: 삶의 난관 앞에 선 실학자들

Povety, Illness and Death : Silhak scholars` practice on the trouble of life

김선희 ( Seon Hee Kim )
  • : 한국실학학회
  • : 한국실학연구 26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3년 12월
  • : 121-167(47pages)
한국실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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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의 지적 전통의 내부로 진입하는 한 방법으로 개인과 그의 삶의 공동체 내에서의 실천과 지향을 파악하는 경로를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논문에서는 실제 생활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가난, 병, 죽음 등 누구나 실존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삶의 난관에 맞서 성호학파가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실천을 모색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유학에서 가난과 그에 따른 검소한 삶은 자기 수양과 학문 그리고 도덕적 완성의 토대로 여겨져 왔다. 공자 이래로 유학자들에게 검약은 단순히 생계유지나 운영의 방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원리이자 가치적 지향을 담은 세계관의 문제였다. 병과 죽음 역시 인간적 감정의 차원에 매몰될 수 없는 이념적 지향과 관련된다. 성호는 특히 검약의 강조와 더불어 사치를 비판하는 데 이 두 가지 긴장은 결국 이들이 바라던 공적 세계상과 연관된다. 성호학파에게 검약의 실천은 공적 정치 영역으로 갈 수 없었던 이들이 생활 속에서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성호학파들은 이런 지향 속에 실질적인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삶의 자원을 노동으로부터 해결하고자 한다. 불필요한 사치가 없고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수탈이 없다면 각자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만으로도 천하가 안정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이들에게 노동의 강조는 자원과 지위가 없는 사회 구성원들이 자립하며 삶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일종의 공적 가치 실현의 방법이었다. 이들은 삶에 필요한 자원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가정과 가문을 유지하고, 죽음의 의례에 들어가는 비용과 절차를 줄임으로써 검약을 통해 생활에서 공적 가치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상례(喪禮) 역시 한 개인, 한 집안의 검약이 사회 전체에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성호 학파의 경계와 비판과 연결된다. 이들에게 신후의 준비는 예의 차원을 넘어서 사적 차원에서 실현하는 공의 이념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검약의 원리로 사회 제도를 구축할 뿐 아니라 가정 생활을 영위하고, 죽음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삶이 공적 세계에서 기대되는 올바른 삶의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가족이라는 삶의 공동체가 겪는 실존적 조건으로서의 가난, 병, 죽음의 문제를 통해 성호학파가 꿈꾸었던 올바른 세계에 대한 이념과 실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This paper suggests a way of understanding Joseon`s intellectual tradition, which is a path of perceiving one`s practice and orientation in his community. It focuses on the subject of poverty, illness and death occurring in life-world, namely, in one`s community including their family, relatives and writers. And it covers how Seongho school responded to those trouble of life and what kinds of practices they sought for. By traditions of Confucianism, poverty and thrifty living had been regarded as a foundation of self-discipline, one`s learning and moral life. For confucianism philosophers, the frugalness is not merely a way to make a living but a view of the world including value orientation. Illness and death also concerns ideological orientation, not restricting to humane emotions. Especially Seongho school stressed practicing thrifty and criticized extravagant spending, which connected with a picture of the public world that they hoped. For them, who couldn`t make their ways into public post, the practicing thrifty is a way of practicing the public value in their daily life. They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labor and tried to obtain necessaries of life by the products of labor. No dispensable extravagance, no plundering of the products of labor, they believed that only labor for sustentation could stabilize the whole country. The emphasis on labor is a way for realizing the public value that stabilize the livelihoods of social members who had no social resources. They maintained pedigree minimizing necessaries of life and reducing funeral expenses. Funeral rites also concerns Seongho school`s criticism on how individual frugalness are connected with total society. By the principle of frugalness, they hoped to construct the social system, to manage domestic life, and to prepare for death, because a frugal life was the way of life to be expected right life-style in public world. This study focuses on the subject of poverty, illness and death to consider Seongho school`s ideas and practices on right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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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14-100-002069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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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598-0928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9-2021
  • :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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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권0호(2021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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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실학담론의 재구성과 양득중의 실사구시론

저자 : 김태희 ( Kim Tae-heui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4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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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담론은 역사적 소산이다. 근대주의와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실학담론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종래 실학으로 파악했던 내용을 세 가지 명제로 재구성해 보았다.
첫째 道器不相離論. 道와 器(또는 修己와 治人)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보완 관계라는 생각이다. 그동안 '경세치용론'과 '이용후생론'의 기술개발, 제도개혁, 민생개선 주장에 주목해왔다. 이것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는 물질적인 부분만 강조할 수는 없다. 정신과 물질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해야 한다.
둘째 華夷一也論. 모든 공동체와 문명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관점이다. 그동안 탈중국중심주의 경향과 북학론 등을 실학으로 파악해왔다. 주체성의 강조가 자칫 자폐에 빠질 수 있고, 보편성 추구가 자칫 종속으로 흐를 수 있다. 양 편향을 극복하고, 세계의 보편성과 주체의 고유성을 조화롭게 결합해야 한다. 이것은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프레임 자체를 극복한 '華夷一' 사상에서 출발해야 한다.
셋째 實事求是論. 진리와 실천의 준거를 實心과 實事에서 찾는 자세 또는 作風이다. 실사구시의 의미는 덕촌 양득중의 실사구시론에서 구해야 한다. 덕촌은 '실사구시'의 제창과 함께, 『반계수록』을 추천함으로써 실학의 역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본고는 새로운 실학담론 논의에 일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논의에는 法古創新의 정신이 필요하다.


Silhak discourse is a historical product. Silhak discourse oriented towards modernism and nationalism has now reached its limit. I have reconstructed the contents that had been grasped as Silhak into three propositions.
The first is 'Dogi Inseparability Theory(道器不相離論)'. It is the idea is that Do[道] and Gi[器](or Sugi[修己] and Chiin[治人]) are complementary to each other. In the meantime, we have been paying attention to the claims of technology development, institutional reform, and improvement of people's livelihoods in 'Gyeongsechiyong Theory(經世致用論)' and 'Iyonghusaeng Theory[利用厚生論]'. This is still important, but now we can't just focus on material things. We must seek harmony and balance between the spiritual and the material.
The second is 'Civilization and Barbarian's Equality Theory(Hwaiilya Theory(華夷一也論))'. It is the viewpoint that all communities and civilizations have equal values. In the meantime, we have grasped the De-Sinocentrism(脫-中華主義) tendency and the 'Bukhak Theory(北學論)' as Silhak. The emphasis on subjectivity could fall into autism, and the pursuit of universality could lead to subordination. We must overcome both biases and harmonize the universality of the world with the uniqueness of the subject. This should start with the idea of 'Hwaiil(華夷一)' that overcomes the frame itself that separates civilization from barbarism.
The third is 'Silsagusi Theory(實事求是論)'. 'Silsagusi' is an attitude or style that seeks the basis of truth and practice in sincerity and reality. The meaning of 'Silsagusi' should be drawn from the argument of Yang Deuk-joong(梁得中). He made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the history of Silhak by recommending < Bangyesurok(磻溪隨錄) > along with the proposition of 'Silsagusi'.
This paper is intended to contribute to the discussion of a new Silhak discourse. This discussion requires the spirit of 'Beopgochangshin(法古創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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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예학(禮學)과 『상체편람(常體便覽)』

저자 : 김윤정 ( Kim Yun-jung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3-8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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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직은 망국의 시기에 강학과 간행사업을 통해 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데 주목한 지식인이었다. 허전의 제자로서 『사의』 간행에 참여하고 『상체편람』을 저술하는 등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집성과 고증의 방식을 통해 허전 심의설의 특징과 정당성을 드러내는 「심의고증」을 저술했다. 그는 허전의 예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실천했지만, 다른 예설에 대한 배척이 아닌 통합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유학자들의 분열을 원치 않았던 노상직의 학문 경향을 토대로, 예학은 논쟁의 대상이기보다는 지켜야 할 가치로서 인식되었을 것이다.
노상직의 예서인 『상체편람』은 變節보다 예의 기본인 常體를 강조하는 행례서로서, 복잡다단한 예설 논쟁보다는 예의 근본을 지키는 것이 더 필요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상체편람』은 55개의 의절로 구성되었는데, 집안에서 날마다 행하는 관혼상제 중심의 가례 관련 의절이 51개에 해당된다. 『가례』의 내용을 행례 단위로 의절화하면서, 『사의』의 書式과 祝文을 보충하였다. 사당제도와 오복제도 등은 과감하게 생략했고, 필요할 경우 『가례』에 없는 별도의 조목을 추가하기도 했다. 『사의』의 예설을 중심으로, 「청기의」를 보충하고 「조석곡전」을 하나의 의절로 마련했다. 그러나 「기제의」의 考妣並祭와 「묘제의」의 親盡墓祭 문제에서는 자신의 예설을 드러내기도 했다.
『상체편람』은 가례뿐만 아니라 서당의 의례를 함께 수록함으로써 서당 중심의 예교에 주목했다. 「향음주의」와 「사상견의」는 서당의 행례에 맞게 변용되었고, 유교적 제향을 위한 「창주정사석채의」와 「문묘석전의」는 서당의 문생들이 지켜야할 지식으로 인식되었다. 망국의 시기에, 서당은 유학의 예교를 실천하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고, 노상직은 서당의 예교를 통해 유학자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Sonul Noh Sang-jik was an intellectual who focused on inheriting the tradition of studying abroad through lectures and publication projects during the period of his ruin. As a disciple of Heo Jeon, he was well versed in ritual study, participating in the publication of Saeui and writing Sangchepyunram. Through the method of aggregation and examination, he wrote Simeuigojeung which reveals the characteristics and merits of false examination theory. He practiced Heo Jeon's ritual theory and tried to verify its legitimacy through a Bibliographical Study, but did not mention them as controversial subjects. During the chaotic period of the country, Noh Sang-jik's academic tendency, which did not want to divide Confucian scholars, was reflected, and ritual study was recognized as a value to protect rather than as a subject of controversy.
Sangchepyunram emphasizes the basics of riual rather than the transformation, and it reflected the changes in the times when it was more necessary to keep the basics of ritual than the complex debate. Sangchepyunram consisted of 55 Protocols, 51 of them were about the family rituals. The contents of Family Rituals were made on a ritual basis, supplementing the forms and written prayer of Saeui. Sangchepyunram focused on the Confucianism centered on the Seodang by incorporating not only the cases but also the rituals of the Seodang. The Seodang was recognized as the last bastion of Confucianism, and Noh Sang-jik maintained his social role as a Confucian scholar until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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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의 『전례유집(全禮類輯)』과 예설 교류

저자 : 남재주 ( Nam Jae-ju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3-11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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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堂 柳疇睦은 경상북도 尙州에서 활동하면서 退溪學派의 西厓學統을 계승한 학자이다. 그는 300여 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하였고 학술 진흥, 특히 禮學 분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가 편찬한 『全禮類輯』은 家禮와 邦禮를 전체적으로 아우른 禮書로, 조선시대 예학 저술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면밀한 것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는 官撰이 아니라 한 개인의 학문적 열정으로 편찬한 私撰 '예설 종합서'로 그의 사후에 제자들과 지역 유림의 협조로 최종 정리되었다. 그가 가례뿐만 아니라 방례까지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결과물을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西厓 柳成龍과 洛波 柳厚祚 등으로 이어져 家學전통으로 자리매김한 '世臣之義'의 가르침을 출처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였던 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편, 류주목의 제자로서 近畿南人 性齋 許傳의 제자 명단에 함께 수록된 인물이 20명에 이를 정도로 많다. 특히 『전례유집』에 수록된 '師服' 조목은 영남남인 東巖 柳長源의 『常變通攷』 자료를 기초로 하여 편찬하였는데, 류주목의 제자이자 허전의 제자인 克齋 盧佖淵의 아들 小訥 盧相稷이 「師服考」라는 저술에서 이들 자료를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경상북도 상주 중심의 류주목 제자와 경상남도 중심의 허전 제자 간에 학술적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Ryu Ju-mok was a scholar who succeeded Seoae Studies(西厓學) among the Toegye School(退溪學派) and was active in Sangju(尙州) Gyeongsangbuk-do(慶尙北道). He produced more than 300 disciples and contributed greatly to the promotion of Yehak(禮學). In particular, he compiled the 『JeonRyeYooJip(全禮類輯)』 by incorporating the custom of the family and the rites of the country, and this book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extensive and detailed among the Joseon Dynasty's ritual books. The reason he was able to make excellent results by studying the rites of the family and the state is because the teachings of Sesinjiui(世臣之義) have been handed down to the traditional theory of the family from Ryu Seong-ryong(柳成龍) and Ryu Hu-jo(柳厚祚).
By the way, among the disciples of Ryu-jumok there are 20 people whose names were recorded on the list of Heo Jeon(許傳)'s disciples, Noh Pil-yeon(盧佖淵) was one of them. And Noh-Pilyeon's son Noh Sang-jik(盧相稷) wrote Sabokgo(師服考) which inherited theory of 『JeonRyeYooJip』's Sabok(師服). Based on the fact that the theory of 『JeonRyeYooJip』's Sabok began with 『SangbyeonTonggo(常變通攷)』, we can see that there was active academic exchange and communication between the disciples of Ryu ju-mok in Sangju Gyeongsangbuk-do and Heo jeon in Gyeongsangnam-do(慶尙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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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의(士儀)』의 체제와 예설의 학파적 성격

저자 : 이봉규 ( Lee Bong-kyoo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7-14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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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이 편성하였던 『사의』의 체제는 1870년에 간행된 목활자본에서 알 수 있다. 허전 사후 1909년에 간행된 목판본 『사의』는 제자와 영남 지역의 유학자들이 함께 활자본에 교정을 가하고 체제를 일부 새로 편성한 것이다. 그러나 목판본은 활자본 이후 허전과 제자들에 의해 가해진 수정을 일부만 반영하였다. 따라서 향후 『사의』의 정본을 편찬할 경우, 두주와 노필연의 「士儀考誤增註」 등을 교감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조선에서 편찬되는 가례서는 『가례』의 체제를 따르는 유형과, 독자적으로 의절을 수립하고 주석을 부가하는 유형으로 구분된다. 후자의 방식은 이익의 『星湖禮式』에서 시작되었고, 정약용의 『四禮家式』으로 이어졌다. 허전의 『사의』는 고례와 『가례』를 중심으로 의절을 세우고 독자적으로 주석을 부가하면서, 변례와 상관되는 쟁점에 대해서 “辨疑”의 항목을 두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허전은 사의도(106도)로 가례도(31도)를 대체하였고, 부고전 告廟, 成殯, 계후자에 대한 상복 등 『가례』에 없거나 『가례』와 다른 규정을 의절에 새로 추가하였다. 『사의』는 성호학파의 예학 전통을 계승하면서 당대 중국과 한국에서 논의된 예설까지 수렴하여 서민의 수준에서 가례를 실행할 수 있게 편성한 독자적인 가례서이다. 허전은 예설에서 『星湖禮說類編』의 설을 주로 계승하면서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견해들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였다. 正體를 후계자가 아닌 부친과 조부에게 해당한다는 것, 적자가 생존해 있으면 적손의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조모나 모친이 생존해 있을 때 승중손의 처가 시조부에 대하여 중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성호학파의 관점을 수렴하여 제시한 것이다. 반면, 입후한 뒤의 승계에서 계후자의 지위를 우선시하고, 환종을 반대한 것은 이이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다. 또한 계후자의 상복을 의복이 아닌 正服으로 규정하면서 이익, 이상정, 권상하, 한원진, 이재 등의 견해를 원용하였다. 허전은 정약용의 『상례사전』의 견해도 선택적으로 수용하였다.


The original composition of Shiyi organized by Heo Jeon can be seen in the printed book published in 1870. The woodblock edition was published in 1909 by disciples who gave a proofreading and organized some new compositions. However, the woodblock copy only partially reflected the revisions of Heo and his disciples. Therefore, if the definitive edition of Shiyi is compiled in the future, it is necessary to reflect the Shiyi-Kaowu-Zengzhu(士儀考誤增註) of Noh Pil-yeon and the other documents of proofreading.
Books of family rituals, compiled in Joseon, is divided into two types: following the system of Jiali, and establishing and annotating rituals independently. The latter method began with Yi Ik's Xinghulishi(星湖禮式), followed by Jeong Yak-yong's Silijiashi(四禮家式). Heo Jeon established main items of ritual centered around the ancient rites and Jiali and independently annotated it, presenting his views on issues related to the variant li with a “Bianyi(辨疑, Argument on Variant Cases)” item. He replaced Diagram of Jiali(31) with Diagram of Shiyi(106), and added new regulations to the rite, such as ritual to report to the shrine, and morgue installation. The Shiyi is an independent book of family rituals, in which Heo Jeon succeeded the tradition of the Seongho School and discussed releated arguments in China and Korea at that time to practice the ritual at the level of ordinary people. He inherited the opinions of Xinghu-lishuo-leibian(星湖禮說類編) in relation to rituals, selectively accepting the views of the Kiho School and the Yeongnam School. The opinions that “zhengti(正體)” corresponds to the father and grandfather not to the heir, the concept of legal posterity does not exist if the eldest son is alive, and wife of the legal posterity does not three-year mourning to the grandfather when the grandmother or mother is alive, were presented on the tradition of Seongho School. On the other hand, it was Yi Yi's view that after his adopted son was established as his successor, he prioritized the status of successor in succession and opposed the dissolution of adoption. In addition, Yi Ik, Lee Sang-jeong, Kwon Sang-ha, Han Won-jin, and Lee Jae-yi's views were adopted by defining the adopted son's mourning as the one by kinship rather than by duty. Heo Jeon also optionally accepted Jeong Yak-yong's view of Sanglisi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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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의 『상변통고(常變通攷)』가 조선후기 예학사(禮學史)에 끼친 영향

저자 : 정길연 ( Jeong Gil-yeon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9-18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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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세기 영남의 예학자 동암 류장원의 『상변통고』가 조선 후기 예학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고찰하였다. 『상변통고』는 처음 기획부터 주자의 『가례』를 표본으로 삼고, 그리고 『의례경전통해』의 방대함을 겸하는 것이 그 편찬 목적이었다. 이 책의 방대하고 면밀한 고증면에서는 영남의 예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방대한 『상변통고』는 나름의 문제도 안고 있었다. 그것은 방대함이 주는 불편함이었다. 이로 인해 素隱 柳炳文, 定齋 柳致明, 近庵 柳致德 등은 『상변통고』의 이러한 문제들을 보완하기 위해 각각 예서를 편찬하였다. 또한 『상변통고』는 영남 학자들은 물론이고 기호학파의 학자들에게까지 고증서로서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상변통고』를 참고한 학자들 중에는 서울의 性齋 許傳과 芸窓 朴性陽, 경기도 과천의 果齋 成近默, 충청도 보령의 肅齋 趙秉悳, 전라도 전주의 艮齋 田愚, 경주의 立軒 韓運聖 등 그 범위가 전국에 걸쳐있다. 이들 학자들은 모두 방대한 자료를 수록한 『상변통고』를 통해 의심스러운 禮說을 살피고 논단했다. 뿐만아니라 『상변통고』를 숙독한 나머지 그 미비점을 지적하는 데 까지 이르렀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was to inspect how 『Sangbyeon Tonggo(常變通攷)』 by Dongam(東巖) Ryu Jang-won(柳長源), a 18th-century scholar of Yeongnam region who academically specialized in rituals, affected the history of ritual studies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When first planned to be compiled, 『Sangbyeon Tonggo(상변통고)』 aimed to put itself out as an alternative literature to Zhu Xi's huge collection of ritual theories, 『Euirye Gyeongjeon Tonghae(儀禮經傳通解)』 while being fundamentally based on the Chinese Confucian scholar's 『Garye(家禮)』. After『Sangbyeon Tonggo(상변통고)』 was published, all of the then ritual scholars who were active in Yeongman region agreed that the book was really full-fledged and meticulously bibliographical. However, there was some limitation that 『Sangbyeon Tonggo(상변통고)』 had. It was that the literature is too much in content to be dealt with conveniently. To solve or reduce this problem, Soeun(素隱) Ryu Byeong-mun(柳炳文), Jeongjae(定齋) Ryu Chi-myeong(柳致明), and Geunam(近庵) Ryu Chi-deok(柳致德) respectively wrote and put out books about rituals. 『Sangbyeon Tonggo(상변통고)』 was a highly reputed bibliographic evidence for not only scholars of Yeongnam region, but also those of other regions, especially the Kiho School scholars.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there were many scholars across the country who often made references to 『Sangbyeon Tonggo』. Among them were Seongjae(性齋) Heo Jeon(許傳) and Unchang(芸窓) Park Seong-yang(朴性陽) in Seoul, Gwajae(果齋) Seong Geun-muk(成近默) in Gwacheon, Gyeonggi province, Sukjae(肅齋) Jo Byeong-deok(趙秉悳) in Boryeong, Chungcheong province, Ganjae(艮齋) Jeon Woo(田愚) in Jeonju, Jeolla province and Yipheon(立軒) Han Woon-seong(韓運聖) in Gyeongju. For those scholars, 『Sangbyeon Tonggo(상변통고)』 was a huge basis on which they discussed, pondered or judged ritual theories that they thought were doubtful. Meanwhile, they reviewed the book thoroughly, so they even could point out seemingly incomplete parts from the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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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성재(性齋) 허전(許傳)의 상복(喪服) 연구

저자 : 차서연 ( Cha Seo-yeon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9-22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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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의 애통한 심정을 표상하는 복식인 喪服에 대한 性齋 許傳의 해석을 고찰한 것이다. 성재는 옛 복식의 제도 중 후세까지 전해진 것은 深衣와 상복이고, 두 옷은 上衣와 下裳의 분리 여부만이 다를 뿐 전체적인 제도는 같다고 전제한다. 상복의 제도를 규정한 『儀禮』 「喪服」과 심의의 제도를 규정한 『禮記』 「玉藻」와 「深衣」는 상호 보완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는 성재의 해석적 입장은 그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古禮를 기준으로 상복의 제도를 복원한 성재는 이를 그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고례를 그대로 따르기 힘들 경우 『家禮』의 규정을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고례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당시 조선에서 행해지던 시속을 적극 반영하였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는 대체품을 사용하도록 제시하면서, 무엇보다도 애통해하는 마음의 표상이라는 상복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형편에 맞추어 검소하게 마련할 것을 강조한다.
성재가 고례와 『가례』 그리고 조선의 시속까지 반영하여 상복의 형태를 논증하되 절검까지 고려하여 시행하도록 제안한 것은 상복의 의례적인 상징성과 실제적인 기능성을 회복해 상례의 수행 가능성을 높이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상복이 가장 오래된 유교적 복식의 하나이고 애통한 심정을 표상하는 의례복이며 상례를 치르는 오랜 기간 실제로 입고 생활하는 일상복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 복식으로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This paper is a study on Seongjae Heojeon(性齋許傳)'s interpretation of mourning as a dress code representing grief-stricken sorrow of a man who lost his loved one. Seongjae presupposes that the old clothing systems passed down to posterity are Simui(深衣) and mourning, which have the same overall design with only a difference in separation of top (上衣) from bottoms (下裳). Seongjae's interpretative position is that 'Sangbok(喪服)' in Uirye(儀禮) defining mourning clothes system and 'Okjo(玉藻)' and 'Simui (深衣)' in Yegi (禮記) defining Simui system are complementary.
Seongjae, who restored the mourning clothes system based on Old Manners (古禮) did not insist that this must be enforced as it was. He utilized the regulations in the Garye(家禮) selectively if it was difficult to follow the Old Manners and actively reflected the customs of Joseon Dynasty as long as it's not against the Old Manners. He stressed the spirituality of mourning as a manifestation of grieving heart and suggested to prepare the costume frugally depending the circumstances, recommending to use alternative items if there were materials difficult to obtain.
Seongjae's proposal to enforce the mourning clothes system by considering the Old Manners, Garye, and customs of Joseon Dynasty, shape of mourning dress up to frugality contains purpose to improve the practice of funeral rites by recovering the ceremonial symbolism and practical functionality of mourning. It's because mourning is one of the longest Confucian dresses and a dress code that simultaneously implies both a ceremonial costume representing grief-stricken heart and an everyday dress that is worn actually for a long time while holding a funeral 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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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의 예학(禮學)

저자 : 한재훈 ( Han Jae-hoon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9-25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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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堂 李南珪(1855∼1907)의 禮學은 조선시대 예학의 마지막 장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예학은 지속적인 연구의 축적과 함께 시기별로 특징적 진전을 이루었으며, 수당의 예학은 이와 같은 성취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중에서도 이러한 진전을 주도했던 인물로서 수당의 예학에 지속적으로 소환되는 인물은 退溪 李滉(1501∼1570)과 沙溪 金長生(1548∼1631) 그리고 星湖 李瀷(1681∼1763)이다. 특히 수당의 예학이 퇴계와 사계에 연결되는 통로는 성호였다. 성호는 일찍이 퇴계의 예학을 『李先生禮說類編』으로 정리했고, 사계의 예학에 대해서는 疑禮問解辨疑를 통해 폭넓게 변증한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수당이 성호의 예학을 묵수하거나 답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讀書劄記 형식의 여러 저술을 통해 성호 예학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수당의 문집이 남아서 전하기는 하지만, 日兵에 의해 1907년 아들(李忠求)과 함께 순국한 정황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저술이 충분히 수습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런 추측은 그의 예학 관련 자료 역시 현재 전하는 것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이어진다. 본 논문은 남아 있는 자료들 중에서 「讀星湖疑禮問解辨疑」와 「爲妻無練說」 그리고 「讀星湖禮說」을 중심으로 수당의 예학을 검토했다. 검토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수당의 예학은 기본적으로 성호 예학의 자장 내에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호를 통해 퇴계와 사계의 예학까지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성호의 예학을 그저 묵수하거나 답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냉정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성호가 비판적으로 극복하려고 했던 사계를 옹호하고 성호를 비판하는 면까지 보여주었다. 이는 수당의 예학적 특성이 성호의 예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


Yi Nam Gyu's study on li appears in the final scene of study on li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other words, study on li during the Joseon Dynasty made characteristic progress by period with the accumulation of continuous research, and Yi Nam-gyu's study on li of allowances developed on this achievement. His study on li was greatly influenced by Yi Hwang, Kim Jang Saeng, and Yi Ik. In particular, Yi Ik served as the basis for his research to connect Yi Hwang and Kim Jang Saeng. Furthermore, his study on li was basically formed within the magnetic field of Yi Ik's study on li. As such, it is true that his study on li has been absolutely influenced by Yi Ik, but that does not mean that he has only ignored or followed Yi Ik's study on li. At times, he criticized Yi Ik's claims, and even criticized Yi Ik, defending Kim Jang Saeng, whom Yi Ik criticized. His intention to conduct this type of research was to develop Yi Ik's study on li crit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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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지역학 저변으로 바라 본 덕촌 양득중 - 남겨진 유적 현황과 과제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승대 ( Kim Seung-dae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9-30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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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 양득중은 조선후기 실학과 양명학에 있어서 매우 비중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의 삶과 사상을 조망하고 그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위해서는 지역학적 차원에서의 체계적인 접근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현존하는 그의 문집인 『덕촌집』 이외에 관련 저작물의 집적화와 최근 발굴된 고문서의 번역작업이 필요하다. 아울러 덕촌의 생장과 활동, 추숭 관련 유적에 대한 면밀한 지역학적 차원의 연구가 요망된다. 특히 그 대상지역으로 해남 영신리, 영암 구림, 화순 일원, 보성 박실, 공주 덕촌, 노성 유봉, 부안 일원 등이 주목된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으로서의 덕촌 양득중에 대한 실학자 연구를 넘어서 당대 학맥과 인물 교유, 문화콘텐츠화 등에 대한 '한국실학', '호남실학' 차원의 외연 확장이라 여겨진다. 실례로 해남 영신리의 '실사구시 마을' 조성, 영암 구림의 아천 박태초 연구, 공주 덕촌과 명재 윤증의 학맥 조사, 덕촌과 부안의 반계 유형원 연구 등을 들 수 있다.


Deokchon(德村) Yang Deuk-jung(梁得中) is considered to be a very meaningful figure in the late Joseon Period in Shilhak(實學) and Yang-ming Studies(陽明學). However, it is believed that a systematic approach at the regional studies level should precede the view of his life and ideas and the extensive study of them.
To this end, in addition to his literary collection, 『Deokchonjib(德村集)』, his collection of related works and translation work on the recently excavated archaic documents of Deokchon(德村) should be preceded. In addition, a close regional study of Deokchon(德村)'s hometown, the area of his activities, and the remains left in his memory is needed. In particular, the target areas include Haenam Yeongsin-ri, Yeongam Gurim, Hwasun, Boseong Baksil, Gongju Deokchon, Noseong Yubong, and Buan.
This is not just a survey of Deokchon(德村) Yang Deuk-jung(梁得中) as an individual. In terms of 'Hankook Silhak(韓國實學)' and 'Honam Silhak(湖南實學)' it is necessary to expand the extracurricular activities where various measures such as academic relationships, exchanges between characters, and cultural content are derived. For example, the creation of a 'Silsagusi(實事求是)' village in Yeongsin-ri, Haenam-gun and the study of Acheon(鵝川) Park Tae-cho(朴泰初) in Gurim, Yeongam-gun were also included. It is also necessary to investigate the personal relationship between Deokchon and his teacher, Myeongjae(明齋) Yeun Jeung(尹拯). In addition, this includes research on the relationship between Bangue(磻溪) Yu Hyeong-won(柳馨遠) and Deokchon(德村) who lived in Buan-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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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덕촌 양득중 초상의 제작과 봉안

저자 : 이경화 ( Lee Kyung-hwa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1-3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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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村 梁得中(1665∼1742)은 英祖(재위 1724∼1776)에게 『磻溪隧錄』의 진강을 건의하고 實事求是의 개념을 전하여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양명학과 실학적 소양을 겸비한 尹拯(1629∼1714)의 문인이었으며 영조의 신임을 받는 소론계 학자관료이기도 하였다. 1864년 영암의 사림들은 그의 고향 영암에 영당을 건립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현재까지도 덕촌 영당은 양득중의 영정을 배향하며 선조와 후손들이 조우하는 공간으로서 운영되고 있다. 본 연구는 덕촌 영당 및 영정과 관련된 현존 자료를 취합하고 영당의 건립과 영정의 봉안 과정을 살피고자 하였다. 아울러 초상의 회화적 면모를 검토하고 관련 의문점을 논의하였다.
초상 속에서 양득중은 심의에 복건을 착용하였으며 무릎을 꿇고 공수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가 착용한 심의복건은 본래 朱子(1130∼1200) 초상의 의상이었다. 심의복건은 宋時烈(1607∼1689) 초상에 선택된 이후 서인-노소론계 문인의 초상에서 빈번하게 재현된 의상으로서 유학자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圖像이기도 하였다. 양득중 초상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특징은 跪坐와 拱手, 즉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주잡은 경건하고 신중한 태도일 것이다. 예의를 갖춘 유학자의 자세인 궤좌는 조선 초상화에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도상으로서 무엇보다 그의 스승 윤증의 초상을 특징짓는 자세였다. 스승 윤증의 도상을 차용함으로서 양득중은 윤증의 학문적·정치적 계승자로서의 의지를 표상한 것으로 이해된다.
양득중의 영당과 영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고려해야 하는 요소는 이들이 제작 당시 원형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영당과 영정은 그간에 보수와 재제작을 통해 변형이 더해진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덕촌 영정에서 관찰되는 비전통적인 표현 요소는 이것이 근대의 이모본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문중에는 1910년 근대 초상화의 거장 蔡龍臣(1850∼1941)을 초청하여 초상을 다시 제작하였다는 이모 이력이 구전되고 있다. 그러나 초상의 회화적 면모는 채용신의 필치와 상이하며 오히려 당시 전남 지역에서 활약한 지역 화가의 화풍과 긴밀한 관계를 보인다. 이러한 결과는 양득중의 경우에 한정하지 않고 근대기 지방에서 활동한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필요함을 의미할 것이다. 향후에 지속적인 고찰을 통해 양득중 영정 이모의 실재가 분명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이 초상이 지닌 의의를 더욱 분명하게 도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Yang Deukjung(梁得中, 1665∼1742, sobriquet Deokchon '德村') is regarded as a pioneer of Silhak(實學), the reformative intellectual movement rising during the late Joseon Korea, who as an official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governance to be grounded in reality to King Yeongjo(r. 1724∼1776). He was a disciple of Yun Jeung(尹拯, 1629∼1714) as a leading scholar of Soron(少論: young learning) faction, and had a profound knowledge of both aspects of Yangmingism(陽明學) and Silhak. In 1864, the heir of Soron wanted to commemorate Yang's remarkable achievements by building the portrait hall at Yeongam(靈巖) in Jeolla(全羅) province, which the village of Yang's clan located in. Deokchon-sa(德村祠), the portrait hall called after Yang's literati name, exists as the enshrining site of Yang's portrait and as the encountering place of ancestor and descendants. The study explores the process of production and enshrinement of the portrait of Yang Deukjung with Deokchon-sa. It also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Yang's portrait and discuss the issues in relation to its provenance.
In the portrait, Yang Deukjung is described as a scholar wearing Simeui(深衣: a plain robe with black border) on his body and Bokgeon(幅巾: a black scarf) on his head. Simeui-Bokgeon is defined as an authoritative attire for Confucian scholar by Zhu Xi(朱熹, 1130∼1200), an eminent Neo-Confucian scholar in the Southern Song, Simeui-Bokgeon painted in portrait allows Yang to embody efficiently his identity as a Confucian scholar following the tradition of Zhu Xi's philosophy. Yang's pose kneeling down and holding two hands together in front of his body is a very decent posture of Neo-Confucian scholar emphasized by Zhu Xi. The kneeling down is also a distinctive pose chosen in the portrait of Yun Jeung. Yang intended to revival his teacher's posture in his own portrait and establish himself as an heir of Yun's academic legacy.
It is noteworthy that the current condition of both Deokchon portrait hall and Yang's portrait are different from what they were originally produced. As the hall had been restored and the portrait had been reproduced, they have undergone many changes over the years. Yang's descendants in Yeongam region tell the story that Chae Yongsin(蔡龍臣, 1850∼1941), the renowned portraitist in his time, reproduced it there in 1910. However, the pictorial characteristics of Yang's portrait is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those of Chae and it has more common with the portrait of a local painter. It is expected to clarify obviously the reality of the reproduction story, and to reveal the local portraitists active in the Jolla province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n it would become possible to shed more light on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Yang Deukjung's portrait and its enshrin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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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호의 가문의식과 일상생활

저자 : 전성건 ( Sung Kun Jeon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7-4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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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의 가문은 옥동 이서와 성호 이익을 정점으로 문장 위주의 가문에서 의리 위주의 가문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옥동 이서는 詩文으로 명망을 얻었지만 이를 일신하여 퇴계의 敬 사상을 이어받아 성호 가문이 퇴계의 도학을 받아들이는 계기를 만들었고, 성호 이익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퇴계 이황의 학문을 전범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시대적 상황에 맞게 퇴계의 학문적 성과를 발전시켜 성호학파를 구성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성호 가문은 섬계 이잠에 의해 작성된 무술년의 상소문과 그에 따른 그의 장살사건으로 몰락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성호 가문의 중차대한 위기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에 성호는 출사를 포기하고 학문에 침잠하여 후일을 도모하게 된다. 이를 정치적 위기상황에 대한 학문적 탈출구 마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당연히 학문적 탈출구는 퇴계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확대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성호는 어느 정도 가문의 禍難이 정리되고 난 뒤에는, 퇴계의 적전을 잇고 있는 영남 남인과의 교류를 통해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몰락한 가문의 家計를 유지하는 데에 힘을 쏟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이는 성호의 특징적인 사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호의 士庶人 의식과 절검의 실학정신이다. 전자는 그의 造命의 시각에서 살펴볼 수가 있으며, 후자는 그의 구체적 현실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유학에서 빈부귀천은 천명에 기인한 것으로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지만, 성호는 조명의 논리를 통하여 인간의 노력을 통해 時勢에 대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그가 제시한 士農一致의 시각에 반영되어 있다. 선비는 출사하여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시세에 의해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경우에는 농사를 짓는 등 현실을 직시하여 또 다른 영역에서 삶을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조명의 논리는 그의 구체적 현실에서 절검의 실학정신으로 나타난다. 그가 집안의 일화를 바탕으로 조직한 삼두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콩죽, 콩나물, 콩메주 등을 담가 집안의 모임을 갖고 해마다 일정하게 삼두회를 개최하여 집안의 유훈으로 삼으려고 했던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성호는 이 외에도 博奕雜戱를 멀리하도록 하였고 술·담배를 금지하는 등 절검의 실학정신을 가문의 유훈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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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성호학파의 친족의식과 의례생활 -광주안씨 종계를 중심으로-

저자 : 박종천 ( Jong Chun Park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43-87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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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근기 남인을 대표하는 성호학파는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여유를 갖추지 못한 향촌의 재지사족으로서, 절검과 상호부조를 통해 친족공동체를 결속시키기 위해 종약을 제정하고 종계를 운영했다. 특히 18C 중반 형성된 광주안씨 사간공파 종중은 가난한 종인들의 네트워크를 전국적 범위의 대종계로 확장함으로써 종계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는데, 이는 규모의 경제를 통해 현실적인 경제적 한계를 극복하고 제사의 의례적 구심점과 상호부조의 사회경제적 안전망을 마련하여 친족의식의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순암 안정복은 이러한 종계 운영과 의례적 실천을 '생양'(生養)의 경제적 기반 위에서 '예교적 풍속'(風俗)의 문화적 실천을 합리적으로 정립하고 그러한 합리적 의례질서를 친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에서 구현하도록 '정령'(政令)의 정치적 경계를 시행하는 체계적인 예학적 구상으로 뒷받침했다. 그는 성호 이익을 계승하여 경제적 여건에 맞게 의례의 규모와 방식을 합리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절검을 통한 경제적 기반 구축을 시도하는 한편, 종계의 운영과 묘제의 실천을 통해서 서민으로 전락해 가는 사족의 정체성을 재정립하여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자 모색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성호학파의 종계 운영과 의례적 실천은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향촌의 재지사족으로서 사회경제적 현실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하층민과 차별화된 사족적 정체성을 강화하여 독자적인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의례적 위계질서를 실천함으로써, 경제, 정치, 문화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향촌사회의 예교질서를 갱신하려는 전략적 실천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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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성호학파의 가족 유대의식과 가범(家範)-성호와 순암을 중심으로-

저자 : 함영대 ( Young Dae Ham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89-12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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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을 중심으로 성호학파의 가족유대 의식과 家範을 살펴본 것이다. 이것은 이후 전개될 실학파의 가족인식을 검토하려는 시도 가운데 하나로 기획된 것이다. 성호학파의 주요 구성원인 성호와 순암은 한 사람의 학자이기 이전에 한 집안의 아들이자 아버지로서 또는 남편으로서 家長의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했다. 중요한 삶의 터전인 가족이라는 유대 속에서 그들은 가족을 성의를 다해 꾸려나갔다. 성호는 넉넉지 않은 삶의 여건을 고려하여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기꺼이 감내했다. 순암 역시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지만 아내와의 정의는 매우 도타왔다. 아울러 그들은 진심을 다해 때론 엄하게 때론 자상하게 자식과 친족 자녀들을 가르쳤다. 진정 성호와 순암은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성실하게 그 삶을 살아갔다. 우리는 그들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신실한 학자로서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는 가족의 구성원으로서도 제 역할을 충실하게 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학문에서 뿐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자세에 있어서도 진지했다. 그들은 진정 앎과 삶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에게 다가온 삶의 여건을 외면하지 않고 대응하면서 성실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았다. 그들이 자기 삶의 여정을 통해 구축한 학문적 성과인 실학은 삶과 전면적으로 조우하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학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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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난, 병, 죽음: 삶의 난관 앞에 선 실학자들

저자 : 김선희 ( Seon Hee Kim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121-167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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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의 지적 전통의 내부로 진입하는 한 방법으로 개인과 그의 삶의 공동체 내에서의 실천과 지향을 파악하는 경로를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논문에서는 실제 생활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가난, 병, 죽음 등 누구나 실존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삶의 난관에 맞서 성호학파가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실천을 모색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유학에서 가난과 그에 따른 검소한 삶은 자기 수양과 학문 그리고 도덕적 완성의 토대로 여겨져 왔다. 공자 이래로 유학자들에게 검약은 단순히 생계유지나 운영의 방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원리이자 가치적 지향을 담은 세계관의 문제였다. 병과 죽음 역시 인간적 감정의 차원에 매몰될 수 없는 이념적 지향과 관련된다. 성호는 특히 검약의 강조와 더불어 사치를 비판하는 데 이 두 가지 긴장은 결국 이들이 바라던 공적 세계상과 연관된다. 성호학파에게 검약의 실천은 공적 정치 영역으로 갈 수 없었던 이들이 생활 속에서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성호학파들은 이런 지향 속에 실질적인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삶의 자원을 노동으로부터 해결하고자 한다. 불필요한 사치가 없고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수탈이 없다면 각자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만으로도 천하가 안정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이들에게 노동의 강조는 자원과 지위가 없는 사회 구성원들이 자립하며 삶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일종의 공적 가치 실현의 방법이었다. 이들은 삶에 필요한 자원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가정과 가문을 유지하고, 죽음의 의례에 들어가는 비용과 절차를 줄임으로써 검약을 통해 생활에서 공적 가치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상례(喪禮) 역시 한 개인, 한 집안의 검약이 사회 전체에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성호 학파의 경계와 비판과 연결된다. 이들에게 신후의 준비는 예의 차원을 넘어서 사적 차원에서 실현하는 공의 이념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검약의 원리로 사회 제도를 구축할 뿐 아니라 가정 생활을 영위하고, 죽음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삶이 공적 세계에서 기대되는 올바른 삶의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가족이라는 삶의 공동체가 겪는 실존적 조건으로서의 가난, 병, 죽음의 문제를 통해 성호학파가 꿈꾸었던 올바른 세계에 대한 이념과 실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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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경세론에서 본 실학

저자 : Seong Yun Kim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169-212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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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실학의 경세론을 정치의 개념과 방법, 군주론, 왕정론, 윤리론으로 나누어 그 추이를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새롭게 제기한 주요 논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조선후기의 실학은 서구에 비견하자면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에서 절대왕정에 이르는 시기의 사회구성과 유사한 조선의 상황을 배경으로 나타난 유교적 인문주의의 색채를 띤 근대지향적 정치 · 사상운동이었다. 둘째, 실학 경세론의 발전 과정을 그 내용과 성격, 그리고 그것이 주로 영향을 받거나 준거(準據)로 삼은 경전이나 학술사조를 중심으로 대별하면 대체로 ① 『맹자』의 평균주의(平均主義)와 선부후교론(先富後敎論)에 주목한 단계(이이), ② 『주례』를 국가체제 재건을 위한 이론적 준거로 삼은 단계(유형원 · 이현일), ③ 제자백가나 탈성리학적인 견해들을 실질적으로 참용(參用)하면서 주자학의 경세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이론을 구축해가는 단계(성호 · 강화학파), ④ 서구 과학이나 철학 및 청대 고증학 등을 활용하는 한편 정치적 적용을 거치면서 새로운 정치이론을 심화하는 단계(후기실학자)로 나눌 수 있다. 셋째, 실학의 연원은 공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안민(安民)과 부국강병을 지향하던 두 갈래의 물길, 즉 정전제(井田制) 복구를 중심으로 하는 평균주의(平均主義) 사고와 북인계열의 국가중심의 정치적 사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갈래가 한백겸(韓百謙) 등의 평양 기전(箕田) 연구를 기폭제로 하여 하나로 합쳐지면서 실학은 주자학과 구분되는 조선 나름의 개성있는 경세학으로 등장했다. 넷째, 경세론의 맥락에서 볼 때 실학의 가장 큰 특색이자 장점은 평균주의와 국가주의의 강고한 결합에 있다. 실학이 갖는 평균주의 전통은 국가주의가 갖는 전제성(專制性)을 현격히 완화킴으로써 민본적(民本的) 성향이 강한 조선의 왕정이 전제주의로 흐르지 않고 차후 국민국가로 나아갈 수 있게 할 동력으로 잠재해 있었다. 이것은 조선의 근대화가 서구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거친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성찰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실학 연구의 시의성을 높일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다섯째, 실학은 성리학이 주장하는 도덕정치론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민생 복리를 실질적으로 증진시키는 것을 정치로 이해하였다. 성리학의 도덕적 보편주의에 대비되는 이러한 실학의 현실주의 · 공리주의 정치 개념은 먼저 '선부후교론'(先富後敎論)의 형식으로 제기되었고, 이후 정치의 개념에 대한 주희의 명제를 비판하면서 정치와 도덕을 분리해 나갔다. 여섯째, 실학은 정치의 방법에서도 예교(禮敎)를 통한 도덕적 감화를 우선하는 성리학의 입장을 비판하고, 법과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도기일체론'(道器一體論)을 표방한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왕도와 패도를 절충하려는 이러한 실학의 정치방법론은 왕패병용(王覇竝用) · 왕패일도론(王覇一途論) · 관맹상제론(寬猛相濟論) · 교법일치(敎法一致) · 교법상보(敎法相補)의 형식을 통해 확산되었다. 일곱째, 조선후기에 통치체제에 대한 새로운 모색 과정에서 군주권은 그 핵심적 요소로 부각되었고, 존군론(尊君論)은 실학의 공리적 정치관이 발달함에 따라 강화되어 갔다. 존왕론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 '신(新)군주'의 상은 군사(君師)라는 형태로 먼저 나타났으며, 곧이어 군주가 도학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존군의 논리는 이후 군주를 태극 및 상제(上帝)에 비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절대군주론으로 발전했다. 여덟째, 실학의 왕정론은 다원적 권력을 중앙의 국왕에게 일원화하고 정치적 정통성 또한 국왕이 독점함으로써 이른바 중개세력을 해소하고 국왕의 지배에 복종하는 동질적이고 균등한 국민을 만들어 낼 것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국민국가에 선행하는 절대주의 왕정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아홉째, 신분제를 부정했던 실학은 사회적 불평등 질서를 옹호하던 오륜의 윤리에 대신하여 『맹자』에 나타난 삼달존(三達尊)을 대안으로 제시했으나, 곧 이어 모든 신민에게 적용되는 통일된 평등 윤리로서 효제(孝悌)를 제시했다. 효제 윤리는 윤휴 등에 의해 이미 제시되었으나 이것을 정치차원에까지 확대하여 크게 선양했던 인물은 영조와 정조였다. 정조의 명덕본심설(明德本心說)을 계승한 정약용은 명덕이 효 · 제· 자(孝悌慈)임을 논증함으로써 그 인간론적 근거를 완성했다. 이 때의 효제는 신분적 · 계급적 지배의 규율로서가 아니라 평등한 개인 상호간에 호혜성 수수의 관계로 재조명된 것이므로 그것이 갖는 사회실천적 의미는 이전과 크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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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유학에 있어서 "공"의 이념과 그 전개 -퇴계와 성호를 중심으로-

저자 : 김종석 ( Jong Seok Kim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213-24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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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최근 국내외적으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公'적 가치를 어떻게 정립하고 실천할 것인가라는 이슈와 관련하여, 조선유학에서 公의 이념이 형성되고 전개되어 온 과정을 퇴계와 성호를 중심으로 살펴 본 것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공적 가치의 정립을 중요한 학문적 과제로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각기 16세기와 18세기의 성리학과 실학의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이다. 퇴계는 중국의 정자와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성리학적 공동체론에 바탕을 두고 16세기 조선시대가 요구하는 공동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우주만물을 한 몸으로 보는 정주학적 우주공동체론에 입각하고 있지만, 우주공동체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仁의 실천을 스스로의 일로 자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게 公의 실현은 인간의 실천적 노력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실천적이라 할 수 있으며, 敬은 그 실천을 위한 방법이었다. 18세기의 성호는 公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 중심에 서야 한다는 점에서는 퇴계의 생각을 충실히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만물일체론에 바탕을 둔 우주공동체론에서 벗어나 實地實用에 입각하여 변화된 사회상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론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公의 이념은 우주적 차원의 공동체 원리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원리였으며 구체적인 삶의 원리였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公 · 私의 엄격한 구분과 그것에 바탕을 둔 법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질 때 진정한 公의 이념이 달성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호에 있어 실용은 단순한 편의적인 실용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각성과 그 실천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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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옥동(玉洞) 이숙(李숙)의 사회시(社會詩)를 통해 본 조선조(朝鮮朝) 도학자(道學者) 사회시(社會詩)의 一 양상(樣相)

저자 : Jea Hwuan Yoon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245-284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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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玉洞 李숙의 社會詩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글이다. 社會詩를 “작가의 비판정신이 작품 창작의 기저를 이루고 있으며, 예술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회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개인적인 생활 · 체험 · 희노애락의 감정보다는 개인과 상대적인 개념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시적 반영의 대상으로 한 시”로 정의하였을 때 옥동의 사회시는 그의 시문학 세계 안에서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옥동의 시문학 작품 전체 741題 1,302首 중 9題 13首의 시 만을 사회시로 간주할 수 있다. 옥동의 사회시 13首는 크게 두 경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경향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사회를 掩襲하는 자연 재해에 의한 삶의 疾苦를 토로하는 것이다. 두 경향의 시 모두 인간의 삶,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요소들에 대한 시적인 대응이라는 점에서 사회시의 영역 안에 다루기에 충분하지만, 두 경향의 시들은 본질적인 차이를 지닌다. 첫 번째 경향의 시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사회 현상이라는 점에서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인간을 교화함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만, 두 번째 경향의 시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자연 재해는 인간의 도덕적 교화를 통해 극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옥동은 첫 번째 경향의 시에서와 달리 두 번째 경향의 시에서는 비판보다 현실적인 삶의 疾苦를 묘사하여 탄식하고 안타까워하는 정서를 시 속에 표출하는데 주목하였다고 보인다. 이와 같은 옥동의 사회시는 시적 형상화의 방법에서도 특징적인 모습을 보인다. 옥동 사회시의 특징으로 간주할 수 있는 형상화 방법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상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로 유기적인 결합 과정을 거쳐 옥동의 사회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옥동 사회시의 첫 번째 특징으로는 諷刺와 寓意를 배격한 직설적 묘사, 두 번째 특징으로는 구체적 비판 대상의 排除, 세 번째 특징으로는 절제된 詩語와 제어된 감정 표출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한 옥동의 의식을 반영하기에 가장 적절한 기법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만큼 옥동의 비판 의식이 현실과는 멀어진다는 문제를 지니고, 사회시의 사회성과 비판성을 약화시킨다는 문제를 지닌다. 도학자로 자처하고 세상의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옥동이 얼마 되지 않는 양이기는 하지만, 사회시를 창작했었던 것은 그가 세상에 대해 느끼고 있었던 책임의식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스스로를 세상을 교화해야 할 책임이 있는 학자라고 생각했던 옥동은 세상의 부조리, 현실의 질고에 대해 눈감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수양 의식을 훼손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옥동은 자신이 인지하고 용인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비판의식을 토로하여 사회시를 창작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점에서 옥동의 사회시는 사회시 일반에서 볼 때 비판의식의 약화와 사회개혁 의지의 부족함이 문제될 수 있겠지만, 도덕적 이상사회의 현실적 구현을 추구했던 조선조 도학자 사회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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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시문학에 대한 일고찰 -시인적 면모와 학자적 면모의 관련양상을 중심으로-

저자 : Yong Tai Kim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285-31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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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李瀷의 조카이자 수제자였던 李秉休(1710∼1776)의 시문학에 대한 재검토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병휴의 시문학을 '담담한 학자풍의 시'로 이해하였으나, 사실 이병휴는 시에 대한 열정이 매우 컸으며, 참신하고 아름다운 시를 짓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점을 논증하였다. 그런데 이병휴의 시에 대한 열정은 그의 깊은 학문과 연결되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참신하고 주목할 만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첫째, 그의 세심한 관찰이 생명존중사상과 결합하여 微物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름다운 生態詩를 산출하였다. 둘째, 사회제도에 대한 관심이 시로 표출되어 「職掌八영」이라고 하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였다. 셋째, 『周易』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시로 표현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러한 이병휴 시문학의 성취는 近畿南人들의 문학적 전통속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본 연구는 근기남인들의 문학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에 하나의 밑바탕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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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유한준(兪漢雋) 문학의 실학적 면모

저자 : 박경남 ( Kyeong Nam Park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317-34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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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兪漢雋 문학의 실학적 면모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면서, 특히 그가 牧民官으로 있으면서 羅山 지역의 三政의 문란을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창작되었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유한준은 朴趾源과의 대비속에서 그간 擬古的 경향과 보수적 對淸意識만이 과도하게 부각되어 왔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실학자 柳馨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식과 지방관으로서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던 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조선의 풍속 및 역사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 및 실사구시적 정신과 실증적 글쓰기가 돋보이는 글들이 적지 않다. 본고에서는 기존의 실학 개념 속에서 충분히 조명될만한 유한준 문학의 이러한 실학적 면모들을 우선 개괄적으로 간단히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 중 특히 그가 지방관으로 직무를 수행하며 田政·軍政·還穀 등 三政의 폐단을 지적했던 「羅山策」 등 현실비판적인 일련의 작품들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실천적 목민관으로서의 유한준의 삶과 문학이 조명될 수 있었고, 경세적 측면과 관련된 유한준 문학의 실학적 면모가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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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혼돈록(혼돈錄)』에 대하여

저자 : 김언종 ( Eon Jong Kim ) , 안세현 ( Se Hyun Ahn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351-403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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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잡저류(雜著類) 저술인 『혼돈록(혼돈錄)』 현전본의 종류와 주요 내용을 학계에 소개하고, 이 저술이 지닌 자료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혼돈록』은 신조본(新朝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장서각과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 『여유당집(與猶堂集)』에 각각 수록되어 전한다. 또 1974년에 영인된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 2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조목은 장서각본이 249개, 규장각본이 225개로 장서각본이 24개 더 많다. 보유본은 장서각본을 저본으로 하면서도 규장각본을 섞어 영인한 것이며, 영인 과정의 오류로 244개 조목만 수록되어 있다. 요컨대 장서각본이 규장각본보다 앞선 초본(初本)일 가능성이 높다. 『혼돈록』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이 저술은 다산이 1796년(정조 20) 초계문신으로 『사기영선』을 교정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전체적인 서술은 유배지에서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혼돈록』 권4의 내용이 『아언각비』에 많은 부분 수용된 것으로 보아, 『혼돈록』 저술은 적어도 『아언각비』가 완성된 1819년(순조 19) 이전에 마친 것임에 분명하다. 『혼돈록』은 총4권인데 권1ㆍ2는 모두 사론(史論)이며 권3의 전반부는 사론이고 후반부는 시화(詩話)이다. 권4는 언어문자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전체 249개 조목 중에 136개가 사론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249개 조목의 제목과 내용에 대해서는【부록】으로 첨부한 <『혼돈록』 249개 조목 내용 일람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혼돈록』은 신조본 『여유당전서』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간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혼돈록』의 자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첫째, 『혼돈록』은 절반 이상이 사론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를 통해 다산의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숙종과 정조 연간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산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냉정하게 역사를 평가하였다. 다산이 자기 나름대로 남인이 분열되고 정치적으로 몰락한 과정을 탐색해 본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중국 역사에 대한 단순한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면서 우리의 현실에 입각하여 비판적으로 역사를 검토하였다. 둘째, 신조본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다산의 시론과 시편을 확인할 수 있다. 남인 시맥에 대한 정보나 칠언고시의 율격에 대한 논의는 다산의 시론 연구에 참고할 만하다. 신조본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희작 성향이 농후한 잡체시(雜體詩)는 다산 시세계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답수차요(踏水車謠)」와 「반지화곡(班枝花曲)」 등에 대한 논의에서는 다산의 실학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셋째, 『혼돈록』은 다산의 여러 저작의 원천 자료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혼돈록』은 『아언각비』 저술의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여타 문장을 짓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원사(原赦)」라는 글은 『혼돈록』권1의 「왕가종수칠십(王伽縱囚七十)」이 바탕이 되어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한전(限田)」ㆍ「현령시책(縣令試策)」ㆍ「개천맥(開阡陌)」 등은 『경세유표』에, 「본생부칭백부숙부(本生父稱伯父叔父)」ㆍ「성치(城雉)」 등은 『상례사전(喪禮四箋)』에, 「세실(世室)」은 『춘추고징(春秋考徵)』에 수용되었다. 넷째, 다산의 저술 편찬 경위를 엿볼 수 있었다. 다산은 『혼돈록』 권1의 7조에서 자신이 지은 『맹자차록(孟子箚錄)』이라는 저술을 언급하였다. 『맹자차록』은 현재 전하지 않는데, 본 조목과 관련된 내용은 『맹자요의(孟子要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맹자차록』은 『맹자요의』에 앞서 지었고, 이를 바탕으로 『맹자요의』를 저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고가 다산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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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간행물
간행물명 최신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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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연구
56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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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Confucian Philosophy and Culture
36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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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상과 문화
103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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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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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논총
37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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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학
44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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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보
149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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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연구
55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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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논집
69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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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연구
55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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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학
38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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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
61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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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상사학
67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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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연구
54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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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사상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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