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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역사: 고아열차와 빈곤 아동의 이미지

Marginal History: The Orphan Trains and the Image of Child Poverty

전동호 ( Chun¸ Dongho ) , 전종설 ( Chun¸ Jongserl ) , 정익중 ( Chung¸ Ick-joong )
  •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5월
  • : 6-27(22pages)
미술사와 시각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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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고아열차의 등장 배경
Ⅲ. 고아열차란 무엇인가?
Ⅳ. 고아열차를 통한 아동의 배치
Ⅴ. 고아열차 제도의 종말
Ⅵ. 19세기 미국의 빈곤 아동 이미지
Ⅶ.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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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열차(Orphan Train)’ 운동은 뉴욕 등 동부지역 대도시의 가난하고 집 없는 아이들을 미국 전역의 농촌으로 이주시킨 일종의 빈민 구제 프로그램으로 1854년과 1929년 사이에 총 20만 명가량의 빈곤 아동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한 것으로 추산된다. 즉 고아나 버려진 어린이들이 뉴욕시 등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에서 인구밀도가 낮은 미국의 다른 농촌 지역으로 대량 이주했는데 이동이 주로 열차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후에 고아열차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사회개혁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브레이스(Charles Loring Brace, 1826-1890)는 1853년 뉴욕시에 아동구호협회를 설립했으며, 도시환경에서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농촌의 기독교가정에 보내는 것이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농촌 생활에 대한 낭만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기술을 배우고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농촌 지역으로 보낼 대담한 계획을 시도하였다. 이는 1854년 최초의 고아열차 운행으로 이어졌으며 아동구호협회의 고아열차 프로그램은 널리 모방되었다. 보스턴과 시카고의 수녀회(Sisters of Charity)는 4만 명의 어린이를 미국 농촌 지역 가톨릭 공동체에 보냈으며, 또한 영국,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본고는 미국의 저명한 삽화가 로크웰(Norman Rockwell, 1894-1978)이 1951년 고아열차를 소재로 삼아 제작한 유화를 지렛대 삼아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고아열차의 출현과 전개를 학술적으로 조명한 글이다. 이 고아들은 누구이며 왜 등장했고 고아열차는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한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빈곤 아동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당대 미국의 미술가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본고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시론적 탐구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그간 학계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아동복지의 역사와 미술사학의 접점을 탐색하고 학제적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본고의 일차적 목적이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혹은 이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던 아동의 역사는 늘 주류가 아닌 변방의 역사였다. 이제는 아동의 관점에서 이들의 삶과 목소리를 재구성하고 재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며 이를 위해서는 아동사와 아동복지학 그리고 미술사학 간의 학제적 협력과 고민이 절실하다.
The Orphan Train Movement was an early American child welfare program that relocated destitute children from crowded Eastern cities of the United States to foster homes located predominantly in rural areas of the Midwest. The orphan trains operated between 1854 and 1929, transporting roughly 200,000 children. Initiated by Charles Loring Brace (1826-1890) and the Children’s Aid Society that he founded in 1853, the program placed homeless, orphaned and abandoned urban children, exceeding 30,000 in New York City alone in the 1850s, in rural homes throughout the country. They were mainly transported to new homes by trains, hence the term ‘orphan train’ was coined. The movement terminated in the 1920s with the advent of organized foster care in America. Brace’s idea that children are better looked after by families at home than in institutions, however, is the most fundamental keystone of modern foster care. Employing the 1951 painting of the orphan train by Norman Rockwell (1894-1978) as an interlocutor, this article explores the history of the orphan train and its visual representations, a subject hardly known in Korean academia. In doing so, it seeks to establish an interdisciplinary partnership between art history and child welfare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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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예체능분야  > 미술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599-7324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02-2021
  • :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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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권0호(2021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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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변방의 역사: 고아열차와 빈곤 아동의 이미지

저자 : 전동호 ( Chun¸ Dongho ) , 전종설 ( Chun¸ Jongserl ) , 정익중 ( Chung¸ Ick-joo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27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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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열차(Orphan Train)' 운동은 뉴욕 등 동부지역 대도시의 가난하고 집 없는 아이들을 미국 전역의 농촌으로 이주시킨 일종의 빈민 구제 프로그램으로 1854년과 1929년 사이에 총 20만 명가량의 빈곤 아동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한 것으로 추산된다. 즉 고아나 버려진 어린이들이 뉴욕시 등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에서 인구밀도가 낮은 미국의 다른 농촌 지역으로 대량 이주했는데 이동이 주로 열차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후에 고아열차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사회개혁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브레이스(Charles Loring Brace, 1826-1890)는 1853년 뉴욕시에 아동구호협회를 설립했으며, 도시환경에서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농촌의 기독교가정에 보내는 것이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농촌 생활에 대한 낭만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기술을 배우고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농촌 지역으로 보낼 대담한 계획을 시도하였다. 이는 1854년 최초의 고아열차 운행으로 이어졌으며 아동구호협회의 고아열차 프로그램은 널리 모방되었다. 보스턴과 시카고의 수녀회(Sisters of Charity)는 4만 명의 어린이를 미국 농촌 지역 가톨릭 공동체에 보냈으며, 또한 영국,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본고는 미국의 저명한 삽화가 로크웰(Norman Rockwell, 1894-1978)이 1951년 고아열차를 소재로 삼아 제작한 유화를 지렛대 삼아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고아열차의 출현과 전개를 학술적으로 조명한 글이다. 이 고아들은 누구이며 왜 등장했고 고아열차는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한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빈곤 아동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당대 미국의 미술가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본고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시론적 탐구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그간 학계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아동복지의 역사와 미술사학의 접점을 탐색하고 학제적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본고의 일차적 목적이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혹은 이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던 아동의 역사는 늘 주류가 아닌 변방의 역사였다. 이제는 아동의 관점에서 이들의 삶과 목소리를 재구성하고 재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며 이를 위해서는 아동사와 아동복지학 그리고 미술사학 간의 학제적 협력과 고민이 절실하다.


The Orphan Train Movement was an early American child welfare program that relocated destitute children from crowded Eastern cities of the United States to foster homes located predominantly in rural areas of the Midwest. The orphan trains operated between 1854 and 1929, transporting roughly 200,000 children. Initiated by Charles Loring Brace (1826-1890) and the Children's Aid Society that he founded in 1853, the program placed homeless, orphaned and abandoned urban children, exceeding 30,000 in New York City alone in the 1850s, in rural homes throughout the country. They were mainly transported to new homes by trains, hence the term 'orphan train' was coined. The movement terminated in the 1920s with the advent of organized foster care in America. Brace's idea that children are better looked after by families at home than in institutions, however, is the most fundamental keystone of modern foster care. Employing the 1951 painting of the orphan train by Norman Rockwell (1894-1978) as an interlocutor, this article explores the history of the orphan train and its visual representations, a subject hardly known in Korean academia. In doing so, it seeks to establish an interdisciplinary partnership between art history and child welfare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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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숭불(崇佛)과 숭유(崇儒)의 충돌, 16세기 중엽 산수 표현의 정치학 ―〈도갑사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과 〈무이구곡도〉 및 〈도산도〉

저자 : 조규희 ( Cho¸ Kyuhe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67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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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그동안 불교 회화와 유교 관련 산수화로 각기 논의되어 온 〈도갑사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道岬寺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과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및 〈도산도(陶山圖)〉가 숭불(崇佛)과 숭유(崇儒)가 충돌하던 16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가 배태한 정치적 산수화임을 논증한다. 16세기 중엽은 국시(國是)로 내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조선 사회에서 심화되었던 시기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기는 유학자가 아닌 승려를 보필로 삼아 '여성'이 '숭불정책'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당시로서는 '부자연스러운' 시기였다. 12세의 나이에 즉위한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을 대신하여 모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8년간 섭정하면서 억불(抑佛)정책을 폐지하고 1550년에는 유생과 사대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숭불정책을 공식화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의 위세가 대단하던 1550년에 왕실의 후원으로 제작된 그림이 〈도갑사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대폭의 비단 화면의 5분의 4가량이 산수로 채워져 있는, 기존 관음보살도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을 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의 관음보살은 바로 뒤의 봉우리가 후광(後光)처럼 가장 높이 부각되어 그려진 오봉산을 배경으로 하단의 산악 위로 홀로 솟은 높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이 땅에 내려와 군림하는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봉이 높게 표현된 오봉산의 표현은 조선시대 어좌 뒤에 설치된 '오봉산병풍(五峯山屛風)'의 이미지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산악 아래 펼쳐진 세상을 내다보는 관음의 이미지는 관음의 화신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한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그리게 한 '관음현상(觀音現相)'의 이미지와도 관련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오봉산을 배경으로 산악으로 둘러싸인 세상을 내다보는 관음의 이미지가 곧 통치자로 읽히던 조선적 시각문화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울러 오봉산을 배경으로 산악을 내다보며 '국토' 위에 군림하는 이미지로 관음보살이 그려진 1550년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문정왕후의 권력이 정점에 이른 해였다.
이 논문은 이렇게 관음보살 탱화가 특이하게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이 표현되었을 뿐 아니라 산악 아래로는 뭇 재난에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32응신 장면이 그려진 이유를 문정왕후 통치기의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섬세하게 살펴본 글이다. 즉 이 글에서는 작품이 제작된 시기와 봉안될 장소에 대한 의미를 검토하여 이 작품이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이 그려진 의미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 〈무이구곡도〉와 〈도산도〉라는 도갑사 탱화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산수화가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이황(李滉, 1501-1570)과 연관되어 처음으로 등장한 연유 역시 왕실 주도의 숭불과 이황 일파의 숭유가 첨예하게 부딪히던 당시 '산수' 현장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도갑사 탱화와 〈무이구곡도〉의 화기(畵記)와 발문(跋文)이 각기 인종(仁宗, 재위 1544-1545)과 을사사화(乙巳士禍)를 환기하고 있는 이유도 이 점에서 이해된다. 16세기 중엽에 그려진 '산수'가 당시 여론의 향방과 직결된 정치적 산수화였음을 규명한 것이 본 논문의 의의다.


This paper argues that Thirty-two Responsive Manifestations of Avalokites´vara from Dogapsa Temple, Muigugokdo and Dosando, which have been discussed as a Buddhist painting and Neo-Confucianism-related landscape paintings, are, in fact, political landscapes of mid-sixteenth- century Joseon Korea when partisan sungbul (boosting Buddhism) and sungyu (promoting Neo- Confucianism) policies and attitudes clashed. The middle of the 16th century is mentioned as a period when the understanding of Neo-Confucianism was deepened in Joseon society. However, this period was actually the time when Buddhism prevailed. On behalf of King Myeongjong (r. 1545-1567), who was enthroned at the age of 12, Queen Dowager Munjeong (1501-1565) was regent for eight years. She pushed the policies to promote Buddhism in the Confucian nation. Monk Bou (1509-1565) as her political and religious ally played a key role in the promotion of Buddhism during her reign. She revived an official system of training and selecting monks in both the Seon (Ch. Chan; J. Zen Buddhism) and Gyo (Textual School) sects despite the severe opposition of the officials and Confucian scholars in 1550. In the same year when Buddhism was so powerful like this, Thirty-two Responsive Manifestations of Avalokites´vara from Dogapsa Temple was created. It was a royal family-sponsored Buddhist painting.
Unusually for the image of the Gwaneum (Ch. Guanyin) Bodhisattva (Avalokites´vara), the mountain is depicted in four-fifths of the entire painting. Therefore, although it is a Buddhist painting, it is more like a landscape painting. The image of Gwanseeumbosal (Avalokites´vara) itself represents the Water and Moon Gwaneum. However, the most striking disparity is the usage of landscape. Avalokites´vara dominantly sits on the towering cliff at the center with the five mountain peaks in the background. In other words, the Gwaneum Bodhisattva in this work is depicted as an image of descending to this land and ruling the world while sitting alone on a high rock above the hills and mountains at the bottom against the background of Mount Obong (Five Peaks). The image of Avalokites´vara against the backdrop of the Five Peaks, in which the middle peak was depicted high, was also that of the Obongsan byeongpung, a folding screen of the Five Peaks, installed behind the king's chair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addition, the image of the Gwaneum Bodhisattva overlooking the world under the mountains is also related to the image of Avalokitesvara created by King Sejo (r. 1455-1468), who invented his image as the incarnation of Gwanseeumbosal, the bodhisattva of compassion. Therefore, it is noteworthy that this work can be understood in the Joseon visual culture, where this image of Avalokitesvara was read as a ruler. The year 1550, when Avalokitesvara was painted as a divine Buddhist deity overlooking the world against the backdrop of Mount Obong, was the year when the power of Queen Dowager Munjeong reached its peak.
This paper examines the reason why Thirty-two Responsive Manifestations of Avalokites´vara from Dogapsa Temple is not only created as a unique landscape painting, but also a scene depicting 32 different incarnations in the mountains to save those suffering from disasters. In other words, examination of the crisis of the time when the work was produced and enshrined in Dogapsa Temple will shed light on the intention of this work drawn like a landscape painting. At the same time, during this period, The Nine-Bend Stream of Mount Wuyi (Muigugokdo) and Mount Do (Dosando), which are landscape paintings with a completely different character from Thirty-two Responsive Manifestations, first appeared in connection with Yi Hwang (1501- 1570), a representative of the Yeongnam sarim (literati in the Yeongnam area). The Yeongnam region was the area in which the court policy of promoting Buddhism and the upholding of Neo-Confucian fundamentalism by Yi Hwang and his followers clashed. Based on a new interpretation of these three works, this thesis argues that the landscape paintings of the mid-16th century were political paintings directly connected to the conflicts between Buddhism and Neo-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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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숙종대 장녕전(長寧殿) 건립과 어진 봉안

저자 : 이종숙 ( Lee¸ Jongsoo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8-101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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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재위 중인 국왕의 어진을 제작하는 전통을 다시 살려 1695년과 1713년에 자신의 어진을 진전에 봉안하게 했다. 1695년에 조세걸(曺世傑, 1636-?)이 그린 숙종 어진은 2본이었으며, 1본은 강화부(江華府)의 장녕전(長寧殿)에, 다른 1본은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에 봉안되었다. 강화는 외적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갖춘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이자 국가의 보장처(保障處)로 인식되었으며, 숙종 이전에도 이곳에 진전을 세우고 태조 어진과 세조 어진을 봉안한 일이 있었다.
숙종은 1695년의 어진 제작과 진전 건립을 신하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진행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신하들 중 일부가 강화의 영전(影殿) 영건(營建)을 반대하자 숙종은 비밀리에 서둘러 어진을 강화로 내려보냈다. 이후 강화 유수 김구(金構, 1649-1704)가 격식을 갖추어 어진 봉안 의식을 엄숙히 거행하도록 건의함에 따라 숙종은 어진 봉안 행사를 공식적으로 준비하게 하였다. 그는 예조의 관리들을 강화에 파견하여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장녕전에 어진을 봉안하게 했다. 이때 숙종 어진은 흑칠궤에 담긴 상태 그대로 장녕전 내부 어탑(御榻) 위에 봉안되었다.
1695년에 장녕전에 봉안된 어진은 숙종의 평소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학창의(鶴氅衣)와 당혜(唐鞋)를 착용하고 머리에 역괘고후관(易卦高後冠)을 쓴 모습의 전신상이었다. 이러한 옷차림은 조선 시대 국왕의 전형적인 어진과 큰 차이를 보인다. 숙종은 일상에서 학창의를 종종 착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 사대부들도 학창의와 고후관을 일상복으로 착용했다.
1695년에 봉안된 숙종 어진은 1713년(숙종 39)에 새로 그려진 어진으로 교체되었다. 1713년은 숙종이 즉위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숙종은 이를 계기로 새로운 어진 제작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원유관본과 익선관본 어진이 각 1본씩 그려졌으며 원유관본은 강화 장녕전에, 익선관본은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되었다. 어진 제작을 위해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이 설치되었으며 어진 제작과 관련된 많은 사안들이 숙종과 신하들 간의 논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어진을 장녕전에 봉안하는 의식도 미리 응행절목(應行節目)을 마련하여 엄숙히 거행했으며, 왕세자와 백관들이 경덕궁의 정문에 나와 강화로 출발하는 어진을 배웅했다. 이처럼 1713년의 어진 제작과 봉안은 거의 모든 면에서 1695년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진을 펼쳐서 봉안하지 않고 궤에 들어 있는 상태로 어탑 위에 봉안한 것은 이전과 동일했다. 장녕전과 선원전에 새로운 어진이 봉안된 후 기존 어진은 세초(洗草)되었다. 두 곳의 숙종 어진은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승하한 이후인 1720년에 펼쳐서 봉안되었다.
숙종이 1713년에 어진을 새로 제작한 표면적 이유는 기존에 장녕전에 봉안된 어진이 미진(未盡)하여 후대에 전하기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진'이라는 표현은 인물 묘사에 사실성이 부족함을 뜻하기보다는 국왕의 어진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학창의와 고후관 차림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어진은 사대부 초상화와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숙종은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시각적으로 국왕의 권위와 우월함이 뚜렷이 드러나는 어진을 새로 제작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새로 그린 어진을 봉안한 뒤 기존 어진들을 세초해서 없애 버린 것은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초상은 국왕의 어진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나온 조치로 여겨진다.


King Sukjong (r. 1674-1720), the 19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resumed the production and enshrinement of portraits of present kings that had ceased for a long time. In 1695, Sukjong had Jo Segeol (1636-?) paint two portraits of himself. One of the two was enshrined in the Jangnyeongjeon, a portrait hall newly constructed on Ganghwa Island. Thought to be secure from foreign invasions and also located close to the capital where the royal palace was situated, Ganghwa Island would have probably been considered the most fitting location for the enshrinement of the royal portraits. King Sukjong did not inform his officials of his portrait production and the construction of the Jangnyeongjeon Hall. He secretly sent the portrait to Ganghwa Island even before the completion of the portrait hall. Following the proposal of Kim Gu (1649-1704), a local governor of Ganghwa Island, the king dispatched officials from the capital to have them conduct a ceremony for the portrait enshrinement. Different from portraits of the former kings in formal robes displaying their status as king, that of Sukjong enshrined in Jangnyeonjeon Hall showed him in a hakchangui robe and a gohugwan hat, plain and informal daily costumes for noblemen during the Joseon period.
In 1713, King Sukjong instructed the painters to depict himself in the king's official robes. A temporary office for the superintendence of the royal portrait production was organized. In the office, court officials actively expressed their opinions about the central issues in the creation of the portrait such as selecting painters and choosing the best sketch for the portrait. Two portraits of the king in total were produced at the time. One showed him dressed in a gollyongpo robe with an ikseongwan hat, and the other presented him in a gangsapo robe and a wonyugwan hat. The one depicting the king in a Gangsapo coat replaced the old portrait in the Jangnyeongjeon Hall. The officials prepared the manual for the conveyance and enshrinement of the portrait which didn't exist before 1713. When the procession for conveyance, consisting of a palanquin carrying the portrait, ministers, armed soldiers, and a court musical band, set out for Ganghwa Island from the palace, the crown prince and officials in formal robes paid their utmost respect for the portrait outside the gates of the palace and bowed several times. After the new portrait was enshrined in the Jangnyeongjeon Hall, the old one was erased with water.
The portrait of King Sukjong produced in 1695, depicting him in daily robes for nobility in Joseon Korea , may have been in appearance similar to the portraits of noblemen. Over time, however, the portrait that made him look quite ordinary would have been no longer valuable to him. The fact that King Sukjong officially produced the portraits of himself in royal attire in 1713 clearly proves that he would have realized the significance of a king's portrait distinctly demonstrating the ruler's authority and power. The king's portrait in the Joseon dynasty manifesting his absolute superiority and dignity finally turned into the king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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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계회도(契會圖)에서 계병(稧屛)으로: 조선 시대 왕실 계병의 정착과 계승

저자 : 김수진 ( Kim¸ Soo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2-127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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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부터 조선 왕실은 국가 행사를 마친 후 이것을 기념하고 기록하기 위해 계병(稧屛)을 제작했다. 계병은 조선 전기에 사대부 사이에 유행했던 계회도(契會圖)의 제작 관습을 왕실이 전용(轉用)함으로써 이를 왕실 차원의 문화적 전통으로 계승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계병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으며 누가 어떻게 주문하고 나누어 가졌는가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계병은 조선 전기에 관원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제작되었던 계회도의 성격과 근본적으로 유사하지만, 그 표장(表裝) 형식, 발주 및 주문의 주체, 회화의 주제와 구성 면에서 크게 바뀐 측면이 있다. 본 연구는 관원들의 계회도가 어떻게 왕실 계화(稧畵)로 정착하는지를 검토하는 차원에서 18세기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대에 계화가축(軸)·첩(帖)·권(卷)·병(屛)으로 형식상의 각축(角逐)을 벌이다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시대에 이르러 병풍으로 정착되는 역사를 살핀 것이다. 아울러 계병이 실제로 제작되는 과정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재원(財源)이 마련되고 내입(內入)과 분하(分下)를 통해 왕실과 신료들에게 나누어지는 과정이 논의되었다. 이 전통은 19세기에 이르러 계병채(稧屛債)라는 안정적 재원을 확보하면서 20세기 초반까지 꾸준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The Joseon court produced documentary folding screens (gyebyeong) in order to commemorate and record each and every royal event since the eighteenth century. To establish a model for gyebyeong, the Joseon court used the tradition of gyehoedo showing scholar-officials' gatherings. While consulting gyehoedo, court painters depicted royal events in folding screen format. As a result, a new format of painting, that is gyebyeong, was finally created.
This paper aims to answer a series of questions regarding the emergence and popularity of gyebyeong such as who commissioned gyebyeong, to whom copies of gyebyeong were distributed, and how the production of gyebyeong was sponsored. To this end, this paper begins with an analysis of how the four formats of gyehoedo (i.e., hanging scroll, album, handscroll, and folding screen) came to be unified into a single format of folding screen during King Yeongjo's and Jeongjo's reigns. Then, it discusses the recipients of copies of gyebyeong and their connections to gyebyeongchae, the costs of production for gyebyeong. Eventually, this paper aims to shed light on the social and cultural roles of the gyebyeong tradition that continued until the end of the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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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한종의 사실주의적 어해 화풍의 성격과 형성배경

저자 : 김태은 ( Kim¸ Tae-eu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8-159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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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종(張漢宗, 1768-1815)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와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연간에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畫員)으로 활동하였던 화가이다. 그는 물고기와 게 등 각종 수생생물(水生生物)을 소재로 삼은 어해도(魚蟹圖)로 명성이 높았다. 장한종은 길상 소재를 다룬 수묵 어해도뿐 아니라 세필(細筆)과 채색을 사용하여 어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새로운 방식의 어해도를 제작하였다. 본고에서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어해병풍(魚蟹屛風)》 8폭을 중심으로 장한종의 사실주의적 어해 화풍의 성격과 그 형성배경을 분석하였다.
장한종은 기존 어해도의 전통을 바탕으로 사실적 어해 화풍을 새롭게 시도하였다. 그의 어해도에 묘사된 유영(遊泳)하는 어류의 이미지는 중국의 고전에 근거한 도상이었다. 또한 전통적인 길상 소재는 명대(明代)의 화조화 구성 및 당대에 유행하던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의 산수 표현과 함께 그려졌다. 그러나 장한종 어해도의 가장 큰 특징은 수십 종의 수생생물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어류와 관련된 지식을 시각화하였다는 것이다. 장한종은 《어해병풍》에 66종(種) 이상의 수생생물을 묘사하였으며 각 생물의 외양, 생태, 서식지 등에 대한 지식을 그림에 정확히 표현하였다. 그의 이러한 작화(作畵) 방식은 사물의 개별성을 인정하며 다양한 대상을 전문적으로 탐구하였던 조선 후기의 명물학(名物學)적 학문 경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시기에 저술된 어류와 관련된 명물서(名物書)들은 장한종의 어해도 제작에 참고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한종이 어해도에 최초로 사용한 병풍 형식은 조선 후기에 가장 선호되던 회화 매체이자 다양한 어종에 관한 시각정보를 전달하기에 유용한 수단이었다. 병풍에 표현된 장한종의 사실주의적 어해 화풍은 조선 말기의 어해도 작가들에게 계승되어 조선의 새로운 어해도 전통을 형성하였다.


Jang Hanjong was a chabi daeryeong hwawon (painter-in-waiting to the court) active during the reigns of Kings Jeongjo (r. 1776-1800) and Sunjo (r. 1800- 1834). He was most renowned for fish and crab paintings. He made traditional ink paintings and also initiated a new painting style depicting fish and crabs with meticulous brushwork and extreme realism. This study considers the characteristics and intellectual background of this new style by examining Jang's Fish and Crab Folding Scree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currently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Jang attempted to portray aquatic organisms such as fish, crabs, and plants with astonishing realism while keeping with the iconographical tradition of fish and crab paintings. The motif of swimming fish he often drew had a long history originating from the Chinese classics. The traditional auspicious motifs of fish appeared in his painting with the bird and flower painting style of the Ming dynasty and the style of Kim Hongdo's (1745-after 1806) landscapes. However, the most significant character of Jang's fish and crab paintings is that he presented his knowledge of aquatic organisms in visual terms. For the Fish and Crab Folding Screen, he depicted more than 66 species of aquatic organisms, providing accurate information on their appearance, nature, and habitat. This style of painting was closely related to the popularity of Myeongmulhak (evidential and encyclopedic studies of names and things) which focused on the individuality of each object and took a profound interest in various things. It is likely that the books written with expert knowledge on fish under the influence of Myeongmulhak served as references for Jang. The folding screen, a painting format popular in the late Joseon and used for the first time for fish and crab paintings by Jang, was most suitable for offering information on creatures living in water. Jang Hanjong's Fish and Crab Folding Screen shows a new style of realistic fish and crab painting, laying the foundation for later pictures of aquatic animals and plants. Numerous painters active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followed Jang's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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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감로도(甘露圖)의 제명(題名) 문제(問題)에 대한 재고(再考)

저자 : 박영아 ( Pak¸ Taylor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0-191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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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도(甘露圖)는 한국의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다양한 제명(題名)으로 지칭되어 온 회화 장르이다. 1923년 세키노 타다시(関野貞, 1868-1935)를 시작으로, 한국 및 일본 학자들은 각자 감로도의 도상 내용과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한 제명을 사용해 왔다. 이 과정에서 화기(畵記)에 보이는 제명, 즉 〈하단탱(下壇幀)〉, 〈감로왕탱(甘露王幀)〉, 〈감로회(甘露會)〉, 〈감로탱(甘露幀)〉 혹은 〈감로탱화(甘露幀畵)〉 등은 물론, <시아귀도(施餓鬼圖)〉, 〈우란분경변상(盂蘭盆經變相)〉, 〈수륙회도(水陸會圖)〉 등 새롭게 고안된 제명이 각각 사용되었다. 이들은 이와 같은 제명 설정의 근거와 타당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감로도라는 회화 장르에 대한 일관된 이해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본고는 이와 같은 감로도의 제명 문제를 조명한 글이다. 감로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는 학계에서 감로도의 제명을 다양하게 사용하게 된 각각의 경위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작업이다. 이를 통해 본고에서는 개별 작품의 도상 구성과 그 해석에 근거한 제명 사이에 나타나는 부적합성이 지적되었다. 이로써 본고는 다수의 제명이 갖는 다양성을 도상의 구성 요소가 아닌 감로도가 제단화(祭壇畵)로 사용된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감로도와 조선시대 불교의 의례적 체계 사이의 관련성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The Gamnodo is a Korean Buddhist painting genre which has been subjected to scrutiny exceptionally under different titles in modern scholarship. Since its introduction in the early 1920s, Korean and Japanese scholars have adopted either or both of historically derived and newly reconstructed titles that they purport to represent its iconographic content. The varying appellations thus accordingly guided manifold iconographical interpretations. This has in turn impeded a coherent understanding of the genre in its entirety. This paper addresses the very issue of the Gamnodo's viable connection to multiple titles. Through a careful examination of the historiographical trajectory of scholarship on the Gamnodo, it sheds light on the modern reception of the genre and the unwonted specificity of its attributed titles. As the paper reveals discordances between each title and iconographical capacity of the Gamnodo, the collective distinctiveness of the varied titles is found exclusively linked with the functional quality of the ritual altar on which the genre was installed from the sixteenth century onward. The Gamnodo's appellations are observed essentially anew in the contemporaneous liturgical framework of Joseon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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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상회(傷懷)의 풍경: 항성모(項聖謨, 1597-1658)와 명청(明淸) 전환기

저자 : 장진성 ( Chang¸ Chin-su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2-219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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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嘉興)의 거부(巨富)였던 항성모(項聖謨, 1597-1658)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진 '명청(明淸) 전환기'에 활동한 화가이다. 항성모는 1645년 청군의 가흥 침공으로 모든 것을 잃었으며 이후 피란 생활 속에 직업화가로 곤궁한 삶을 살았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 1606-1645)의 군대가 자금성(紫禁城)을 포위하자 숭정제(崇禎帝, 재위 1628-1644)는 매산(煤山)에 올라 액사(縊死)하였다. 숭정제의 자살과 명나라의 멸망 소식을 들은 항성모는 〈주색자화상(朱色自畵像)〉 (1644년)을 그렸는데 이 그림에 나타난 붉은색은 명나라 황실의 성(姓)인 주(朱)를 상징하는 색채이다. 이 그림에는 항성모의 강렬한 유민(遺民) 의식과 망국에 대한 충성심이 나타나 있다. 1645년에 가흥이 청군에 의해 함락되자 항성모는 어머니와 처자와 함께 급히 피신하여 유랑 생활을 하였다. 이후 그는 영락(零落)한 자신을 주제로 한 자화상과 산수화를 다수 남겼다. 1646년에 항성모가 그린 〈자화상〉에는 피란 생활 속에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그의 모습, 즉 직업화가로서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같은 해에 그린 〈홍수추산도(紅樹秋山圖)(1646년), 〈대수도(大樹圖)〉(1649년), 〈대수풍호도(大樹風號圖)〉(1649년경)에는 홀로 산천을 떠도는 '운유(雲遊)' 또는 '배회(徘徊)'하는 인물이 나타나 있다. 이 인물은 다름 아닌 항성모 자신이다. 그는 이 그림들을 통해 숭정제가 죽고 나라가 망한 '갑신지변(甲申之變)', 을유년 가흥에서 일어난 청군의 만행, 동생 항가모의 자살, 어머니와 처자와 함께 간신히 가흥을 탈출했던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토로하였다. 특히 그는 이 작품들에 붉은색을 사용하여 명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심과 아울러 강남 지역에서 벌어진 청군의 대학살로 인해 피로 얼룩진 세상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붉은색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동시에 피[血]로 물든 산천에 대한 아픈 기억이었다. 가흥으로 돌아온 항성모는 〈송도선산도(松濤仙山圖)〉(1652년), 〈상우도(尙友圖)〉(1652년) 등을 통해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회고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들에는 1644년 이전 부유하고 행복했던 항성모의 옛 시절에 대한 추억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는 피에 대한 기억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그린 <산수도(山水圖)>(1658년)에는 여전히 바위 절벽이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숭정제의 자살, 명나라의 멸망, 청군이 강남 지역에서 명나라 백성들에게 행한 대학살, 만주족 군대의 가흥 침공 등 일련의 사건들로 발생한 그의 정신적 상처[傷懷, trauma]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The fall of the Ming dynasty (1368-1644) fundamentally affected almost everyman's life. The post-1644 life of Xiang Shengmo (1597-1658), a cultural luminary and eminent painter of Jiaxing in Zhejiang province, was no exception. Xiang was a wealthy and privileged landowner and aesthete of great refinement and sensitivity whose comfortable and luxurious life was abruptly disrupted by the chaotic years of the Ming-Qing transition. The heyday of Xiang's elegant life came to an end when the grim news that the last Ming emperor had taken his life and rebel forces had occupied the capital city reached the city of Jiaxing. In deep sorrow and despair, Xiang painted Self-Portrait in Red Landscape, a remarkable self-portrait in 1644, shortly after the fall of the Ming, to express his unchanging loyalty to his dead ruler and country. Self-Portrait in Red Landscape shows the painter in a vermilion landscape. Xiang used red, in Chinese, zhu, to allude to the last name of the Ming imperial family. Red Trees and Autumn Mountains (1646) shows a figure aimlessly wandering in the dark forest like a helpless orphan who has no shelter to settle. The lone wanderer in the wilderness is a striking self-image of the painter. Tall Tree in Howling Wind, ca. 1649, is a haunting landscape showing a large oak tree at which a staff-bearing old man wearing a red robe is looking up. Instead of dying for the fallen dynasty, Xiang self-fashioned himself as a loyal leftover subject mourning the tragic end of the emperor and the bygone dynasty. In 1652, Xiang painted in collaboration with Xie Bin (1602-?), a student of the famous portraitist of the late Ming period Zeng Jing (1564-1647), A Carefree Immortal among Waves of Pines, showing Xiang as a lone stroller in the wilderness. Venerable Friends (1652), by Xiang and his friend Zhang Qi (active mid-seventeenth century), is filled with the former's nostalgia for the happy years before 1644. In this way, Xiang attempted to rebuild in his mind and his paintings the world that he had lost. But, the lost world never returned to him. It only existed in his painful memories and reminiscences. Landscape (1658) is one of the last paintings by Xiang depicts the land of the Peach Blossom Spring with a magic grotto and blossoming peach trees in which he attempts to find a shelter in peace after the years of traumatic su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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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베이징대학화법연구회(北京大學畫法硏究會)와 1920년대 베이징 전통파 화단

저자 : 정수진 ( Jung¸ Soo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0-245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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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대학화법연구회(北京大學畫法硏究會)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초대 교육부 총장과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의 교장을 지낸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8-1940)가 1918년에 설립한 회화사단(繪畫社團)이다. 차이위안페이는 '미육(美育)'을 통한 교육개혁이라는 자신의 신념과 중국 회화의 개혁이라는 목표 실현을 위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즉 이 사단은 '서구 미술의 사실주의 도입을 통한 중국 미술 개혁'이라는 방향성이 뚜렷한 단체였다. 그런데 본래 목표와는 달리 이 단체의 활동은 베이징 전통파(傳統派) 화단의 결속과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본 논문은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요인을 분석하고 나아가 전통의 보존과 개혁의 추구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20세기 초반 베이징 미술계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취지로 작성되었다.
이 시기 전통파 화단의 성장 배경으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베이징 화단의 주도 세력이었던 '문인 엘리트'들의 보수성과 이들의 전통 회화에 대한 옹호이다. 둘째는 대표적 전통파 회화사단인 '중국화학연구회(中國畫學硏究會)'의 설립과 베이징대학화법연구회 운영방식의 참작을 통한 이 사단의 근대적인 운영이다. 셋째는 중국화 개량론에 대항하기 위해 정립한 전통파 화단의 이론이다. 전통파 화가들은 자신의 주장을 베이징대학화법연구회의 기간지 『회학잡지(繪學雜誌)』 등에 게재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보다 정밀화된 이론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전통파 화단은 1920년대의 베이징 미술계를 주도할 수 있었다. 이는 베이징대학화법연구회의 기치와 선구적인 운영 형태가 정체되어 있던 베이징의 미술계에 준 자극과 범본(範本)으로서의 역할이 있었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결과이다.


In 1918, the Beijing University's Society for Research on Painting Methods was founded by Cai Yuanpei (1868-1940). What led Cai, who served as the principal of Beijing University and the first Minister of Education of the Chinese Republic, to establish the Society was his ambition to revolutionize Chinese painting through introducing “aesthetic education.” The Society was therefore initiated with the clear intent to reform Chinese art by adopting Western realism. However, contrary to Cai's goal, the Society resulted in strengthening the union of traditionalist painting groups and their influence. This paper analyzes several factors that contributed to this unexpected outcome and examines the various activities of Beijing's artistic circles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There are three factors behind the advent of traditionalist painting groups in Beijing during this period: first, the conservatism of literati elites, the leading figures of the Beijing art scene of the time, and their advocacy of traditional paintings; second, the founding of a traditionalist group, the Society for the Study of Chinese Painting, and its management modeled after that of the Beijing University's Society for Research on Painting Methods; third, the establishment of traditional painting theories as a counteraction to Chinese painting reformation theories. Besides, traditionalists also reinforced their position by publishing articles in the Painting Scholarship Magazine, the periodical journal of the Beijing University's Society for Research on Painting Methods.
Owing to these factors, the traditionalist painters dominated Beijing's art scene in the 1920s. In short, the modern progressive system of the Beijing University's Society for Research on Painting Methods served as a catalyst for the resurgence of traditional artistic principles in the midst of the stagnant art scene of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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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내 아시아관에는 높이가 308cm에 달하는 대형 불교 조상비가 전시되어 있다. 이 조상비는 〈트뤼브너 조상비(the Trübner stele)〉로 불리는데, 이전 소장자였던 외르그 트뤼브너(Jörg Trübner, 1902?-1930)의 성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명문에 의하면 이 조상비는 북위(北魏) 영희(永熙) 2년(533)에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동위(東魏) 무정(武定) 원년(元年, 543)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트뤼브너 조상비〉는 구미의 여러 유명 미술관에 소장된 중국 불교 조각들 중에 가장 논의가 분분한 예 중 하나이다. 이 조상비는 6세기 불교 조각의 가장 중요한 명작으로 높이 평가받기도 했으며, 동시에 20세기 초의 위작이라고 폄하되기도 하였다. 특히 〈트뤼브너 조상비〉 정면의 많은 부분이 보수되면서 원형을 잃고 다시 조각되었다며 그 의미가 축소되기도 했다.
〈트뤼브너 조상비〉를 둘러싼 논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간단하지 않지만, 중국 불교미술 연구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구미(歐美)의 중국 조각 컬렉션의 역사와 의미를 조명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먼저 이 조상비의 정면과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와 여러 제명(題名)들을 6세기 중엽의 역사적, 지리적 상황과 대조해 보는 것이다. 다음은 조상비에 새겨진 불·보살상의 도상과 양식, 조각의 주제 및 화면 구성과 배치 등을 마찬가지로 6세기 중엽 전후 중국의 불교 석굴, 조상비 및 단독 조상(造像) 등에 나타난 시각적 요소들과 비교함으로써 미술사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이다.
이 조상비의 정면 조각의 표현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에 논란이 많았다. 반면 이와 대조적으로 조상기의 내용 및 서체(書體)에는 그간 특별히 논란이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조상비를 건립한 주요 공양자(供養者), 이와 관련된 이 조상비의 명칭, 그리고 이 조상비가 원래 세워졌던 지역 및 사원명(寺院名) 등과 관련해서 논란이 있는 부분이 적지 않으므로, 조상기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트뤼브너 조상비〉의 명문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된 공양자의 인명과 관직명, 그리고 원래 위치에 관해 알려 줄 수 있는 지명 등이 6세기 중엽의 역사적, 지리적 상황과 잘 부합된다는 사실을 밝힌 글이다. 따라서 이 조상비의 명문 부분만으로 판단한다면 〈트뤼브너 조상비〉는 6세기 중엽경에 제작된 진작(眞作)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트뤼브너 조상비〉를 건립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공양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도찬(李道贊), 혁련자열(赫連子悅), 무맹종사(武猛從事)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이 조상비의 원래 위치 및 관련 사원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 하남 북부의 기현(淇縣) 부근으로 그 범위를 좁혀볼 수 있다.
조상기와 제명 등 조상비에 기록된 명문은 6세기 중엽 무렵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기록을 잘 담고 있다. 이 명문이 틀림없이 6세기 중엽경 제작된 진작으로 판단됨에 따라 〈트뤼브너 조상비〉의 진위 문제 중 절반 정도는 해결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문 관련 논의의 진행만으로는 이 조상비의 진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따라서 〈트뤼브너 조상비〉의 진위에 대한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조상비에 새겨진 불·보살상과 여러 인물들 및 장식 요소 등을 미술사적으로 상세히 분석해야 한다. 필자는 〈트뤼브너 조상비〉는 6세기 중엽경에 제작된 원작이 이후 어느 시기엔가 보수되면서 재조각되어 다시 봉안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별고를 통해 다룰 생각이다.


A large Buddhist stele, called “the Trubner stele” named after Jorg Trubner (1902-1930), its former owner and an art dealer, is displayed at the gallery for Chinese Buddhist art on the second floor of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in New York. According to the inscription carved on the front and obverse sides of the stele, its creation began in 533 during the Northern Wei dynasty (386- 534) and was completed in 543 during the Eastern Wei dynasty (534-550). The Trubner stele is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Chinese Buddhist sculptures housed in several renowned art museums i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It has been highly acclaimed as the most important masterpiece among Chinese Buddhist sculptures from the sixth century, disparaged as a forgery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or even disregarded for having been considerably recut and restored.
The effort to resolve the controversy surrounding the Trubner stele is not that simple, but the issue is crucial not only in the history of Chinese Buddhist art, but also in illuminating the history and contribution of the collections of Chinese sculptures i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Such investigation can be carried out in two main ways. The first is to compare the names of men who participated in the creation of the stele, their official titles, and place names carved in the dedicatory inscription of the stele to the historical and geographical circumstances of the mid-sixth century. Secondly, visual imageries carved on the stele, such as Buddhas, bodhisattvas, other figures, and ornamental elements should also be extensively investigated in terms of form, style, and iconography, using visual elements from Buddhist caves, Buddhist steles, and freestanding sculptures in China from the sixth century.
In contrast to the controversy over the authenticity of the sculptures carved on the frontal surface of the stele, little question has been raised over the contents and calligraphic style of the stele's inscription. However, it is essential to analyze the inscription, since there are many controversies concerning the main contributor of the stele, the original geographical location, and the temple wherein it was originally established. This paper investigates the dedicatory inscription on the Trubner stele and reveals that the names of patrons, their official titles, and place names are in good accordance with the historical and geographical circumstances of the mid-sixth century. Thus, it can be an important clue in locating the original location. Accordingly, this stele can be considered a genuine Buddhist sculpture produced in the midsixth century. However, there are various opinions on who contributed the most to the construction of the stele, including Li Daozan, Helian Ziyue, or the wumeng congshi. There is also disagreement about the original location of this stele and the associated temple, but it cannot be determined accurately at this point. In general, the area can be narrowed down to the northern part of the Henan province near Qi County.
Since the dedicatory inscription carved on the stele reflects the historical situation of the mid-sixth century, the inscription itself can be regarded as a genuine work created at that time. Thus, at least half of the issue regarding the authenticity of the Trubner stele appears to be resolved. Nevertheless, these discussions over the dedicatory inscription alone does not fully address the issue of authenticity over the stele. In order to resolve the controversy, it is fundamental to closely examine Buddhist imageries and other visual elements carved on the stele.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genuine piece of the Trubner stele was created in the sixth century, but the frontal surface of the stele had been substantially damaged and thus had to be recarved and rededicated at some point to be the present form of the Trubner stele. I would like to proceed with this argument through a separate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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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제작에서 실천으로: 1970년대 미공투 REVOLUTION 위원회의 영상 작업

저자 : 박혜연 ( Park¸ Haeyu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6-311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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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타마미술대학(多摩美術大学) 재학생인 호리 코사이(堀浩哉, 1947-)와 히코사카 나오요시(彦坂尚嘉, 1946-)의 주도로 결성된 미공투 REVOLUTION 위원회(美共闘REVOLUTION委員会)는 작업을 통한 미술 표현에 내재된 미술의 근원적인 제도성을 비판하였다. 미공투 위원회의 작가들은 60년대 말 '제작의 상실'이라는 모더니즘 미술의 위기 앞에서 그들의 선행 세대인 일본개념파(日本概念派)와 모노하(もの派)가 제작을 회피하고 관념주의 미술을 지향한 것을 비판하며 개인의 자율적인 표현 행위로 여겨졌던 '제작'을 집단이 주체가 되어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서 행하는 사회적인 노동, 즉 '실천'으로 변환하였다. 미공투 위원회에 대한 기존 미술사학계의 논의는 1970년대 후반 회화 매체를 이용한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의 영상 작업은 “표현 이전, 예술 이전”의 과도기적인 중간 단계로 파악되었다. 본 논문은 미공투 위원회의 영상 작업을 중점적으로 논의함으로써 기존 해석과는 반대로 당시 그들의 작업이 일상적인 삶의 장소에서 이미 구체적인 예술 표현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주장한 글이다. 또한 영상이라는 매체가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의 토대 위에 미술을 위치시키고자 했던 미공투 위원회 작가들의 작업에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본 논문은 학술적으로 조명하였다.


Bikyōtō REVOLUTION Committee was organized in 1970 by artists Hori Kōsai (1947-) and Hikosaka Naoyoshi (1946-), who were students at Tama Art University in Tokyo. They recognized that artistic expression itself was fundamentally linked to the institutionality of art and sought to critique the structural problem of “art as institution.” They criticized that the Japanese conceptualists and Mono-ha, faced with the crisis of modernist art in the late '60s, avoided “making” by taking a contemplative approach to art. Instead, they sought to transform “production,” which was considered an individualistic and autonomous activity, to “practice,” a collective form of social labor that unfolds in the space of everyday life. Art historical scholarship on Bikyōtō REVOLUTION Committee has focused on the artists' paintings in the latter half of the 1970s, while relegating their moving image works in the first half of the decade as a transitional period of “pre-expression, pre-art.” Contrary to this evaluation, this paper focuses on the group's moving image works in the first half of the decade and argues that they had already appeared as concrete forms of artistic expression that unfolded in the specific time and space of daily life. Furthermore, this paper demonstrates how moving image media provided a theoretical and praxis-oriented foundation to the work of Bikyōtō REVOLUTION Committee, which sought to position art firmly on the grounds of the “here and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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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변방의 역사: 고아열차와 빈곤 아동의 이미지

저자 : 전동호 ( Chun¸ Dongho ) , 전종설 ( Chun¸ Jongserl ) , 정익중 ( Chung¸ Ick-joo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27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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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열차(Orphan Train)' 운동은 뉴욕 등 동부지역 대도시의 가난하고 집 없는 아이들을 미국 전역의 농촌으로 이주시킨 일종의 빈민 구제 프로그램으로 1854년과 1929년 사이에 총 20만 명가량의 빈곤 아동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한 것으로 추산된다. 즉 고아나 버려진 어린이들이 뉴욕시 등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에서 인구밀도가 낮은 미국의 다른 농촌 지역으로 대량 이주했는데 이동이 주로 열차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후에 고아열차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사회개혁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브레이스(Charles Loring Brace, 1826-1890)는 1853년 뉴욕시에 아동구호협회를 설립했으며, 도시환경에서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농촌의 기독교가정에 보내는 것이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농촌 생활에 대한 낭만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기술을 배우고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농촌 지역으로 보낼 대담한 계획을 시도하였다. 이는 1854년 최초의 고아열차 운행으로 이어졌으며 아동구호협회의 고아열차 프로그램은 널리 모방되었다. 보스턴과 시카고의 수녀회(Sisters of Charity)는 4만 명의 어린이를 미국 농촌 지역 가톨릭 공동체에 보냈으며, 또한 영국,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본고는 미국의 저명한 삽화가 로크웰(Norman Rockwell, 1894-1978)이 1951년 고아열차를 소재로 삼아 제작한 유화를 지렛대 삼아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고아열차의 출현과 전개를 학술적으로 조명한 글이다. 이 고아들은 누구이며 왜 등장했고 고아열차는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한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빈곤 아동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당대 미국의 미술가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본고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시론적 탐구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그간 학계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아동복지의 역사와 미술사학의 접점을 탐색하고 학제적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본고의 일차적 목적이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혹은 이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던 아동의 역사는 늘 주류가 아닌 변방의 역사였다. 이제는 아동의 관점에서 이들의 삶과 목소리를 재구성하고 재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며 이를 위해서는 아동사와 아동복지학 그리고 미술사학 간의 학제적 협력과 고민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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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그동안 불교 회화와 유교 관련 산수화로 각기 논의되어 온 〈도갑사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道岬寺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과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및 〈도산도(陶山圖)〉가 숭불(崇佛)과 숭유(崇儒)가 충돌하던 16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가 배태한 정치적 산수화임을 논증한다. 16세기 중엽은 국시(國是)로 내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조선 사회에서 심화되었던 시기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기는 유학자가 아닌 승려를 보필로 삼아 '여성'이 '숭불정책'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당시로서는 '부자연스러운' 시기였다. 12세의 나이에 즉위한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을 대신하여 모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8년간 섭정하면서 억불(抑佛)정책을 폐지하고 1550년에는 유생과 사대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숭불정책을 공식화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의 위세가 대단하던 1550년에 왕실의 후원으로 제작된 그림이 〈도갑사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대폭의 비단 화면의 5분의 4가량이 산수로 채워져 있는, 기존 관음보살도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을 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의 관음보살은 바로 뒤의 봉우리가 후광(後光)처럼 가장 높이 부각되어 그려진 오봉산을 배경으로 하단의 산악 위로 홀로 솟은 높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이 땅에 내려와 군림하는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봉이 높게 표현된 오봉산의 표현은 조선시대 어좌 뒤에 설치된 '오봉산병풍(五峯山屛風)'의 이미지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산악 아래 펼쳐진 세상을 내다보는 관음의 이미지는 관음의 화신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한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그리게 한 '관음현상(觀音現相)'의 이미지와도 관련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오봉산을 배경으로 산악으로 둘러싸인 세상을 내다보는 관음의 이미지가 곧 통치자로 읽히던 조선적 시각문화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울러 오봉산을 배경으로 산악을 내다보며 '국토' 위에 군림하는 이미지로 관음보살이 그려진 1550년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문정왕후의 권력이 정점에 이른 해였다.
이 논문은 이렇게 관음보살 탱화가 특이하게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이 표현되었을 뿐 아니라 산악 아래로는 뭇 재난에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32응신 장면이 그려진 이유를 문정왕후 통치기의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섬세하게 살펴본 글이다. 즉 이 글에서는 작품이 제작된 시기와 봉안될 장소에 대한 의미를 검토하여 이 작품이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이 그려진 의미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 〈무이구곡도〉와 〈도산도〉라는 도갑사 탱화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산수화가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이황(李滉, 1501-1570)과 연관되어 처음으로 등장한 연유 역시 왕실 주도의 숭불과 이황 일파의 숭유가 첨예하게 부딪히던 당시 '산수' 현장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도갑사 탱화와 〈무이구곡도〉의 화기(畵記)와 발문(跋文)이 각기 인종(仁宗, 재위 1544-1545)과 을사사화(乙巳士禍)를 환기하고 있는 이유도 이 점에서 이해된다. 16세기 중엽에 그려진 '산수'가 당시 여론의 향방과 직결된 정치적 산수화였음을 규명한 것이 본 논문의 의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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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숙종대 장녕전(長寧殿) 건립과 어진 봉안

저자 : 이종숙 ( Lee¸ Jongsoo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8-101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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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재위 중인 국왕의 어진을 제작하는 전통을 다시 살려 1695년과 1713년에 자신의 어진을 진전에 봉안하게 했다. 1695년에 조세걸(曺世傑, 1636-?)이 그린 숙종 어진은 2본이었으며, 1본은 강화부(江華府)의 장녕전(長寧殿)에, 다른 1본은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에 봉안되었다. 강화는 외적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갖춘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이자 국가의 보장처(保障處)로 인식되었으며, 숙종 이전에도 이곳에 진전을 세우고 태조 어진과 세조 어진을 봉안한 일이 있었다.
숙종은 1695년의 어진 제작과 진전 건립을 신하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진행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신하들 중 일부가 강화의 영전(影殿) 영건(營建)을 반대하자 숙종은 비밀리에 서둘러 어진을 강화로 내려보냈다. 이후 강화 유수 김구(金構, 1649-1704)가 격식을 갖추어 어진 봉안 의식을 엄숙히 거행하도록 건의함에 따라 숙종은 어진 봉안 행사를 공식적으로 준비하게 하였다. 그는 예조의 관리들을 강화에 파견하여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장녕전에 어진을 봉안하게 했다. 이때 숙종 어진은 흑칠궤에 담긴 상태 그대로 장녕전 내부 어탑(御榻) 위에 봉안되었다.
1695년에 장녕전에 봉안된 어진은 숙종의 평소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학창의(鶴氅衣)와 당혜(唐鞋)를 착용하고 머리에 역괘고후관(易卦高後冠)을 쓴 모습의 전신상이었다. 이러한 옷차림은 조선 시대 국왕의 전형적인 어진과 큰 차이를 보인다. 숙종은 일상에서 학창의를 종종 착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 사대부들도 학창의와 고후관을 일상복으로 착용했다.
1695년에 봉안된 숙종 어진은 1713년(숙종 39)에 새로 그려진 어진으로 교체되었다. 1713년은 숙종이 즉위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숙종은 이를 계기로 새로운 어진 제작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원유관본과 익선관본 어진이 각 1본씩 그려졌으며 원유관본은 강화 장녕전에, 익선관본은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되었다. 어진 제작을 위해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이 설치되었으며 어진 제작과 관련된 많은 사안들이 숙종과 신하들 간의 논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어진을 장녕전에 봉안하는 의식도 미리 응행절목(應行節目)을 마련하여 엄숙히 거행했으며, 왕세자와 백관들이 경덕궁의 정문에 나와 강화로 출발하는 어진을 배웅했다. 이처럼 1713년의 어진 제작과 봉안은 거의 모든 면에서 1695년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진을 펼쳐서 봉안하지 않고 궤에 들어 있는 상태로 어탑 위에 봉안한 것은 이전과 동일했다. 장녕전과 선원전에 새로운 어진이 봉안된 후 기존 어진은 세초(洗草)되었다. 두 곳의 숙종 어진은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승하한 이후인 1720년에 펼쳐서 봉안되었다.
숙종이 1713년에 어진을 새로 제작한 표면적 이유는 기존에 장녕전에 봉안된 어진이 미진(未盡)하여 후대에 전하기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진'이라는 표현은 인물 묘사에 사실성이 부족함을 뜻하기보다는 국왕의 어진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학창의와 고후관 차림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어진은 사대부 초상화와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숙종은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시각적으로 국왕의 권위와 우월함이 뚜렷이 드러나는 어진을 새로 제작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새로 그린 어진을 봉안한 뒤 기존 어진들을 세초해서 없애 버린 것은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초상은 국왕의 어진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나온 조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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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계회도(契會圖)에서 계병(稧屛)으로: 조선 시대 왕실 계병의 정착과 계승

저자 : 김수진 ( Kim¸ Soo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2-127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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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부터 조선 왕실은 국가 행사를 마친 후 이것을 기념하고 기록하기 위해 계병(稧屛)을 제작했다. 계병은 조선 전기에 사대부 사이에 유행했던 계회도(契會圖)의 제작 관습을 왕실이 전용(轉用)함으로써 이를 왕실 차원의 문화적 전통으로 계승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계병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으며 누가 어떻게 주문하고 나누어 가졌는가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계병은 조선 전기에 관원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제작되었던 계회도의 성격과 근본적으로 유사하지만, 그 표장(表裝) 형식, 발주 및 주문의 주체, 회화의 주제와 구성 면에서 크게 바뀐 측면이 있다. 본 연구는 관원들의 계회도가 어떻게 왕실 계화(稧畵)로 정착하는지를 검토하는 차원에서 18세기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대에 계화가축(軸)·첩(帖)·권(卷)·병(屛)으로 형식상의 각축(角逐)을 벌이다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시대에 이르러 병풍으로 정착되는 역사를 살핀 것이다. 아울러 계병이 실제로 제작되는 과정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재원(財源)이 마련되고 내입(內入)과 분하(分下)를 통해 왕실과 신료들에게 나누어지는 과정이 논의되었다. 이 전통은 19세기에 이르러 계병채(稧屛債)라는 안정적 재원을 확보하면서 20세기 초반까지 꾸준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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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한종의 사실주의적 어해 화풍의 성격과 형성배경

저자 : 김태은 ( Kim¸ Tae-eu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8-159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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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종(張漢宗, 1768-1815)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와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연간에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畫員)으로 활동하였던 화가이다. 그는 물고기와 게 등 각종 수생생물(水生生物)을 소재로 삼은 어해도(魚蟹圖)로 명성이 높았다. 장한종은 길상 소재를 다룬 수묵 어해도뿐 아니라 세필(細筆)과 채색을 사용하여 어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새로운 방식의 어해도를 제작하였다. 본고에서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어해병풍(魚蟹屛風)》 8폭을 중심으로 장한종의 사실주의적 어해 화풍의 성격과 그 형성배경을 분석하였다.
장한종은 기존 어해도의 전통을 바탕으로 사실적 어해 화풍을 새롭게 시도하였다. 그의 어해도에 묘사된 유영(遊泳)하는 어류의 이미지는 중국의 고전에 근거한 도상이었다. 또한 전통적인 길상 소재는 명대(明代)의 화조화 구성 및 당대에 유행하던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의 산수 표현과 함께 그려졌다. 그러나 장한종 어해도의 가장 큰 특징은 수십 종의 수생생물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어류와 관련된 지식을 시각화하였다는 것이다. 장한종은 《어해병풍》에 66종(種) 이상의 수생생물을 묘사하였으며 각 생물의 외양, 생태, 서식지 등에 대한 지식을 그림에 정확히 표현하였다. 그의 이러한 작화(作畵) 방식은 사물의 개별성을 인정하며 다양한 대상을 전문적으로 탐구하였던 조선 후기의 명물학(名物學)적 학문 경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시기에 저술된 어류와 관련된 명물서(名物書)들은 장한종의 어해도 제작에 참고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한종이 어해도에 최초로 사용한 병풍 형식은 조선 후기에 가장 선호되던 회화 매체이자 다양한 어종에 관한 시각정보를 전달하기에 유용한 수단이었다. 병풍에 표현된 장한종의 사실주의적 어해 화풍은 조선 말기의 어해도 작가들에게 계승되어 조선의 새로운 어해도 전통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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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감로도(甘露圖)의 제명(題名) 문제(問題)에 대한 재고(再考)

저자 : 박영아 ( Pak¸ Taylor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0-191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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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도(甘露圖)는 한국의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다양한 제명(題名)으로 지칭되어 온 회화 장르이다. 1923년 세키노 타다시(関野貞, 1868-1935)를 시작으로, 한국 및 일본 학자들은 각자 감로도의 도상 내용과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한 제명을 사용해 왔다. 이 과정에서 화기(畵記)에 보이는 제명, 즉 〈하단탱(下壇幀)〉, 〈감로왕탱(甘露王幀)〉, 〈감로회(甘露會)〉, 〈감로탱(甘露幀)〉 혹은 〈감로탱화(甘露幀畵)〉 등은 물론, <시아귀도(施餓鬼圖)〉, 〈우란분경변상(盂蘭盆經變相)〉, 〈수륙회도(水陸會圖)〉 등 새롭게 고안된 제명이 각각 사용되었다. 이들은 이와 같은 제명 설정의 근거와 타당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감로도라는 회화 장르에 대한 일관된 이해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본고는 이와 같은 감로도의 제명 문제를 조명한 글이다. 감로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는 학계에서 감로도의 제명을 다양하게 사용하게 된 각각의 경위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작업이다. 이를 통해 본고에서는 개별 작품의 도상 구성과 그 해석에 근거한 제명 사이에 나타나는 부적합성이 지적되었다. 이로써 본고는 다수의 제명이 갖는 다양성을 도상의 구성 요소가 아닌 감로도가 제단화(祭壇畵)로 사용된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감로도와 조선시대 불교의 의례적 체계 사이의 관련성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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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상회(傷懷)의 풍경: 항성모(項聖謨, 1597-1658)와 명청(明淸) 전환기

저자 : 장진성 ( Chang¸ Chin-su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2-219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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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嘉興)의 거부(巨富)였던 항성모(項聖謨, 1597-1658)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진 '명청(明淸) 전환기'에 활동한 화가이다. 항성모는 1645년 청군의 가흥 침공으로 모든 것을 잃었으며 이후 피란 생활 속에 직업화가로 곤궁한 삶을 살았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 1606-1645)의 군대가 자금성(紫禁城)을 포위하자 숭정제(崇禎帝, 재위 1628-1644)는 매산(煤山)에 올라 액사(縊死)하였다. 숭정제의 자살과 명나라의 멸망 소식을 들은 항성모는 〈주색자화상(朱色自畵像)〉 (1644년)을 그렸는데 이 그림에 나타난 붉은색은 명나라 황실의 성(姓)인 주(朱)를 상징하는 색채이다. 이 그림에는 항성모의 강렬한 유민(遺民) 의식과 망국에 대한 충성심이 나타나 있다. 1645년에 가흥이 청군에 의해 함락되자 항성모는 어머니와 처자와 함께 급히 피신하여 유랑 생활을 하였다. 이후 그는 영락(零落)한 자신을 주제로 한 자화상과 산수화를 다수 남겼다. 1646년에 항성모가 그린 〈자화상〉에는 피란 생활 속에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그의 모습, 즉 직업화가로서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같은 해에 그린 〈홍수추산도(紅樹秋山圖)(1646년), 〈대수도(大樹圖)〉(1649년), 〈대수풍호도(大樹風號圖)〉(1649년경)에는 홀로 산천을 떠도는 '운유(雲遊)' 또는 '배회(徘徊)'하는 인물이 나타나 있다. 이 인물은 다름 아닌 항성모 자신이다. 그는 이 그림들을 통해 숭정제가 죽고 나라가 망한 '갑신지변(甲申之變)', 을유년 가흥에서 일어난 청군의 만행, 동생 항가모의 자살, 어머니와 처자와 함께 간신히 가흥을 탈출했던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토로하였다. 특히 그는 이 작품들에 붉은색을 사용하여 명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심과 아울러 강남 지역에서 벌어진 청군의 대학살로 인해 피로 얼룩진 세상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붉은색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동시에 피[血]로 물든 산천에 대한 아픈 기억이었다. 가흥으로 돌아온 항성모는 〈송도선산도(松濤仙山圖)〉(1652년), 〈상우도(尙友圖)〉(1652년) 등을 통해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회고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들에는 1644년 이전 부유하고 행복했던 항성모의 옛 시절에 대한 추억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는 피에 대한 기억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그린 <산수도(山水圖)>(1658년)에는 여전히 바위 절벽이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숭정제의 자살, 명나라의 멸망, 청군이 강남 지역에서 명나라 백성들에게 행한 대학살, 만주족 군대의 가흥 침공 등 일련의 사건들로 발생한 그의 정신적 상처[傷懷, trauma]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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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베이징대학화법연구회(北京大學畫法硏究會)와 1920년대 베이징 전통파 화단

저자 : 정수진 ( Jung¸ Soo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0-245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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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대학화법연구회(北京大學畫法硏究會)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초대 교육부 총장과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의 교장을 지낸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8-1940)가 1918년에 설립한 회화사단(繪畫社團)이다. 차이위안페이는 '미육(美育)'을 통한 교육개혁이라는 자신의 신념과 중국 회화의 개혁이라는 목표 실현을 위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즉 이 사단은 '서구 미술의 사실주의 도입을 통한 중국 미술 개혁'이라는 방향성이 뚜렷한 단체였다. 그런데 본래 목표와는 달리 이 단체의 활동은 베이징 전통파(傳統派) 화단의 결속과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본 논문은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요인을 분석하고 나아가 전통의 보존과 개혁의 추구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20세기 초반 베이징 미술계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취지로 작성되었다.
이 시기 전통파 화단의 성장 배경으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베이징 화단의 주도 세력이었던 '문인 엘리트'들의 보수성과 이들의 전통 회화에 대한 옹호이다. 둘째는 대표적 전통파 회화사단인 '중국화학연구회(中國畫學硏究會)'의 설립과 베이징대학화법연구회 운영방식의 참작을 통한 이 사단의 근대적인 운영이다. 셋째는 중국화 개량론에 대항하기 위해 정립한 전통파 화단의 이론이다. 전통파 화가들은 자신의 주장을 베이징대학화법연구회의 기간지 『회학잡지(繪學雜誌)』 등에 게재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보다 정밀화된 이론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전통파 화단은 1920년대의 베이징 미술계를 주도할 수 있었다. 이는 베이징대학화법연구회의 기치와 선구적인 운영 형태가 정체되어 있던 베이징의 미술계에 준 자극과 범본(範本)으로서의 역할이 있었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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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내 아시아관에는 높이가 308cm에 달하는 대형 불교 조상비가 전시되어 있다. 이 조상비는 〈트뤼브너 조상비(the Trübner stele)〉로 불리는데, 이전 소장자였던 외르그 트뤼브너(Jörg Trübner, 1902?-1930)의 성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명문에 의하면 이 조상비는 북위(北魏) 영희(永熙) 2년(533)에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동위(東魏) 무정(武定) 원년(元年, 543)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트뤼브너 조상비〉는 구미의 여러 유명 미술관에 소장된 중국 불교 조각들 중에 가장 논의가 분분한 예 중 하나이다. 이 조상비는 6세기 불교 조각의 가장 중요한 명작으로 높이 평가받기도 했으며, 동시에 20세기 초의 위작이라고 폄하되기도 하였다. 특히 〈트뤼브너 조상비〉 정면의 많은 부분이 보수되면서 원형을 잃고 다시 조각되었다며 그 의미가 축소되기도 했다.
〈트뤼브너 조상비〉를 둘러싼 논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간단하지 않지만, 중국 불교미술 연구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구미(歐美)의 중국 조각 컬렉션의 역사와 의미를 조명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먼저 이 조상비의 정면과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와 여러 제명(題名)들을 6세기 중엽의 역사적, 지리적 상황과 대조해 보는 것이다. 다음은 조상비에 새겨진 불·보살상의 도상과 양식, 조각의 주제 및 화면 구성과 배치 등을 마찬가지로 6세기 중엽 전후 중국의 불교 석굴, 조상비 및 단독 조상(造像) 등에 나타난 시각적 요소들과 비교함으로써 미술사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이다.
이 조상비의 정면 조각의 표현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에 논란이 많았다. 반면 이와 대조적으로 조상기의 내용 및 서체(書體)에는 그간 특별히 논란이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조상비를 건립한 주요 공양자(供養者), 이와 관련된 이 조상비의 명칭, 그리고 이 조상비가 원래 세워졌던 지역 및 사원명(寺院名) 등과 관련해서 논란이 있는 부분이 적지 않으므로, 조상기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트뤼브너 조상비〉의 명문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된 공양자의 인명과 관직명, 그리고 원래 위치에 관해 알려 줄 수 있는 지명 등이 6세기 중엽의 역사적, 지리적 상황과 잘 부합된다는 사실을 밝힌 글이다. 따라서 이 조상비의 명문 부분만으로 판단한다면 〈트뤼브너 조상비〉는 6세기 중엽경에 제작된 진작(眞作)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트뤼브너 조상비〉를 건립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공양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도찬(李道贊), 혁련자열(赫連子悅), 무맹종사(武猛從事)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이 조상비의 원래 위치 및 관련 사원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 하남 북부의 기현(淇縣) 부근으로 그 범위를 좁혀볼 수 있다.
조상기와 제명 등 조상비에 기록된 명문은 6세기 중엽 무렵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기록을 잘 담고 있다. 이 명문이 틀림없이 6세기 중엽경 제작된 진작으로 판단됨에 따라 〈트뤼브너 조상비〉의 진위 문제 중 절반 정도는 해결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문 관련 논의의 진행만으로는 이 조상비의 진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따라서 〈트뤼브너 조상비〉의 진위에 대한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조상비에 새겨진 불·보살상과 여러 인물들 및 장식 요소 등을 미술사적으로 상세히 분석해야 한다. 필자는 〈트뤼브너 조상비〉는 6세기 중엽경에 제작된 원작이 이후 어느 시기엔가 보수되면서 재조각되어 다시 봉안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별고를 통해 다룰 생각이다.

KCI등재

10제작에서 실천으로: 1970년대 미공투 REVOLUTION 위원회의 영상 작업

저자 : 박혜연 ( Park¸ Haeyu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6-311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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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타마미술대학(多摩美術大学) 재학생인 호리 코사이(堀浩哉, 1947-)와 히코사카 나오요시(彦坂尚嘉, 1946-)의 주도로 결성된 미공투 REVOLUTION 위원회(美共闘REVOLUTION委員会)는 작업을 통한 미술 표현에 내재된 미술의 근원적인 제도성을 비판하였다. 미공투 위원회의 작가들은 60년대 말 '제작의 상실'이라는 모더니즘 미술의 위기 앞에서 그들의 선행 세대인 일본개념파(日本概念派)와 모노하(もの派)가 제작을 회피하고 관념주의 미술을 지향한 것을 비판하며 개인의 자율적인 표현 행위로 여겨졌던 '제작'을 집단이 주체가 되어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서 행하는 사회적인 노동, 즉 '실천'으로 변환하였다. 미공투 위원회에 대한 기존 미술사학계의 논의는 1970년대 후반 회화 매체를 이용한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의 영상 작업은 “표현 이전, 예술 이전”의 과도기적인 중간 단계로 파악되었다. 본 논문은 미공투 위원회의 영상 작업을 중점적으로 논의함으로써 기존 해석과는 반대로 당시 그들의 작업이 일상적인 삶의 장소에서 이미 구체적인 예술 표현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주장한 글이다. 또한 영상이라는 매체가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의 토대 위에 미술을 위치시키고자 했던 미공투 위원회 작가들의 작업에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본 논문은 학술적으로 조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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