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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일본의 식민지적 통제와 미국 이민법의 네트워크 ― 한인 사진신부 사례를 중심으로(1910-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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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적 통제와 미국 이민법의 네트워크 ― 한인 사진신부 사례를 중심으로(1910-1924)

The Historical Network of Colonial Control and Immigration Law: A Focus on Korean Picture Brides(1910-1924)

노선희 ( Roh Sunhee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3월
  • : 229-261(33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29.6


목차

1. 들어가며
2. 일본의 ‘보호’와 ‘통제’ 사이에서 발생한 한인 사진신부
3. 미국 이민법의 변화와 인종·민족·젠더 간 위계
4. 이중으로 주변화된 이민자, 한인 사진신부
5. 나오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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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20세기 초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사진신부 집단이 어떠한 배경 하에 발생하였고 이들의 정체성과 더불어 미국사회의 어느 지점에 이 여성들이 위치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미국과 일본이 맺은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의 인도적 조항으로 일본인 사진신부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이후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진신부들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 하에 한인 사진신부는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의 부속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일본의 식민지적 통제라는 차원과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일본정부가 미국 내 자국민을 보호하는 한편 조선의 노동력과 독립자금의 진원지였던 미주 한인사회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한인 사진신부의 여권발급을 허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인 사진신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 집단의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발생한 아시아여성 간 위계화 문제와도 연관성이 있다. 이는 1875년에 제정된 페이지 법(Page Act)에서 그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이민금지를 목표로 제정된 페이지 법은 백인사회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여 동아시아 출신 여성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시각은 이후 아시아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이민법으로 이어졌다. 페이지 법으로 시작된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시아여성 간 일련의 경합과정은 미국사회에서 이민법으로 재현되는 인종·민족·젠더적 차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적 상황 속에 등장한 한인 사진신부는 여타 사진신부들과는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1910년에서 1924년까지의 제한된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와 조선과 일본의 식민주의라는 맥락 하에 등장하였고 무엇보다 이 여성집단은 이중으로 주변화된 이민자들이었다.
This research analyses the identity of the Korean picture brides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their political and social positioning in the American society. As an exceptional provision to the Gentlemen’s Agreement of 1908 between the U.S. and Japan, and as an extension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n picture brides were allowed to migrate to the U.S. starting in 1910. Under this political context, Korean picture brides tended to be regarded as an accessory to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U.S. and Japan. However, Korean brides’ migration to the U.S. coincided with Japanese colonial control and the increasing policies produc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to control Chosŏn and the Korean American community. Further, the migration of Korean brides is also related to the issue of hierarchy among Asian women during the transition of immigration laws from the mid-19th to the early 20th century. Starting with Page Act of 1875, a series of contestations between Asian women in the process of creating immigration laws offer a glimpse of racial, ethnic, and gender discrimination reproduced in U.S. legislation. Under these circumstances, Korean brides emerged in the contex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U.S. and Japan, and colonialism between Chosŏn and Japan. From this perspective, the Korean brides were a doubly marginalized immigrant in both American and Asian socie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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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1
  • : 1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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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권0호(2021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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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말·일제하의 사회학 교육(1906~1945) ― 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저자 : 김필동 ( Kim Pil-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9 (7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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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말·일제하 한국의 사회학 교육의 전체상을 전문학교의 교과과정과 사회학 담당 교수(강사)에 초점을 두고 연구한 것이다.
한국에서 사회학 교육은 1907년 보성전문학교에서 처음 실시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제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초의 사회학 강의는 1914년 평양의 숭실대학에서 편하설(C. F. Bernheisel)에 의해 '기독교사회학'이란 이름으로 개설되었고, 일반 사회학 강의는 1918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원한경(元漢慶)이 처음으로 개설했다. 1920년대 이후 사회학 강의는 숭실대학(후에 숭실전문학교)과 연희전문학교에서 꾸준히 개설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도 이 흐름을 따랐다. 한편 보성전문학교는 1925년부터 사회학 강의를 개설했고, 중앙불교전문학교는 1929년부터 사회학 및 관련 강의를 꾸준히 개설했으며, 마지막으로 명륜전문학교도 1942년 이 흐름에 합류했다.
이처럼 한국인이 주로 다니던 전문학교에서 사회학 교육은 거의 일반화되었다. 이는 관공립전문학교와 일본계 사립전문학교에서 사회학 강의가 전혀 개설되지 않았던 것과 뚜렷이 대비되는 점이다. 이렇게 된 데는 미션계 전문학교가 미국의 교양대학을 모델로 했던 데다가 당시 미국에서 사회학이 크게 확산되고 있었던 영향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한국인 운영자나 교수들은 사회학이 학생들로 하여금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를 통하여 식민지기에 적어도 20명의 사회학 담당 교원이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학부 또는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학에서 사회학 강의를 수강했거나 개인적인 관심으로 공부한 경우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의의 내용과 수준에는 상당한 편차가 있었을 것이다. 이들 중 5년 또는 5회 이상 사회학 강의를 했던 인물은 백남운, 한치진, 하경덕, 채필근, 고황경, 김현준이다.


This paper studies the sociology education in the late Old Korean and Colonial Periods (1906-1945) with a focus on college curriculums and sociology professors. The educators of Boseong College (普成專門學校) initially planned to give sociology lectures in 1907, but this lecture was not implemented. However, C. F. Bernheisel (片夏薛) gave the first lecture, in the name of “Christian Sociology,” at Union Christian College (崇實大學) in Pyongyang in 1914, while the first lecture in general sociology, taught by H. H. Underwood (元漢慶), took place at Chosen Christian College (延禧專門學校) in 1918.
Since the 1920s, sociology lectures have been steadily given at Union Christian College and Chosen Christian College, and various other schools have followed suit: the Boseong College in 1925, the Central Buddhist College (中央佛敎專門學校) in 1929, Ewha Woman's College in 1930, and Myeongryun College (明倫專門學校) in 1942.
As such, sociology became a common subject in colleges where Koreans usually attended. This is in stark contrast to the fact that no sociology lectures were given at the government, public, and private colleges where Japanese usually attended. This can be said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fact that mission schools were modeled after liberal arts colleges in the U.S. and that sociology was spreading significantly in the U.S. at the time. In addition, Korean operators and professors seem to have thought that sociology helps students understand the changing world and promote social and national consciousness.
This study found that at least 20 professors and lecturers in charge of sociology engaged in student teaching during the colonial period. While some had formal undergraduate or graduate training in sociology, others had self-educated themselves in the subject. As a result, there must have been significant variation in the content and level of the lectures. Among them, Paik Nam-woon (白南雲), Hahn Chi-chin (韓稚振), Har Kyung-durk (河敬德), Chae Pil-geun (蔡弼近), Koh Whang-kyung (高凰京), and Kim Heun-chun (金賢準) have taught sociology over five years or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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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제강점기 숭실전문학교 교수진의 구성과 네트워크

저자 : 이경숙 ( Lee Kyu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1-132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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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사립전문학교인 숭실전문학교의 조선인 교수진을 탐색한 것이다. 식민지 지식인들이 어떤 경로와 네트워크를 통해 숭실전문학교에 모이게 되었는지, 그렇게 모인 교수진은 전공분야에서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지 분석하였다. 교수 개인의 취직이 아니라 학교의 교육인력배치라는 점에서 교수진은 학생들에게 성장의 기반이며, 지식인의 유입이라는 점에서 지역사회에는 중요한 사회 문화적 토양으로 작용한다. 평양에 있었던 숭실전문학교의 교수진은 숭실학교 연고자들이 절반을 넘나들고, 평양으로 상징되는 서북지역, 넓게는 북부지역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문과에 속하는 신학과 교육학 전공자들, 화학과 공학을 전공했던 이과 교수진들은 모두 미국유학 출신이었다. 전문학교 인가를 받던 시점부터는 일본유학 경력자들이 증가하였다. 특히 농과 교수진은 모두 일본유학을 거쳤다.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면서 숭실, 서북, 유학, 이 세 가지 연결망이 숭실전문학교 조선인 교수진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네트워크였다. 그리고 숭실전문학교 교원 중 오랫동안 잊혀지거나 잘못 알려졌던 교육학자 최윤호와 생물학자 이기인은 다시금 주목해야 할 식민지 지식인이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Korean faculty of Soongsil College, a private college that existed during Japan's colonization of Korea. It examined the channels and networks the colonial intellectuals operated at Soongsil College, and analyzed the competencies that the faculty had in their specific fields. The faculty was considered the foundations through which students develop their intellect. However, faculty members were not employed merely as professors, but hired and representative additionally as educational manpower tasked with enriching the country. More than half of the faculty members at Soongsil College in Pyongyang were primarily from the northwest region but also from the broader northern region. The faculty of theology, education, chemistry, and engineering, however, all had foreign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It was only after the Government-General of Chosen accredited the college that people with educational experiences in Japan joined the faculty. Notably, all the members of the agriculture department eventually consisted of those who had studied in Japan. Guided on Christian principles, the Korean faculty at Soongsil College became representative of a networked triad between Soongsil, Northwestern people, and overseas education. Amongst these individuals, educationalist Choy Yoon-ho and biologist Lee Ki-in surfaced as long-forgotten or misrepresented intellectuals of that time. The research provides local context with the history of education in Korea but also presents new details related to national identity and educational leadership during colo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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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해방 이후의 민간역서와 달력 시간의 혼종성

저자 : 김미화 ( Jin Meihu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3-17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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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달력을 쓴다는 것은 같은 시간질서에 따르고 시간과 관련된 문화적 상징을 공유하는 것이다. 전통시대의 달력은 '역서' 형태였고, 그것의 간행은 국가가 독점했다. 태양력 도입 이후에도 식민지기에 총독부는 전통적인 책자 형태의 역서를 독점간행했다. 해방 이후 역서 출판이 자유화되면서 남한에서는 다양한 민간역서가 대거 등장했다가, 1960년대부터는 명문당과 남산당 두 출판사가 시장을 거의 점유했다. 이들 민간역서는 제사나 택일 등과 관련한 전통적 '음력'의 수요에 부응하면서, 매 순간에 다른 의미가 매겨지는 질적 시간관을 온존시켰다. 시계 시간이 획일화되면서 정밀해진 것과 달리, 현대 한국에서 달력 시간은 비동시적인 것들의 공존, 다차원의 혼종성을 보인다.


To use the same calendar is to follow the same temporal order and share cultural symbols of temporality. The calendar of the traditional period was created in almanac form, and the state monopolized its publication. Even after the inception of the Gregorian (solar) calendar, the General Government exclusively published official almanacs of traditional design during the colonial period. After liberation in 1945, the ban on the private publication of almanacs was lifted, which led to the popularity of various privately published almanacs emerging in the country. But starting from 1960s, two publishers, Myeongmundang and Namsandang, cornered the market in almanac sales and distribution. The popular almanacs met the needs of those people wishing to perform traditional lunar calendar-related ancestral rites. The almanacs also remained viable for crucial day-selections while preserving a qualitative conception of time. Unlike the uniformity and precision of clock-based perceptions of time, calendar time still allows non-simultaneous things to coexist, and produces multidimensional hybridity in moder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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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상계』 지식인들의 경제 담론 연구 ― 국가 개입론을 중심으로

저자 : 최민석 ( Choi Min Se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3-219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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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사상계』에는 경제적 자유가 중요한 쟁점이었다. 신학과 철학에 학문적 배경을 가진 『사상계』 핵심 필진들은 기독교적 도덕과 휴머니즘에 입각해 경제적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공동체 윤리를 준거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비판했으며, 근대화를 추동하는 힘으로 정신적 요소를 강조했다. 반면 민주당 신파와 일군의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자유의 전면화를 주장했다. 이들은 자유경제에서만 효율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유당 정부의 관권경제를 비판했다.
4월혁명을 전후하여 『사상계』 지식인들의 경제 담론은 자유와 계획의 혼합 또는 자유경제를 위한 과도적 계획을 요청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이들의 논의는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도 반영되었다. 다른 한편 이 시기 경제적 자유의 제한과 균분을 요구하는 흐름은 복지국가론으로 나타났다. 서구의 복지국가는 빈곤으로부터의 탈피를 위한 국가 개입을 정당화하는 모델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서 빈곤 탈피가 의미하는 것은 재분배가 아닌 개발과 성장이었다. 복지국가론은 국가 주도적 성장과 분배, 그 과정에서 일부 자유의 유보를 정당화하는 담론으로 변용되었다.
1960년대를 경과하면서 개발의 성과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지만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에 비로소 지식인들은 개발주의로 오도된 복지국가론을 재고하게 되었다.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은 기대와 달리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저항적 지식인들은 비대한 독점재벌과 생존권을 위협받는 다수의 민중이라는 틀로 박정희의 개발주의를 비판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개발주의적 근대화 담론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사상계』 지식인들은 빈곤과 불평등을 인간 소외의 윤리적 문제로 규정했다. 반정부 투쟁에 앞장선 지식인들이 휴머니즘에 입각해 제기한 생존권 담론은 지식인과 종교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반향을 불러올 수 있었다.


In the 1950s, 'economic liberty' became a contentious social topic covered in Sasanggye, Korea's most popular intellectual magazine at that time. The writers in the magazine centered their arguments on Christianity, insisting that economic restrictions based on and limited by the ethical tenets of the community were needed. Conversely, economists contended that national development required economic policies and government assistance merely to create the essential infrastructure to achieve a viable liberal economy. After the 5·16 coup, then-President Park Chung-hee synthesized both views, applying this approach to his economic plan for the country. While this direction became the main driver of political-economic planning, the argument for economic restriction remained a valuable alternative often adopted in discussion aid at creating a welfare state. Sasanggye writers viewed the developmental state, however, as an inevitable welfare state characteristic of underdeveloped countries, primarily because those states intervened in the market economy as a means of alleviating poverty. In South Korea, particularly after its state-led industrialization of the 1960s, high growth failed to bring about equal prosperity alongside growth of income disparities. Chaebol or large family-owned business conglomerates, for the most part, monopolized the profits accruing in the market while workers increasingly fought to stave off poverty. The growing gap between the haves and have-nots re-ignited the Sasanggye intellectuals to reconsider their initial approach to economic 'good governance.' The state has a moral obligation to intervene in market processes for the right of life of the people. Their discourse on humanity and equality rose as a crucial tool that radical intellectuals and the Christian communities often embrace. Analysis of the economic discourse written in Sasanggye provides a retrospective understanding of today's contention with income disparities while it also provides a means for historically framing intellectuals' influences on the politics surrounding economic perspectives in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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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제주 탑동매립반대운동의 정치과정과 주체 형성 ― 주민운동에서 범도민운동으로

저자 : 정영신 ( Jeong Young Si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1-26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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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제주에서는 제주개발체제에 저항하는 주민운동이 연속적으로 분출 했고, 이것은 보다 큰 규모의 사회운동의 고조로 이어졌다. 탑동공유수면의 불법매립에 반대하는 운동(탑동운동)은 같은 시기 다른 주민운동들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쟁점들이 주민운동의 영역 밖으로 확장하여 제주도민의 공동의 요구로까지 발전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이다. 초기 해녀들의 보상 요구 이후에 탑동운동은 매립면허취소, 개발이익환수, 도민(=주민)주체 개발과 같은 요구를 제기하는데, 이 과정에는 민주화운동 세력들의 관여가 중요했다. 관광'개발'체제에 저항하는 주민운동의 흐름과 개발'독재'체제에 저항해 온 민주화운동은 탑 동운동의 과정에서 합류하여 '범도민운동'으로 발전한다. 범도민운동을 통해 지역 주민들과 민주사회단체들의 연합이라는 조직적 틀이 가능해졌고, 주민에 토대를 두면서도 그와 구별되는 도민이라는 주체의 정치적 공간으로서 현재의 제주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있었다. 오늘날 국제자유도시의 형태로 전환된 제주개발체제 비판을 위해서는 당시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성찰하고 넘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


In the late 1980s, a series of resident movements against the Jeju development system erupted in Jeju. And this led to the escalation of larger social movements. The movement aimed to inhibit the illegal reclamations of Topdong public waters and eventually expanded to include broader issues, including the residents' overlapping and related demands. The case is unique in that the Haenyeo (women divers) were the prime drivers of the movement at its outset and became symbolically valuable cultural subjects throughout the struggle. Their early successes quickly motivated others to join the movement. Expanded participation brought with it diversity that soon moved the movement from one focused on the public waters to achieving additional demands such as cancellation of the reclamation license and return of development profits―both of which benefited from crucial involvement of civil disobedience and political activism. The Topdong Movement became a model for other democratization movements to actively combat unilateral government decision-making and a means through which to address community issues. The Topdong Movement started as a resident-led protest but quickly spread and expanded to become a pan-provincial or beomdomin (provincial citizen) movement that sought to address the concerns of an entire province. Through the Beomdomin Movement, the organizational framework and the united force of local residents combined with democratic social groups became possible. Such an achievement created an organizational means for effectively representing today's broader civil society and attending to Jeju's mixed and diverse residents and inhabitants' needs. A retrospective approach on the achievements and limitations of the movements of the 80s can help address the contradictions and complications that exist in Jeju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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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스웨덴 고용조정 제도의 형성과 전개(1906~1946) ― 살트쇠바덴 협약을 중심으로

저자 : 신원철 ( Shin Wonchu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1-30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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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스웨덴 노사가 체결한 살트쇠바덴 협약 제3장은 경영자의 자유로운 해고권과 함께 노동조합의 협의권을 규정했다. 고용주는 근속 1년 이상의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일시해고할 경우, 노동조합의 사업장 대표에게 1주 전에 통지해야 하고, 노동조합의 대표자가 요청하면 해고에 관해서 협의해야 했다. 이러한 내용은 경영특권과 노동조합의 단결권을 상호 인정한 1906년 12월 협정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었다. 의회정치가 활성화되기 이전에 1906년 12월 협정이라는 형태로 노동시장 주요 당사자들의 합의가 이루어진 점이 단체교섭 및 단체협약을 통한 고용조정규제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1938년 협약에 이르기까지 스웨덴 노사 간에는 격렬한 갈등도 존재했고, 노동시장에 관한 입법도 정치 쟁점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결국 LO와 SAF 사이의 살트쇠바덴 협약을 통해서 고용조정 규칙이 만들어졌고, 정치영역에서 법률 형태로 노동시장 규칙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은 뒤로 밀려났다. 1932년 사회민주당이 집권을 시작했을 때 사용자단체는 노동시장에 대한 법률의 제정을 회피하려고 LO와 타협하는 데 적극적으로 되었다. 이 시점에서 LO도 단체협약을 통한 노동시장 규제를 선택했고, 이는 스웨덴 모델의 핵심 특징이 되었다. 그런데 살트쇠바덴 협약을 통해서 고용조정 과정에 대한 노동조합의 협의권이 보장되었지만, 경영특권은 여전히 광범위하게 인정되었다. 즉, 고용조정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조직적 통제력을 확장하는 데는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노동자들의 고용보호를 늘리는 데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체결된 1946년 기업위원회 협약을 통해서도 큰 변화는 없었다. 스웨덴 모델의 전성기에 노동조합이 고용보호 입법을 추진하지 않은 것은 렌-마이드너 모델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관련이 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과 LO는 실업보험과 재취업 및 재훈련 등에 초점을 두는 유연안정성(flexicurity) 정책을 선구적으로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기층 조합원들의 불만이 1960년대 말 와일드캣 스트라이크로 표출되었고, 1974년의 고용보호법 제정은 이를 수용한 것이었다.


The representatives of the Swedish Trade Union Confederation (LO) and the Swedish Employers Association(SAF) agreed on the right of the management to dismiss workers at will, along with the right to seek union consultation related to such dismissals pursuant to Chapter 3 of the Saltsjöbaden Agreement(1938). When an employer dismiss or lay-off workers with more than one year of service, he or she has one week to notify a union representative, who can then request a consultation with the employer. The Chapter was developed from the December 1906 compromise concluded by the SAF and the LO. The December compromise established the mutual recognition of the management prerogatives and the workers' rights to access labor union protections. These non-legislative steps between the main labor market parties became the starting points through which collective bargaining and mutual agreements formed as essential tools for protracting and implementing employment adjustment arrangements. However, until the 1938 establishment of 'basic agreements,' labor market legislation remained a contentious topic marked with fierce conflicts between labor and management. The Saltsjöbaden Agreement between the LO and the SAF eventually led to employment adjustment rules that produced labor market regulation and subsequently created a labor market order outside of the legislative and political spheres. When the Social Democratic Party came to power in 1932, the SAF actively compromised with the LO to avoid enacting labor market legislation. Even the latter chose to regulate the labor market through collective bargaining, which further rooted bargaining as a key feature of the Swedish model. Yet, though the Saltsjöbaden Agreement guaranteed the union's right to consultation regarding employment adjustments, the dealings still respected management prerogatives. In other words, the union partially succeeded in expanding its administrative control over the employment adjustments process, but such agreements failed to increase workers' employment protections. Even after the World War II, no significant changes took place through the company council agreement of 1946. The failure of trade unions to promote protective employment legislation in the heyday of the Swedish model coincides with the Rehn-Meidner model's active labor market policy. The Swedish Social Democratic Party and the LO pioneered a policy of flexicurity, which emphasizes unemployment insurance, re-employment, and retraining programs. Dissatisfaction with this policy amongst rank-and-file members fueled a series of wildcat strikes in the late-1960s, which resulted in the enactment of the Employment Protection Act in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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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평과 반론] 답변: 비폭력이라고 하는 임무를 향해서

저자 : 우에노지즈코 , 아라라기신조 , 히라이가즈코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5-319 (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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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50~60년대 '요보호'의 재구성과 '윤락여성선도사업'의 전개

저자 : 김대현 ( Kim Daeh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9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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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성매매여성에 대한 형사적 처벌은 기소 단계까지 가지 않고 즉결 심판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여성범죄의 경벌화 경향과는 달리, '요보호여성'에 대한 처벌은 사회적인 형태로 가중되었다. '윤락행위'의 개연성을 지닌 여성으로 정의된 '요보호여성'의 규정은 당대 보안처분의 법리를 통해 합리화되었다. 또한 '직업보도'의 명목으로 세워진 시설에 수용되는 것, 더불어 당대 사회사업을 통해 수용자의 심리적·정신의학적 특성을 추출하고 그것을 병리화하는 논리는 '요보호여성'들에게 형사처벌보다 더 무거운 처벌로서 기능하였다.
더불어 1950년대 이래 성매매여성 수용시설은 당대의 사회사업이 그러하였듯 민간이 주요 주체로 활약하였다. 또한 1961년 「윤락행위등방지법」과 1962년 성매매집결지에 대한 특정지역 설치를 통해 성매매집결지 및 수용시설에 대한 시설화는 가중되었다.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는 박정희 정부 초기 반관반민 운동조직의 활동이 그러하였듯 부패 및 사적 폭력 등 다양한 문제를 노정하였고, 이러한 조직들은 경찰과 포주에 더해 성매매집결지를 둘러싼 중층적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또한 '요보호여성' 대상 수용 시설로 1961년 설립된 서울시립부녀보호지도소는 교정시설과 부녀복지시설의 양가적 의미를 갖는 곳이었다. 이들 수용 시설의 프로그램은 종교단체의 신앙교육과 사회사업 논리에 입각한 '과학적 접근'이 병존하였고, 1960년대 내내 시설 수용 여성들의 반복되는 탈출이 야기되었다. 즉 성매매여성들에게 이곳에 수용되는 것은 곧 처벌을 의미하였다.
끝으로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 및 '요보호여성' 수용 시설 운영자들은 '윤락여성'의 개인적 자질과 심리적 특성에서 '윤락'행위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를 반복했고, 이를 합리화해준 지식 중 하나는 당대 사회사업에 참고되었던 정신의학이었다. 이렇듯 '요보호여성'을 둘러싼 수용시설과 지역사회에서의 시설화 과정, 그에 힘입은 '요보호여성'의 병리화는, 정부 주도를 넘어 사회 안에서 창출되고 있던 폭력이자, 성매매의 '묵인-관리 체제'적 성격의 성매매 관련 법체계를 통해 창출된 사회의 면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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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역에서의 '부랑인' 수용과 민간 사회복지 ― 1960-70년대 부산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김일환 ( Kim Il-hw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1-10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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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60-70년대 부산을 사례로, 지역사회에서 '부랑인' 문제가 전개되는 구체적 양상을 특히 민간 사회복지 영역의 동학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간 '부랑인'의 시설수용과 사회적 배제에 관한 연구에서 지역사회 공간과 지방정부의 역할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지역 내에서 공존했던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다양한 활동방식과 복수의 시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명 역시 불충분했다. 이 논문에서는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체결, 부랑인·부랑아 수용시설을 운영했던 '영화숙', '마리아수녀회', '칠성원', '형제복지원'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들의 사업이 부산의 민간 사회복지 장(welfare field) 내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부랑인'에 대한 대응을 살펴본다.
연구결과는 당시 여러 민간 사회사업체의 '부랑인' 시설 운영방식, 사업에 동원하는 자본과 네트워크의 성격은 균일하지 않았고, 때로는 이들이 지역사회를 무대로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부산시의 대규모 경찰 단속행정을 전제로 시설수용을 지속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시설문제를 둘러싼 사회사업체 간의 갈등과 지역 내 논란이 오히려 대형 시설을 중심의 수용체계 재편·강화로 귀결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부산의 사례는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로 상징되는 중앙정부의 정책과는 별개로, 지역 수준의 동학이 부랑인에 대한 시설 수용을 이해할 때 대단히 중요함을 시사한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의 지역사회적 기원과 민간 사회사업체의 역할에 대한 면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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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병원에서 마을로 ―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으로 본 1970년대 의료 소외지역의 지역보건 실험

저자 : 정다혜 ( Jeong Dahy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7-14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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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한국의 지역보건사업의 모태가 되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을 통해 지역보건사업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말부터 지역주민의 요구를 바탕으로 약 10년간 실시된 의료선 교사 주도의 보건의료사업으로, 1970-80년대에 진행된 지역사회보건사업들의 시초이다. 본 사업은 기존의 병원 중심의 의료모델을 탈피하여 지역사회 중심의 보건 의료,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한 건강개선을 강조하며 새로운 보건의료 모델을 실험하였다.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주목받고 있던 지역사회의 학을 적용한 것이었고, 마을건강사업을 비롯한 사업의 내용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정부 보건개발 정책 수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지역 주민들이 보조 보건인력으로 사업에 참여하고 주민 주도로 마을의 건강상태를 개선하고자 시도한 것은 새로운 지역보건 모델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 범위가 확대되고 정부 주도로 주체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지역별 특수성과 지역주민의 이해관계는 오히려 장애 요소로 인식되었다. 행정적인 사업의 확대 과정에서 지역주민의 주체화는 큰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와 지역주민 참여 문제는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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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0~80년대 사회정화와 여성 수용

저자 : 김아람 ( Kim A Ram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7-18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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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사회정화'를 장기적인 맥락에서 분석하고, 여성들이 사회정화의 주요 대상이자 수단이 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분류하고,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이를 통제하여 사회정화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어떻게 구체적인 정책과 사업으로 실시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여성 통제가 그 핵심이었다는 점은 지적되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 사회정화 인식과 정책에서 여성이 주요 대상이 되었음을 밝히고, 1960~80년대에 여성 통제의 주요 방식이었던 수용시설을 분석하였다. 수용시설의 목적과 규정, 현황, 여성들의 수용 과정과 퇴소 이후 상황을 새로운 자료로 밝힐 수 있었다. 여성 수용시설은 보호, 교도, 자활을 표방하였지만, 실상은 통제와 낙인의 공간이라는 이중성을 지녔다. 시설 운영과정에서는 젠더 특성에 따른 차별과 인권침해가 심각하였고, 여성들은 탈출을 시도하는 등 이에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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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조 부계화와 관계자본

저자 : 이재혁 ( Lee Jaehyuck ) , 박미해 ( Park Mee Ha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3-228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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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부계화에 대하여 '에이전시'의 관점에서 보다 분석적으로 그 논리와 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단일왕조 내에서 발생한 양변적 출계에서 부계 단일출계로의 이행이 비교사회론적으로 이례적인 경우라는 점을 들어 조선조 부계화의 논리 자체를 재고찰이 필요한 문젯거리로 삼는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간과되어온 행위자의 능동적 에이전시의 측면을 부각시키며, 부계친 및 비부계친의 관계구성을 기본적으로 행위자(혈족)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조선후기의 부계화를 전략적 선택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적 균형'으로서 해석한다. 조선의 독특한 부계화 과정에는 비단 유교의 영향뿐 아니라 비부계친과의 관계설정이 일정하게 관여되어 있었다고 가정하며, 이를 구체적 사료들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였다. 인척 및 외척과의 관계는 자원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것은 조선조 친족관계가 물질적 자원의 교류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관계자본'의 동원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이 연구는 인류학 친족연구의 전례에 따라 조선후기 친인척 교류의 작동원리가 물자와 시간을 기반으로 한 자원의 교환에 놓여 있다고 설정하며, 이로부터 부계친과 비부계친 관계에서 어떤 차별점이 드러나는지 검토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의 가설을 설정하였다. 1) 수익률이 높다고 기대되는 사회적 관계에 더 많은 물적-시간적 자원이 투자된다. 2) 부계친에 대한 관계자본 투자는 수익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일 것이고 그에 비해 외척과 인척에 대한 투자는 그 대상의 수익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교류의 변동 폭도 더 클 것이다. 3) 정기적인 관혼상제가 이루어지는 부계친 관계는 주로 물적 자원을 통한 투자와 관계유지가 두드러지고, 외척과 인척 관계는 시간 자원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더 주요하게 나타날 것이다. 가설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겉으로는 전례없는 유교 국가를 추구하였던 조선에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완벽한 부계화가 진행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친족구조의 변화양상에 대한 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능동적 '행위자'의 측면에 대한 고려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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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본의 식민지적 통제와 미국 이민법의 네트워크 ― 한인 사진신부 사례를 중심으로(1910-1924)

저자 : 노선희 ( Roh Sunh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9-26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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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20세기 초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사진신부 집단이 어떠한 배경 하에 발생하였고 이들의 정체성과 더불어 미국사회의 어느 지점에 이 여성들이 위치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미국과 일본이 맺은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의 인도적 조항으로 일본인 사진신부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이후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진신부들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 하에 한인 사진신부는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의 부속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일본의 식민지적 통제라는 차원과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일본정부가 미국 내 자국민을 보호하는 한편 조선의 노동력과 독립자금의 진원지였던 미주 한인사회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한인 사진신부의 여권발급을 허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인 사진신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 집단의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발생한 아시아여성 간 위계화 문제와도 연관성이 있다. 이는 1875년에 제정된 페이지 법(Page Act)에서 그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이민금지를 목표로 제정된 페이지 법은 백인사회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여 동아시아 출신 여성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시각은 이후 아시아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이민법으로 이어졌다. 페이지 법으로 시작된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시아여성 간 일련의 경합과정은 미국사회에서 이민법으로 재현되는 인종·민족·젠더적 차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적 상황 속에 등장한 한인 사진신부는 여타 사진신부들과는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1910년에서 1924년까지의 제한된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와 조선과 일본의 식민주의라는 맥락 하에 등장하였고 무엇보다 이 여성집단은 이중으로 주변화된 이민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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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 '희생자'의 변용과 활용 ― 무장대 출신자의 과거청산 경험을 사례로

저자 : 고성만 ( Koh Sung-m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3-29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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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희생자'는 과거청산의 견인책이자 주요한 성과물로 의미 규정되어 왔다. 제주4·3특별법에 따른 다양한 기념사업은 새롭게 결정되는 '희생자'의 수, 추가로 각명되는 '희생자'의 기념비와 같은 양적 성장을 순항하는 과거청산의 희망적인 시그널로 홍보하며 4·3의 국민적 기억을 구성하려는 기획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희생자'는 '어둠에서 빛으로', '침묵에서 외침으로'와 같은 과거청산 슬로건의 실증성을 제고하는 데에도 역할 해왔다. 그러나 4·3의 다종다양한 주체들 모두가 이러한 발전 모델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이 논문의 첫 번째 목적은 '희생자에서 제외대상'으로 분류되는 무장대 출신자들의 사례를 통해 '희생자'가 단순히 추가되는 것만이 아니라 관리되고 활용되어 온 점을 밝힘으로써 '폭도에서 희생자로'와 같은 과거청산의 성장주의적 논법을 재검토하는 데 있다. 기존 연구에서 제기됐던 4·3 '희생자'의 또 다른 특성은 불가역적 지위를 갖는 집합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장대 이력을 이유로 '희생자' 자격이 취소되는 사례가 등장하면서 '희생자'로 최종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선별과 배제의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언제든 다시 심사대로 소환될 수 있다는 점을 새롭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희생자'라는 공적 지위가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박탈될 수도 있는, 신분의 불안정성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종래의 연구들 역시 시야의 확장과 관점의 갱신을 요구받게 됐다. 이 논문의 두 번째 목적은 '희생자'라는 공적 지위의 유동적 측면을 고찰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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