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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燕行錄) 국역 사업’의 성과와 향후 과제 ― 학술적 가치와 연계하여 ―

Achievements and Future Tasks of the “Yeonhaengrok(燕行錄) Korean Translation Project” - In connection with academic values

이홍식 ( Lee¸ Hongshik )
  • : 온지학회
  • : 온지논총 67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4월
  • : 167-196(30pages)
온지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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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연행록 국역 사업’ 성과의 현재적 의미
Ⅲ. ‘연행록 국역 사업’ 성과의 미래적 가치
Ⅳ. 연행록 국역 사업에 대한 향후 제언
Ⅴ.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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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2015년부터 수행하고 있는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를 학술적 차원에서 평가하고 그 의미를 점검하여 앞으로의 사업 방향을 제시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에 지금까지 제출된 연행록 국역 성과와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를 비교 분석하여 현재 의미를 평가하였고,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이루어진 사행 관련 학술연구 성과를 분석하여 ‘연행록 국역 사업’ 성과의 미래 가치를 점검하였다. 마지막으로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에 비추어서 앞으로의 국역 사업 진행 방향 등에 대해 정책 제언을 더하였다.
대중국 사행기록인 연행록은 한·중 교류의 역사적인 기록이자 문화의 교류와 충격 그리고 자각을 드러내는 문화사적·지성사적 자료이다. 우리 문화유산 속에서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닌 문헌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이에 한·중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밝히는 자료로써 그 가치가 매우 높은데,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번역 출간한 20권의 연행록은 이러한 사행기록의 학술적 가치를 드러내는 데 매우 유용한 텍스트이다.
따라서 ‘연행록 국역 사업’은 다른 어떤 사업보다도 체계적인 계획 아래에서 완성도 높은 성과를 지속적으로 제출할 필요가 있다. 더하여 학술 연구와의 연계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사업 주체들의 책임의식과 협업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더하여 한국고전번역원의 평가 심사 외에도 성과발표회 및 학술세미나 등을 주기적으로 개최하여 국역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학술연구와 연계하여 새로운 비전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교육부의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연구지원이 절실하다.
This paper evaluated the achievements of the “Yeonhaengrok(燕行錄) National Translation Project”, which has been carried out by Memorial of the Great King Sejong since 2015 with the support of the Ministry of Education, at the academic level. And this paper examined meanings of the achievements and discussed the main purpose of presenting the future business direction. The “Yeonhaengrok National Translation Project” conducted by the Memorial of the Great King Sejong plays a very important role in establishing the basis for research on Sahaeng(使行:). So this paper was forced to proceed in connection with academic research.
First of all, the present meaning was evaluated by comparing and analyzing the performances of the “Yeonhaengrok National Translation Project” that have been submitted so far. Then this paper examined the future value of the achievements of the “Yeonhaengrok National Translation Project” by analyzing the achievements of academic research related to meandering from 2018 to 2020. Finally, in conjunction of the achievements of the “Yeonhaengrok National Translation Project,” policy suggestions were added on the future direction of the national translation project.
Yeonhaengrok, the record of diplomatic trip from Joseon to China(Ming and Ching), is the historical record of exchange between Korea and China, travel literature, and material of cultural·intellectual history indicated exchange, shock and awareness of culture. It is not only a document with its own value and meaning in Korea’s cultural heritage, but also recognized as a very unique entity in East Asian cultural history. Therefore Yeonhaengrok is very valuable as a material that reveals the homogeneity and heterogeneity of Korean-Chinese culture. The 20 volumes of Yeonhaengrok, translated and published by the Memorial of the Great King Sejong from 2015 to 2019, are very useful texts in revealing the academic value of these speculative records.
Therefore, the “Yeonhaengrok National Translation Project” needs to continuously submit high-quality results under a systematic plan than any other project. In addition, the connection with academic research should be strengthened even more than now. For this, the responsibility and cooperation of each project subject should precede anything else. Also, in addition to the evaluation of the Korean Classical Translation Institute, achievements presentations and academic seminars should be held regularly to evaluate the achievements of national translation in an overview, and to seek new visions in connection with academic research. Above all, stable and continuous research support from the Ministry of Education is desperately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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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598-1444
  • : 2384-2253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5-2021
  • : 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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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권0호(2021년 07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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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 중후기 왕실 도화서 화원들의 불화 제작과 그 영향

저자 : 최엽 ( Choi Yeob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3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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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는 왕실이 후원하여 궁중 도화서의 화원(畵員)들이 참여한 불사가 적지 않고, 이상좌·이맹근 등 화원들이 단독으로 제작한 불화도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과 비교해 조선 중기와 후기는 현전하는 작품도 화승들과 공동제작이거나 화원들의 참여여부가 명확하지 않아 이전 시기에 비해 화원들의 불화 제작 빈도수가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시기에는 사찰에 속한 화승(畵僧)들이 불교회화의 주요 제작자로서 활약한다.
비록 영세하긴 하지만 작품과 문헌기록을 통해 김명국, 이정 등 조선중후기 화원들의 불교회화 제작에 대한 사례들을 확인하였다. 조선 중기의 화원 박란의 경우, 화승들과 함께 참여하여 제작한 괘불도(掛佛圖)가 현재 한 점 남아있다. 김명국은 사찰의 승려들이 직접 그에게 의뢰하여 불교의 지옥 그림을 그린 것이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으며, 이정은 화원 집안으로서 여러 대에 걸쳐 불화를 제작한 사례가 역시 기록으로 전한다. 조선 후기는 왕실 화원이 참여한 수원 용주사 불사가 잘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때로는 이들 화원들과 화승들의 접점이 있었을 가능성도 추가로 제시하였다. 즉, 사찰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화원들이 사찰에 파견되어 불화를 제작하거나 화승들이 관청에 속에 화업(畵業)을 담당했던 사례를 통해 서로간의 영향관계를 추정해보았고, 이러한 상황은 사찰 내 불교회화에 새로운 요소들의 출현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내용들은 조선중후기 불화 제작의 다양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there were many Buddhist temples sponsored by the royal family and participated by hwawons(the Court Painters: 畵員) of Dohwaseo(圖畵署), and there also remained Buddhist paintings produced alone by painters such as Yi Sang-jwa and Yi Maeng-geun. Compared to this situation, in the mid to late Joseon Dynasty,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frequency of production of the Buddhist paintings by the hwawons decreases compared to the previous period because the existing works are either co-produced or the participation of the Hwawons is unclear. In addition, hwaseungs(Buddhist monk painters, 畵僧) belonging to Buddhist temples during this period were active as the main producers of the Buddhist paintings.
However, we confirmed through the literature that there were the cases of Buddhist paintings produced by the hwawons such as Kim Myeong-guk(金明國) and Yi Jeong(李楨) in the mid to late Joseon Dynasty, and sometimes, also suggested the possibility of a point of contact between the hwawons and the hwaseungs. In addition, we estimated the mutual influential relationship through the cases where at the request of the temple, the hwawons were dispatched to the temple to produce the Buddhist paintings or the hwaseungs were responsible for paintings in government offices, and determined that this situation would be also related to the emergence of new elements in the Buddhist paintings in the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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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책거리(冊巨里)10폭병풍≫ 연구

저자 : 김주연 ( Kim Joo Ye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7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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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책거리10폭병풍≫은 큰 규모에 다양한 기물들을 정갈한 수묵으로 묘사하여 기존의 화려한 채색으로 표현된 책거리 그림들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독특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소재와 기법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더 발견되어 부분 초본을 공유한 하나의 공방에서 특정 작가를 중심으로 한 사제 관계, 혹은 협업체계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작품들의 구도와 주요 기물은 이형록 등 화원에 의해 제작된 궁중 책거리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어색하게 변형된 공간감과 비례감, 기물을 가득 메운 문양들은 좀 더 민화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갈하고 세밀한 수묵의 필치는 문인적인 아취의 세계로 인도한다. 더욱이 병풍들에는 문방청완(文房淸玩) 취미를 정리한 명나라 말기의 저술 『고반여사(考槃餘事)』, 『장물지(長物志)』, 그리고 조선 19세기의 백과전서로 알려진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이운지(怡雲志)」 등에 소개된 확장된 청완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에 더하여 조선 19세기의 취미와 청나라 문물의 영향을 보여주는 품목들도 함께 어우러진다.
1870년경 '수석(水石)'이 그렸다는 수묵 책거리 병풍의 주문 제작 사례, 19세기 후반 궁중 책거리 그림과의 구도적 유사성,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본에 묘사된 그림 액자 등을 보아 이 작품들은 19세기 말경에 주문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문방청완과 애완의 취미가 엿보이는 병풍 속의 물상들은 재력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소유하기 어려운 것들이기에 이 작품들의 주문층은 19세기 문화를 주도했던 경화세족이나 새롭게 부를 축적한 부유한 중산층으로 짐작해 보았다. 즉 이 병풍의 소장자는 감상(鑑賞)보다는 소장품을 과시하면서 문인적 이상을 동경했던 호사자(豪奢者)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축적된 부로 문인문화를 즐겼던 당시의 사회문화양상이 그대로 드러난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The Chaekgeori 10-fold folding screen of Ewha Womans University Museum is a unique work that features a variety of artifacts with neat ink, which surpasses the traditional one. However, more works drawn with similar materials and techniques have been found, suggesting that they may have come from a particular painter in a collaborative workshop where master and disciple shared a partial design. The composition of the works and the main objects started from the royal Chaekgeori folding screens, but the awkwardly modified spatiality and proportionality filled with objects show more folklore and the detailed ink strokes lead to a world of literary taste. Furthermore, the folding screens feature a large number of scholar's accoutrement introduced in late Ming writings and Iunji, encyclopedia of the 19th century of Joseon. In addition, items that show the influence of hobbies in the 19th century of Joseon and the products of recent culture of the Qing Dynasty are combined.
Based on the custom-made case of the Ink-wash Chaekgeori folding screen, the compositional similarity to the royal Chaekgeori" folding screens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the picture frames depicted in the collection of the Ewha Womans University Museum, Chaekgeori folding screens are customized around the end of the 19th century. Objects in folding screens are affordable exclusively for the rich such as Gyeonghwasejok people or the rich middle class. Folding screen was an interesting work that reveals the social and cultural aspects of the time when the literary culture was enjoyed by accumulated w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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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사(渭士) 강필주(姜弼周)의 행적과 회화

저자 : 송희경 ( Song Heeky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1-10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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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渭士) 강필주(姜弼周, 1852-1932)는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화가다. 대한제국기에는 여러 도감의 화원으로, 1910년대에는 서화미술회와 서화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양식을 계승하여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기명절지도 등, 동양 회화의 다양한 제재를 두루 섭렵하였다. 화가 강필주의 공식 이력은 1900년 어진모사도감의 방외화원 선발에서부터 확인된다. 왕실과의 인연이 돈독하여 여러 의궤에 화사로 활약하거나, 고종이 주관한 함녕전 휘호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음력 1917년 '납월 상순'에 완성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기명절지도≫와 ≪노안도≫ 가리개는 왕세자 이은(李垠, 1897-1970)의 조선 방문을 기념하며 제작한 시각물이라고 판단된다. 이는 7년 만에 귀국한 왕세자와 고종, 순종이 함께 한 함녕전서온돌 오찬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필주는 1910년대 전통화단을 이끈 서화미술회와 서화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적지 않은 휘호회나 합작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는 주로 노안도나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현장에서 바로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시간적 제한과, 여타 작가의 화목과의 차별화를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Kang Pil-joo, also known for the art name Wei-sa, was an artist who was active from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e was active as a painter of various illustrated books during the Korean Empire and as a member of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rt Society and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in the 1910s. Furthermore, inheriting the style of Jang Seung-eop, he mastered all the materials of oriental painting, such as landscape paintings, portrait paintings, flower bird paintings, and still-life paintings of bowls and flowers.
Once can find the official history of Kang Pil-joo from as early as the selection of a nongovernmental painter in 1900. He also had a strong relationship with the members of the Royal House of Yi. Thus, he was active as a painter in various Uigwe (recordings of royal rituals and ceremonies of the Joseon Dynasty). He also participated in the artist gatherings for collaborative painting at Hamnyeongjeon, hosted by King Emeritus Gojong. In particular, the still-life paintings of bowls and flowers and wild goose paintings, completed at the beginning of the lunar calendar in 1917 and currently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are judged to have been visuals created to commemorate the visit of Crown Prince Yi Eun to Joseon. Such a judgment is based on the high probability that it was used for the celebratory luncheon in the West Ondol Chamber of Hamnyeongjeon, where the Crown Prince, who returned to Korea after 7 years, was joined by King Emeritus Gojong and King Sunjong.
Kang Pil-joo was a member of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rt Society and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which led the traditional art world in the 1910s; he also participated in a number of artist gatherings for joint painting and collaborative productions. On such occasions, he mainly painted wild goose paintings or landscape paintings. Such is interpreted to be the result of a combination of the time limit of having to complete the painting on the spot and the intention to differentiate it from other artists' harmon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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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여제(女帝)와 미술: 당 무측천(武則天)시대 낙양성의 정치적 기념비

저자 : 蘇鉉淑 ( So Hyunso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9-14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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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였던 무측천이 낙양성에 건립한 정치적 기념비 명당(明堂), 천당(天堂), 천추(天樞)를 무측천의 '낙양성의 공간 설계'라는 맥락에서 살펴보고, 그 성격과 의미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세 기념비를 설계자의 측면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이것을 보는 수용자의 인식까지 함께 살펴봄으로써 정치적 기념비의 종합적 이해를 시도했다.
무측천은 동도(東都) 낙양성을 신도(神都)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자신의 정치 거점으로 삼았다. 무측천이 낙양을 중시했던 데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낙양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역사적 정통성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낙양은 중국에서 고래로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되었으며, 중국에서 이상으로 여겼던 주(周)나라의 도읍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또한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땅이라는 불교적 정통성까지 갖고 있었다.
무측천은 낙양성의 역사적 전통 위에 여제의 통치공간으로서 낙양성을 신도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는 정통성의 시각화로서, 명당, 천당, 천추, 그리고 구정(九鼎)과 칠보(七寶) 등의 정치적 기념비의 조영을 통해 실현되었다. 당시의 시문(詩文)과 가요에 의하면, 이 기념비들은 낙양은 물론, 변방인 사주(沙州) 지역에서까지 무측천 통치의 정통성을 보여 주는 존재로 찬미되었다.


This study examines the political monuments Mingtang(明堂), Tiantang(天堂), and Tianshu(天樞), built on the Capital Luoyang(洛陽) by Empress Wu(武) of Tang Dynasty, in the context of "Space Design of the Capital Luoyang" and analyzes its characteristics and meanings. Furthermore, this study attempted to comprehensively understand political monuments by analyzing them in accordance with public perception away from the sponsor's point of view.
Empress Wu changed the name of Capital Luoyang, which was meant to be the capital of the east, to the name of the "City of God," and used it as her political base. Her emphasis on Luoyang was due to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factors, but the historical legitimacy of the city of Luoyang also played a major role. Since ancient times Luoyang has been regarded as the center of the world in China, and it was the place where the capital of ancient Zhou(周) Dynasty. It also had Buddhist legitimacy as the first land where Buddhism was introduced to China.
Empress Wu wanted to make Luoyang a sacred city, and built three political monuments there. Three monuments were built on the central axis of the Capital Luoyang. The topography of Luoyang is high in the north and low in the south, with the three monuments constructed from north to south in order of Tiantang, Mingtang, and Tianshu. In other words, the three monuments became the tallest buildings in Luoyang. Poetry and songs written in Luoyang and the western outskirts of China at that time praised the three monuments as a demonstration of the legitimacy of the em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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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규보 문학에 나타나는 자기형상의 양상과 그 의미 - 자술적(自述的)요소에 주목하여 -

저자 : 장진엽 ( Jang Jin-youp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18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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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李奎報(1168~1241) 문학의 自述的요소에 주목하여, 여기에 나타나는 작가의 자기형상을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규보의 자기형상은 狂과 直의 두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狂의 자기형상은 청년기의 좌절과 실의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십 대 후반 본격적으로 求官에 나서면서 이규보는 자신의 광을 '佯狂(거짓 미침)'으로 규정하며, 사실은 도를 품고 있는 고상한 인물임을 피력하고 자 애쓴다. 즉, 관료로서의 자질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狂에 대해 '변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자아상은 평생토록 지속된다. 또한 이규보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광인으로 명명하기도 했는데,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曠達한 성품을 지닌 문인 예술가의 형상이라는 狂의 긍정적 측면을 수용한 것이다.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한 30대에는 直의 자기형상이 등장한다. 29세에 지은 작품에서 자신이 못난 사람들에게 굽히지 않는 꼿꼿한 성격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直의 단초가 된다. 이규보는 32세에 전주목사록에서 파직된 후 자신의 성격을 '孤直'(홀로 곧음)으로 규정한다. 이 시기에 直은 '옳음'이라는 가치를 지키고 不義를 견디는 형상으로 그려진다. 直의 자아상은 40대 이후 작품에서는 두드러지지 않다가 63세에 위도로 귀양을 간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부상하는데, 이때 핵심이 되는 것은 '方直'(방정하고 곧음)의 자아상이다. 直의 형상은 관료로서의 자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아상으로, 이규보의 관료적 자부심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별도로 검토했지만 실제로 狂과 直의 정체성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두 가지 형상 모두 부정적 현실 속에서 왜소해진 자아에 대한 '변명', 또는 '자기 해명'으로서 출현한 자아상으로, 이규보의 내면에 평생토록 나란히 존재해 왔다. 여타의 문인들과 구별되는 이규보 자기형상의 독특한 점은 여기에 있으며, 이는 곧 당시 이규보가 처했던 정치·사회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한편 이규보의 자기형상을 그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자기형상은 일차적으로 그의 '주관적 의식의 산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문학적 표현'의 한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자기형상은 그가 처한 실제 현실 및 그에 대한 대응방식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으로서, 완전히 허구적인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한 인물의 자기형상은 그가 속했던 실제의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요컨대 이규보의 자기형상은 하나의 문학적 표현물인 동시에 고려중기 무인정권기 문인 지식인의 존재 양태를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가 되는 것이다.


This article examines Yi Kyupo (李奎報)'s literary portrayals of self, with special attention paid to the autobiographical descriptions found in his works.
Two key traits define Yi Kyupo's literary portrayals of self - madness (狂) and righteousness (直). The mad self formed during his young adulthood, when Yi Kyupo underwent frustration and failure; but later, while looking to launch his career as an official, Yi Kyupo tries to pass off his madness as a mere act. He makes an effort to show that he is actually a noble person with great morality, even going as far as to dismissing his madness as a 'fake madness (佯狂)'. However, in truth he never truly disavowed his characterization as a madman. Instead he actively called himself a madman to adopt the positive aspect of madness, with an aim to cast himself as a literati-artist with a free, unrestrainable nature.
Righteous self emerged once he began his career as an official in his 30s. Prior to this, at the age of 29, he characterized himself as someone who does not bow to lesser men. And this became the basis of his self portrayals as a righteous person; after getting dismissed from his then position - minister of Chŏnju - at the age of 32, he claimed he is, by nature, 'solely righteous (孤直)'. Here, he painted himself as a only defender of what is right, battling against unrighteousness (不義). Righteous self became dormant in his 40s, but emerged again when he was sent exile to Wido at the age of 63. But his word choice altered slightly, and the 'upright self' (方直) came to be the new 'righteous self'. It seems that Yi Kyupo aimed to find self-respect as an official by priding on the fact that he is a man of righteousness.
While discussed separately in this article, two main traits found in Yi Kyupo's perception of self - madness and righteousness - were closely related. Both features have been invented to help himself cope with a grim reality, from the time when he had to defend his shrunken ego or make excuses for himself. This factor, which has to do with Yi Kyupo's sociopolitical circumstances, distinguishes his self portrayals from that of other literati.
However, we should not take his self portrayals to be merely reflective of his life. Self-characterization found in writings is first of all, a product of a subjective mind, and constitutes just one method in an array of efforts to properly represent the self. Yet self portrayals are not complete fabrications as well, since they are found based on his understanding of his circumstances and reactions to said circumstances. For this reason, probing his self portrayals provides a meaningful gateway in navigating the society and history of his time. In short, his self portraits are on one hand, a literary work; but at the same time, it is also a valid testimony on a literati's mode of being during the mid-Koryŏ military regim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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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 문인의 수시(數詩)수용과 변주 양상

저자 : 박종훈 ( Park Chong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3-20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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數詩는 雜體詩의 한 詩體로, 宋나라 鮑照에서 시작되었다. 포조는 5언20구로 작품을 지으면서, 매 홀수 구의 첫 글자에 '一'부터 '十'까지 차례대로 배열하여, 삶에 대한 정회를 담아냈다. 조선 문인 역시 포조 작품의 영향하에 수시를 지속적으로 창작했다. 본고에서는 조선 문인 25人의 28首를 대상으로, 조선 문인의 수시 수용과 변주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잡체시는 희작의 성향이 강해 본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조선 문인 역시 희작의 경향을 그대로 이은 경우도 있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특별한 내용을 담은 작품들도 산견되어 주목된다. 김세렴과 황호 그리고 남용익은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문인과 수시로 화운하면서 양국 간의 우호의 내용을 적절하게 담아냈다. 또한 인평대군과 황호는 병자 호란의 실상을 언급하면서, 숭명반청 의식을 담아낸 독특한 일면도 있었다. 이로보자면, 단순히 희작의 경향만으로 수시 전체를 포괄할 수 없다.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5언20구의 전형을 벗어난 다양한 변주 양상이 확인되었다. '一'에서 부터 '十'까지의 전형에서 벗어나 '兆'까지 활용한 작품도 확인되었고 매 홀수 구의 첫 글자에 숫자를 안배했던 것에서도 벗어나 매 구의 첫 번째 글자에 숫자를 안배하는 작품도 보였다. 더불어 오언뿐만 아니라, 칠언으로 나아가 칠언절구로까지의 변주도 이루어졌다. 이는 스스로 제약을 다양하게 적용하여, 자신만의 시적 재능을 발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문인은 수시를 지속적으로 창작하면서, 희작에만 머물지 않고 당대의 상황이나 그에 대한 자신의 심사를 적절하게 담아냈다. 또한 형식적인 변주를 통해, 자신의 시적 재능을 맘껏 발산했다. 이는 기존 수시에 대한 일반적이고 인상적인 평가와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수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Numeric Poetry(數詩) is a form of miscellaneous poetry that began with the Pojo(鮑照) of the Song Dynasty. Pojo composed his work with 5 letters and 20 verses, arranging the first letters of odd-numbered phrases from '一' to '十'. In this way, he has captured the essence of his life. Choseon Dynasty writers also continued to create works under the influence of Pojo works. In this paper, the acceptance and variation aspects of Numeric Poetry were examined.
The miscellaneous poem was not considered to have been made as a joke. The Choseon Dynasty writers also maintained the trend of his works. However, in special circumstances, there are works with special contents. Kim Se-ryum, Hwang Ho, and Nam Yong-ik visited Japan and harmonized with Japanese writers, capturing the friend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Prince InPyeong and HwangHo mentioned the invasion of the Qing dynasty, and contained a ceremony to honor the Ming dynasty and reject the Qing dynasty. In this regard, it is not possible to cover the whole with the simple tendency to play.
In terms of form, it was used in a variety of ways, out of the basic form. There were works that used '一' to '十' as well as '兆', and instead of arranging numbers in the first letter of odd-numbered phrases, numbers were arranged in the first letter of each phrase. In addition to the five letters, the work was composed of seven letters and even seven letters and four phrases. This seems to be to show his own poetic talent by applying various constraints on his own.
Writers continued to create works that had the characteristics of a comedy, and they did not stop at a comedy, but contained the current situation and their own examination of it. Also, through formal variations, showed his poetic talent to the fullest. This is inconsistent with the existing general evaluation, and various approaches must be ta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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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물 서사 비교를 통해서 본 유연 옥사와 <유연전>의 간극 ― 진·가 판별과 창작 의도를 겸하여 ―

저자 : 김용기 ( Kim-yong Ki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9-2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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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유연 사건에 대한 상반된 기록을 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두 기록을 일차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리고 이를 수용한 조선 중후기 문집들의 수용 태도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작가 이항복이 <유연전>에서 이들의 기록들을 모두 수용하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창작 의도를 고찰하였다.
논의 결과 이항복은 <유연전>의 복잡한 서사를 통해 세 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첫째는 사람이 남의 말을 듣고 시비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벼슬아치들에게 공정하고 신중한 재판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자 한 것이다. 셋째는 유유를 통해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창작 의식이다.
이런 세 가지 창작 의도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에 실록의 두 가지 유연 옥사 기록과 <유연전>의 인물 서사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작가는 이러한 서사적 거리를 효율적인 결구 방식을 통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사필귀정, 권선징악과 같은 주제 의식도 함께 드러내었다.
마지막으로는 <유연전>의 진·가(眞假) 모티프에는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바로 진·가를 판별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중에 드러나는 '나를 지킴', 즉 '수오(守吾)'에 대한 문제다. 이 작품에서 진짜와 가짜를 증명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신체, 얼굴, 목소리'와 같은 외형적 근거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형제와 향족들, 그리고 종들의 주장이나 판정도 수용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진·가는, 어떤 시비에서도 '나를 잃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가 '나다움'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진·가를 판별해 준다는 의식이 담겨 있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documents of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including two contrary records about the affair of Youyeon. It was the receptive attitude that the researcher looked at the collection of books of the mid- to late Joseon period. The writing purpose of Lee-hangbok was considered. He accepted these records and revealed concretely.
On the basis of results, we could find out three things through the complicated narration of < Youyeonjeon >. First, people should listen to others and distinguish the right and the wrong. Second, he tried to give a lesson that the government officials have to judge fairly and carefully. Third, he reveals the creative conciousness that we have protect human rights through Youyou.
The characteristic narration of < Youyeonjeon > and two records about Youyeon's jail experience story are very different because he reveals these three purposes for writing. The writer could overcome the narrative distance and he raised degree of completion using construction methods. As a result, the thematic consciousness that the truth wins in the long run was revealed.
Lastly, there is a hidden intention in the true or false motif of < Youyeonjeon > and it is quite important. The point of keeping oneself, 'Suo' reveals in the process of judging the truth or false. The physical side like body, face or voice was not conceded as a resonable evidence. Brother, relative, or servant's opinion could not be accepted. The truth or flase emphasizing on this work is to focus on keeping oneself in a quarrel. It is the ability not to lose being myself and it has a consciousness that can distinguish truth or fa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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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근대계몽기 신문 소재 약성가(藥性歌)의 근대적 변전(變轉)과 의미 연구

저자 : 김형태 ( Kim Hyung-ta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9-26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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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성가는 병의 원인을 진단하고, 약의 성질을 밝혀놓으며, 한방에서 다루는 다양한 약재와 치료법 등을 나열한 시가이다. 약성가는 한의학이 의술의 대세를 이루었던 동북아시아 중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고 다양하게 전승된 전통이다. 또한 의학 관련 내용을 시조나 가사의 노래 형식으로 만들어 암송과 활용에 용이하게 만든 것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시가 향유 방식과 자질의 독특한 점을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갈래이다.
현재 약성가를 확인할 수 있는 텍스트는 조선후기의 의서, 소설 <흥부전>, 판소리 사설 <수궁가(水宮歌)>·<변강쇠가>, 가면극 <봉산탈춤> 등이고, 근대 신문과 잡지 수록 자료, 현대 희곡 등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근대의 신문 중 『대한매일신보』와 『대한민보』 소재 약성가를 대상으로 근대적 변전의 양상과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하여 조선후기 약성가류와 근대 약성가의 비교 방법을 통해 앞으로 확장될 관련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근대계몽기 신문에 수록된 약성가는 독서물로 정착하면서 기존의 부수적 성격으로부터 독자적 가결을 형성하였고, 근대 이전 약성가와 달리 의약가적 구성의 확장이 일어났으며, 내용 축약과 정제를 통한 변전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수궁가> 등 판소리에 포함된 약성가는 의서(醫書) 소재 약성가의 영향을 받았으며, 시가로서 충분히 향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가창 자질을 획득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근대 약성가는 신문 등 다양한 근대적 매체를 통해 시국을 알리고 사회의 각종 병폐를 고발하며, 그 해결책을 전달하려는 목적성을 띠게 되었다. 즉, 근대 약성가는 근대계몽기의 다양한 신문 및 학술지 발간에 힘입어 근대적 사유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기능한 것이다.


Yak-seong-ga(藥性歌) is a poem that diagnoses the cause of a disease, define the properties of the drug, and lists various drugs and treatments used in oriental medicine. And Yak-seong-ga(藥性歌) made drug-related contents in the form of songs to make it easier to memorize and write. Therefore, it is also a good literary asset that can confirm the enjoyment method and characteristics of classical Korean poetry.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confirm the aspect and meaning of modern transformation by targeting the Yak-seong-ga(藥性歌) in the modern newspapers 『The 『Korea Daily News』 and The 『Daehan Minbo』. For this purpose, the basis for related research to be expanded in the future was laid through the comparative method between the Yak-seong-ga(藥性歌)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modern Yak-seong-ga(藥性歌). The texts that can be used for the study include medical books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novel < Chun-hyang-jeon >, pan-so-ri editorial < Su-gung-ga > and < Byeon-gangso- ga >, and the mask play < Bong-san Mask Dance >, materials from modern newspapers and magazines, and modern plays.
The Yak-seong-ga(藥性歌) included in the newspapers of the Modern Enlightenment changed from the existing incidental character and formed an unique lyrics while settling down as a reading material. Also, unlike the pre-modern Yak-seong-ga(藥性歌), the composition of the medicinal value was expanded, and the aspect of transformation through content summary and refinement could be confirmed. In addition, it was possible to examine that influenced by the yak-seong songs included in the pan-so-ri such as < Su-gung-ga >, and acquired the singing qualities with the potential to be fully enjoyed as a poems and songs.
The modern Yak-seong-ga(藥性歌) has the purpose of informing the state of the world through various modern media such as newspapers, accusing society of various ills, and delivering solutions. In other words, the modern Yak-seong-ga (藥性歌) functioned as a means of disseminating modern thinking thanks to the publication of various newspapers and academic journals during the Modern Enlightenment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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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이날치'의 고전 현재화와 그 참여문화의 스토리텔링 - 음악 낯설게하기가 가져온 전경화와 그 효과들 -

저자 : 임형택 ( Im Hyeong-tae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9-30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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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치'는 단기간에 급성장한 퓨전 판소리팀으로서 흥겹고 대중적인 춤을 일으키는 얼터너티브 팝 밴드를 지향한다. 이들은 능동적·적극적 수용행위로 발전하는 인터넷 참여문화의 기반 위에서 성장했으니 그들을 키운 것은 탈경계·탈중심의 포스트모던한 글로벌 대중의 성원과 힘이었다. 이날치는 음악 '낯설게하기'를 통해 다양한 '전경화' 효과를 배태했다. 멜로디를 제외한 리듬 반주만으로 밴드를 구성했고 판소리 장단을 음악의 기조로 삼았다. 그 결과로 '희한하게 익숙하고 아름답게 낯선' 음악이 창조됐다. 그 신이한 음악은 글로벌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다양한 전경화 효과를 유발했다. 춤의 전경화는 그 첫 번째 효과로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이날치 공연의 몸-동작 즉 시각적 효과를 담당했고 그 역할을 적절히 수행했다.
글로벌 대중의 적극적 관심은 곧 다양하고 방대한 인터넷 밈들로 나타났다. 춤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 나타난 효과는 노래의 전경화였다. 리듬은 몸-동작뿐 아니라 몸-소리를 유발하므로 리듬의 소리 표출인 노래로의 관심 확장은 지당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래의 인터넷 밈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 상황은, 더 오래전부터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콘텐츠가 올라오는 춤의 인터넷 밈을 상기하면 더욱 의문스러운 것이다. 이에 관한 대중의 입장은 이날치 노래는 따라부르기에 너무 어렵다는 토로였다.
이 와중에서 예상되지 않았던 상황이 흥미롭게 전개됐다. '소리'를 할 줄 아는 전문가들이 이날치 노래의 재생산자로 호명된 것이다. 그들은 대중에게 판소리의 특성과 노래의 배경을 알려주고 나아가 이날치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대중이 노래 재생산의 주체는 아니되 판소리 명인·전공자를 호명하여 현대문화의 한마당에 세운 것은 대중이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야기의 전경화 효과가 발생했다. 노래를 익힌다는 것은 가사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며 이날치 노래는 곧 이야기[+하기]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점진적 전경화는 각 단계에서 스토리텔링을 생성하면서 판소리(고전) 현재화의 방법과 의미를 풍성하게 보여주었다. 또 이 과정은 다름 아닌 글로벌 범주에서 발생했다는 사실, 즉 처음에는 포스트모던한 글로벌 대중의 성향이 탈장르적·혼종적인 이날치를 글로벌 문화의 장에 불러냈으나, 결국 그들의 관심이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분명한 이야기로까지 확장됐다는 사실 역시 강조돼야 할 것이다. 이날치가 남기는 성과를 고전 현재화의 한 전범(典範)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낯섦과 전경화가 유발하는 참여문화의 스토리텔링 효과를 적극적으로 지향할 필요가 있겠다.


Inalchi' is a fusion pansori team that has grown rapidly in a short period of time and aims to be an alternative pop band that induces dance. They grew up on the basis of a culture of participation in the Internet that develops into active and active acceptance behaviors, so it was the support and strength of the public that nurtured them. Lee Nalchi embodies the effects of various 'Foregroundinging' through the music 'Defamilarization'. The band consisted of only rhythmic accompaniment excluding melody, and the rhythm of pansori was used as the keynote rhythm. As a result, “abnormally familiar and beautifully unfamiliar” music was created. The new music attracted the attention of the global public and caused a step-by-step foregrounding effect. As the first effect, Ambiguous Dance Company was in charge of the body-movement, or visual effect, of Inalchi's performance, and played a role in that first effect. The active interest of the global public soon emerged as a wide variety of Internet memes. The effect of getting used to dancing to some extent was the foregrounding of the song. In addition, rhythm induces not only body-movements but also mother-sounds. Therefore, the expansion of interest to the Sori(sound) version of the dance rhythm was a reasonable result. Strangely, however, few Internet memes of the song appeared. This situation is even more suspicious when you recall the Internet memes of dance that have been out for a long time and are still uploading new content. The public's position on this could be confirmed in the comments posted on Inalchi content, so the song was too difficult to follow. In the process, an unexpected situation unfolded interestingly. People who knew how to speak “Sori” were called as the reproducers of Inalchi's song. They informed the public about Pansori's unique rhythm, vocalization, and background knowledge of the song, and further taught the song Inalchi. The public was not the subject of song reproduction, but it was the public who called for a master or major in pansori to establish it in the midst of modern culture. And at this point, the foregrounding effect of the story occurred. Learning to sing means understanding the lyrics, and this is because this song is about Story+telling. The above gradual foregrounding painting created storytelling at each stage, showing the method and meaning of presenting pansori (classical studies) in abundance. Let's actively welcome the new defamilarization, foregrounding effect, and storytelling while accepting the achievements and effects left by Lee Nalchi as a model for the presentization of classical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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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사소절』에 나타난 이덕무의 아동교육관

저자 : 김인규 ( Kim In-gyu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5-3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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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사소절(士小節)』에 나타난 아동교육관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조 아동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선현들은 대부분 성리학자이었는데 비해,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의 아동교육관을 살펴보는 것은 성리학과 실학의 아동교육관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아동교육서로는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천자문(千字文)』과 주희(朱熹)가 편찬한 『소학(小學)』을 들 수 있다. 『천자문』이 문자 교육서라면, 『소학』은 유학 교육서로 조선시대 동몽 교육의 주(主) 교재였다. 그러나 『천자문』과 『소학』이 문자 교육과 유교 교육에 있어 많은 장점을 지지고 있지만, 16세기 이후에 아동교육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면서 많은 동몽 교재가 널리 편찬되었는데, 대표적인 문자 교육서로 『훈몽자회(訓蒙字會)』, 『신증유합(新增類合)』, 『아학편(兒學編)』 등이 있으며, 유학 교육서로 『아희원람(兒戱原覽)』, 『계몽편(啟蒙萹)』, 『동몽선습(童蒙先習)』, 『격몽요결(擊蒙要訣)』,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다.
『사소절』은 가정의 각 구성원인 '선비', '부녀자', '아이' 등이 일상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사소한 예절인 소절(小節)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집안의 자제들을 훈계할 목적으로 저술된 「동규」편은 『소학』의 아동교육론을 계승하여 소절(小節)이 대덕(大德)의 근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동몽기에 사소한 예절을 충실하게 실천함으로써 형성되는 올바른 습관과 태도가 장래에 큰 덕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근본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 대표적인 유학 교재라 하겠다.


This paper is to examine Ajeong Lee Deokmu's view of childhood education demonstrated on Sasojeol (Small Courtesy for Scholars). It is predominantly Neo-Confucian scholars who were concerned about childhood educa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has significance to look into the view of childhood education of Lee Deokmu, a Silhak scholar (Realist School of Confucianism), which enables to compare views of childhood education between Neo- Confucianism and Silhak.
As everyone knows, Thousand-Character Classic(千字文) written by Zhou Xingsi(周興嗣) and Xiaoxue(小學) published by Zhuxi are representative teaching materials for children in Joseon. Thousand-Character Classic serves as a textbook for character education while Xiaoxue works as a Confucian material, both of which are main materials for children education in Joseon era. Though Thousand-Character Classic and Xiaoxue had a lot of advantages for character and Confucian education, textbooks for children were widely published since new awareness and efforts for practice as to childhood education were reflected after the 16th century.
Sasojeol mainly describes small courtesy that family members of Confucian scholars, women and children should observe in daily lives. The part Donggyu particularly written in order to discipline children in a family inherited the view of childhood education on Xiaoxue to clarify that small courtesy (小節) is the root of greater virtue (大德). Dongyu is a typical textbook for children to stress that right habits and attitudes formed with thorough practice of small courtesy in childhood would serve as the basis to achieve greater virtues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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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용익의 <독사시장편삼백이십오운(讀史詩長篇三百二十五韻)>에 대하여

저자 : 이남면 ( Lee Nam-my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4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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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남용익의 <讀史詩長篇三百二十五韻>시를 고찰한 것이다. 이 작품은 중국의 太古시대부터 淸나라 초기까지 흥망성쇠의 변천 과정을 시대 순으로 읊은 칠언고시로, 총 325운이고 650구이며 4,550자에 이르는 장편 대작이다.
창작 동기는 남용익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勸善懲惡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하였으며 명말청초의 암울한 현실을 역사의 반추를 통해 위안 받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의 특징은 儒家的 이념과 사유에 입각한 역사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유가의 인물을 칭송하고 異端을 배척했으며, 蜀漢이 漢나라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기술했고, 곳곳에서 尊王攘夷 의식을 드러내었으며, 秦始皇과 隋煬帝 등 폭군을 비판한 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표현의 특징은, 우선 장법 면에서 褒와 貶의 반복과 그 거리 조절을 통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함으로써 단조로움을 피하였고, 역사의 전환기마다 과거와 새 시대를 연결하는 '聯'을 배치하여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시어의 사용은 '哀', '恨', '傷' 등 감정 표현의 글자를 사용하여 비판의 효과를 높였으며, 동물과 관련한 일화를 실패와 몰락 등의 표현을 위해 원용하는 한편 고인의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내어 역사를 현장감 있게 생생히 보여주었다. 구법 면에서는 7언구가 5언구에 비해 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장점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 시는 다양한 역사 기술의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해주었고, 家學을 통해 전승된 남용익의 역사 인식이 조선 후기 문인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다만 긴 편폭에 너무 많은 역사를 압축 제시하여 일별하기에 쉽지 않고 그 내용 또한 난해하다. 결국 이런 방식의 역사 시 창작이 후대에 계승되지 못한 것은 이 작품의 한계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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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의 설리시(說理詩) 연구(硏究)

저자 : 李貞和 ( Lee Jeong Hwa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7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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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설리적 언표로 자신의 사상을 표출한 병와 이형상의 학문 인식과 시세계의 상관관계를 탐색한 것이다. 병와가 애호한 산수는 음풍농월하기 위한 소일의 공간이 아니라 성학의 이치를 깨닫는 장소이자 학문적 사유의 공간이다. 병와의 학자적 풍모는 벼슬아치들이 모여 있는 조시에서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었으니, 오히려 초야에서의 은거생활 속에서 완성된 것이었다.
병와는 생전에 '병와순옹(甁窩順翁)'를 명정(銘旌)에 써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자신의 내면 수양에 철저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 의지가 매우 강하였다. <경전명(鏡前銘)>에서는 내면을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 유자의 자세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때 묻기 쉬운 마음 상태를 염려하여 수신해야 함을 일깨운 작품이 <경후명(鏡後銘)>이다. 또한 <경갑명(鏡匣銘)>에서는 먼지를 막기 위해 거울에 덮개가 있는 것과 같이 유자의 수기(修己) 역시 허물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절조축(節操祝)」은 자신의 기상을 낙락장송에 빗대어 표출하고 있는데, 올곧은 선비로 살았던 병와의 삶과 정신세계가 담겨 있다. 「임고알묘(臨皐謁廟)」에서는 유학의 도통을 전수한 포은을 스승으로 존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고결한 스승의 정신을 본받아서 자신 또한 지극한 정성을 다해 스승의 사우에 무릎을 꿇고 참배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에서 이러한 그의 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설리시에 내재된 시정신은 기본적으로 이학자의 구도 정신인데, 시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려고 한 것이다. 마음의 다스림을 수양의 근본으로 삼고 성학을 통해 체득한 이치를 생활 속에 실천하는 삶이 설리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공맹(孔孟)을 위시한 성현의 학문을 삶의 척도로 삼아 살아가는 유자의 일상은 수기(修己)가 중심이 됨은 물론이다. 병와의 시에는 『대학(大學)』을 비롯한 경전을 통해 성학의 가르침을 체득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시화한 작품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작품들에 나타나 있는 병와의 가르침은 오로지 학문에 전념해야 통찰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일깨우는 마음을 담고 있다.
병와시에는 실천궁행하는 삶의 자세가 바로 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병와는 설리시를 읊음으로써 사람이면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이 곧 '도'임을 표명하고 있으니, 이는 깨달음의 도가 충만할수록 더욱더 실천궁행하는 것이 유자의 바른 길임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일방삼연(一方三然)」에서 병와는 공자와 안회의 덕망을 우러르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인(仁)의 마음을 변치 않고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병와의 설리시 가운데 일상의 경솔한 언동을 경계하는 설리시가 들어 있는데, 이를 통해 신중한 태도로 살아가는 선비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삼성수수(三聖授受)」의 경우, 도심(道心)을 정밀하게 살피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삼가고 재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은사(隱士)인 소부·허유의 고사를 전고로 하여 「소허청절(巢許淸節)」을 읊은 바 있으니, 이 시에는 본성을 잃지 말 것을 권면하는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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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채주문(蔡周文) 사건의 서사화 양상을 통해 본 조선 후기 복수 서사의 이념성

저자 : 오보라 ( Oh Bo-ra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10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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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복수를 둘러싼 쟁점들이 복수 서사를 통해 유교 이념으로 포섭되고 유교 이념을 실천하는 행위로 미화되는 과정에 주목하여, 蔡周文 사건의 서사화 양상을 분석했다.
채주문의 복수 살인은 장계, 옥안, 판부 등의 공문서에 형성된 내러티브를 통해 정당한 행위로 판결되었다. 당초 황성엽에 대한 옥안에서는 채서우가 황성엽에 의해 죽은 것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경상감사의 장계 등에서 각종 정황 증거를 거론하여 채주문의 행위를 정당한 행위로 평가했다. 하지만 채주문의 복수 살인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논란을 해소하고자 창작된 것이 바로 정상리의 「채효자복수기사」이다. 채주문의 가문과 인척 관계였던 정상리는 실기류 산문을 통해 채주문의 복수가 정당한 행위였음을 역사적 사실로 명문화했다. 그 뒤 정민병과 고성겸은 「채효자전」을 지어, 채효자 사건을 인구에 회자될 만한 흥미롭고도 특출난 효행으로 윤색했다.
정민병은 정상리의 再從姪이었으며, 고성겸은 정민병과 교유했던 상주지역의 유생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정상리의 의도를 계승·발전하여, 복수사건을 보다 극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복수 준비 과정, 복수 살인 장면 등을 확대하고 새로운 서사를 삽입하여, 복수 서사를 흥미롭고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정민병과 고성겸이 새로 삽입하거나 확대한 서사 요소들은 모두 '孝'라는 가치와 긴밀하게 조응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이 창작한 「채효자전」은 독자들로 하여금 복수 관련 쟁점들을 상기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채주문의 행위를 보기 드문 위대한 효행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정민병과 고성겸이 이러한 서사화를 통해 노린 것은 궁극적으로 채주문이 정려를 받고 역사서에 기록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정상리, 정민병, 고성겸은 의도적으로 채주문의 복수 관련 의혹들을 제거하여, 채주문의 살인을 칭송할 만한 윤리적 행위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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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후산(后山) 정윤영(鄭胤永)의 『영악록(瀛嶽錄)』 일고찰(一考察)

저자 : 박종훈 ( Park Chong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9-14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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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금강산 유기로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后山 鄭胤永의 『瀛嶽錄』을 살펴본 것이다. 정윤영은 1897년 8월 16일 安城을 출발하여 內外 金剛과 東海를 유람하고 10월 8일 귀향했다.
『영악록』은 화성 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총 99면, 17,956자이다. 특징 중 하나는 前代문인들의 금강산 관련 기록을 대폭 수용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金昌協의 「東游記」와는 그 체제나 실제 내용에서 유사한 측면이 너무도 많다. 전인의 기록을 대폭 수용한 것은 『영악록』을 쓴 의도가, 단순히 금강산의 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목적의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목적은 첫째, 금강산의 절경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영악록』에는 산수 유람과 관련된 수많은 중국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직접 금강산을 말하지 않고 중국의 뛰어난 산수만을 표현함으로써 금강산의 절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냈고, 중국 산수와의 대비를 통해 금강산이 비교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둘째, 유자적 사유를 체험하는 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유람을 통해, 유자로서 평소 익혔던 사유를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체득하는 기회로 삼았다. 또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은 철저하게 고증하는 자세를 취했다. 셋째, 산수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절경의 산수에 대해서는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암벽에 새겨진 이름이나 정자에 걸린 작품 등을 통해 東國의 유람 습속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세웠다. 넷째,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로 삼기 위함이었다. 척화 관련 소장으로 유배의 시련을 겪었는데, 그러한 시련의 삶에 대한 진지한 회고가 담겨 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유람을 활용했는데, 이 부분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 측면에서도 그 목적의식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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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전문학에 수용된 인물의 특질과 형상화 방안 ― 설화 <우렁각시>를 중심으로 ―

저자 : 하경숙 ( Ha Kyoung-sook ) , 이정현 ( Lee Jung-hy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5-16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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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각시> 설화는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우렁각시는 다양한 유통을 통해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총각이 농사를 짓다가 우렁이를 발견하고 우렁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변신해 밥상을 차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총각과 처녀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이다.
설화 <우렁각시> 속에는 여성적이며 현실적이며 신비한 면모를 지닌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며, 사회적·문화적 문맥을 통하여 이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또한 결핍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는 여성의 특성을 중심으로 서사가 지니고 있는 관계적 가치를 풀어보고자 모색하였다. 우렁각시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아내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총각이 지닌 다양한 결핍과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해결해주는 인물이다. 아울러 현모양처의 면모가 상세히 드러난다.
우렁각시라는 인물은 독립적인 결정과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가는 능동적인 인물이다. 스스로 다양한 사건을 경험한 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명력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렁각시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서사에서는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상황으로의 국면을 전환하는 노력과 아울러 주체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우렁각시가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고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보다 삶에 대해 적극적이고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렁각시가 인간의 일상생활에 속하게 되면서 다양하고 신이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여성이 지닌 생명성을 동일하게 바라본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고대사회의 여성이 지니고 있는 생명에 대한 관점과 삶속에서 생명추구의 모습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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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연행록(燕行錄) 국역 사업'의 성과와 향후 과제 ― 학술적 가치와 연계하여 ―

저자 : 이홍식 ( Lee¸ Hongshi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7-19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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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2015년부터 수행하고 있는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를 학술적 차원에서 평가하고 그 의미를 점검하여 앞으로의 사업 방향을 제시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에 지금까지 제출된 연행록 국역 성과와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를 비교 분석하여 현재 의미를 평가하였고,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이루어진 사행 관련 학술연구 성과를 분석하여 '연행록 국역 사업' 성과의 미래 가치를 점검하였다. 마지막으로 '연행록 국역 사업'의 성과에 비추어서 앞으로의 국역 사업 진행 방향 등에 대해 정책 제언을 더하였다.
대중국 사행기록인 연행록은 한·중 교류의 역사적인 기록이자 문화의 교류와 충격 그리고 자각을 드러내는 문화사적·지성사적 자료이다. 우리 문화유산 속에서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닌 문헌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이에 한·중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밝히는 자료로써 그 가치가 매우 높은데,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번역 출간한 20권의 연행록은 이러한 사행기록의 학술적 가치를 드러내는 데 매우 유용한 텍스트이다.
따라서 '연행록 국역 사업'은 다른 어떤 사업보다도 체계적인 계획 아래에서 완성도 높은 성과를 지속적으로 제출할 필요가 있다. 더하여 학술 연구와의 연계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사업 주체들의 책임의식과 협업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더하여 한국고전번역원의 평가 심사 외에도 성과발표회 및 학술세미나 등을 주기적으로 개최하여 국역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학술연구와 연계하여 새로운 비전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교육부의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연구지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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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선조초반 사인조보(私印朝報)사건을 통해 본 정치상황과 조보(朝報)정책

저자 : 김경록 ( Kim Kyeong L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7-23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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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보는 승정원에서 정리하여 전국에 전파함으로써 국왕의 선정 및 통치의도를 알리는 목적으로 발간되었다.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요되는 필사조보를 인쇄하여 보다 많은 부수를 보다 편리하게 전파할 수 있음에도 선조는 이를 사건화하여 정국을 경색시켰다. 그 결과 인쇄를 통해 신속하고 대량으로 전파할 수 있음에도 인쇄조보를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은 유교국가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사대부의 지배체제가 공론정치를 지향했다. 공론정치를 지속하고 확장하기 위해 국왕의 정당한 정치를 알리고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활용된 것이 조보였다. 조보는 국왕과 왕실의 동정 및 각종 예제, 인사정책, 관리의 공론정치 및 보고서와 이에 대한 국왕의 처분을 포함하였다. 조선은 건국직후 조보를 왕정의 전파수단으로 인식하여 철저히 통제하고자 하였으며, 각종 정치사건, 예제사건, 인사정책에 조보는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선조는 즉위하며 명종대에 척신정치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층의 분화 및 대립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유교국가의 정통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런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군사적 위기의식이 고조되자 선조는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즉, 선조는 왕위계승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치 상황에 대응하고자 정세를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에 의한 사인조보의 발행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처벌함으로써 조보를 왕권의 대외 전파수단임을 강조했다.
1577년(선조 10) 선조의 備忘記에서 시작된 사인조보사건은 유교국가에서 조보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직계왕손으로 즉위하지 못한 선조가 초반기 왕위의 정통성과 통치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였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국왕의 정당한 통치를 전파하는 조보를 민간에서 사적 이익을 위해 인쇄하였다는 점은 선조로써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약 3개월의 조사를 통해 30여 명의 관련자를 처벌한 선조는 향후 조보의 인쇄를 금지하고 철저한 관리를 지시하며 사건을 종료했다.
선조에 의해 제기되고 처벌된 사인조보사건은 선조초반 정치상황의 전개과정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재위 10년을 경과하며 선조는 왕위의 권위를 회복하고 갈등구도의 정치상황을 주도적으로 운영하고자 사인조보사건을 정치사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철저히 엄단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제 사인조보는 당시 명에서 일상적으로 시행되는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王政의 전파 및 전달단계를 원활히 함과 동시에 이의 발행을 수월하게 하여 민간에서 이익을 가지고자 했던 사회발전의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선조는 사인조보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왕명출납의 한방식이라 강조하였다. 조보는 이후 매우 한정적으로 발행되었으며, 임진전쟁의 와중에 통치질서가 붕괴되자 이를 보완하는 매체로 활용됨으로써 선조초반 사인조보사건이 선조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발생하였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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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성호 이익의 관혼례(冠婚禮) 의절(儀節) 연구

저자 : 도민재 ( Doh Min-ja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5-26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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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성호 이익이 실제 관례와 혼례를 거행하며 의식절차를 정리한 「산절관의(刪節冠儀)」와 「취부의(娶婦儀)」, 「가녀의(嫁女儀)」의 내용 분석을 통해, 이익이 제시한 실용적인 관례와 혼례 의절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이익은 관례에서 빈객을 모시는 절차를 생략하고, 삼가례는 한 번으로 간소화하여 관례 시행에 필요한 의복이나 기물 준비에 드는 비용 부담을 줄였다. 이는 예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가난한 집안의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현실적인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혼례는 시속(時俗)을 따라 친영(親迎)을 하지 않고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청기(請期)'도 신랑집이 아닌 신부집에서 청하도록 하고, 폐백과 음식의 종류 및 가짓수를 간소화하여 실용적인 혼례 의식을 제시했다.
이익은 『가례』가 의례 실천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점은 인정했으나, 『가례』의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실적인 경제 상황에 맞추어 의례를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가난한 양반이나 일반 서인들이 『가례』를 제대로 따르기 어려운 현실에서, 경제적인 측면에 구애되지 않고 시행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의례의 형식을 제시했다. 이처럼 이익은 당시 조선의 현실에 알맞은 실용적인 의례 실천을 추구하여, 형식에 치우친 허례허식(虛禮虛飾)이 아닌 진정한 실학으로서의 예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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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희의 미발공부 유무와 호락논쟁

저자 : 이종우 ( Yi Jongwoo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5-29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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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미발시 공부로서 계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훗날 조선후기 호락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호학의 한원진은 낙학인 이현익의 미발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김창흡을 지지하였다. 당시 김창흡은 낙학에서 이현익과 박필주가 논쟁을 벌인 것에 대하여 이현익을 비판하면서 박필주를 지지하였다. 그는 미발시에도 함양공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현익은 미발이란 희노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일 뿐만 아니라 허황된 생각도 생기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주희의 미발무공부에 근거하였다. 반면에 김창흡은 그러한 상태일지라도 그것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에 함양으로서 계신공구 공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주희의 미발공부에 근거하였다. 김창흡은 미발이란 본연지성만 있으므로 순선하다고 여긴 반면에 한원진은 기질지성도 있기 때문에 선악이 함께 있다고 여긴 것이 다른 점이다. 이간은 미발을 본연지성만 있으므로 순선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이 김창흡과 공통점이다. 이 때문에 『정조실록』에서 이간을 김창흡과 같은 낙학으로 분류하였으나 미발시 공부설도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간은 미발을 중과 부중으로 구분하여 부중의 미발은 공부가 필요하지만 중의 미발은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주희의 미발공부의 유무에 근거하였다. 이간의 미발시 무공부는 이현익과 공통점을 갖는 반면에 김창흡과 다르다. 그러므로 『정조실록』에서 이간과 김창흡을 낙학으로 분류한 것은 미발시 본연지성만 있다는 주장이 같았기 때문일 뿐 공부설이 같아서 분류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의 미발시 공부에 관한 논쟁은 성리학의 목적에 해당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호락논쟁의 결론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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