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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인의 수시(數詩)수용과 변주 양상

A Study on the Acceptance and Variation of Numerical Poetry by Choseon Dynasty Writers

박종훈 ( Park Chonghoon )
  • : 온지학회
  • : 온지논총 6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7월
  • : 183-208(26pages)
온지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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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鮑照의 「數詩」와 조선 문인의 數詩 창작
Ⅲ. 數詩의 수용과 변주 양상
Ⅳ.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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數詩는 雜體詩의 한 詩體로, 宋나라 鮑照에서 시작되었다. 포조는 5언20구로 작품을 지으면서, 매 홀수 구의 첫 글자에 ‘一’부터 ‘十’까지 차례대로 배열하여, 삶에 대한 정회를 담아냈다. 조선 문인 역시 포조 작품의 영향하에 수시를 지속적으로 창작했다. 본고에서는 조선 문인 25人의 28首를 대상으로, 조선 문인의 수시 수용과 변주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잡체시는 희작의 성향이 강해 본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조선 문인 역시 희작의 경향을 그대로 이은 경우도 있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특별한 내용을 담은 작품들도 산견되어 주목된다. 김세렴과 황호 그리고 남용익은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문인과 수시로 화운하면서 양국 간의 우호의 내용을 적절하게 담아냈다. 또한 인평대군과 황호는 병자 호란의 실상을 언급하면서, 숭명반청 의식을 담아낸 독특한 일면도 있었다. 이로보자면, 단순히 희작의 경향만으로 수시 전체를 포괄할 수 없다.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5언20구의 전형을 벗어난 다양한 변주 양상이 확인되었다. ‘一’에서 부터 ‘十’까지의 전형에서 벗어나 ‘兆’까지 활용한 작품도 확인되었고 매 홀수 구의 첫 글자에 숫자를 안배했던 것에서도 벗어나 매 구의 첫 번째 글자에 숫자를 안배하는 작품도 보였다. 더불어 오언뿐만 아니라, 칠언으로 나아가 칠언절구로까지의 변주도 이루어졌다. 이는 스스로 제약을 다양하게 적용하여, 자신만의 시적 재능을 발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문인은 수시를 지속적으로 창작하면서, 희작에만 머물지 않고 당대의 상황이나 그에 대한 자신의 심사를 적절하게 담아냈다. 또한 형식적인 변주를 통해, 자신의 시적 재능을 맘껏 발산했다. 이는 기존 수시에 대한 일반적이고 인상적인 평가와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수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Numeric Poetry(數詩) is a form of miscellaneous poetry that began with the Pojo(鮑照) of the Song Dynasty. Pojo composed his work with 5 letters and 20 verses, arranging the first letters of odd-numbered phrases from ‘一’ to ‘十’. In this way, he has captured the essence of his life. Choseon Dynasty writers also continued to create works under the influence of Pojo works. In this paper, the acceptance and variation aspects of Numeric Poetry were examined.
The miscellaneous poem was not considered to have been made as a joke. The Choseon Dynasty writers also maintained the trend of his works. However, in special circumstances, there are works with special contents. Kim Se-ryum, Hwang Ho, and Nam Yong-ik visited Japan and harmonized with Japanese writers, capturing the friend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Prince InPyeong and HwangHo mentioned the invasion of the Qing dynasty, and contained a ceremony to honor the Ming dynasty and reject the Qing dynasty. In this regard, it is not possible to cover the whole with the simple tendency to play.
In terms of form, it was used in a variety of ways, out of the basic form. There were works that used '一' to '十' as well as '兆', and instead of arranging numbers in the first letter of odd-numbered phrases, numbers were arranged in the first letter of each phrase. In addition to the five letters, the work was composed of seven letters and even seven letters and four phrases. This seems to be to show his own poetic talent by applying various constraints on his own.
Writers continued to create works that had the characteristics of a comedy, and they did not stop at a comedy, but contained the current situation and their own examination of it. Also, through formal variations, showed his poetic talent to the fullest. This is inconsistent with the existing general evaluation, and various approaches must be ta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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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598-1444
  • : 2384-2253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5-2021
  • : 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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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권0호(2021년 07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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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 중후기 왕실 도화서 화원들의 불화 제작과 그 영향

저자 : 최엽 ( Choi Yeob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3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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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는 왕실이 후원하여 궁중 도화서의 화원(畵員)들이 참여한 불사가 적지 않고, 이상좌·이맹근 등 화원들이 단독으로 제작한 불화도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과 비교해 조선 중기와 후기는 현전하는 작품도 화승들과 공동제작이거나 화원들의 참여여부가 명확하지 않아 이전 시기에 비해 화원들의 불화 제작 빈도수가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시기에는 사찰에 속한 화승(畵僧)들이 불교회화의 주요 제작자로서 활약한다.
비록 영세하긴 하지만 작품과 문헌기록을 통해 김명국, 이정 등 조선중후기 화원들의 불교회화 제작에 대한 사례들을 확인하였다. 조선 중기의 화원 박란의 경우, 화승들과 함께 참여하여 제작한 괘불도(掛佛圖)가 현재 한 점 남아있다. 김명국은 사찰의 승려들이 직접 그에게 의뢰하여 불교의 지옥 그림을 그린 것이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으며, 이정은 화원 집안으로서 여러 대에 걸쳐 불화를 제작한 사례가 역시 기록으로 전한다. 조선 후기는 왕실 화원이 참여한 수원 용주사 불사가 잘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때로는 이들 화원들과 화승들의 접점이 있었을 가능성도 추가로 제시하였다. 즉, 사찰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화원들이 사찰에 파견되어 불화를 제작하거나 화승들이 관청에 속에 화업(畵業)을 담당했던 사례를 통해 서로간의 영향관계를 추정해보았고, 이러한 상황은 사찰 내 불교회화에 새로운 요소들의 출현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내용들은 조선중후기 불화 제작의 다양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there were many Buddhist temples sponsored by the royal family and participated by hwawons(the Court Painters: 畵員) of Dohwaseo(圖畵署), and there also remained Buddhist paintings produced alone by painters such as Yi Sang-jwa and Yi Maeng-geun. Compared to this situation, in the mid to late Joseon Dynasty,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frequency of production of the Buddhist paintings by the hwawons decreases compared to the previous period because the existing works are either co-produced or the participation of the Hwawons is unclear. In addition, hwaseungs(Buddhist monk painters, 畵僧) belonging to Buddhist temples during this period were active as the main producers of the Buddhist paintings.
However, we confirmed through the literature that there were the cases of Buddhist paintings produced by the hwawons such as Kim Myeong-guk(金明國) and Yi Jeong(李楨) in the mid to late Joseon Dynasty, and sometimes, also suggested the possibility of a point of contact between the hwawons and the hwaseungs. In addition, we estimated the mutual influential relationship through the cases where at the request of the temple, the hwawons were dispatched to the temple to produce the Buddhist paintings or the hwaseungs were responsible for paintings in government offices, and determined that this situation would be also related to the emergence of new elements in the Buddhist paintings in the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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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책거리(冊巨里)10폭병풍≫ 연구

저자 : 김주연 ( Kim Joo Ye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7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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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책거리10폭병풍≫은 큰 규모에 다양한 기물들을 정갈한 수묵으로 묘사하여 기존의 화려한 채색으로 표현된 책거리 그림들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독특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소재와 기법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더 발견되어 부분 초본을 공유한 하나의 공방에서 특정 작가를 중심으로 한 사제 관계, 혹은 협업체계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작품들의 구도와 주요 기물은 이형록 등 화원에 의해 제작된 궁중 책거리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어색하게 변형된 공간감과 비례감, 기물을 가득 메운 문양들은 좀 더 민화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갈하고 세밀한 수묵의 필치는 문인적인 아취의 세계로 인도한다. 더욱이 병풍들에는 문방청완(文房淸玩) 취미를 정리한 명나라 말기의 저술 『고반여사(考槃餘事)』, 『장물지(長物志)』, 그리고 조선 19세기의 백과전서로 알려진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이운지(怡雲志)」 등에 소개된 확장된 청완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에 더하여 조선 19세기의 취미와 청나라 문물의 영향을 보여주는 품목들도 함께 어우러진다.
1870년경 '수석(水石)'이 그렸다는 수묵 책거리 병풍의 주문 제작 사례, 19세기 후반 궁중 책거리 그림과의 구도적 유사성,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본에 묘사된 그림 액자 등을 보아 이 작품들은 19세기 말경에 주문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문방청완과 애완의 취미가 엿보이는 병풍 속의 물상들은 재력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소유하기 어려운 것들이기에 이 작품들의 주문층은 19세기 문화를 주도했던 경화세족이나 새롭게 부를 축적한 부유한 중산층으로 짐작해 보았다. 즉 이 병풍의 소장자는 감상(鑑賞)보다는 소장품을 과시하면서 문인적 이상을 동경했던 호사자(豪奢者)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축적된 부로 문인문화를 즐겼던 당시의 사회문화양상이 그대로 드러난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The Chaekgeori 10-fold folding screen of Ewha Womans University Museum is a unique work that features a variety of artifacts with neat ink, which surpasses the traditional one. However, more works drawn with similar materials and techniques have been found, suggesting that they may have come from a particular painter in a collaborative workshop where master and disciple shared a partial design. The composition of the works and the main objects started from the royal Chaekgeori folding screens, but the awkwardly modified spatiality and proportionality filled with objects show more folklore and the detailed ink strokes lead to a world of literary taste. Furthermore, the folding screens feature a large number of scholar's accoutrement introduced in late Ming writings and Iunji, encyclopedia of the 19th century of Joseon. In addition, items that show the influence of hobbies in the 19th century of Joseon and the products of recent culture of the Qing Dynasty are combined.
Based on the custom-made case of the Ink-wash Chaekgeori folding screen, the compositional similarity to the royal Chaekgeori" folding screens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the picture frames depicted in the collection of the Ewha Womans University Museum, Chaekgeori folding screens are customized around the end of the 19th century. Objects in folding screens are affordable exclusively for the rich such as Gyeonghwasejok people or the rich middle class. Folding screen was an interesting work that reveals the social and cultural aspects of the time when the literary culture was enjoyed by accumulated w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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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사(渭士) 강필주(姜弼周)의 행적과 회화

저자 : 송희경 ( Song Heeky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1-10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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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渭士) 강필주(姜弼周, 1852-1932)는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화가다. 대한제국기에는 여러 도감의 화원으로, 1910년대에는 서화미술회와 서화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양식을 계승하여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기명절지도 등, 동양 회화의 다양한 제재를 두루 섭렵하였다. 화가 강필주의 공식 이력은 1900년 어진모사도감의 방외화원 선발에서부터 확인된다. 왕실과의 인연이 돈독하여 여러 의궤에 화사로 활약하거나, 고종이 주관한 함녕전 휘호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음력 1917년 '납월 상순'에 완성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기명절지도≫와 ≪노안도≫ 가리개는 왕세자 이은(李垠, 1897-1970)의 조선 방문을 기념하며 제작한 시각물이라고 판단된다. 이는 7년 만에 귀국한 왕세자와 고종, 순종이 함께 한 함녕전서온돌 오찬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필주는 1910년대 전통화단을 이끈 서화미술회와 서화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적지 않은 휘호회나 합작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는 주로 노안도나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현장에서 바로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시간적 제한과, 여타 작가의 화목과의 차별화를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Kang Pil-joo, also known for the art name Wei-sa, was an artist who was active from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e was active as a painter of various illustrated books during the Korean Empire and as a member of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rt Society and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in the 1910s. Furthermore, inheriting the style of Jang Seung-eop, he mastered all the materials of oriental painting, such as landscape paintings, portrait paintings, flower bird paintings, and still-life paintings of bowls and flowers.
Once can find the official history of Kang Pil-joo from as early as the selection of a nongovernmental painter in 1900. He also had a strong relationship with the members of the Royal House of Yi. Thus, he was active as a painter in various Uigwe (recordings of royal rituals and ceremonies of the Joseon Dynasty). He also participated in the artist gatherings for collaborative painting at Hamnyeongjeon, hosted by King Emeritus Gojong. In particular, the still-life paintings of bowls and flowers and wild goose paintings, completed at the beginning of the lunar calendar in 1917 and currently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are judged to have been visuals created to commemorate the visit of Crown Prince Yi Eun to Joseon. Such a judgment is based on the high probability that it was used for the celebratory luncheon in the West Ondol Chamber of Hamnyeongjeon, where the Crown Prince, who returned to Korea after 7 years, was joined by King Emeritus Gojong and King Sunjong.
Kang Pil-joo was a member of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rt Society and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which led the traditional art world in the 1910s; he also participated in a number of artist gatherings for joint painting and collaborative productions. On such occasions, he mainly painted wild goose paintings or landscape paintings. Such is interpreted to be the result of a combination of the time limit of having to complete the painting on the spot and the intention to differentiate it from other artists' harmon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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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여제(女帝)와 미술: 당 무측천(武則天)시대 낙양성의 정치적 기념비

저자 : 蘇鉉淑 ( So Hyunso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9-14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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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였던 무측천이 낙양성에 건립한 정치적 기념비 명당(明堂), 천당(天堂), 천추(天樞)를 무측천의 '낙양성의 공간 설계'라는 맥락에서 살펴보고, 그 성격과 의미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세 기념비를 설계자의 측면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이것을 보는 수용자의 인식까지 함께 살펴봄으로써 정치적 기념비의 종합적 이해를 시도했다.
무측천은 동도(東都) 낙양성을 신도(神都)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자신의 정치 거점으로 삼았다. 무측천이 낙양을 중시했던 데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낙양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역사적 정통성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낙양은 중국에서 고래로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되었으며, 중국에서 이상으로 여겼던 주(周)나라의 도읍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또한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땅이라는 불교적 정통성까지 갖고 있었다.
무측천은 낙양성의 역사적 전통 위에 여제의 통치공간으로서 낙양성을 신도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는 정통성의 시각화로서, 명당, 천당, 천추, 그리고 구정(九鼎)과 칠보(七寶) 등의 정치적 기념비의 조영을 통해 실현되었다. 당시의 시문(詩文)과 가요에 의하면, 이 기념비들은 낙양은 물론, 변방인 사주(沙州) 지역에서까지 무측천 통치의 정통성을 보여 주는 존재로 찬미되었다.


This study examines the political monuments Mingtang(明堂), Tiantang(天堂), and Tianshu(天樞), built on the Capital Luoyang(洛陽) by Empress Wu(武) of Tang Dynasty, in the context of "Space Design of the Capital Luoyang" and analyzes its characteristics and meanings. Furthermore, this study attempted to comprehensively understand political monuments by analyzing them in accordance with public perception away from the sponsor's point of view.
Empress Wu changed the name of Capital Luoyang, which was meant to be the capital of the east, to the name of the "City of God," and used it as her political base. Her emphasis on Luoyang was due to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factors, but the historical legitimacy of the city of Luoyang also played a major role. Since ancient times Luoyang has been regarded as the center of the world in China, and it was the place where the capital of ancient Zhou(周) Dynasty. It also had Buddhist legitimacy as the first land where Buddhism was introduced to China.
Empress Wu wanted to make Luoyang a sacred city, and built three political monuments there. Three monuments were built on the central axis of the Capital Luoyang. The topography of Luoyang is high in the north and low in the south, with the three monuments constructed from north to south in order of Tiantang, Mingtang, and Tianshu. In other words, the three monuments became the tallest buildings in Luoyang. Poetry and songs written in Luoyang and the western outskirts of China at that time praised the three monuments as a demonstration of the legitimacy of the em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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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규보 문학에 나타나는 자기형상의 양상과 그 의미 - 자술적(自述的)요소에 주목하여 -

저자 : 장진엽 ( Jang Jin-youp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18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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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李奎報(1168~1241) 문학의 自述的요소에 주목하여, 여기에 나타나는 작가의 자기형상을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규보의 자기형상은 狂과 直의 두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狂의 자기형상은 청년기의 좌절과 실의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십 대 후반 본격적으로 求官에 나서면서 이규보는 자신의 광을 '佯狂(거짓 미침)'으로 규정하며, 사실은 도를 품고 있는 고상한 인물임을 피력하고 자 애쓴다. 즉, 관료로서의 자질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狂에 대해 '변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자아상은 평생토록 지속된다. 또한 이규보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광인으로 명명하기도 했는데,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曠達한 성품을 지닌 문인 예술가의 형상이라는 狂의 긍정적 측면을 수용한 것이다.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한 30대에는 直의 자기형상이 등장한다. 29세에 지은 작품에서 자신이 못난 사람들에게 굽히지 않는 꼿꼿한 성격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直의 단초가 된다. 이규보는 32세에 전주목사록에서 파직된 후 자신의 성격을 '孤直'(홀로 곧음)으로 규정한다. 이 시기에 直은 '옳음'이라는 가치를 지키고 不義를 견디는 형상으로 그려진다. 直의 자아상은 40대 이후 작품에서는 두드러지지 않다가 63세에 위도로 귀양을 간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부상하는데, 이때 핵심이 되는 것은 '方直'(방정하고 곧음)의 자아상이다. 直의 형상은 관료로서의 자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아상으로, 이규보의 관료적 자부심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별도로 검토했지만 실제로 狂과 直의 정체성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두 가지 형상 모두 부정적 현실 속에서 왜소해진 자아에 대한 '변명', 또는 '자기 해명'으로서 출현한 자아상으로, 이규보의 내면에 평생토록 나란히 존재해 왔다. 여타의 문인들과 구별되는 이규보 자기형상의 독특한 점은 여기에 있으며, 이는 곧 당시 이규보가 처했던 정치·사회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한편 이규보의 자기형상을 그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자기형상은 일차적으로 그의 '주관적 의식의 산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문학적 표현'의 한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자기형상은 그가 처한 실제 현실 및 그에 대한 대응방식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으로서, 완전히 허구적인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한 인물의 자기형상은 그가 속했던 실제의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요컨대 이규보의 자기형상은 하나의 문학적 표현물인 동시에 고려중기 무인정권기 문인 지식인의 존재 양태를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가 되는 것이다.


This article examines Yi Kyupo (李奎報)'s literary portrayals of self, with special attention paid to the autobiographical descriptions found in his works.
Two key traits define Yi Kyupo's literary portrayals of self - madness (狂) and righteousness (直). The mad self formed during his young adulthood, when Yi Kyupo underwent frustration and failure; but later, while looking to launch his career as an official, Yi Kyupo tries to pass off his madness as a mere act. He makes an effort to show that he is actually a noble person with great morality, even going as far as to dismissing his madness as a 'fake madness (佯狂)'. However, in truth he never truly disavowed his characterization as a madman. Instead he actively called himself a madman to adopt the positive aspect of madness, with an aim to cast himself as a literati-artist with a free, unrestrainable nature.
Righteous self emerged once he began his career as an official in his 30s. Prior to this, at the age of 29, he characterized himself as someone who does not bow to lesser men. And this became the basis of his self portrayals as a righteous person; after getting dismissed from his then position - minister of Chŏnju - at the age of 32, he claimed he is, by nature, 'solely righteous (孤直)'. Here, he painted himself as a only defender of what is right, battling against unrighteousness (不義). Righteous self became dormant in his 40s, but emerged again when he was sent exile to Wido at the age of 63. But his word choice altered slightly, and the 'upright self' (方直) came to be the new 'righteous self'. It seems that Yi Kyupo aimed to find self-respect as an official by priding on the fact that he is a man of righteousness.
While discussed separately in this article, two main traits found in Yi Kyupo's perception of self - madness and righteousness - were closely related. Both features have been invented to help himself cope with a grim reality, from the time when he had to defend his shrunken ego or make excuses for himself. This factor, which has to do with Yi Kyupo's sociopolitical circumstances, distinguishes his self portrayals from that of other literati.
However, we should not take his self portrayals to be merely reflective of his life. Self-characterization found in writings is first of all, a product of a subjective mind, and constitutes just one method in an array of efforts to properly represent the self. Yet self portrayals are not complete fabrications as well, since they are found based on his understanding of his circumstances and reactions to said circumstances. For this reason, probing his self portrayals provides a meaningful gateway in navigating the society and history of his time. In short, his self portraits are on one hand, a literary work; but at the same time, it is also a valid testimony on a literati's mode of being during the mid-Koryŏ military regim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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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 문인의 수시(數詩)수용과 변주 양상

저자 : 박종훈 ( Park Chong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3-20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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數詩는 雜體詩의 한 詩體로, 宋나라 鮑照에서 시작되었다. 포조는 5언20구로 작품을 지으면서, 매 홀수 구의 첫 글자에 '一'부터 '十'까지 차례대로 배열하여, 삶에 대한 정회를 담아냈다. 조선 문인 역시 포조 작품의 영향하에 수시를 지속적으로 창작했다. 본고에서는 조선 문인 25人의 28首를 대상으로, 조선 문인의 수시 수용과 변주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잡체시는 희작의 성향이 강해 본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조선 문인 역시 희작의 경향을 그대로 이은 경우도 있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특별한 내용을 담은 작품들도 산견되어 주목된다. 김세렴과 황호 그리고 남용익은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문인과 수시로 화운하면서 양국 간의 우호의 내용을 적절하게 담아냈다. 또한 인평대군과 황호는 병자 호란의 실상을 언급하면서, 숭명반청 의식을 담아낸 독특한 일면도 있었다. 이로보자면, 단순히 희작의 경향만으로 수시 전체를 포괄할 수 없다.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5언20구의 전형을 벗어난 다양한 변주 양상이 확인되었다. '一'에서 부터 '十'까지의 전형에서 벗어나 '兆'까지 활용한 작품도 확인되었고 매 홀수 구의 첫 글자에 숫자를 안배했던 것에서도 벗어나 매 구의 첫 번째 글자에 숫자를 안배하는 작품도 보였다. 더불어 오언뿐만 아니라, 칠언으로 나아가 칠언절구로까지의 변주도 이루어졌다. 이는 스스로 제약을 다양하게 적용하여, 자신만의 시적 재능을 발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문인은 수시를 지속적으로 창작하면서, 희작에만 머물지 않고 당대의 상황이나 그에 대한 자신의 심사를 적절하게 담아냈다. 또한 형식적인 변주를 통해, 자신의 시적 재능을 맘껏 발산했다. 이는 기존 수시에 대한 일반적이고 인상적인 평가와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수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Numeric Poetry(數詩) is a form of miscellaneous poetry that began with the Pojo(鮑照) of the Song Dynasty. Pojo composed his work with 5 letters and 20 verses, arranging the first letters of odd-numbered phrases from '一' to '十'. In this way, he has captured the essence of his life. Choseon Dynasty writers also continued to create works under the influence of Pojo works. In this paper, the acceptance and variation aspects of Numeric Poetry were examined.
The miscellaneous poem was not considered to have been made as a joke. The Choseon Dynasty writers also maintained the trend of his works. However, in special circumstances, there are works with special contents. Kim Se-ryum, Hwang Ho, and Nam Yong-ik visited Japan and harmonized with Japanese writers, capturing the friend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Prince InPyeong and HwangHo mentioned the invasion of the Qing dynasty, and contained a ceremony to honor the Ming dynasty and reject the Qing dynasty. In this regard, it is not possible to cover the whole with the simple tendency to play.
In terms of form, it was used in a variety of ways, out of the basic form. There were works that used '一' to '十' as well as '兆', and instead of arranging numbers in the first letter of odd-numbered phrases, numbers were arranged in the first letter of each phrase. In addition to the five letters, the work was composed of seven letters and even seven letters and four phrases. This seems to be to show his own poetic talent by applying various constraints on his own.
Writers continued to create works that had the characteristics of a comedy, and they did not stop at a comedy, but contained the current situation and their own examination of it. Also, through formal variations, showed his poetic talent to the fullest. This is inconsistent with the existing general evaluation, and various approaches must be ta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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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물 서사 비교를 통해서 본 유연 옥사와 <유연전>의 간극 ― 진·가 판별과 창작 의도를 겸하여 ―

저자 : 김용기 ( Kim-yong Ki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9-2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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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유연 사건에 대한 상반된 기록을 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두 기록을 일차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리고 이를 수용한 조선 중후기 문집들의 수용 태도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작가 이항복이 <유연전>에서 이들의 기록들을 모두 수용하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창작 의도를 고찰하였다.
논의 결과 이항복은 <유연전>의 복잡한 서사를 통해 세 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첫째는 사람이 남의 말을 듣고 시비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벼슬아치들에게 공정하고 신중한 재판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자 한 것이다. 셋째는 유유를 통해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창작 의식이다.
이런 세 가지 창작 의도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에 실록의 두 가지 유연 옥사 기록과 <유연전>의 인물 서사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작가는 이러한 서사적 거리를 효율적인 결구 방식을 통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사필귀정, 권선징악과 같은 주제 의식도 함께 드러내었다.
마지막으로는 <유연전>의 진·가(眞假) 모티프에는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바로 진·가를 판별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중에 드러나는 '나를 지킴', 즉 '수오(守吾)'에 대한 문제다. 이 작품에서 진짜와 가짜를 증명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신체, 얼굴, 목소리'와 같은 외형적 근거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형제와 향족들, 그리고 종들의 주장이나 판정도 수용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진·가는, 어떤 시비에서도 '나를 잃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가 '나다움'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진·가를 판별해 준다는 의식이 담겨 있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documents of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including two contrary records about the affair of Youyeon. It was the receptive attitude that the researcher looked at the collection of books of the mid- to late Joseon period. The writing purpose of Lee-hangbok was considered. He accepted these records and revealed concretely.
On the basis of results, we could find out three things through the complicated narration of < Youyeonjeon >. First, people should listen to others and distinguish the right and the wrong. Second, he tried to give a lesson that the government officials have to judge fairly and carefully. Third, he reveals the creative conciousness that we have protect human rights through Youyou.
The characteristic narration of < Youyeonjeon > and two records about Youyeon's jail experience story are very different because he reveals these three purposes for writing. The writer could overcome the narrative distance and he raised degree of completion using construction methods. As a result, the thematic consciousness that the truth wins in the long run was revealed.
Lastly, there is a hidden intention in the true or false motif of < Youyeonjeon > and it is quite important. The point of keeping oneself, 'Suo' reveals in the process of judging the truth or false. The physical side like body, face or voice was not conceded as a resonable evidence. Brother, relative, or servant's opinion could not be accepted. The truth or flase emphasizing on this work is to focus on keeping oneself in a quarrel. It is the ability not to lose being myself and it has a consciousness that can distinguish truth or fa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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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근대계몽기 신문 소재 약성가(藥性歌)의 근대적 변전(變轉)과 의미 연구

저자 : 김형태 ( Kim Hyung-ta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9-26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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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성가는 병의 원인을 진단하고, 약의 성질을 밝혀놓으며, 한방에서 다루는 다양한 약재와 치료법 등을 나열한 시가이다. 약성가는 한의학이 의술의 대세를 이루었던 동북아시아 중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고 다양하게 전승된 전통이다. 또한 의학 관련 내용을 시조나 가사의 노래 형식으로 만들어 암송과 활용에 용이하게 만든 것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시가 향유 방식과 자질의 독특한 점을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갈래이다.
현재 약성가를 확인할 수 있는 텍스트는 조선후기의 의서, 소설 <흥부전>, 판소리 사설 <수궁가(水宮歌)>·<변강쇠가>, 가면극 <봉산탈춤> 등이고, 근대 신문과 잡지 수록 자료, 현대 희곡 등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근대의 신문 중 『대한매일신보』와 『대한민보』 소재 약성가를 대상으로 근대적 변전의 양상과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하여 조선후기 약성가류와 근대 약성가의 비교 방법을 통해 앞으로 확장될 관련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근대계몽기 신문에 수록된 약성가는 독서물로 정착하면서 기존의 부수적 성격으로부터 독자적 가결을 형성하였고, 근대 이전 약성가와 달리 의약가적 구성의 확장이 일어났으며, 내용 축약과 정제를 통한 변전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수궁가> 등 판소리에 포함된 약성가는 의서(醫書) 소재 약성가의 영향을 받았으며, 시가로서 충분히 향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가창 자질을 획득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근대 약성가는 신문 등 다양한 근대적 매체를 통해 시국을 알리고 사회의 각종 병폐를 고발하며, 그 해결책을 전달하려는 목적성을 띠게 되었다. 즉, 근대 약성가는 근대계몽기의 다양한 신문 및 학술지 발간에 힘입어 근대적 사유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기능한 것이다.


Yak-seong-ga(藥性歌) is a poem that diagnoses the cause of a disease, define the properties of the drug, and lists various drugs and treatments used in oriental medicine. And Yak-seong-ga(藥性歌) made drug-related contents in the form of songs to make it easier to memorize and write. Therefore, it is also a good literary asset that can confirm the enjoyment method and characteristics of classical Korean poetry.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confirm the aspect and meaning of modern transformation by targeting the Yak-seong-ga(藥性歌) in the modern newspapers 『The 『Korea Daily News』 and The 『Daehan Minbo』. For this purpose, the basis for related research to be expanded in the future was laid through the comparative method between the Yak-seong-ga(藥性歌)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modern Yak-seong-ga(藥性歌). The texts that can be used for the study include medical books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novel < Chun-hyang-jeon >, pan-so-ri editorial < Su-gung-ga > and < Byeon-gangso- ga >, and the mask play < Bong-san Mask Dance >, materials from modern newspapers and magazines, and modern plays.
The Yak-seong-ga(藥性歌) included in the newspapers of the Modern Enlightenment changed from the existing incidental character and formed an unique lyrics while settling down as a reading material. Also, unlike the pre-modern Yak-seong-ga(藥性歌), the composition of the medicinal value was expanded, and the aspect of transformation through content summary and refinement could be confirmed. In addition, it was possible to examine that influenced by the yak-seong songs included in the pan-so-ri such as < Su-gung-ga >, and acquired the singing qualities with the potential to be fully enjoyed as a poems and songs.
The modern Yak-seong-ga(藥性歌) has the purpose of informing the state of the world through various modern media such as newspapers, accusing society of various ills, and delivering solutions. In other words, the modern Yak-seong-ga (藥性歌) functioned as a means of disseminating modern thinking thanks to the publication of various newspapers and academic journals during the Modern Enlightenment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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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이날치'의 고전 현재화와 그 참여문화의 스토리텔링 - 음악 낯설게하기가 가져온 전경화와 그 효과들 -

저자 : 임형택 ( Im Hyeong-tae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9-30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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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치'는 단기간에 급성장한 퓨전 판소리팀으로서 흥겹고 대중적인 춤을 일으키는 얼터너티브 팝 밴드를 지향한다. 이들은 능동적·적극적 수용행위로 발전하는 인터넷 참여문화의 기반 위에서 성장했으니 그들을 키운 것은 탈경계·탈중심의 포스트모던한 글로벌 대중의 성원과 힘이었다. 이날치는 음악 '낯설게하기'를 통해 다양한 '전경화' 효과를 배태했다. 멜로디를 제외한 리듬 반주만으로 밴드를 구성했고 판소리 장단을 음악의 기조로 삼았다. 그 결과로 '희한하게 익숙하고 아름답게 낯선' 음악이 창조됐다. 그 신이한 음악은 글로벌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다양한 전경화 효과를 유발했다. 춤의 전경화는 그 첫 번째 효과로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이날치 공연의 몸-동작 즉 시각적 효과를 담당했고 그 역할을 적절히 수행했다.
글로벌 대중의 적극적 관심은 곧 다양하고 방대한 인터넷 밈들로 나타났다. 춤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 나타난 효과는 노래의 전경화였다. 리듬은 몸-동작뿐 아니라 몸-소리를 유발하므로 리듬의 소리 표출인 노래로의 관심 확장은 지당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래의 인터넷 밈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 상황은, 더 오래전부터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콘텐츠가 올라오는 춤의 인터넷 밈을 상기하면 더욱 의문스러운 것이다. 이에 관한 대중의 입장은 이날치 노래는 따라부르기에 너무 어렵다는 토로였다.
이 와중에서 예상되지 않았던 상황이 흥미롭게 전개됐다. '소리'를 할 줄 아는 전문가들이 이날치 노래의 재생산자로 호명된 것이다. 그들은 대중에게 판소리의 특성과 노래의 배경을 알려주고 나아가 이날치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대중이 노래 재생산의 주체는 아니되 판소리 명인·전공자를 호명하여 현대문화의 한마당에 세운 것은 대중이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야기의 전경화 효과가 발생했다. 노래를 익힌다는 것은 가사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며 이날치 노래는 곧 이야기[+하기]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점진적 전경화는 각 단계에서 스토리텔링을 생성하면서 판소리(고전) 현재화의 방법과 의미를 풍성하게 보여주었다. 또 이 과정은 다름 아닌 글로벌 범주에서 발생했다는 사실, 즉 처음에는 포스트모던한 글로벌 대중의 성향이 탈장르적·혼종적인 이날치를 글로벌 문화의 장에 불러냈으나, 결국 그들의 관심이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분명한 이야기로까지 확장됐다는 사실 역시 강조돼야 할 것이다. 이날치가 남기는 성과를 고전 현재화의 한 전범(典範)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낯섦과 전경화가 유발하는 참여문화의 스토리텔링 효과를 적극적으로 지향할 필요가 있겠다.


Inalchi' is a fusion pansori team that has grown rapidly in a short period of time and aims to be an alternative pop band that induces dance. They grew up on the basis of a culture of participation in the Internet that develops into active and active acceptance behaviors, so it was the support and strength of the public that nurtured them. Lee Nalchi embodies the effects of various 'Foregroundinging' through the music 'Defamilarization'. The band consisted of only rhythmic accompaniment excluding melody, and the rhythm of pansori was used as the keynote rhythm. As a result, “abnormally familiar and beautifully unfamiliar” music was created. The new music attracted the attention of the global public and caused a step-by-step foregrounding effect. As the first effect, Ambiguous Dance Company was in charge of the body-movement, or visual effect, of Inalchi's performance, and played a role in that first effect. The active interest of the global public soon emerged as a wide variety of Internet memes. The effect of getting used to dancing to some extent was the foregrounding of the song. In addition, rhythm induces not only body-movements but also mother-sounds. Therefore, the expansion of interest to the Sori(sound) version of the dance rhythm was a reasonable result. Strangely, however, few Internet memes of the song appeared. This situation is even more suspicious when you recall the Internet memes of dance that have been out for a long time and are still uploading new content. The public's position on this could be confirmed in the comments posted on Inalchi content, so the song was too difficult to follow. In the process, an unexpected situation unfolded interestingly. People who knew how to speak “Sori” were called as the reproducers of Inalchi's song. They informed the public about Pansori's unique rhythm, vocalization, and background knowledge of the song, and further taught the song Inalchi. The public was not the subject of song reproduction, but it was the public who called for a master or major in pansori to establish it in the midst of modern culture. And at this point, the foregrounding effect of the story occurred. Learning to sing means understanding the lyrics, and this is because this song is about Story+telling. The above gradual foregrounding painting created storytelling at each stage, showing the method and meaning of presenting pansori (classical studies) in abundance. Let's actively welcome the new defamilarization, foregrounding effect, and storytelling while accepting the achievements and effects left by Lee Nalchi as a model for the presentization of classical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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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사소절』에 나타난 이덕무의 아동교육관

저자 : 김인규 ( Kim In-gyu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5-3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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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사소절(士小節)』에 나타난 아동교육관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조 아동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선현들은 대부분 성리학자이었는데 비해,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의 아동교육관을 살펴보는 것은 성리학과 실학의 아동교육관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아동교육서로는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천자문(千字文)』과 주희(朱熹)가 편찬한 『소학(小學)』을 들 수 있다. 『천자문』이 문자 교육서라면, 『소학』은 유학 교육서로 조선시대 동몽 교육의 주(主) 교재였다. 그러나 『천자문』과 『소학』이 문자 교육과 유교 교육에 있어 많은 장점을 지지고 있지만, 16세기 이후에 아동교육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면서 많은 동몽 교재가 널리 편찬되었는데, 대표적인 문자 교육서로 『훈몽자회(訓蒙字會)』, 『신증유합(新增類合)』, 『아학편(兒學編)』 등이 있으며, 유학 교육서로 『아희원람(兒戱原覽)』, 『계몽편(啟蒙萹)』, 『동몽선습(童蒙先習)』, 『격몽요결(擊蒙要訣)』,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다.
『사소절』은 가정의 각 구성원인 '선비', '부녀자', '아이' 등이 일상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사소한 예절인 소절(小節)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집안의 자제들을 훈계할 목적으로 저술된 「동규」편은 『소학』의 아동교육론을 계승하여 소절(小節)이 대덕(大德)의 근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동몽기에 사소한 예절을 충실하게 실천함으로써 형성되는 올바른 습관과 태도가 장래에 큰 덕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근본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 대표적인 유학 교재라 하겠다.


This paper is to examine Ajeong Lee Deokmu's view of childhood education demonstrated on Sasojeol (Small Courtesy for Scholars). It is predominantly Neo-Confucian scholars who were concerned about childhood educa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has significance to look into the view of childhood education of Lee Deokmu, a Silhak scholar (Realist School of Confucianism), which enables to compare views of childhood education between Neo- Confucianism and Silhak.
As everyone knows, Thousand-Character Classic(千字文) written by Zhou Xingsi(周興嗣) and Xiaoxue(小學) published by Zhuxi are representative teaching materials for children in Joseon. Thousand-Character Classic serves as a textbook for character education while Xiaoxue works as a Confucian material, both of which are main materials for children education in Joseon era. Though Thousand-Character Classic and Xiaoxue had a lot of advantages for character and Confucian education, textbooks for children were widely published since new awareness and efforts for practice as to childhood education were reflected after the 16th century.
Sasojeol mainly describes small courtesy that family members of Confucian scholars, women and children should observe in daily lives. The part Donggyu particularly written in order to discipline children in a family inherited the view of childhood education on Xiaoxue to clarify that small courtesy (小節) is the root of greater virtue (大德). Dongyu is a typical textbook for children to stress that right habits and attitudes formed with thorough practice of small courtesy in childhood would serve as the basis to achieve greater virtues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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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 중후기 왕실 도화서 화원들의 불화 제작과 그 영향

저자 : 최엽 ( Choi Yeob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3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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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는 왕실이 후원하여 궁중 도화서의 화원(畵員)들이 참여한 불사가 적지 않고, 이상좌·이맹근 등 화원들이 단독으로 제작한 불화도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과 비교해 조선 중기와 후기는 현전하는 작품도 화승들과 공동제작이거나 화원들의 참여여부가 명확하지 않아 이전 시기에 비해 화원들의 불화 제작 빈도수가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시기에는 사찰에 속한 화승(畵僧)들이 불교회화의 주요 제작자로서 활약한다.
비록 영세하긴 하지만 작품과 문헌기록을 통해 김명국, 이정 등 조선중후기 화원들의 불교회화 제작에 대한 사례들을 확인하였다. 조선 중기의 화원 박란의 경우, 화승들과 함께 참여하여 제작한 괘불도(掛佛圖)가 현재 한 점 남아있다. 김명국은 사찰의 승려들이 직접 그에게 의뢰하여 불교의 지옥 그림을 그린 것이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으며, 이정은 화원 집안으로서 여러 대에 걸쳐 불화를 제작한 사례가 역시 기록으로 전한다. 조선 후기는 왕실 화원이 참여한 수원 용주사 불사가 잘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때로는 이들 화원들과 화승들의 접점이 있었을 가능성도 추가로 제시하였다. 즉, 사찰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화원들이 사찰에 파견되어 불화를 제작하거나 화승들이 관청에 속에 화업(畵業)을 담당했던 사례를 통해 서로간의 영향관계를 추정해보았고, 이러한 상황은 사찰 내 불교회화에 새로운 요소들의 출현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내용들은 조선중후기 불화 제작의 다양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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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책거리(冊巨里)10폭병풍≫ 연구

저자 : 김주연 ( Kim Joo Ye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7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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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책거리10폭병풍≫은 큰 규모에 다양한 기물들을 정갈한 수묵으로 묘사하여 기존의 화려한 채색으로 표현된 책거리 그림들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독특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소재와 기법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더 발견되어 부분 초본을 공유한 하나의 공방에서 특정 작가를 중심으로 한 사제 관계, 혹은 협업체계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작품들의 구도와 주요 기물은 이형록 등 화원에 의해 제작된 궁중 책거리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어색하게 변형된 공간감과 비례감, 기물을 가득 메운 문양들은 좀 더 민화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갈하고 세밀한 수묵의 필치는 문인적인 아취의 세계로 인도한다. 더욱이 병풍들에는 문방청완(文房淸玩) 취미를 정리한 명나라 말기의 저술 『고반여사(考槃餘事)』, 『장물지(長物志)』, 그리고 조선 19세기의 백과전서로 알려진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이운지(怡雲志)」 등에 소개된 확장된 청완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에 더하여 조선 19세기의 취미와 청나라 문물의 영향을 보여주는 품목들도 함께 어우러진다.
1870년경 '수석(水石)'이 그렸다는 수묵 책거리 병풍의 주문 제작 사례, 19세기 후반 궁중 책거리 그림과의 구도적 유사성,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본에 묘사된 그림 액자 등을 보아 이 작품들은 19세기 말경에 주문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문방청완과 애완의 취미가 엿보이는 병풍 속의 물상들은 재력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소유하기 어려운 것들이기에 이 작품들의 주문층은 19세기 문화를 주도했던 경화세족이나 새롭게 부를 축적한 부유한 중산층으로 짐작해 보았다. 즉 이 병풍의 소장자는 감상(鑑賞)보다는 소장품을 과시하면서 문인적 이상을 동경했던 호사자(豪奢者)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축적된 부로 문인문화를 즐겼던 당시의 사회문화양상이 그대로 드러난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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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사(渭士) 강필주(姜弼周)의 행적과 회화

저자 : 송희경 ( Song Heeky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1-10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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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渭士) 강필주(姜弼周, 1852-1932)는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화가다. 대한제국기에는 여러 도감의 화원으로, 1910년대에는 서화미술회와 서화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양식을 계승하여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기명절지도 등, 동양 회화의 다양한 제재를 두루 섭렵하였다. 화가 강필주의 공식 이력은 1900년 어진모사도감의 방외화원 선발에서부터 확인된다. 왕실과의 인연이 돈독하여 여러 의궤에 화사로 활약하거나, 고종이 주관한 함녕전 휘호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음력 1917년 '납월 상순'에 완성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기명절지도≫와 ≪노안도≫ 가리개는 왕세자 이은(李垠, 1897-1970)의 조선 방문을 기념하며 제작한 시각물이라고 판단된다. 이는 7년 만에 귀국한 왕세자와 고종, 순종이 함께 한 함녕전서온돌 오찬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필주는 1910년대 전통화단을 이끈 서화미술회와 서화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적지 않은 휘호회나 합작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는 주로 노안도나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현장에서 바로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시간적 제한과, 여타 작가의 화목과의 차별화를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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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여제(女帝)와 미술: 당 무측천(武則天)시대 낙양성의 정치적 기념비

저자 : 蘇鉉淑 ( So Hyunso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9-14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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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였던 무측천이 낙양성에 건립한 정치적 기념비 명당(明堂), 천당(天堂), 천추(天樞)를 무측천의 '낙양성의 공간 설계'라는 맥락에서 살펴보고, 그 성격과 의미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세 기념비를 설계자의 측면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이것을 보는 수용자의 인식까지 함께 살펴봄으로써 정치적 기념비의 종합적 이해를 시도했다.
무측천은 동도(東都) 낙양성을 신도(神都)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자신의 정치 거점으로 삼았다. 무측천이 낙양을 중시했던 데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낙양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역사적 정통성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낙양은 중국에서 고래로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되었으며, 중국에서 이상으로 여겼던 주(周)나라의 도읍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또한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땅이라는 불교적 정통성까지 갖고 있었다.
무측천은 낙양성의 역사적 전통 위에 여제의 통치공간으로서 낙양성을 신도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는 정통성의 시각화로서, 명당, 천당, 천추, 그리고 구정(九鼎)과 칠보(七寶) 등의 정치적 기념비의 조영을 통해 실현되었다. 당시의 시문(詩文)과 가요에 의하면, 이 기념비들은 낙양은 물론, 변방인 사주(沙州) 지역에서까지 무측천 통치의 정통성을 보여 주는 존재로 찬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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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규보 문학에 나타나는 자기형상의 양상과 그 의미 - 자술적(自述的)요소에 주목하여 -

저자 : 장진엽 ( Jang Jin-youp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18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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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李奎報(1168~1241) 문학의 自述的요소에 주목하여, 여기에 나타나는 작가의 자기형상을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규보의 자기형상은 狂과 直의 두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狂의 자기형상은 청년기의 좌절과 실의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십 대 후반 본격적으로 求官에 나서면서 이규보는 자신의 광을 '佯狂(거짓 미침)'으로 규정하며, 사실은 도를 품고 있는 고상한 인물임을 피력하고 자 애쓴다. 즉, 관료로서의 자질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狂에 대해 '변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자아상은 평생토록 지속된다. 또한 이규보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광인으로 명명하기도 했는데,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曠達한 성품을 지닌 문인 예술가의 형상이라는 狂의 긍정적 측면을 수용한 것이다.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한 30대에는 直의 자기형상이 등장한다. 29세에 지은 작품에서 자신이 못난 사람들에게 굽히지 않는 꼿꼿한 성격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直의 단초가 된다. 이규보는 32세에 전주목사록에서 파직된 후 자신의 성격을 '孤直'(홀로 곧음)으로 규정한다. 이 시기에 直은 '옳음'이라는 가치를 지키고 不義를 견디는 형상으로 그려진다. 直의 자아상은 40대 이후 작품에서는 두드러지지 않다가 63세에 위도로 귀양을 간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부상하는데, 이때 핵심이 되는 것은 '方直'(방정하고 곧음)의 자아상이다. 直의 형상은 관료로서의 자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아상으로, 이규보의 관료적 자부심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별도로 검토했지만 실제로 狂과 直의 정체성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두 가지 형상 모두 부정적 현실 속에서 왜소해진 자아에 대한 '변명', 또는 '자기 해명'으로서 출현한 자아상으로, 이규보의 내면에 평생토록 나란히 존재해 왔다. 여타의 문인들과 구별되는 이규보 자기형상의 독특한 점은 여기에 있으며, 이는 곧 당시 이규보가 처했던 정치·사회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한편 이규보의 자기형상을 그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자기형상은 일차적으로 그의 '주관적 의식의 산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문학적 표현'의 한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자기형상은 그가 처한 실제 현실 및 그에 대한 대응방식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으로서, 완전히 허구적인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한 인물의 자기형상은 그가 속했던 실제의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요컨대 이규보의 자기형상은 하나의 문학적 표현물인 동시에 고려중기 무인정권기 문인 지식인의 존재 양태를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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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 문인의 수시(數詩)수용과 변주 양상

저자 : 박종훈 ( Park Chong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3-20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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數詩는 雜體詩의 한 詩體로, 宋나라 鮑照에서 시작되었다. 포조는 5언20구로 작품을 지으면서, 매 홀수 구의 첫 글자에 '一'부터 '十'까지 차례대로 배열하여, 삶에 대한 정회를 담아냈다. 조선 문인 역시 포조 작품의 영향하에 수시를 지속적으로 창작했다. 본고에서는 조선 문인 25人의 28首를 대상으로, 조선 문인의 수시 수용과 변주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잡체시는 희작의 성향이 강해 본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조선 문인 역시 희작의 경향을 그대로 이은 경우도 있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특별한 내용을 담은 작품들도 산견되어 주목된다. 김세렴과 황호 그리고 남용익은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문인과 수시로 화운하면서 양국 간의 우호의 내용을 적절하게 담아냈다. 또한 인평대군과 황호는 병자 호란의 실상을 언급하면서, 숭명반청 의식을 담아낸 독특한 일면도 있었다. 이로보자면, 단순히 희작의 경향만으로 수시 전체를 포괄할 수 없다.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5언20구의 전형을 벗어난 다양한 변주 양상이 확인되었다. '一'에서 부터 '十'까지의 전형에서 벗어나 '兆'까지 활용한 작품도 확인되었고 매 홀수 구의 첫 글자에 숫자를 안배했던 것에서도 벗어나 매 구의 첫 번째 글자에 숫자를 안배하는 작품도 보였다. 더불어 오언뿐만 아니라, 칠언으로 나아가 칠언절구로까지의 변주도 이루어졌다. 이는 스스로 제약을 다양하게 적용하여, 자신만의 시적 재능을 발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문인은 수시를 지속적으로 창작하면서, 희작에만 머물지 않고 당대의 상황이나 그에 대한 자신의 심사를 적절하게 담아냈다. 또한 형식적인 변주를 통해, 자신의 시적 재능을 맘껏 발산했다. 이는 기존 수시에 대한 일반적이고 인상적인 평가와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수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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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물 서사 비교를 통해서 본 유연 옥사와 <유연전>의 간극 ― 진·가 판별과 창작 의도를 겸하여 ―

저자 : 김용기 ( Kim-yong Ki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9-2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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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유연 사건에 대한 상반된 기록을 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두 기록을 일차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리고 이를 수용한 조선 중후기 문집들의 수용 태도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작가 이항복이 <유연전>에서 이들의 기록들을 모두 수용하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창작 의도를 고찰하였다.
논의 결과 이항복은 <유연전>의 복잡한 서사를 통해 세 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첫째는 사람이 남의 말을 듣고 시비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벼슬아치들에게 공정하고 신중한 재판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자 한 것이다. 셋째는 유유를 통해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창작 의식이다.
이런 세 가지 창작 의도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에 실록의 두 가지 유연 옥사 기록과 <유연전>의 인물 서사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작가는 이러한 서사적 거리를 효율적인 결구 방식을 통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사필귀정, 권선징악과 같은 주제 의식도 함께 드러내었다.
마지막으로는 <유연전>의 진·가(眞假) 모티프에는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바로 진·가를 판별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중에 드러나는 '나를 지킴', 즉 '수오(守吾)'에 대한 문제다. 이 작품에서 진짜와 가짜를 증명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신체, 얼굴, 목소리'와 같은 외형적 근거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형제와 향족들, 그리고 종들의 주장이나 판정도 수용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진·가는, 어떤 시비에서도 '나를 잃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가 '나다움'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진·가를 판별해 준다는 의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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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근대계몽기 신문 소재 약성가(藥性歌)의 근대적 변전(變轉)과 의미 연구

저자 : 김형태 ( Kim Hyung-ta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9-26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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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성가는 병의 원인을 진단하고, 약의 성질을 밝혀놓으며, 한방에서 다루는 다양한 약재와 치료법 등을 나열한 시가이다. 약성가는 한의학이 의술의 대세를 이루었던 동북아시아 중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고 다양하게 전승된 전통이다. 또한 의학 관련 내용을 시조나 가사의 노래 형식으로 만들어 암송과 활용에 용이하게 만든 것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시가 향유 방식과 자질의 독특한 점을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갈래이다.
현재 약성가를 확인할 수 있는 텍스트는 조선후기의 의서, 소설 <흥부전>, 판소리 사설 <수궁가(水宮歌)>·<변강쇠가>, 가면극 <봉산탈춤> 등이고, 근대 신문과 잡지 수록 자료, 현대 희곡 등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근대의 신문 중 『대한매일신보』와 『대한민보』 소재 약성가를 대상으로 근대적 변전의 양상과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하여 조선후기 약성가류와 근대 약성가의 비교 방법을 통해 앞으로 확장될 관련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근대계몽기 신문에 수록된 약성가는 독서물로 정착하면서 기존의 부수적 성격으로부터 독자적 가결을 형성하였고, 근대 이전 약성가와 달리 의약가적 구성의 확장이 일어났으며, 내용 축약과 정제를 통한 변전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수궁가> 등 판소리에 포함된 약성가는 의서(醫書) 소재 약성가의 영향을 받았으며, 시가로서 충분히 향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가창 자질을 획득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근대 약성가는 신문 등 다양한 근대적 매체를 통해 시국을 알리고 사회의 각종 병폐를 고발하며, 그 해결책을 전달하려는 목적성을 띠게 되었다. 즉, 근대 약성가는 근대계몽기의 다양한 신문 및 학술지 발간에 힘입어 근대적 사유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기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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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이날치'의 고전 현재화와 그 참여문화의 스토리텔링 - 음악 낯설게하기가 가져온 전경화와 그 효과들 -

저자 : 임형택 ( Im Hyeong-tae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9-30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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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치'는 단기간에 급성장한 퓨전 판소리팀으로서 흥겹고 대중적인 춤을 일으키는 얼터너티브 팝 밴드를 지향한다. 이들은 능동적·적극적 수용행위로 발전하는 인터넷 참여문화의 기반 위에서 성장했으니 그들을 키운 것은 탈경계·탈중심의 포스트모던한 글로벌 대중의 성원과 힘이었다. 이날치는 음악 '낯설게하기'를 통해 다양한 '전경화' 효과를 배태했다. 멜로디를 제외한 리듬 반주만으로 밴드를 구성했고 판소리 장단을 음악의 기조로 삼았다. 그 결과로 '희한하게 익숙하고 아름답게 낯선' 음악이 창조됐다. 그 신이한 음악은 글로벌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다양한 전경화 효과를 유발했다. 춤의 전경화는 그 첫 번째 효과로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이날치 공연의 몸-동작 즉 시각적 효과를 담당했고 그 역할을 적절히 수행했다.
글로벌 대중의 적극적 관심은 곧 다양하고 방대한 인터넷 밈들로 나타났다. 춤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 나타난 효과는 노래의 전경화였다. 리듬은 몸-동작뿐 아니라 몸-소리를 유발하므로 리듬의 소리 표출인 노래로의 관심 확장은 지당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래의 인터넷 밈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 상황은, 더 오래전부터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콘텐츠가 올라오는 춤의 인터넷 밈을 상기하면 더욱 의문스러운 것이다. 이에 관한 대중의 입장은 이날치 노래는 따라부르기에 너무 어렵다는 토로였다.
이 와중에서 예상되지 않았던 상황이 흥미롭게 전개됐다. '소리'를 할 줄 아는 전문가들이 이날치 노래의 재생산자로 호명된 것이다. 그들은 대중에게 판소리의 특성과 노래의 배경을 알려주고 나아가 이날치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대중이 노래 재생산의 주체는 아니되 판소리 명인·전공자를 호명하여 현대문화의 한마당에 세운 것은 대중이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야기의 전경화 효과가 발생했다. 노래를 익힌다는 것은 가사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며 이날치 노래는 곧 이야기[+하기]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점진적 전경화는 각 단계에서 스토리텔링을 생성하면서 판소리(고전) 현재화의 방법과 의미를 풍성하게 보여주었다. 또 이 과정은 다름 아닌 글로벌 범주에서 발생했다는 사실, 즉 처음에는 포스트모던한 글로벌 대중의 성향이 탈장르적·혼종적인 이날치를 글로벌 문화의 장에 불러냈으나, 결국 그들의 관심이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분명한 이야기로까지 확장됐다는 사실 역시 강조돼야 할 것이다. 이날치가 남기는 성과를 고전 현재화의 한 전범(典範)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낯섦과 전경화가 유발하는 참여문화의 스토리텔링 효과를 적극적으로 지향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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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사소절』에 나타난 이덕무의 아동교육관

저자 : 김인규 ( Kim In-gyu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5-3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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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사소절(士小節)』에 나타난 아동교육관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조 아동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선현들은 대부분 성리학자이었는데 비해,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의 아동교육관을 살펴보는 것은 성리학과 실학의 아동교육관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아동교육서로는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천자문(千字文)』과 주희(朱熹)가 편찬한 『소학(小學)』을 들 수 있다. 『천자문』이 문자 교육서라면, 『소학』은 유학 교육서로 조선시대 동몽 교육의 주(主) 교재였다. 그러나 『천자문』과 『소학』이 문자 교육과 유교 교육에 있어 많은 장점을 지지고 있지만, 16세기 이후에 아동교육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면서 많은 동몽 교재가 널리 편찬되었는데, 대표적인 문자 교육서로 『훈몽자회(訓蒙字會)』, 『신증유합(新增類合)』, 『아학편(兒學編)』 등이 있으며, 유학 교육서로 『아희원람(兒戱原覽)』, 『계몽편(啟蒙萹)』, 『동몽선습(童蒙先習)』, 『격몽요결(擊蒙要訣)』,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다.
『사소절』은 가정의 각 구성원인 '선비', '부녀자', '아이' 등이 일상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사소한 예절인 소절(小節)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집안의 자제들을 훈계할 목적으로 저술된 「동규」편은 『소학』의 아동교육론을 계승하여 소절(小節)이 대덕(大德)의 근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동몽기에 사소한 예절을 충실하게 실천함으로써 형성되는 올바른 습관과 태도가 장래에 큰 덕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근본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 대표적인 유학 교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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